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연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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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의 보물
1769호

1770호

1771호
창덕궁 주합루
창덕궁 연경당
기장 장안사 대웅전

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보물 제1770호
창덕궁 연경당
昌德宮 演慶堂


소재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궁궐·관아/ 궁궐
수량
1동
지정연도
2012년 8월 16일
제작시기
조선시대, 1827년 / 1828년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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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경당의 안채(위)와 사랑채(아래) 외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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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고궁박물관에서 제작한 〈'문예군주를 꿈꾼 왕세자, 효명' 특별전 - 연경당〉영상
1. 개요
2. 역사
3. 구조
3.1. 연경당 사랑채
3.2. 연경당 안채
4. 부속 건물
4.1. 장락문
4.2. 선향재
4.3. 농수정
4.4. 반빗간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창덕궁 후원에 있는 사대부가 형식의 건물이다. 순조 말에 대리청정을 맡은 효명세자가 아버지 순조와 어머니 순원왕후존호를 올리는 의식을 치르면서 잔치를 하기 위해 후원 내 진장각(珍藏閣) 옛 터에 세운 연회장이었다. 한동안은 효명세자사대부생활을 체험하기 위해 지었다는 설과 순조가 유유자적하게 지내고 싶어 지었다는 설이 알려져있었다. 하지만 아래에 나온 것처럼 효명세자가 지었을때는 분명히 연회장이었고, 사대부가 형식으로 개조한 것은 고종 때인 듯 하다.

연경당이라 하면 보통 사랑채 건물 한 채, 또는 사랑채 - 안채만을 가리키지만, 다른 부속 건물들까지 통틀어 일컫는 경우도 많다.

건물 이름인 '연경(演慶)'은 '경사스러운(慶) 행사를 연행(演行)[2]한다'는 뜻이다.

연경당에 대한 3D VIEW 영상.

2. 역사[편집]


지은 연대가 확실하지 않다. 《궁궐지》에는 1828년(순조 28년)으로 쓰여있는 반면, 《한경지략》과 《동국여지비고》에는 1827년(순조 27년)으로 적혀 있다.

건립 후 효명세자신하들을 접견하거나 진작례[3]를 거행했다. 헌종 대 이후에는 익종으로 추존 된 효명세자의 어진과 모훈[4]자료를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다가 1857년(철종 8년)에 터가 서늘하고 습하다는 이유로 익종의 초상화를 다른 곳으로 옮겨 오랫동안 빈 건물로 있었다.#

고종 시기인 1865년(고종 2년) 새로 증축, 신축했으나 곧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한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이후 1884년(고종 21년) 갑신정변청나라 군대에 쫓긴 개화파 수뇌들이 고종을 데리고 이곳으로 잠시 피신하기도 했고, 이외에도 고종과 순종이 외국 공사를 접견하고# #, 여러 연회를 베푸는 등 정치적 공간으로 사용했다. 특히 1895년 6월 6일에는 이곳에서 역사상 최초의 서양식 가든파티인 원유회가 개최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순종이 이 곳에서 오찬을 열고# 다과회를 여는 등 행사 장소로 활용되었으며# 1917년 창덕궁 희정당대조전내전 건물이 전부 불타자 그 곳에 살던 순종순정효황후가 임시로 거처하기도 했다.#

이후 큰 훼손 없이 오늘에 이른다. 다만 자동차의 출입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애련정 일대의 의두합의 전면이 깎이고, 다른 후원 권역에서 연경당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금마문(金馬門)이 개조되는 변화가 있었다.# 2012년 8월 보물 제1770호로 지정받았다.


3. 구조[편집]


{{{#!wiki style="margin: -5px -10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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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궐도》 연경당
연경당을 처음 지을 즈음인 효명세자 대리청정기에 그린 《동궐도》를 보면, 지금과는 구조가 많이 다르다. 'ㄷ'자 형 건물 한 채로만 되어있고, 건물 전면에는 여러 행사를 할 수 있는 넓은 월대가 놓여있었다. 그리고 동, 서, 북쪽 담장은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형태인 벽돌사고석으로 쌓았으나 남쪽 담장은 판자로 되어있으며 출입문은 남쪽에 2칸 짜리 솟을 대문 1개를, 서쪽에 1개를 두었고 남쪽의 솟을 대문 중 큰 칸의 이름을 장락문(長樂門)이라 했다. 또한 동쪽에 긴 'ㅡ'자 형 부속 건물을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한 채 씩 두고 담장과 이었는데 남쪽 건물은 운회헌(雲檜軒), 북쪽은 개금재(開錦齋)라 했다. 연회, 공연같은 행사를 하기 좋은 구조인데, 애초 연경당의 설립 목적을 생각해보면 당연한 것이다. 이런 형태는 철종 연간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나 고종 때 증축, 신축하면서 현재 모습으로 바뀐 듯 하다.

