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오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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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진소관.jpg
중화민국 2대 해군부장
정체
陳紹寬
간체
陈绍宽
한국식 독음
진소관
영문
Chen Shaokuan

후보(厚甫)
출생
1889년 10월 7일
청나라 복건성 민후현
(現 중화인민공화국 푸젠성 푸저우시 민허우현)
사망
1969년 7월 30일 (향년 79세)
중화인민공화국 푸젠성 푸저우시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파일:중국 국기.svg
학력
남경수사학당
직업
정치가, 군인
해군부장
재임기간

2대 1932년 1월 1일 ~ 1938년 1월 31일
해군총사령
재임기간

1대 1938년 1월 1일 ~ 1945년 12월 26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해군의 아버지
2.4. 국공내전과 말년
3. 매체에서
4. 주요 경력
5. 참고문헌


1. 개요[편집]


중화민국의 해군 장성. 보잘것없는 중국 해군의 확장과 현대화를 위해 노력했으며, 중일전쟁 중 항전을 수행했다.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 정부를 따라가지 않고 대륙에 남아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1889년 복건성 민후현(現 푸젠성 푸저우시 민허우현)에서 출생했다. 해군부대 청소부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1907년 남양함대의 남경수사학당에 입학했다. 거기서 매일밤 연등을 하고 공부하는 피나는 노력 끝에 최고실력으로 졸업하여 해군 소위로 임관했다. 1915년 12월 호국전쟁 중 해군 함정을 탈취하려는 혁명군의 공격을 저지하였고 그 공을 인정받아 영국 유학을 떠났고 1916년 주영 중국 공사관 해군무관에 임명되었다. 1917년 5월, 돤치루이 정부가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결정하게 되면서 영국 해군에 파견되어 대독 해군 작전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이때 전공을 세워 영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수여받았다.

1918년,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열강의 해군력을 시찰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차 세계대전의 전황과 직접 경험한 바를 정리한 보고서를 제출하여 정부에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건조에 대해 건의하였으나, 내전에 정신이 없던 북양정부는 이를 묵살했다. 전후 파리 강화 회의에 중국 해군대표로 참여했는데, 중국의 주장이 강대국에게 철저히 무시당하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전후 해체된 독일 제국의 해군으로부터 유보트를 구입하려고도 시도했으나 영국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1919년 4월, 만국해로회의에 대표로 파견되었다. 귀국 후 해군 상교로 진급했다.

1926년 9월 중장으로 진급하여 2함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그해 장제스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하고 북상하자, 장강 하류를 방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국민혁명군에 합류했다. 국민혁명이 마무리된 후 대대적인 건함을 주장했지만, 장제스는 아직 정치가 안정되지도, 경제적 여력이 있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 편견회의 과정에서 동북, 광동의 해군을 하나로 통일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2.2. 해군의 아버지[편집]


"국가의 강함과 약함은 영해권의 확보 비율에 달려 있으며, 영해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전적으로 해군에 달려 있다. (...) 해권이 신장되면 국가는 자연스럽게 갈수록 부강해진다."

해군부장 재임 중의 발언.


1928년 10월 21일, 군사위원회 회의는 기존 군사기관의 해체와 통합을 논의하였으며 11월 2일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모든 군사위원회 참모청과 총사령부 참모처를 참모부로 통합 개편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이 있었으며 해군총사령부도 군정부 해군서로 개조되었다. 천사오콴은 해군서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해 12월 16일, <세계에 해군을 필요로 하지 않는 국가가 있는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제출하여 해군 인재를 양성하고 새로운 군함을 추가로 건설하는 것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그리고 영국 해군이 120만톤, 일본 해군이 100만톤, 기타 국가도 70~80만톤 급, 적어도 30~40만톤급의 함대를 갖추고 있는데 중국 해군은 수도 적고 그 질도 낡고 폐기 직전인 고물들 뿐이라면서 해군서를 해군부로 격상하고 대대적으로 해군을 확충하여 중국의 상선과 해외의 화교들을 보호할 필요에 대해 역설했다.

