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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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국보 제225호
창덕궁 인정전
昌德宮 仁政殿 | Injeongjeon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
분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궁궐
시설
1동
지정연도
1985년 1월 8일
건축시기
조선시대, 1405년(창건) / 1804년(중건)


파일:창덕궁_인정전_전경.jpg

파일:인정전.jpg
인정전[1]
파일:창덕궁_인정전_인정문에서_본_전경.jpg
인정문에서 바라본 인정전[2]
파일:창덕궁_인정전_야경.jpg
인정전 야경[3]

1. 개요
2. 명칭
3. 역사
5. 구조
6. 여담
7. 대중 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인정전 소개 영상

창덕궁정전이다. 신하들이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이다.

창덕궁의 정문 돈화문으로 입궐했을 때 바로 정면에 보이지 않는다. 금천교를 건너 진선문을 지나 인정문 앞에 이르기까지 2번을 꺾어야 비로소 보인다. 좌측에는 궐내각사 영역, 그리고 우측에는 편전인 선정전과 내전 영역이 있다.


2. 명칭[편집]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仁政)'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어진(仁) 정치(政)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3. 역사[편집]



파일:은대계회도2.png


파일:동궐도 인정전.png

16세기 조선 전기 창덕궁 인정전 일곽의 모습이 담긴 〈은대계회도(銀臺契會圖)〉
19세기 〈동궐도〉에서 묘사해놓은 인정전 권역
1405년(태종 5년) 창덕궁을 창건할 때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정면 3칸의 작은 전각이었고, 정문인정문도 중층이었으며 행각 모서리에 십자각(十字閣)이 있는 등 지금과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1418년(세종 즉위년)에 고쳐지으면서 정면 칸을 5칸으로 늘렸다. 1505년(연산군 11년)부터 인정전과 선정전청기와를 올리려 했으나[4], 1506년(연산군 12년) 9월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당하면서 공사는 중지되었다.

조선 전기 내내 저 모습을 유지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불탔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중건했다. 이후 고종 초기까지 약 270년 간 재건하지 못한 경복궁 근정전을 대신해 조선 후기 내내 사실상 정궁 정전(법궁 법전)으로 궁궐을 상징했다. 일례로 민요 《농부가》를 보면 '인정전 달 밝은 밤 세종대왕 놀음이요'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세종대왕임금의 대명사로, 인정전은 궁궐을 대표하는 건물로 언급한 것이다.

이괄의 난, 병자호란의 화마도 비껴갔으나 1803년(순조 3년)에 화재로 불탔고 다음 해 다시 지은 뒤 1857년(철종 8년)에 다시 보수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이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강점기인 1926년까지 살면서 인정전 건물이 많이 바뀌었다. 1994년에 원래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4. 정문[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인정문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구조[편집]


  • 2단으로 쌓은 넓은 월대 위에 높직한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둥근 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4칸의 2층 전각[5]으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이다. 공포는 다포 양식이며 외부의 쇠서[6]는 3중 앙서[7]에 수서[8] 하나를 운궁[9]으로 처리했으며, 첨차[10]는 교두형이고, 보 머리는 3분두이다. 기둥 머리의 안초공[11]이 살미 밑을 받치고 있는 듯한 모습이 인정문과 다른 수법이지만, 복잡한 초각 등과 함께 조선 후기의 다포 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출처

  • 18본의 평주로 된 외진주와 4본의 고주로 된 내진주가 세워져 있고, 정면 3칸과 측면 2칸이 중앙칸이며, 그 둘레는 퇴칸이다. 좌우로 동행각 36칸과 서행각 38칸이 딸려 있다. 내부는 통층으로 밖에서 볼 때는 2층이지만 안에는 구분없이 뚫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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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덕궁_인정전_보개천정.jpg}}} ||
인정전 천장에 달린 봉황 조각[12]
실내 천장 가운데에는 금박을 입힌 봉황 두 마리가 걸려있다. 아무래도 제후국이궁으로 지은 것이다 보니 그런 듯하다. 답도에도 봉황이 새겨져 있다. 반면 조선법궁 경복궁의 근정전은 답도에 봉황이 새겨져 있으나 천장엔 이 걸려있으며 대한제국의 황궁경운궁(덕수궁) 중화전은 답도, 천정에 용을 새기고 걸었다.

