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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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소설가, 친일반민족행위자. 본관은 평강(平康)이며, 호는 백릉(白菱), 채옹(采翁)이다. 대표작으로는 〈레디메이드 인생〉(1934), 《탁류(濁流)》(1937) 《태평천하(太平天下)》(1938)[3] , 〈치숙(痴叔)〉(1938), 〈여인전기(女人戰紀)〉(1944), 〈미스터 방(方)〉(1946) 등이 있다.
2. 생애[편집]
1902년 7월 21일 전라북도 임피군 군내면 동상리(현 군산시 임피면 읍내리)에서 부농인 아버지 채규섭(蔡奎燮, 1862 ~ 1944. 12. 16)[4] 과 어머니 한양 조씨 조우섭(趙又燮, 1865 ~ 1947. 4. 18)[5] 사이의 5남 1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고향의 임피공립보통학교와 서울의 중앙고보를 거쳐 와세다대학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이 와세다 고등학원은 구제고등학교 및 대학 예과 과정에 상응하는 고등교육기관이다. 그러나 1년 만에 중퇴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했다. 기자 생활을 하면서 써 온 소설로 등단하였고, 곧 기자 생활을 그만두었다. 그 이후 동반자 작가[6] 성향의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차차 풍자적인 성향의 작품을 발표,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텔리와 빈대떡>으로 입지를 굳혔다.
40대 후반에 사망해 작품 활동기가 길지 않았음에도 대표적 다작 작가로 유명한데 소설, 희곡,[7] 동화, 수필, 평론 등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작품의 양만이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채만식은 동시대 작가 위에 도도하게 군림한다. 서동산(徐東山)이라는 가명으로 최초의 근대적 장편 추리 소설인 〈염마(艶魔)>를 발표한 작가이기도 하다. 김유정과 함께 신식교육을 받은 도시인임에도 사투리를 자유자재로 다룬 작가인데 제주도 사투리 말고는 다 나온다. 똑같이 사투리 활용이 다채로운 김유정이 요절로 30여편만 남긴데 반해 200여편을 남긴 사람의 작품이 8도 사투리를 넘나들어서 전집 내기 힘든 작가로 유명하다.
예술가답게 잦은 검열 기준을 넘나드는[8] 풍자적 성향의 작품을 잇따라 발표하다가, 그 이후 독서회사건으로 인하여 친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3. 친일 행적[편집]
내지의 어머니들은 이천육백여 년을 두고 한결같이 나라를 위하여 아들네를 전지에 내보내되, 동치 아니하도록 도저한 도야(陶冶)와 훈련과 그리고 자각(自覺) 가운데서 살아 내려왔다. 그런 결과 일본 여성은 사랑하는 아들을 나라에 바쳤으되 조금도 미련겨워하며 슬퍼하는 등 연약한 거동을 함이 없이 가장 늠름하기를 잊지 아니하는 천품이 정신이 잡히기에 이르렀다. 어머니 된 정에 노상 어찌 슬픔이 없을 리가 있을꼬마는, 한때 속으로 슬퍼하였지, 혼자서 암루(暗淚)나 흘리면 흘렸지 일상에 상심하는 얼굴을 지닌다거나, 항차 남 앞에서 눈물을 보인다거나 하는 법은 전연히 없다.
여러 백 년을 나라와 나라 위할 줄을 모르고 오직 자아본위(自我本位), 가정본위(家庭本位), 오직 일가족속본위(一家族屬本位)로만 살아온 조선 백성은 따라서 어머니들의 군국에 대한 정신적 준비랄 것이 막상 충분치가 못하 였다. 빈약한 편이 많았다.
“나라는 개인보다 중(重)하니라.”
“민족의 번영은 언제나 그 민족의 젊은이가 흘린 바 피와 정비례하느니라.”
채만식, 「여인전기」
"당신, 죄 지셨잖아요? 그 죄, 지신 채 그대루, 저생 가시구퍼요?"
아내가 나를 죄인이라고 부르기는 처음이었다. 그는 울면서 그 말을 하였다.
나를 죄인이 아니라 여기려고 아니하는 이 낡아빠진 아내가, 나는 존경스럽고 고마웠다.
