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저우시(허베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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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창저우 중국.jpg
창저우 경기장과 시의 랜드마크인 창저우 사자의 복원본
파일:중국 창저우.jpg
시내를 관통하는 대운하 일대의 풍경
1. 개요[편집]
중국 허베이성 동부의 지급시. 톈진시에서 서남쪽으로 90km, 바오딩에서 동남쪽으로 120km 떨어진 평지에 입지한다. 중국 내륙 수운의 대동맥인 징항 대운하가 도심을 관통하며, 시 인민정부가 위치한 윈허구 역시 운하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창저우 자체는 '바닷가 지역'이란 뜻이다. 지급시의 관할 인구는 무려 730만명이며, 그중 도시 자체에는 130만명이 거주한다. 주변 비옥한 평야의 농산물이 집결되며, 바다와도 가까워 해산물도 풍부하다. 대추와 배, 소금 등이 특산물이다. 또한 보하이 만 해안에서 생산되는 석유의 정유 산업 역시 발달하였다. 중국의 축구팀 창저우 슝스의 연고지이기도 하다.
본래 동남쪽의 창현이 중심지였지만, 대운하의 건설 후 그에 접한 현 시가지가 새로운 중심이 되었다. 한족 외에도 적지 않은 수의 후이족이 거주하며, 시내에는 7개의 모스크가 있다. 그중 하나인 창저우 서부 사원 박물관에는 수백년 된 아랍어 필사본이 있고, 창현 동남쪽의 멍춘 후이족 자치현에도 다수의 무슬림이 살고 있다. 다만 다수인 한족 주민들의 편견이 남아있으며, 최근 들어 위구르인들이 이주해오고 있다. 그외에 창저우는 중국식 서커스인 잡기 (雜技)와 공연 예술인 콰이반 다구의 발상지로도 유명하다. 대운하와 함께 창저우시역에는 톈진-지난 방면 고속철도가 지난다.
2. 역사[편집]
전한 시기 헝수이 동부와 함께 제후국인 하간국에 속했는데, 기원전 165년 그 계보가 끊기자 분할되어 기주 휘하의 발해군이 설치되었다. 발해군의 치소는 현 시가지에서 동남쪽으로 10km 떨어진 부양현이었는데, 후한 시기 서남쪽 30km 지점의 남피 (현 남피현)으로 옮겨졌다. 삼국지의 원소가 이곳 발해군을 거점으로 세력을 길러 기주를 장악하기도 하였다. 위진남북조 시기 북위의 태무제 때에 창수군으로 개칭되었고, 효문제는 그 북부를 따로 떼어 부양군을 신설하였다. 수나라에 들어 옛 발해군 지역에 체주(棣州)가 설치되었고, 606년 현 지명인 창주(滄州)으로 개칭되었다.
이때부터 부양현은 창현으로 불렸고, 송대까지 창주의 치소로 번영하였다. 9세기 말엽에는 의창군 절도사 노언위가 일대를 기반으로 자립하였다가 이극용에게 토벌당하기도 하였다. 후주 시기인 953년에는 일대의 랜드마크인 창저우 철사자가 세워졌다. 원나라 때에는 하간로에 속했고, 명나라의 하간부로 이어졌다. 14세기 들어 무슬림들이 정착, 현재까지도 다수의 후이족이 거주하고 있다. 청나라 때에는 북쪽 천진부에 속했으며, 중화민국기의 진해도와 국공내전기 창현전구를 거쳐 1983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한편 북쪽 20km 칭현에서는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지원 하에 칭현 반일 민주 정부가 세워져 지속적인 게릴라 전을 이어나가기도 하였다. 세부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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