  • 2층에는 문짝이 없으나 아래층에는 칸마다 문짝이 달려 있다. 그리고 정면 중앙 칸과 후면 중앙 칸에 하나씩 출입문을 두고 나머지 칸은 창문으로 삼았다. 《동궐도》 및 1902년에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원래는 정면 중앙 칸 기준으로 좌, 우에 한 칸씩 출입문이 있었고, 가장자리 칸의 하단부도 원래는 머름이 아니라 창경궁 명정전처럼 벽돌로 마감했으나 대한제국 시기 이후 지금과 같은 모양이 되었다. 또한 문짝의 색도 원래는 붉은색이었으나 순종황제이어[13] 이후 황제를 상징하는 황금색으로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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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덕궁 인정전(세키노 타다시).jpg}}} ||
파일:창덕궁 인정전(일제강점기).jpg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3]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4] 《연산군일기》 연산 11년 11월 6일 정해 3번째기사: 전교하기를, "인정전(仁政殿)과 선정전(宣政殿)은 모두 청기와로 이어야 한다. 사찰도 청기와를 이은 것이 많은데, 하물며 왕의 정전(正殿)이랴. 그러나 청기와를 갑자기 마련하기 어려우니 금년부터 해마다 구워 만들어 정전만은 으레 청기와로 이도록 하라." 했다. 인양전(仁陽殿, 내연을 베풀던 전각)과 대비가 옮겨 지낼 곳을 새로 지을 때도 청기와를 올리려 했다.[5] 보통 전통건축에서 2층보다는 '중층(重層)'이라고 많이 표현한다.[6] 소의 혀란 뜻으로, 한식 목구조 공포에서 보 방향으로 첨차에 직교하여 거는, 끝을 소의 혀 모양으로 장식하여 오려낸 부재를 말한다.[7] 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받침.[8] 끝이 아래로 삐죽하게 처진 쇠서받침.[9] 살미(첨차와 직교하여 보방향으로 걸리는 공포부재를 통칭하여 부르는 명칭) 내부에 구름 모양으로 겹쳐진 부분.[10] 공포의 부재.[11] 창방과 직교하여 기둥머리에서 빠져나와 평방과 주두 또는 주두와 도리까지 감싼 부재.[12]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13] 임금이 이사하는 것.
1902년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인정전
일제강점기 인정전 일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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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된 인정전 어좌
1980년대 인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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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복원 중인 인정전 일대
현재 인정전 어좌
순종황제이어 이후 달라진 부분이 더 있다. 내부엔 노란색 천으로 장식한 커튼, 전등이 달려있다. 창문도 창호지 대신 유리로 바뀌었다. 건물 내부 바닥도 전통 전돌이 아닌 일본식 마루가 깔렸다. 그리고 원래 인정전과 행각은 따로 있었는데, 원래의 행각을 철거하고 한국, 일본, 서양양식이 섞인 귀빈대기실 등을 지어 인정전과 복도를 바로 연결시켰다. 경술국치 이후에는 변형이 더 심해졌다. 어좌와 일월오봉병이 사라지고 대신 작은 서양식 의자테이블, 일본식 금박기법과 자수기법을 적용한 커다랗고 괴랄한 봉황그림만 달랑 놓였다.[14] 또한 앞마당의 박석도 걷혔고 그 자리에 잔디가 깔리으며 모란같은 가 심어졌다. 어좌는 1960년대 초에[15] 인정전 주변의 외행각은 1991년 이후, 그리고 앞마당 박석은 1994년에 복원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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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인정전 용마루.png}}} ||
인정전 용마루의 이화문[17]
다른 궁궐 건물과는 다르게, 용마루에 이화문(李花紋)[18]이 설치되어 있다.[19] 이화문은 대한제국 국장 및 황실의 문장으로 황실이 전주 이씨라 오얏꽃(자두꽃)을 상징으로 삼았다. 다른 조선 궁궐에는 이런 장식이 없는데, 이렇게 특정 문장을 새겨넣는 것은 개화기 무렵, 서양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20] 순종이 이어했을 당시에 설치했다는 의견과 일제강점기 이후에 설치했다는 의견이 있다. 전자는 이미 구한말 궁에 유리창과 커튼, 카페트를 적용하는 등 다방면에서 외국식을 도입하고 있었던 것을 근거로 들 수 있고, 후자는 일본이 전통 양식 파괴를 위해 고의적으로 용마루에 박았다는 것이다. 대한제국 황실이 경술국치 이후 이왕가로 격하되었음에도 이화문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계속 썼기 때문에 아주 근거없는 주장은 아니다. 다만, 이것이 와전되어 꽃 종류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쿠라를 박았다는 낭설이 나돌기도 했다.

6. 여담[편집]


〈창덕궁 달빛기행〉 코스 중 한 곳이다.



7. 대중 매체에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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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영상테마파크의 인정전 세트
용인 MBC 대장금 파크의 인정전 세트[21]
조선시대 사극에서 궁궐이 나올 때 경복궁 근정전과 함께 자주 등장하는 편[22]이다. 1980년대2000년대까지만 해도 경복궁이 등장해서는 안되는 광해군 ~ 철종 시절을 다룬 사극들에 실제 인정전에서 촬영한 장면이 더러 나오기는 했으나 현재는 이런저런 이유로[23]기 때문인지 생각보다 자주 나오지는 않는다. 그리고 지금은 세트장에서 주로 촬영하는데 부안영상테마파크에 인정전 세트가 지어져 있어 주로 그곳을 활용한다. 다만 MBC의 경우는 신돈 촬영 때 만든 고려 만월대 회경전 세트를 인정전으로 등장시켜 역덕후들의 뒷목을 잡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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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이 봉황금박자수는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15] 1961년 국제지역사회개발회의를 창덕궁 인정전에서 개막했고 이때 사진을 보면 어좌는 보이지 않는데 보기, 3년 뒤 개봉한 영화인 〈세종대왕〉을 보면 어좌가 있다.보기[16] 복원이라곤 하지만 사실상 인정전의 내부 의장, 전등과 커튼 일본식 나무마루 등은 복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일제강점기에 바뀐 모습도 함께 보여주기 위함인 듯하다.[17] 사진 출처.[18] 배꽃을 가리키는 이화(梨花)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이화는 배꽃(梨花)이다.[19] 이는 정문인 인정문도 마찬가지. 인정전에는 5개, 인정문에는 앞뒤로 3개, 총 6개가 박혀 있다.[20] 일본의 중세 건축물에 가면 가몬(일본)을 이렇게 새겨넣는 것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21] 후술하겠지만 원래는 고려 정궁 회경전 세트다.[22] 엄밀히 말하자면 더 많이 나와야 할 곳은 비율 상 인정전이다.[23] 서구식으로 개조된 흔적 및 겉보기에 훨씬 더 웅장해 보이는 근정전, 무엇보다 예전에 비해 힘들어진 궁궐 촬영.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