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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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자
千鏡子 | Chun Kyungja


파일:external/www.ombudsmannews.com/data/newsThumb/1482188045ADD_thumb580.jpg

본명
천옥자(千玉子)
출생
1924년 11월 11일
전라남도 고흥군 고흥읍 옥하리[1]
사망
2015년 8월 6일 (향년 90세)
미국 뉴욕주 뉴욕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본관
영양 천씨 (潁陽 千氏)
직업
화가, 수필가
학력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2]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3] 미술학
배우자
초혼: 이철식
재혼: 김남중
가족
아버지 천성욱, 어머니 박운아, 1남 2녀중 장녀
자녀 2남 2녀(이혜선, 이남훈 / 김정희, 김종우)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
2. 생애
2.1. 미국으로 떠난 이후
3. 사건사고
4. 활동
4.1. 작품
4.2. 전시
4.3. 저서
5. 경력
6. 수상



1. 개요[편집]


내 온몸 구석구석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적인 여인의 한이 서려 있나 봐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는 지워지지 않아요.

- 천경자

환상적인 세계관을 결합시킨 짙은 색채의 채색화로 전통적인 한국화를 벗어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으며 덕분에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졌고 많은 수의 수필집들도 집필하여 생전부터 큰 대중적 인지도를 얻은 화가다.
주요 작품

파일:천경자-미모사향기.jpg


파일:천경자-여인의초상.jpg

미모사 향기, 1977년
여인의 초상, 1977년


2. 생애[편집]


공립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미술교사로부터 그림을 배웠고, 1941년 일본의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뎃생이나 채색법에 대해 배웠다. 이후 1944년 도쿄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아카데미 고에쓰에서 공부한 뒤 귀국해서 1955년 대한미술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해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화단에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 그후 홍익대학교에서 동양화 학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한편으로 수필가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부터 발표한 수필을 모아 1955년 첫 수필집 "여인소묘"를 출판하기도 했고 남태평양을 다니면서 경험한 것을 자신의 데셍 삽화와 함께 출판한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를 출판하기도 했다. 평생 발표한 저서만 10권이 넘을 정도로, 지금은 대부분 절판됐지만 당시에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또한 한말숙, 박경리 등 문인들하고도 각별히 교류하였다.

그녀는 동양화가이면서도 대담하게 밝은 색채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일본에서 공부해서 지나치게 왜색물이 들었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했다. 이런 그녀의 시대를 앞선 스타일은 그녀를 해방 이후 한국 미술에서 중요한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여성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는 점도 독특한 부분이다.

여성들에게 보수적인 시대였음에도 상당히 개방적인 여성이었다, 수십 년 전에 세계일주를 했을 정도이니. 또한 상당한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녀의 작품에도 담배가 자주 소재로 등장할 정도. 배우 윤여정은 천경자가 맞담배를 허용해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사실 과거에는 회충을 잡아야 한다는 이유로 여성들에게 담배를 허용하는 경우가 많았다.[4] 그래서인지 천경자 집안에는 대대로 애연가가 많았다. 외할머니와 어머니도 애연가였으며, 천경자의 딸 또한 애연가였고, 모녀 간에 맞담배를 즐겼다 한다.# 참고로 천경자는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장녀 이혜선, 장남 이남훈, 차녀 김정희, 막내 김종우[5])

베트남 전쟁 당시 종군화가단의 일원으로 참가해서 기록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한국미술연구소의 천경자 종군화가단 활동 자료

위작시비에 대해 천경자에게 동정적인 기사에서 성격을 묘사하기를, 다른 사람에게 매우 잘해주면서 동시에 두려움과 의심을 갖고 대한다고 했다.

1991년 일어난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창작활동은 파탄을 맞게 된다. 그녀 자신이 그린 적이 없는 그림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 잠시 미국으로 요양차 떠나 있었으나, 얼마 뒤 귀국해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하였고[6] 1995년 호암갤러리[7]에서 첫 번째 회고전(11.1~11.30)을 개최한다. 당시 회고전은 굉장한 화제가 되어서 전시장 매표소에서 시작된 줄이 호암갤러리 밖 서소문 거리에까지 이어졌을 정도였고, 1달 동안 8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마지막 주말에는 하루 5,000명까지 입장하였다고 한다.[8][9] 그러나 1998년 9월 건강이 나빠져 결국 한국 생활을 접고 큰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고, 11월에 일시 귀국하여 그동한 가지고 있던 채색화와 드로잉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다.[10]


