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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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단길[메타문서]: 실크로드의 한글 번역
  • 신 실크로드: KBS 명작 다큐멘터리
  • 기아 그랜버드: 기아의 버스 그랜버드의 등급 실크로드
  • 실크로드 시리즈: SPRITE 동인팀의 게임
  • 실크로드 온라인: 조이맥스의 MMORPG
  • 실크 로드(블랙마켓): 다크웹의 유명한 마약 불법 거래 사이트

기원후 1-10세기경 실크로드 교역망의 분포도.

초원길
사막길
바닷길


1. 개요
2. 어원
3. 역사
3.1. 한국사와 실크로드
4. 종류
4.1. 초원길
4.2. 사막길
4.2.1. 천산북로와 천산남로
4.3. 바닷길
4.3.1. 아프리카의 실크로드
5. 매체와 실크로드
6. 관광


1. 개요[편집]


비단길 또는 실크로드(Silk road)는 대항해시대 이전 중국 대륙중앙아시아, 서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지중해 세계를 잇던 동서 교역 루트, 또는 이러한 교역 루트를 통해 연결되었던 교역망을 이른다. 이 루트를 통해 동서 간의 문물이 왕래했으며 비단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크고 작은 도시나 마을이 생겼다.

유사한 고대의 국제 교역로로 중국, 티베트, 인도, 네팔 등을 연결하던 차마고도가 있다.


2. 어원[편집]


'비단길', 영어로 '실크로드'라는 어휘의 유래는 독일지리학자 페르디난트 폰 리히트호펜[1]이 중국에서 중앙아시아, 인도로 이어지는 옛 교역로를 연구하던 중 당시의 주요 교역품이 비단이었던 것에서 착안하여 '자이덴슈트라쎄(Seidenstraße)'로 명명하면서 사용되었다. 이 실크로드라는 말은 동서방 간의 교역로 중 스텝지대의 '초원길'과 인도양을 통해 이어지는 '바닷길'을 제외한 사막오아시스 일대의 도시들을 거치는 교역 경로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실크로드라는 명칭은 교역로가 확대되면서 다소 부적절해졌지만 유라시아의 원거리 무역과 문명교류의 통로에 대한 상징적이고 관용적인 명칭으로 계속 사용되었다. 중국에서는 사주지로(絲綢之路)라고 부른다.


3. 역사[편집]


넓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10,000년 전후 빙하기가 끝난 후 문명이 발생하고 인류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이때부터 생겨난 몇 갈래의 교통로로서 지금까지 문명 간 교류의 통로로 기능하는 것을 지칭한다. 반면에 좁은 의미의 실크로드는 기원전 8~9세기부터 만들어져 근대 이전까지 기능한 동서문명 교류의 통로를 지칭한다.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도시국가나 유라시아유목국가들에게는 부와 국력의 원천이기도 했으며, 사산조 페르시아부터 일 칸국에 이르기까지 서아시아의 국가들에게도 경제적으로 굉장히 중요했다. 그러나 16세기에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대서양 바다를 통한 대양무역이 확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초원길과 오아시스길이 세계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줄어들게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 길이 완전히 "쇠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대항해시대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서구 중심적 옛 사관에서는 내륙 실크로드가 교역루트로서 몰락했다고 간주하기도 했지만, 이쪽도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퍼센트가 줄어들었을 뿐 16세기 이후에도 이들 유라시아 내륙교역로의 무역랑의 절대량은 계속 증가했으며, 티무르 제국과 제국 붕괴 이후의 코칸트 칸국, 부하라 칸국, 히바 칸국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러시아, 페르시아, 인도, 중국을 엮는 삼각무역의 요충지로서 전성기를 지내며 번성하였다. 러시아는 이곳에서의 모피 무역을 비롯한 각종 교역에서 얻은 자본을 통하여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다. 실크로드 지역이 러시아 제국에게 완전히 정복되는 건 한참 이후의 일이다.