채만식, 「민족의 죄인」, 『레디메이드 인생』, 애플북스, 2014.
다른 친일파 문학가처럼 강연과 친일적 소설과 시로 친일 행위를 하였다. 하지만 별로 부각되는 행적을 보이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 채만식은 광복 이후에 〈민족의 죄인〉(1948.10, 1949.1)이라는 중편 소설을 발표하여, 자신의 친일 행적을 반성하였다. 물론 그렇다고 친일 행위를 한 사실이 변하지는 않지만, 채만식은 적어도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드러내면서 다른 친일 문인들보단 양심이 있다는 평을 받는다.
광복 이후에는 <미스터 방>이나 <논 이야기>, <이상한 선생님> 등으로 미군정 하의 남한의 상황을 풍자한 소설[9] 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국전쟁을 정확히 2주(정확히는 6월 11일 사망) 앞두고 낙향한 이리(지금의 익산시)에서 48번째 생일을 40일 앞두고 47세로 사망한다.[10][11]
그가 죽기 두어 달 전에 남긴 말은 "인편이 허락하는 대로 원고지 20권만 보내 주소. 내가 건강이 좋아져서 글이라도 쓰려고 하는 것 같이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네. 나는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본 일이 없네. 이제 임종이 가깝다는 예감을 느끼게 되는 나로서는 죽을 때나마 한 번 머리 옆에다 원고 용지를 수북히 놓아 보고 싶은 걸세."[12]
연세대학교 교수 최유찬은 자신의 저서 <문학의 모험>에서 채만식의 친일 행위를 비판하기만 하는 행태에 비판을 가했다. 상술하였듯이 채만식의 경우 인정하고 뉘우치는 모습을 보여서인지 60년대부터 꾸준히 친일파 연구와 고발에 힘쓴 돌베개 출판사에서 쓴 친일파 관련 서적에선 이효석과 같이 그래도 조금은 긍정적인 평을 내리고 있다. 적어도 이 둘은 그걸 사죄하고 후회하고 반성하기라도 했다면서 되려, 김동인이나 이광수(소설가), 이무영, 서정주 등 많은 문학가들이 자신의 친일 행위를 숨기거나 뭐가 잘못이냐고 뻔뻔하게 외치던 걸 같이 견주면서.
그러나 최유찬 교수의 의견에 대한 반박 의견도 있다. 채만식의 <문학과 전체주의>에서 최유찬은 어둠속에서 잠을 잘 못 자는 자신이 전등을 끔으로써 불면증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빛과 어둠의 알레고리를 이용해 당대 현실이 암흑의 세계임을 암시한다고 주장했지만[13] 실체 채만식은 불면증에 시달려 포도주를 먹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14]
또한 최유찬은 김재용의 <협력과 저항>을 인용하면서 논리적 왜곡을 저질렀다. 김재용은 채만식 문학의 친일 파시즘화 계기를 1940년 중반 왕정위의 신남경정부수립으로 보고 친일의 내적 논리로서 '멸사봉공'의 이데올로기를 들고 있고, 해방 후 <민족의 죄인>의 논리가 실망스러운 것은 "친일 파시즘에 경도되었던 내적 논리- 15세기 이후 유럽에서 시작된 근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에서 나온 인간 해방-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최유찬은 김재용의 논리를 왜곡하고 있는데 "이 내적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한수영에 의해 지적되었다. 신남경정부의 수립이란 하나의 단순한 외적 사건을 친일작가가 되는 원인으로 삼는 논리, 논거가 부실한 문제점이 지적된 것이다. 그러나 이 내적 논리는 채만식이 자발적 협력을 한 친일작가임을 입지으하는 반석 같은 진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 놓였다. // "5장은 채만식이 해방된 조국에서 '고독한 반성'을 하고 했지만 김재용의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것이었음을 분석하고 있다. 채만식은 김재용의 기대와는 달리 무한삼진을 언급하지도 않고 신남경정부를 아는 체도 하지 않은 것이다."라고 서술한다. 이는 당연한 결과인데 왜나하면 김재용은 앞서 <민족의 죄인>읠 비판하면서 그 이유를 분명히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신남경정부의 수립과 같은 친일의 계기가 분명 아니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최유찬의 논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채만식을 항일작가로 다시 일으켜 세우면서 결국 그것은 다시금 민족주의 담론에 갇혀버린다는 점일 것이다.[15]
4. 여담[편집]
평소 육식을 즐겨서, 집안 살림이 어려워도[16] 밥상에는 꼭 고기 반찬을 올렸다고 한다. 하루는 지인이 채만식의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밥상을 보고 이토록 고기를 즐기니 채(菜)만 식(食)이 아니라 '육(肉)만식(食)'으로 불러야 하는 것 아니냐며 농담을 하기도 했단다. 이런 습관에서 기인했는지 채만식의 작품에서는 음식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 편이며, 심지어는 먹는 산적을 가지고 소설 한 편을 쓰기도 했다.