2.1. 미국으로 떠난 이후[편집]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으로 떠난 뒤 그녀의 작품 가격이 치솟아서 2023년 현재도 그녀의 작품은 미술시장에서 가격이 가장 치솟은 작가로 꼽힌다.[11] 2003년에 호당 1,000만원대이던 그녀의 작품은 2023년 현재는 호당 4,000만원대를 호가한다는 것.[12] 그녀가 1998년 미국으로 떠난 뒤 공개적인 작품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가는 계속 될 거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탓에 그녀의 작품의 다른 위작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그러다 2003년뇌일혈을 일으켜 거동은 커녕 말하는 것조차도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작품활동은 중단되었다. 이후 2006년 갤러리 현대[13]에서 장녀 이혜선의 협조로 전국 각지에 흩어진 채색화와 드로잉, 미완성 작품 등을 모은 대규모 개인전이 열렸고, 2007년에는 새로운 화집 "천경자-그 생애 아름다운 찬가"가 발간되었다.[14]

한편으로 그녀는 고향 고흥군에 2007년 드로잉과 판화 66점을 기증하고 고흥군은 이를 고흥군 종합문화회관내에 천경자 전시실을 설치해 전시했으나 고흥군의 무성의한 작품 보존 행태에 분노한 그녀는 2010년 작품 반환을 요구했다. 작품에 손상을 가하는 할로겐 전구를 전시실 조명으로 쓰는가 하면 심지어는 청소용구를 보관하는 창고에 작품을 보관하는 등의 행태를 듣고 분노한 그녀[15]가 작품 반환을 요구하게 된 것. 고흥군은 결국 2012년 3월에야 반환을 결정했지만, 12월까지 미루고 미루다가 작품의 상태에 대해서 또다시 문제가 밝혀지고 천경자 측과 실랑이를 벌인 끝에 결국 반환했다.

헌데 2014년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다. 천경자의 딸 이혜선 씨가 일부러 천경자의 죽음을 숨기고 계속 예술원 수당을 지급받고 있다는 것. 2014년 천경자는 외부와 접촉을 끊은 채 살고 있는 상태. 공예가인 딸 이씨의 증언에 따르면 "거동은 어렵지만 의식은 있는 상태"라고는 하는데, 예술원은 수당 지급 문제로 천경자의 근황을 확인하려고 지난해부터 이씨에게 공문을 보내 천경자의 의료기록 등을 요구했다. 이씨는 이 같은 요구가 천경자에 대한 명예훼손이라며 응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따라 예술원은 지난 2월부터 수당 지급을 중단했고, 이씨는 회원 탈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예술원은 천경자 본인의 의사가 확인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탈퇴 처리는 하지 않은 상태다.# 천경자의 딸 이씨의 경우 고흥에 기증했던 작품들도 관리를 허술히 했다는 이유로 천경자미술관 건립을 무산시켰고,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된 작품도 반환을 요구하였다.[16] 2014년 6월 27일, MBC의 '리얼스토리 눈'에서 이에 대한 내용을 다루었다.

그런데 천경자가 2015년 8월에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그러나 유족들[17]은 천경자의 유골의 위치를 모른다고 주장했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장녀 이혜선 때문이라고 한다. #. 후에 장녀는 어머니의 유골을 허드슨 강에 뿌렸다고 밝혔다# .

2016년에는 작고 1주기를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기증작품을 중심으로 한 추모전이 개최되었고, 같은 해 미술평론가 최광진[18]이 집필한 "천경자 평전-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이 간행되었다.

2019년에는 천경자화백 큰며느리 유인숙이 쓴 "미완의 환상여행"(이봄-문학동네)이 간행되었다. 저자는 결혼 첫해인 1979년부터 1998년 천화백이 미국으로 이주하기까지 곁에서 일상을 함께했다. 1990년대 일상이 담긴 천화백의 수필은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다. 유인숙 저자는 천화백의 전성기였던 1979년 서교동시절부터 압구정한양아파트에서 살기까지의 일상을 묘사한다. 천화백은 가족을 모델로 작품을 그려왔는데, 1979년 이후에 자식들이 유학 혹은 해외 출장을 간 후 큰며느리가 모델이 되었다고 한다. 모델을 한 작품은 ‘노오란 산책길’, ‘황금의 비’ 포함한 여러 작품이 있다고 한다.#

2021년에는 작품 ‘노오란 산책길’을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했었다.(전시기간 2021.7.21.-2022.6.6.)#

3. 사건사고[편집]



3.1.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활동[편집]



4.1. 작품[편집]