근대에는 러시아에 의해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비롯해 여러 대륙횡단철도가 부설되었으나 냉전시대 철의 장막으로 공산권 내부의 교통로 역할로 그 입지가 줄어들었다. 소련 치하에서 이 지역은 일률적인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회간접자본이 설치되었으며, 그 영향으로 중앙아시아와 동유럽이 같은 경제권으로 묶이게 되었다. 특히 내륙에서의 운송은 철도만 한 것이 없기에[2] 철도 부설은 특히 내륙국이거나 내륙국과 교류하는 국가들에 있어 중요한 경제적 의의를 가진다.

오늘날 중국은 일대일로라는 인프라, 경제, 문화 교류 정책을 추진 중이며, 이는 과거의 실크로드가 남긴 유산을 문화적, 지정학적으로 재활용하는 구상이 포함되어 있다. 이 길을 따라 중국의 아프리카 진출 전략까지 구상되었다. 2014년에는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라는 이름으로 실크로드상의 33개의 유적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실크로드: 창안-톈산 회랑 도로망 참조.


3.1. 한국사와 실크로드[편집]


실크로드의 부수 교역로는 중국의 항저우와 취안저우 항구를 통해 신라의 당항성과 울산, 고려의 벽란도 등 한반도까지 직, 간접적으로 이어졌다. 이에 일찍이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포함해 한반도 전역의 유적에서 당대 동아시아에서는 생산, 제작할 수 없던 서역의 유물들이 출토되면서 조명을 받았다. 대표적인 유물이 경주 계림로 보검이나 황남대총 유리병이다.

유물뿐 아니라 인적 교류도 주목받았는데, 한국인이 실크로드를 이용해 서역으로 갔다온 경우로는 혜초왕오천축국전이 있으며, 반대로 서역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경우로 원성왕릉호인상이 꼽히고 있다. 정수일 박사의 소개로 알려진 중세 이슬람권의 지리서에도 신라에 정착한 아랍인페르시아인의 존재를 묘사하고 있다.

선덕여왕 때 실크로드의 끝을 토함산 석굴암을, 또 사천왕사가 모셔져 있는 황룡사 9층 목탑을 완성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의미: 유럽 서역국을 거쳐 인도를 지나 중국에서 반도까지 외세의 침입으로 부터 국가를 수호한다는 의미로 층마다 외세의 나라를 이름하여 두고 9층까지 목탑으로 만들었다.


4. 종류[편집]


중세의 동서 교역로는 초원길, 사막길(오아시스로), 바닷길의 3대 간선과 마역로, 불타로, 라마로, 메소포타미아로, 호박로라는 5대 지선으로 나뉜다. 다만 이런 복잡한 구분이 생긴 것은 19세기 즈음에 서구 제국주의의 근대적인 팽창 과정에서 실크로드 연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실크로드의 서양 기점은 동로마 제국콘스탄티노플로 알려진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늘날 스웨덴에서 중앙아시아 사만 왕조의 금화나 혹은 중세 초 아프가니스탄에서 제작한 소형 불상 등등이 발견되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듯이 실제로는 이것보다 그 폭과 규모가 더 방대하였다 볼 수 있다.[3]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는 사마르칸트부하라는 실크로드의 주요 경유지였다. 중국 측 기점은 장안이 대표적이다. 다만 쓰촨성 청두(성도)에서는 실크로드의 끝자락을 장안에서 서남쪽 방향으로 꺾어서 연장시켜 비단의 산지인 청두까지 이어지도록 그려 놓았다.[4][5] 한반도 역시 신라고려에서 해상무역로를 통해 도착한 교역품이 거래되었으며, 발해 역시 초원길로 서역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의 유물들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4.1. 초원길[편집]


초원길 또는 스텝길(Steppe Silk Road)은 비단길 가운데 가장 먼저 발생한 교역로로, 흑해, 아랄해, 카스피해 일대에서 살던 스키타이인들이 개척하였다. 유라시아 북방 스텝 지대를 동서로 횡단하는 길이며 선사 시대부터 이용되었다. 오아시스로가 개척되기 전부터 초기 문명 전파의 주요 통로로 기능했었다.