1929년 6월, 기존의 해군서가 확충되어 해군부가 되어 전국의 해군행정업무를 관리하게 되었는데 초대 해군부장에 양수장이 임명되었다. 이때 천사오콴은 해군부 정무차장 겸 대리부장을 지냈다. 1930년 2월 4일, 해군조직법이 통과되었다. 1930년 3월, 함선을 이끌고 장제스의 난징에서 영파에 이르는 지역의 요새방어 시찰을 수행했다. 1931년 4월, 해군검열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중국의 해군력에 대한 검열을 실시했다. 당시 국민정부의 해군력은 고작 55척, 3만 9610톤에 불과했으며 장교 78명, 부사관 및 사병 810명으로 빈약하기 그지 없었다.[1] 천사오콴은 해군부 대리부장으로 재임하면서 <해군 건설 6개년 계획>을 발표, 해군함대를 주력함대와 보조함대로 분리한 후 6년에 걸쳐 주력 함대를 70척, 10만 5천톤, 보조함대를 34척, 5만 3700톤 규모로 증강시킨다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장제스가 육군과 공군의 건설에 대부분의 예산을 투자하고 있었기 때문에 천사오콴의 계획은 반려되었다. 이후 강남조선소 소장 등을 역임했다.

1932년 1월, 정식으로 해군부장에 임명된 천사오콴은 계획을 수정하여 외국에서 순양함과 잠수함을 구입하고 차후 조선소를 건설하여 60만톤 이상의 군함을 자체 건설할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외국에서 6천톤급 순양함 2척, 1500톤급 구축함 2척, 800톤급 잠수함 2척, 300톤급 잠수함 2척 구매를 장제스에게 건의했다. 하지만 이 역시 예산부족으로 반려되었다. 그러자 천사오콴은 1932년, 일본으로부터 구입했던 경순양함 닝하이를 모방하여 자체 설계를 하기로 하고, 일본에 장교들을 파견하여 조선 기술을 배우게 하는 한편 무장능력의 자체 개발에 나섰다. 1935년, 중국 해군은 사상 최초로 첫 건함에 들어가 1937년 4월, 2600톤급의 평해함 진수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강남조선소에 3도크와 마미조선소에 2도크를 추가로 건설하였고 1937년까지 해군을 6만톤 규모로 증강시키는데 성공했다.

파일:1937년진소관.jpg
1937년, 베를린을 방문한 천사오콴. 그 왼쪽은 쿵샹시
1935년 11월,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36년 6월 해군 체육촉진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1937년 2월, 국민당 5기 3중전회 결의에 따라 국방위원회가 설립되자 국방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4월에는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를 수행하여 독일을 방문하여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기도 했다.


2.3. 중일전쟁[편집]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 후 제2차 상하이 사변 도중 하세가와 기요시가 지휘하는 일본군 3함대에 맞섰으나 쪽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아 장인 전투에서 참혹하게 패배했다. 1937년 12월, 난징 전투로 난징이 함락되자 해군부는 우한으로 이동하였고 1938년 1월 1일, 더 이상 지휘할 해군이 없는 현실을 반영한 기구 축소가 단행되어 해군 총사령부로 대체되었다. 천사오콴은 해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38년 1월 15일, 옌시산, 펑위샹, 리지선, 리쭝런, 청첸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해 11월에 우한 전투로 우한이 위험해짐에 따라 해군부를 진계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12월, 해군 특무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쟁을 수행했다. 1943년 11월, 천사오콴은 장제스에게 <해군 건설안>을 제출하여 전후 해군 건설을 위한 3가지 항목을 제시했다. 이는 해상 건설, 연안 지대 구축, 인재 훈련으로 말 그대로 함선을 만들고 군항과 항공기지를 건설하며 인재를 훈련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칭다오, 뤼순, 삼도오, 마공에 해군 군항을 건설하고 요항 역시 갖출 것을 주장했다. 또한 전국을 4개 구역으로 구분하여 동북의 안동에서 산동반도의 성산두까지를 1구역, 성산두에서 강소성의 장강구를 2구역, 장강구에서 광동성 산터우까지를 3구역, 하이난 섬에서 중월국경 지대를 4구역으로 설정하고 각 구역에 함대를 건설해 전투함, 순양함, 구축함, 항공모함, 잠수함, 어뢰 쾌속정 등을 배치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잠수모함, 운수함, 공유함, 급탄선, 의무선, 수리선, 포뢰함, 소뢰함 등 보조 함선의 건조와 내륙 수비를 위한 장강 함대와 주강 함대, 훈련함대, 측량함대의 건조를 주장하였다.