  • 지금 남아있는 연경당의 모습은 사대부 형식이라서 다른 궁궐 전각들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우선 화려한 단청이 칠해져있지 않고, 건물 양식정자인 농수정(濃繡亭)을 제외하고는 모두 기둥 위에 공포를 올리지 않은 민도리 형식이다.

  • 하지만 사대부를 모방했다해도, 어쨌든 궁궐건물이라서 그런지 일반 양반와는 확연히 구분가는 점들이 몇 가지가 있다. 우선 사대부가의 상한선이 99칸인 것에 비해 연경당은 100칸을 넘는 109칸 반에 달한다.[5] 때문에 일부에서는 왕자공주의 사저인 궁가(宮家)를 모방했다는 주장도 제기하고 있다.
    그리고 창문, 담장들의 무늬 등을 화려하며 세련되고 섬세하게 꾸몄다. 이는 전반적으로 연경당 영역에 있는 건물 대부분이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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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연경당 배치도.png}}} ||
현재 연경당 배치도. ⓵ 장락문(연경당 영역의 정문) ⓶ 장양문(사랑채 출입문) ⓷ 수인문(안채 출입문) ⓸ 안채 ⓹ 통벽문(반빗간 출입문) ⓺ 연경당 본채 ⓻ 선향재 ⓼ 농수정 ⓽ 반빗간(반찬을 만드는 곳.)
배치는 전형적인 조선시대 양반처럼 맨 앞쪽에 행랑채를 두 겹으로 두른 뒤 대문을 두고, 대문으로 들어온 뒤 보이는 행랑채에 각각 사랑채(남성의 공간)와 안채(여성의 공간)로 통하는 출입문을 내었다. 이 출입문도 위계를 두었는데 사랑채로 가는 문은 솟을대문으로, 안채로 들어가는 문은 평대문으로 설치하여 서열을 구분했다. 남자여자공간을 엄격하게 나누기 위해 사랑채와 안채의 앞마당 사이에 작은 담을 두었지만, 건물 자체는 이어져 있어 실내에서 드나들 수 있다.#

3.1. 연경당 사랑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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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덕궁_연경당_사랑채_근경.jpg}}} ||
사랑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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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채 구조도
팔작지붕에 홑처마 양식으로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고 중도리와 주심도리로 된 5량가 구조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이며, 정면 기준 제일 오른쪽에 마루 1칸이 있고 그 서쪽에 대청이 2칸, 사랑방 2칸, 그리고 마루 1칸이 나란히 있으며 서북쪽에 침방 2칸을 두었다.#(실제 칸 수는 측면 수를 곱하면 된다.) 대청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는데 서쪽 온돌방의 툇마루 앞엔 이 덧대어져 실내로 들어가 있고 대청과 동쪽 온돌방 앞은 막혀있지 않다. 동쪽 마루는 '누(樓)' 형태라서 아랫 부분에 화강암 기둥이 받쳐져있으나 서쪽 마루는 기단 위에 올려있고 창문으로 마감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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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사랑채와 붙어있는 담.png}}} ||
사랑채 앞마당의 담. 왼족의 문은 안채로 가는 정추문이다.
서쪽으로 안채와 이어지며, 사랑채 건물 서쪽 끝에 안채와 구역을 나누는 작은 을 앞, 뒤로 설치했다. 뒷마당의 담은 남북축으로 되어있으며 문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우신문(佑申門)이다. 앞마당의 담은 남쪽으로 내려오다 사랑채 출입문인 장양문(長陽門) 근처에서 서쪽으로 꺾이는데 그 부분에 안채와 연결되는 정추문(正秋門)이 동향한 채 있고 거기서 담은 다시 남북축으로 배치되어있다. 그리고 건물 기단 위에 안채로 가는 나무 쪽문을 두었다. 건물과 연결된 앞 마당 담 앞에는 괴석 4개를, 서쪽으로 틀어진 정추문 쪽 담 앞에는 괴석 1개를 두었는데 저마다 크기가 다 다르다.


3.2. 연경당 안채[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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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덕궁_연경당_안채_근경.jpg}}} ||
안채[7]
건물 구조 자체는 사랑채와 거의 동일하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서쪽 끝 1칸은 누마루이며 남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누마루 북쪽으로 안방이 2칸 있고, 온돌방 동쪽에 대청이 2칸, 건넌방이 2칸, 마루가 1칸이다.#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으며 창이나 문으로 막혀있지 않고 외부와 통하게 만들었다. 서편에는 창 앞에 쪽마루를 놓았다.