몽골 고비 사막 부근에서 흉노가 성장하면서 광활한 초원지대가 단일한 정치 체제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면서 본격적으로 초원길 경영이 이루어졌다. 이 초원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흉노의 선우에게 통행증을 제시해야 했는데, 통행증이 없다면 이 길을 우회해서 가야 하므로 신체적, 경제적인 한계가 굉장히 많이 따랐다. 그러나 흉노가 경제적, 군사적으로 한나라를 공격하고 이 과정에서 한나라의 비단이 헐값 혹은 공짜로 흉노에 유입된다. 흉노는 이 비단을 그대로 서부 지역에 전달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4.2. 사막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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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판고창국 고성 유적.

사막길 또는 오아시스길(Oasis Silk Road)는 가장 널리 이용되었던 비단길의 중심 루트로서, 좁은 의미의 비단길은 바로 이 사막길을 의미한다. 파미르 고원 서쪽에서는 헬레니즘 제국 시기 그리스계 도시국가들이 인도 간다라 지방까지 교통로를 건설하면서 개척되기 시작했고, 파미르 고원의 동쪽에서는 한나라 때 장건월지와의 동맹을 위해 사신으로 파견되면서 교역망이 이어졌다.

사막길은 중앙아시아를 가로질렀으며 이 길을 통해 로마 세계와 동아시아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교역품은 중국의 비단[6]로마유리 공예품이었다.[7] 또한 단 한 번뿐이지만 로마 제국의 사신이 한나라까지 오기도 했다.


4.2.1. 천산북로와 천산남로[편집]


중국 측 교역로는 장안에서 돈황을 거쳐 천산 산맥을 지나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이었는데, 이것도 천산북로(북비단길, Northern Silk Road)와 천산남로(남비단길, Southern Silk Road)로 나눠진다. 이러한 구분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같은 자연적인 한계가 강한 곳을 최대한 피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초반에는 천산 산맥 남쪽을 지나는 길을 천산남로로 칭했는데, 인근 도시국가들이 물 부족과 사막화로 쇠퇴하고 북방 민족이 이곳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천산 산맥 북쪽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는데 이를 천산북로라고 한다.

이 길을 통해 중국의 , 도자기, 비단을 전하게 된다. 제지 기술도 이 길을 통해 서역으로 전해졌다는 학설이 유력하다. 흔히 탈라스 전투 와중에 붙잡힌 중국인 제지공 덕분에 중동에 제지술이 전파되었다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지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에 따르면 탈라스 전투 한참 이전인 서기 3세기 제지술이 이미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다. 압바스 칼리파조 초창기에 재상을 지냈던 중앙아시아 발흐 출신 바르마크 가문이 지혜의 집 등을 후원하면서 대규모 제지공장을 건설한 시점과 탈라스 전투에서 제지 기술자가 붙잡힌 시점이랑 너무 짧다보니, 그 이전 이미 제지술이 들어온 것이 아닌가 하는 합리적인 의심이 가능했고 결국 고고학 발굴 결과 제지술이 탈라스 전투 이전 이미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었으며, 오히려 목면을 사용하여 중국의 그것보다 더 개량된 형태였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카슈가르-호탄-뤄창-돈황으로 이어지는 길에 한나라 때의 유적들을 볼 수 있다. 다만 이름처럼 매우 험한 길이다.


4.3. 바닷길[편집]


바닷길(Maritime Silk Road)은 기원후 1세기경에 개척되었다. 홍해에서 예멘을 거쳐서 페르시아 만 호르무즈 해협을 거쳐 인도로 가는 루트이다. 인도양으로 향하는 이 길을 통해 본격적으로 원거리 무역이 성행했다. 이로써 당대 로마는 동방의 물건을 해상으로 운송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 중국 남부로 추정되는 지역에까지 교류를 확대했다. 해상 수송은 대량수송의 장점이 있어 도자기와 향료, 차 등이 주로 오갔다. 따라서 비단이 오고간 육지의 비단길에 빗대 이 길은 '향료길', '도자기길'로 불리기도 한다. 고대도시 페트라와도 연관이 있는데 페트라는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 연안까지 2500㎞ 향료길을 잇는 관문이기도 했다. 고대 아라비아 무역로의 중심지였던 페트라는 AD 2세기 로마에 함락된 이후 동서무역로의 중심이 비단길로 옮겨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페르시아 만에서 중국에 이르는 바닷길은 중세 초까지 이른바 파르시로 불리는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상인들이 장악하였던 바 있다. 물론 교역상 중에는 조로아스터교도들만 있던 것은 아니고 힌두교도나 무슬림, 그리고 기독교도들도 적지 않은데 오늘날 인도 케랄라 주의 시로말라바르 가톨릭, 시로말랑카라 가톨릭, 말랑카라 시리아 정교회 등등은 당시 로마 제국이나 페르시아에서 남인도 해안 지대로 정착한 기독교인 상인들과 이들에게 전도된 현지 기독교인들의 후손이다.