  • 1943년 - 노부
  • 1943년 - 조부
  • 1951년 - 생태
  • 1952년 - 부활
  • 1955년 - 정
  • 1959년 - 전설
  • 1962년 - 두 사람
  • 1962년 - 환
  • 1963년 - 원
  • 1964년 - 여인들
  • 1965년 - 찬가
  • 1974년 - 4월
  • 1976년 - 은전아 잘 있었니
  • 1977년 - 6월의 신부
  • 1977년 - 아열대
  • 1977년 - 여인의 초상
  • 1977년 -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 1977년 -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 1977년 - 미모사 향기
  • 1977년 - 수녀 테레사
  • 1977년 - 아열대2
  • 1978년 - 탱고가 흐르는 황혼
  • 1978년 - 초원
  • 1978년 - 윤삼월
  • 1978년 - 무제
  • 1981년 - 미도파의 초상
  • 1981년 - 장미와 여인
  • 1982년 - 여인상
  • 1983년 - 노오란 산책길
  • 1984년 - 아는 여인의 시1
  • 1985년 - 아는 여인의 시2
  • 1985년 - 무제
  • 1988년 - 누가 울어
  • 1988년 - 무제


4.2. 전시[편집]


년도
제목
장소
비고
2018년 3월 16일 ~ 2018년 7월 29일
피란수도 부산 : 절망 속에 핀 꽃
부산시립미술관

2018년 4월 4일 ~ 2018년 4월 10일
여인의 향기
갤러리일호

2018년 7월 13일 ~ 2018년 9월 2일
오늘의 여성미술
양평군립미술관

2018년 7월 14일 ~ 2018년 10월 3일
한국 근현대미술 걸작전 - 100년의 여행, 가나아트 컬렉션
제주도립미술관

2018년 7월 19일 ~ 2018년 9월 9일
책 속의 화가
성북구립미술관



4.3. 저서[편집]


년도
제목
출판사
비고
1974년
남태평양에 가다
서문당

1980년
꿈과 바람의 세계
꿈과 바람의 세계

1986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
제삼기획

1986년
이 행복하고 한적한 매혹의 시간에
진화당

1988년
꽃과 색채와 바람
자유문학사

1989년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자유문학사

1995년
탱고가 흐르는 황혼
세종문고

1995년
천경자 화보집
세종문고

2006년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랜덤하우스코리아

2006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랜덤하우스코리아



5. 경력[편집]


  • 1981년 -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
  • 1978년 -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 1976년 -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운영위원
  • 1965년 -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 ~1974년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교수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부교수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조교수
  • 1954년 -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전임강사
  • 1949 ~ 1952년 - 조선대학교 미술학과 교수


6. 수상[편집]


  • 1983년 - 은관문화훈장
  • 1979년 - 대한민국예술원상
  • 1971년 - 서울특별시 문화상
  • 1955년 - 대한미술협회전 대통령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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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전남여자고등학교[3]여자미술대학[4] 우리나라의 여성 흡연에 대한 터부는 오히려 조선시대나 일제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없었고, 해방 후 서양 문화가 유입되면서 생겨난 것이다.[5] 2007년 작고. 前 세공문고 대표. 이 인연으로 후에 세종문고는 천경자의 화집(1995년판)도 출간했다.[6]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필은 일시적인 것이였다.[7] 과거 중앙일보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용인에 위치한 호암미술관(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의 별관이였으나,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하면서 이곳을 중앙일보에 되돌려 줌에 따라 폐관되었다.[8] 이는 당시 회고전을 기획했던 前 호암미술관 큐레이터인 최광진의 저서 "천경자 평전"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9] 이러한 흥행은 작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것도 이유이지만, 당시 천경자가 전시장에 거의 매일 직접 나와서 관람객을 맞고 사인을 해 주기도 한 것도 어느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시 최광진이 집필한 "천경자 평전"에 언급된다.[10] 이것을 토대로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는 따로 "천경자실"이 마련되어 천경자의 기증작품들이 연중 상설전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11] 경제학적으로 보면 당연한게, 공급은 끊겼는데 수요는 이슈화되면서 올라갔으니 가격이 오를 수 밖에 없다. 사실 상당수 작가들이 죽어서 뜨는 경우가 많다. 재주는 예술가가 부리고 돈은 콜렉터들이 버는 경우도 많다.[12] 하지만 이는 해외 예술시장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해외에서야 1,000억원이 넘는 작품도 경매에서 나오니. 전반적으로 한국예술시장은 규모가 초라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외 예술시장이 그만큼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봐야겠지만.[13] 1973년, 1974년, 1978년, 1980년에 1번씩 천경자의 개인전을 개최한 이력이 있다.[14] 다만 비매품이다.[15] 정확히는 그녀의 장녀인 이혜선. 2003년 천경자가 뇌일혈로 병상에 누운 뒤부터 작고할 때까지 사실상 천경자의 대리인 행세를 했다.[16] 당시 기사 이에 대한 장녀 이혜선의 해명.[17] 정확히는 장녀 이혜선을 제외한 나머지 유족들. 기사에 따르면 나머지 유족들은 어머니의 은행 통장 해지 전화를 받고 나서야 어머니의 죽음을 알았다고 한다. [18] 前 호암미술관 큐레이터. 1995년 천경자 회고전을 기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