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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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조선시대의 별궁. 영조가 연잉군이던 시절 살던 잠저(潛邸)로서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화억옹주, 효장세자, 화순옹주가 태어난 집이며, 말년의 숙빈 최씨가 궁에서 나와 살던 곳이기도 하다.
원래 이 곳은 효종의 4녀 숙휘공주의 남편 인평위 정제현의 옛 집이었는데 숙종이 매입해 4남 연잉군(훗날의 영조)에게 준 것이다. 숙종은 건물 한 채의 이름을 양성헌(養性軒)이라 짓고 시까지 지어 현판으로 걸어 아들에 대한 사랑을 전했다.[3]
1721년(경종 1년) 연잉군이 왕세제가 되어 궁궐에 들어와 살면서 기존의 연잉군 사저는 동궁 소속 궁가가 되었고, 이름도 근처의 '창의문(彰義門)[4] '에서 딴 '창의궁(彰義宮)'으로 바뀌었다. 영조는 즉위 후 창의궁 정당(正堂)에 '건구고궁(乾九古宮)'이란 현판을 걸었다. 《건구공궁 소지(小識)》에 따르면 건구(乾九)는 《주역》에서 온 말로, 승천하지 않고 숨어있는 용, 잠룡을 뜻한다. 즉, 왕이 되기 전의 자신을 투영해 쓴 것이다.
영조로 즉위 후, 한성부 좌윤[6] 홍석보의 주청에 따라 왕의 잠저 당시 호적을 따로 떼어다 이 곳에 보관했다. 그리고 장보각(藏譜閣)을 짓고 영조의 초상화 2본과 어필 및 서찰 등을 모시기도 했다. 옛 집과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한 영조는 어머니 사당인 육상궁을 참배하고 나서 종종 신하들이 말리는데도 여기서 하룻밤 자고 온 적이 많았고, 1754년(영조 30년)에는 이 곳에 일찍 죽은 아들 효장세자와 손자 의소세손의 사당을 두기도 했다.
정조도 사도세자의 초상화를 이곳에 수용하면서 주기적으로 참배하였고 가끔 머물면서 전교를 내리기도 했다. 순조 때는 일찍 죽은 효명세자의 사당도 두었다.
고종 때까지 존재하다가 1908년(융희 2년) 일제에게 헐려 사라졌다. 그리고 창의궁 자리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사택이 세워졌다. 8.15 광복 이후 적산(敵産)으로 분류된 뒤 재분할되어 주택가가 들어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