4.3.1. 아프리카의 실크로드[편집]


파일: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이미지.png
조선시대 초 제작된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중동과 유럽을 포함하여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해안 지대까지 묘사되어 있다.

바닷길은 단순히 중국과 중동만을 연결하는 것이 아닌 아프리카 동부 해안지방까지 연계되어 있었다. 포르투갈 바스코 다 가마 이후 포르투갈인인들은 스와힐리 해안 지방을 정복한 후 대항해시대 항로에 포함시켰다.

중·남아프리카의 경우 그레이트 짐바브웨킬와 술탄국을 통해서 내륙의 금을 해외로 수출했다.

서아프리카의 사헬 일대 역시 몰디브와 교류했는데 몰디브에서 쓰였던 앵무조개 껍질이 말리 제국에서도 쓰였다.[8] 또한 사하라 종단 무역으로 서아프리카와 지중해 일대 사이의 무역이 흥하기도 했었으며 잠깐이었지만 중앙아프리카 중서부 카넴-보르누 제국 역시 사하라 종단 무역을 통해 전성기를 누리기도 했었다.


5. 매체와 실크로드[편집]


방송 매체의 영향으로 실크로드하면 비단 장수들이 낙타 타고 한가하게 사막을 건너는 모습이 연상될 수 있겠지만, 사실 비단 교역로는 사람 살기 힘든 동네였다. 특히 오아시스 주변으로 발달한 도시들은 기후 변화로 인해 물이 줄어들면 그와 함께 급격하게 쇠퇴하거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날아오는 어마어마한 모래 폭풍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모래 더미에 폭삭 파묻히는 경우도 있었다(…). 초원길과 사막길의 개척 시기에 격차가 있는 것도 타클라마칸 사막과 파미르 고원을 통과하는 길이 너무 험난했기 때문이다. (타클라마칸 사막 자체가 당대의 현지 언어로 들어가면 못 나오는 곳이란 뜻이다.) 게다가 이 주변에 매복하고 있는 도적 떼에게 습격이라도 당하는 순간엔 가진 물건을 모두 빼앗기기 십상이었다. 한마디로 비단 장수는 죽을 각오를 하고 사막길을 건너왔다는 것이다.

  • 한국에서는 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의 저서들과 김호동 교수의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가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한 동서교역사을 다루는 대표적인 서적으로 꼽힌다. 정수일 소장은 서역과 신라의 구체적인 실크로드 교류 등 한국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부분을 많이 다루고, 김호동 교수의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는 지도 자료와 그림이 충실해서 실크로드 지역에 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해하기 쉽다. 좀 더 심층적으로 이슬람의 동점 이전 고대 실크로드의 역사에 대해서는 발레리 한센의 <실크로드: 7개의 도시>,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수잔 홧필드의 <실크로드 이야기>, 서양인들의 실크로드 탐험사에 대해서는 피터 홉커크의 <실크로드의 악마들>이라는 책이 번역되어 있으니 참조하면 도움이 된다.

  •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실크로드에 대한 본격적인 언론사의 첫 취재는 1974년 조선일보에서 <서역 3만리>라는 제목의 연재물이었는데, 아직 한국과 외교관계가 없던 중국과 소련 지역은 답사하지 못하고, 나라꼴이 멀쩡하던 아프가니스탄[9], 한창 흥성하던 팔레비 왕조 이란을 거쳐 터키 이스탄불까지의 실크로드 구간을 답사한 것이었다.

