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응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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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채응원(蔡應元), 채응경(蔡應慶), 채도석(蔡道錫)
본관
인천 채씨(仁川 蔡氏)[1]
출생
1879년?[2]
평안도 성천도호부
(현 평안남도 성천군)
사망
1915년 11월 4일
평양형무소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 위패-98호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3. 참고 자료



1. 개요[편집]


"내 나라를 위해 싸운 내가 왜 강도란 말인가. 강도는 오히려 너희들이 아닌가!"


대한민국독립유공자. 통칭 '백년산 호랑이'라 불리며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 초기에까지 8년 동안 항일 활동을 벌인 국내 최후의 의병장이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채응언은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밝혀지지 않았다. 전후관계를 고려하여 출생년도는 1879년이라는 것과 체포된 곳이 평안남도 성천군이기에 출생지도 같을 것이라 추정된다. 한편, 1883년에 출생되었다는 설은 체포 당시 <매일신보>에서의 32~33세 언급을 근거로 하고 있다.

채응언이 16살 되었을 때 동학 농민 혁명이 일어난다. 의병활동을 하기 전에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던 채응언은 어려서부터 의협심이 강하고 성실했던 인물이라고 한다. 을사오적을사조약을 체결하는 일이 벌어지고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며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한다.

난신적자[3]

가 횡행하여 권세를 희롱하므로 송병준, 이완용과 같은 7적, 5귀의 살점은 이천만 동포 모두가 씹어먹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의병을 일으킬 만한 돈도 지위도 없었기에 일단은 다른 인물의 의병으로 활동한다. 1907년에는 전병무, 서태순의 의병 부대에서 활동했으며 그 이전의 활동 기록은 전무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의병부대의 잡일을 도맡다가 포수를 맡게 되고, 부대장이 죽어 그 일을 승계하여 활약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다.

1908년에 자신의 의병부대를 만든 채응언은 최대 500명의 의병들을 이끌고 일제 건물을 파괴하며 게릴라전을 벌인다. 서태순의 의병을 계승한 군율 15개를 정해 의병들을 잘 통솔하고, 게릴라에 능했기에 일제가 보병사단을 투입해 진압작전을 펼쳤음에도 성과가 전혀 없었다.

1909년 즈음을 기점으로 일제가 의병들을 뿌리 뽑기 위해 남한 대토벌작전을 시행했지만 채응언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경찰서와 통신시설을 연달아 파괴하며 일본군을 농락했다. 심지어 1910년에는 군경기관을 직접 공격하여 통신시설 23곳을 파괴하고, 헌병분견소를 공격해 총 13정과 탄알 5800발을 노획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때 헌병대가 2500발의 탄약을 사용하여 진압하고자 했으나 도리어 헌병대원 3명이 죽으며 패배하였다.

국권침탈이 된 이후에도 채응언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오히려 수비대를 공격하여 전과를 올리는 등 독립을 위해 노력한다. 한편으론 군자금과 군수품을 조달하고 일제와 내통하는 친일파와 일진회 등을 처단하는 활동도 했다.

1913년과 1914년에도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여 헌병을 사살하는 등 활동을 지속했다. 당시 그는 백년산 호랑이라 불리며 전설적인 의병장으로 불렸다. 일제는 채응언을 잡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썼으며 1914년 11월에는 그의 목숨에 280원의 현상금이 내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1915년 7월 5일, 군자금을 얻기 위해 그는 고향 성천으로 갔으나 누군가의 밀고로 인해 위치가 노출되어 일본 헌병들에게 추적당했고 격투 끝에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되었을 때에도 적군인 일본 지휘관에게 "애썼다"고 말하는 등 대범함을 보였다.

전설적인 의병장이 잡힌 만큼 재판을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다. 이때 그는 평양 형무소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사형선고를 받자 거세게 항의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의 죄명이 살인강도인 것에 대한 항의였다. 차라리 의적이라면 참겠는데 살인강도라는 죄목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상고가 기각되면서 사형이 확정되고 채응언은 자살을 기도했으나 이를 발견한 간수의 제지로 실패했고 1915년 11월에 교수형에 처해져 순국한다.

채응언이 순국한 후 의병에 대한 일제의 탄압과 토벌이 강화되어 국내 의병활동은 사라졌고, 살아남은 의병들은 해외로 이주하여 근거지를 마련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해외를 근거지로 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실제로 의병 활동을 하던 이들 중에서 독립군이 된 이들이 많다. 한편 국내에서도 일제의 탄압에도 비무장 독립운동 역시 계속되며 무력 투쟁은 주로 의거의 방식으로 이어지게 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사후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3. 참고 자료[편집]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224~2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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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1883년생이라는 설도 있다.[3] 나라를 어지럽히는 신하와 부모를 공격하는 자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