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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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월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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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뱅크스 젱킨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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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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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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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C FRS


본명
대(大) 윌리엄 피트
William Pitt the Elder[1]
출생
1708년 11월 15일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미들섹스웨스트민스터
사망
1778년 5월 11일 (향년 69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켄트 헤이즈
재임기간
제10대 총리
1766년 6월 30일 ~ 1768년 10월 14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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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윌리엄 피트(William Pitt, 1st Earl of Chatham, 1708년 11월 15일~1778년 5월 11일)는 영국의 제10대 총리이며, 영국수상이다. 휘그당 소속으로, 이후 휘그당을 탈당하여 토리당을 이끈 둘째 아들이자 마찬가지로 수상을 역임한 아들과 대비하여 이쪽은 대(大)피트라고 불린다.


2. 생애[편집]


웨스트민스터에서 태어나 이튼 칼리지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27세에 하원에 입성했으며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때는 재무성의 육군 담당 회계장관을 역임했다. 7년전쟁 발발 당시인 1756년 국방장관에 임명될 당시 "나는 이 나라를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구할 수 있음을 자신한다"라는 호기로운 말로 취임했는데 과연 그의 말대로 영국은 피트가 고안해 낸 전략에 힘입어 승리를 쟁취했다.

그는 영국이 유럽 내 영토전쟁보다 식민지에 치중하도록 이끌었으며 이를 위해 대륙의 프로이센을 지지했다. 한편으로 그는 유럽에서 프랑스를 주요 타깃으로 삼고 프랑스와의 식민지 싸움에서 이기고자 했다. 결국 인도·북아메리카 등지에서 식민지를 넓혀 대영제국의 기초를 세워 '위대한 평민(The Great Commoner)'이라는 말도 듣게 된다. 식민지와 평민은 뭔가 좀 안어울리지만 넘어가자 1761년 조지 2세가 죽고 그를 싫어했던 조지 3세가 즉위하면서 그는 강제로 국방 장관에서 해임됐지만[2] 그럼에도 상당수 전황은 피트의 예상대로 흘러간다.

1766년 총리로 취임하였다. 허나 2년 후 영국 의회아메리카 식민지에 세금을 과도하게 물리는 근시안적인 정책을 시행하자 이에 반대하다가 건강 문제도 겹쳐 후임인 오거스터스 피츠로이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사임하였다. 실제 그는 식민지 독립은 반대했으나 미국이나 기타 식민지들과 영국의 유대 관계를 중시하였다.

이후 피트는 1778년 5월 11일 그에게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Iliad〉 중 헥토르장례식 장면을 읽어주던 아들 윌리엄의 품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장관을 이룬 장례 행렬과 국민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생전에 원했던 대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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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뒤에 the Elder가 붙은 것은 아들(1759년생)의 성함도 "William Pitt"라서 구분짓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2] 조지 3세 입장에서 분노할 만한 게 피트가 내놓은 전략은 왕조의 뿌리인 하노버를 지키는 것이 국왕이익이지 나라의 이익은 아니므로 하노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과연 위대한 평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