  • 실크로드를 구체적으로 다룬 대표적인 영상물로는 NHK의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실크로드'가 있다. 중국 CCTV와 합작 제작하여 장안에서 로마까지의 여정을 담았다. 당시는 중국이 덩샤오핑 체제하에서 갓 개혁개방을 시작하던 때라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OST를 뉴에이지 음악가인 기타로가 담당하였고 ' 메인 테마'와 ' 캐러밴의 쉼터' 등이 유명하다. 이 다큐멘터리는 훗날인 1984년 KBS에서도 수입 방영되었다. KBS 방영 버전 제1편(유튜브)
  • 2005년 실크로드 제작 25주년을 기념하여 리부트판인 '신 실크로드'가 제작되었으며, 이 때는 NHKCCTV뿐만 아니라 KBS도 공동제작에 참여하고 LG그룹이 제작을 후원하였다. 이 다큐멘터리도 영상미와 음악이 뛰어난데 OST 담당은 요요마. 요요마 특유의 중후한 첼로와 서역의 이색적인 음률이 잘 어우러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10] 원래 시리즈로부터 수십 년이 지나는 동안 방송장비와 촬영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당시에 비하며 대단히 수려한 영상미를 뽑아낸다.


6. 관광[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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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구시가지 레기스탄의 모습.
사마르칸트에는 고구려 사신이 그려진 아프라시압 벽화가 유명하다.

파일:Khiva_Ichon_Kala.jpg
우즈베키스탄 히바의 이찬 칼라의 전경

파일:1561937104_c9a0056169_b.jpg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Merv)의 산자르 영묘 (Sanjar Mausoleum)

파일:281.jpg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Merv)의 고대 성채

파일:Jiaohe_Ruins.jpg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Turpan) 근교의 교하 고성(交河故城, Jiaohe ruins)

파일:Gaochang_Ruins_Turpan_Xinjiang_China_新疆_吐魯番_高昌故城_-_panoramio_(5).jpg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투루판(Turpan)의 고창 고성(Gaochang Ruins)

파일:97fc7c32faf5efec3718d83c4d733ebb.jpg
중국 타클라마칸 사막에 있는 만리장성 시작부분의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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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문서] 동음이의어 문서로 이어진다.[1] 여담이지만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육군 항공대 에이스 파일럿이었던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이 이 사람의 조카다.[2] 대량 물류 수송은 항만이 가장 효율이 좋다. 러시아가 역사적으로 부동항 확보를 중시한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내륙에는 배가 들어올 수 없기에 철도가 가장 효율이 좋다.[3] 스웨덴과 중동, 동양과의 교류는 주로 키예프 루스를 통해 이루어졌다.[4] 삼국지에서 촉한조위보다 나라가 훨씬 작음에도 대충 3국 구도로 대치가 가능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쓰촨의 특산물 비단(촉금, 蜀錦) 무역 수익이 있었다.[5] 쓰촨성에서 히말라야 산맥 남부를 돌아 인도로 직행하는 육로 무역도 가능하긴 했으나 지형이 험하고 현지 원주민들의 무관심으로 교역 규모와 수익이 적었다. 쓰촨성-윈난성-미얀마-아삼-벵골 루트는 13세기 원나라 시기가 되어서야 윈난성에 무슬림(후이족)이 정착하고 아삼 지역이 인도화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6] 로마에서 막연하게 중국 일대를 비단이 나는 나라라는 뜻의 세레스라고 부르는 것의 연원이 되었다.[7] 이 유리는 신라가야에까지 전해져서, 현재 많은 신라 고분에서 서역산 유리가 발굴되었으며 특히 황남대총에선 그야말로 쏟아져 나왔다. 상태가 온전한 유리공예품은 경주 98호 남분 유리병 및 잔, 황남대총 북분 유리잔 등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기도 했다. 가야 지역의 경우도 합천 옥전 고분군에서 로만글라스 유리잔이 출토되었다.[8] 출저: 해양실크로드 문명사(주강현 저자).[9] 27년 뒤에 탈레반이 파괴하는 바미안 석불취재하기도 했다.[10] 사카이 마사토가 일본에서 장안으로 유학하여 관리까지 지내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 세이 신세이의 재연배우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