채만식만의 독특한 작품 형태로 '대화소설'이 있는데, 지문이 없이 대화로만 이루어져 있으면서 희곡과는 달리 인물, 시대, 장소 제시도 없고 막이나 장의 구분도 없고 무대지시문도 없는 소설을 가리킨다.
점잖은 사람: 명년에는 자네 논이나 몇 말지기 부치게 해주게.
지주: 그새도 농사를 많이 짓지 아니했나?
점잖은 사람: 남의 논 서른 말지기를 지어왔지만 비싼 도조를 치루고 남는 게 있어야지.
지주: 버들골에 있는 열닷 말지기를 명년부터 부치게.
점잖은 사람: 구(舊) 작인(小作人)이 말썽을 아니하겠지?
지주: 내 논 가지고 내 마음대로 작인을 옮기는데 누가 말썽이야? 그새도 그러기는 했지만 앞으로는 일체 농군(農業勞動者)에게는 논을 아니 줄 테야…… 도조를 잘러먹고 간도로 달어나니까.
점잖은 사람: 하기야 농군이 별로 논을 부치어보지도 못했지.
지주: 그게 옳은 일이지.
점잖은 사람: 도조는 얼마씩이나 할까?
지주: 평년작에 양석(150평 1두락에 2석)은 먹는 상답이니까……
점잖은 사람: 응.
지주: 그새까지는 열일곱 섬을 받어왔지만 열석 섬만 치지.
점잖은 사람: 농채(農業資金)도 좀 대어주게.
지주: 금융조합에 보증이나 서주지.
-<조그마한 기업가> 中
읽어보면 소위 대본소설과 비슷한 문체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대화소설'은 그의 희곡과 함께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전북 군산시 임피면 축산리에 채만식 묘소[17] 가 위치해 있으며 내흥동에 채만식문학관[18] 이 위치해 있다.
5. 채만식 문학상[편집]
전라북도 군산시에서 채만식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채만식의 작가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소설가들에게 수여하는 문학상을 제정했다. 매년 10월 5일 군산 시민의 날에 시상식이 열린다. 2003년부터 시상되기 시작했는데, 2005년에는 채만식의 친일 논란 때문에 한 해 걸렀다. 관련 기사. 2006년부터 다시 시상하기 시작해 2018년 15회를 맞았다. 다음은 채만식문학상 역대 수상자 명단.
6. 대표작[편집]
-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의 대표작으로 평가받으나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민족의 죄인 : 광복 직후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반성과 변명을 소설의 형식으로 써낸 작품이다. 역시 생전에는 단행본이 발간되지 않았다.
- 명일 : 궁핍한 개화기 조선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
- 염마 : 추리소설
- 왕치와 소새와 개미와 : 채만식이 쓴 대표적 우화.
- 인텔리와 빈대떡 : 소설이 아닌 희곡 작품이다.
- 삼대 : 생전에 출간된 단편집에는 수록되지 않았다.
- 탁류 : 1939년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태평천하 : 1948년에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 소망
- 치숙
- 순공있는 일요일
- 미스터 방
- 논 이야기
- 두 순정
- 이상한 선생님
- 제향날 :2016학년도 수능 국어 B형에서 나온 희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