창덕궁 서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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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존하지 않는 건축물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창덕궁 서총대
昌德宮 瑞蔥臺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건축시기
1505년 (창건)
1507년 (철훼)
1. 개요
2. 이름
3. 역사
3.1. 철거 이후
4. 모습과 크기
4.1. 모습
4.2. 얼마나 컸는가?



1. 개요[편집]


연산군경복궁 경회루를 본따 창덕궁 후원 춘당지 동쪽에 만든 연회용 건물이다.


2. 이름[편집]


'서총(瑞葱)' 뜻은 '상서로운(瑞) (葱)'이다. 원래 서총대가 있던 구역에 성종 때 한 줄기에 가지 9개가 달린 특이한 파가 돋아나 '서총(瑞葱)'이라 불렀고 연산군이 이를 생각해 서총대라 이름붙였다.


3. 역사[편집]


1505년(연산군 11년)에 연산군창덕궁 후원 춘당지 동쪽에 경복궁 경회루를 본따 짓게 했다. 서총대 공사는 1년 넘게 이어졌고 인원 수십만 명이 투입된 대공사였다. 자연히 자금조달을 위한 세금 독촉도 심했다. 하지만 공사 도중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이 폐위당하면서 서총대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건물은 중종반정 이후 3년 뒤인 1507년(중종 2년)에 헐렸다.

명하여, 양화문(陽華門)과 서총대(瑞葱臺)를 철거케 했다. 이것은 모두 폐주(廢主) 가 건축했던 것이다.

중종실록》 2권, 중종 2년 윤1월 5일 기유 5번째기사



3.1. 철거 이후[편집]


건물이 사라진 이후에도 서총대는 《조선왕조실록》에 번번히 등장했다. 1560년(명종 15년)에는 유생들의 시험 장소로 사용했다.
《서총대친림사연도》

《서총대친림사연도(瑞蔥臺親臨賜宴圖)》는 1560년(명종 15) 9월 창덕궁 뒷뜰에 있는 서총대에 이 행차하여 재상들이 참여한 가운데 베푼 작은 연회 장면을 그린 것이다. 명종(明宗)은 이날 서총대에서 문신에게는 어제(御製: 임금이 직접 내린 제목)를 내려 시를 짓게 하고, 무신에게는 짝을 지어 활쏘기를 시켰다. 그리고 어찬(御饌)을 나누어주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 말 등을 성적이 좋은 사람들에게 상으로 하사했다. 중앙에 꽃무늬가 있는 큰 항아리가 있고, 붉은빛 단령을 입은 입시신(入侍臣)들이 각기 하나의 상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인물들은 가운데 맨 앞쪽에 서서 악기를 부는 악공을 보고 있기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술잔을 서로 나누기도 한다. 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는 인물들, 그리고 왕의 자리를 향해 앉은 악공과 기녀(妓女)들의 변화 있는 자세와 움직임이 보인다. 먹과 채색이 바래진 부분이 있으나 연회의 장면을 자세하게 잘 기록하여 보여주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홈페이지 서총대친립사연도 설명

이후 1583년(선조 16년) 무신들의 활쏘기 장소와 문신들의 제술 시험장으로 사용하면서, 서총대는 문 · 무신의 시사 또는 열무를 하는 곳으로 굳어졌다.


4. 모습과 크기[편집]



4.1. 모습[편집]


서총대 관련 《연산군일기》의 기록이다.

전교하기를, "후원(後苑)의 신대(新臺)를 경회루(慶會樓)와 같게 지으라." 했다.

연산군일기》 58권, 연산 11년 5월 7일 신묘 7번째기사

여기서 신대란 서총대를 말한다. 경회루와 같게 지으라고 했는데, 경회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기 전에는 3층이었으므로 서총대도 3층이었다는 의견이 있다. 또한 임진왜란 이전 경회루 바깥 돌기둥엔 용이 새겨져 있었다. 이를 보아 서총대 기둥에도 용조각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서총대 바깥 돌기둥의 용은 《조선왕조실록》 기사로도 남아 있다.

전교하기를,

"인양전(仁陽殿) · 서총대(瑞葱臺)의 공사를 마친 후에는 동·서로 성을 쌓을 것이지만, 아직 그 성터에 큰 나무를 죽 심어서 성안을 가리게 하라."했다.그때에 명하여 인양전을 짓고, 또 후원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용을 아로새긴 돌로 난간(欄干)을 만들었는데, 1천 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는 10길이나 되었다. 이름을 서총대라 하고, 그 앞에는 큰 못을 팠는데, 차송한 인원 1백 명이 감독했으며,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 호야(呼邪)(여러사람이 힘을 합쳐 일할 때 호흡을 맞춰서 부르는 소리) 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했다.

연산군일기》 61권, 연산 12년 1월 21일 신축 7번째기사


4.2. 얼마나 컸는가?[편집]


위에 적은 《연산군일기》의 "1천 명은 족히 앉을 만하다"와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란 기록만 보더라도 그 크기가 굉장히 컸다는 걸 알 수 있다.[1] 그리고 《중종실록》의 기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창경궁(昌慶宮) 후원에 높이가 1백여 척이나 되는 누대를 쌓고, 이름을 서총대(瑞葱臺)라 했다. 그 위에는 1천여 인을 앉힐 만했으며 그 아래에는 못을 파고 그 곁에 정자를 지었다.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2번째기사 中

일단 이 (尺)[2]이란 단위부터 알아야 한다. 단위가 각 지역, 시대마다 들쑥날쑥한 걸 감안하더라도, 한 척이 대략 25 ~ 40cm이므로 1척 = 30cm 으로 계산하면 30 x 100 = 3000cm이다. 3000cm는 30m 이므로 서총대의 높이는 대략 30m로 볼 수 있다. 현재 근정전 높이(기단 제외)가 22.5m 이고 지금 경회루 높이가 21.5m 인걸 생각하면 굉장히 높은 높이이다. 그리고 경회루는 2층이고 경회루는 서총대의 높이의 약 2/3이므로, 《중종실록》의 저 기록은 서총대 3층 설을 뒷받침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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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지만 반정 세력들이 자신들의 반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과장했을 수도 있다.[2] '자'라고도 불린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의 7번째 문단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