4. 부속 건물[편집]



4.1. 장락문[편집]


파일:정부상징.svg 창덕궁
창덕궁 장락문
昌德宮 長樂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827년 / 1828년 (창건)
1865년 (중수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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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덕궁_연경당_장락문_야경.jpg}}}
장락문[8]
연경당의 정문이다.

'장락(長樂)' 뜻은 '오랫동안(長) 즐거움(樂)을 누리라'이며, 《한비자》 - 〈공명〉 편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창덕궁 낙선재의 정문 이름도 같은데, 공교롭게도 둘 다 사대부가 양식으로 지은 곳이다.

행각 가운데에 한 칸짜리 형태이다. 지붕은 솟을지붕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공포없는 민도리 양식이며 문 가운데 인방 위에는 홍살을 달았다. 문짝은 나무 판이며 바깥쪽에 현판을 달았는데 현판 글씨는 흥선대원군이 쓴 것이다.

4.2. 선향재[편집]


파일:정부상징.svg 창덕궁
창덕궁 선향재
昌德宮 善香齋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865년 (창건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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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향재


연경당의 서재로 사랑채의 동쪽에 위치해있으며 서향하고 있다. 연경당 창건 당시에는 없었고 고종 때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은 '좋은(善) 향기(香)가 서린 집'이란 뜻이다.

정면 7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에 대청이 3칸 있고 대청 좌, 우에 온돌을 2칸씩 놓았다. 청나라 양식의 영향을 받아 건물의 양 옆 면 은 붉은 벽돌을 쌓고 벽 중앙에는 회색 벽돌로 만든 둥근 틀 안에 화려한 문양을 넣었다. 그리고 벽 아래엔 아궁이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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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향재 내부, 왼쪽부터 북온돌, 남온돌, 아래가 대청이다.
건물 전면에는 차양을 덧대었다. 오늘날의 블라인드와 유사하게 지었으며 도르래를 달아 위치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차양의 지붕기와가 아닌 구리 판으로 만들었다. 차양의 안쪽은 나무 판으로 덧대고 나무로 십자 틀을 엮은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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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향재 차양의 안쪽 부분
이 차양은 오후의 햇살을 정면으로 맞기에 이를 피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사실 다른 건물들과는 다르게 서향으로 놓여있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불편한 점이 오후 햇살 외에도 습기가 많이 차서 온돌에 불을 지펴 습기를 빼주어야 했다고 한다. 그럴거면 첨부터 제대로 짓지

선향재의 뒷쪽(동쪽)엔 4단의 화계를 놓고 나무를 심어 화려하게 꾸몄다.

4.3. 농수정[편집]


파일:정부상징.svg 창덕궁
창덕궁 농수정
昌德宮 濃繡亭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건축시기
1865년 (창건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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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정


연경당 영역의 정자로 선향재의 동북쪽에 있다. 건립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선향재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한다. 이름은 '짙은 빛(濃)으로 수(繡)를 놓는다'는 뜻이다.

1칸 짜리 이익공 양식의 건물로 사모지붕에 겹처마로 되어있다. 각 면마다 이 설치되어있는데 아(亞)자살로 되어있어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문짝은 위로 들어 올릴 수 있어있어 문을 올리면 사방이 트인 공간을 만들 수 있다.

이 농수정에서 고종과 왕세자 시절 최초로 어사진을 찍은 사진이 존재한다.
고종이 어사진을 최초로 찍은 장소로 알려져 있고, 고종이 어사진을 찍을 때에 좌우로 경복궁 근정전 안에 있는 청나라 하사품인 향로를 양쪽에 놓고 찍었다

현재의 농수정 계단은 모두 장대석으로 마감되어 있는데, 이는 변형된 것이다.

고종이 어사진을 쪽을 당시의 계단은 담장용으로 사용되는 사고석을 하단에 놓고 그 위에 장대석을 놓는 방식을 반복함으로 계단에도 심미적인 미학을 우리 조상들은 부여했음이 드러난다.

4.4. 반빗간[편집]


연경당의 부엌으로 안채의 뒤에 있다. 'ㄴ' 자 형태로 되어있는 정면 8칸, 측면 1칸의 건물이다. 서북쪽에 2칸이 트여있는 공간이 있고, 서쪽에 주방이 2칸 있으며(각 주방 사이에 폭이 좁은 공간이 1칸 있다.) 주방 동쪽에 온돌방 2칸, 대청 2칸, 그리고 온돌방 1칸이 나란히 놓여있다.


5.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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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고종 21년)에 퍼시버 로웰이 촬영한 고종과 순종 생애 첫 사진
1884년(고종 21년) 고종순종생애사진을 연경당 내 농수정에서 찍었다. 촬영한 사람은 미국인 퍼시벌 로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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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세계민족무용연구소에서 진작례를 재현한 공연 행사 영상
2000년대 들어 이 곳에서 거행했던 진작례를 복원하여 간간히 재현 공연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