박살난 중국의 현황에서 이런 엄청난 해군 건설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자명하였기 때문에 천사오콴은 순양함, 잠수함, 구축함, 수상 비행기를 우선적으로 구입, 건조할 것을 제시했다. 천사오콴은 특히 잠수함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는데 그는 잠수함에 대해 "해안의 항구를 방위할 수 있는 효력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의 군함 및 상선 수송함을 멀리서 공격할 수 있다. 주력함에 비해 소요되는 비용이 저렴하여 구입하여 활용하기에 쉽다."고 잠수함만이라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리고 장기적으로 열강의 해군 중 최저 톤수에 해당하는 규모의 해군을 건설하여 만일의 경우 공격과 수비를 모두 할 수 있는 해군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종전 직전인 1945년 5월, 해군 고문의 자격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연합국 헌장 회의에 참여했으며 8월에 일본이 항복하자 비행기를 타고 급히 귀국하였다. 9월 9일, 허잉친과 함께 난징으로 가서 지나파견군 총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의 항복을 접수하는 영광을 누렸다.

파일:external/www.ocean-fortune.com/201408172215073976.jpg
지나파견군 참모장 고바야시 센사부로의 항복을 지켜보는 천사오콴, 허잉친 오른쪽 하얀 군복 입은 인물.


2.4. 국공내전과 말년[편집]


1945년 11월, 함대를 이끌고 수복된 대만을 시찰하였다. 그리고 장제스에게 기존에 자신이 제출한 건함 계획안을 수정하여 12척의 항공모함을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당시 국민정부는 함대건설은 커녕 전후 처리해야할 현안이 산적한지라 이를 실행할 수 없었다.

1945년 10월 10일, 국민당-공산당간에 쌍십협정이 체결되었지만, 향후 내전에서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점유하기 위한 양군의 이동은 계속되고 있었다. 국민당군은 공산당의 근거지인 옌안 주위로 병력을 계속 집결시켰고, 공산군은 만주장악을 위해 중원의 병력을 산해관 북쪽으로 보내고 있었다. 장제스는 천사오콴에게 장즈(장치)함을 거느리고 산동성에서 발해만을 건너 요동반도로 이동하는 공산군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천사오콴은 국공내전이 재개될 수 있다며 이를 거부했다. 천사오콴의 명령불복종에 노한 장제스는 병력을 동원하여 천사오콴의 사실상의 사병이던 해군사령부를 접수하고, 12월 26일 천사오콴을 해군총사령관직에서 파면하였다. 그가 파면된 이후 천사오콴의 입김이 강했던 해군사령부는 폐지되었고, 천청이 맡고 있는 군정부의 해군처로 격하되었다.

파면 이후 고향인 복건성으로 낙향하여 은거했다. 국공내전에서 밀리면서 장제스는 다시 천사오콴을 복귀시키려고 했으나, 천사오콴은 계속 거부하였다. 1949년, 국민정부가 완전히 수세에 몰리고 푸저우의 함락이 눈앞에 다가오자 장제스는 천사오콴에게 대만으로 이동하라고 지시를 내렸으나 천사오콴은 이를 거절하고 중국 공산당의 영도를 옹호한다는 통전을 보냈다.

복건성이 중공군에게 함락된 후 화동군정위원회 위원, 복건성 인민정부 부주석, 복건성 부성장, 복건성 정치협상회의 부주석, 국방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1~3기 전국인민대표회의 대표를 역임했으며, 1956년 2월과 1958년 11월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3기 및 4기 중앙 부주석에 당선되었다.

파일:1956년2월진소관.jpg
1956년 2월, 민혁 3기 회의에 즈음하여 베이징을 방문하여 마오쩌둥 선집을 읽는 천사오콴

문화대혁명 시기 국민정부의 요직 출신이라는 이유로 홍위병의 위협을 받았으나, 저우언라이의 개입으로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1969년, 마오쩌둥에게 감사하는 편지를 보낸 후 푸저우에서 병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79세.

중국 최초의 원자력 항모가 나오면 천사오관의 이름을 붙일 것이라는 예상이 있다.하지만 이런 예상이 틀린 것이 인민해방군 해군의 함명 방식은 훈련용 함정에는 인명을,실전용 함정에는 지명을 붙인다.중국의 기존 2척의 항모가 각각 랴오닝(항공모함).산둥함인 것도 이런 이유다. 따라서 중국 최초의 원자력 항모에도 지명이 붙을 것이다.


3. 매체에서[편집]


  • 호이4에서 중화민국 해군 장성진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정치력으로 랜덤하게 새로운 장군을 모집할 때 높은 확률로 천사오콴의 사진을 복붙해서 쓴다.

파일:건국대업진소관.jpg
  • 영화 건국대업에서 이연걸이 기라성 같은 육군 장성들 가운데서 거의 유일하게 검은 해군정복을 입은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분했다. 리지선이 전쟁영웅으로 자신을 추켜세워주지만, 중국인이 중국인을 치는 일에는 가담할 생각이 없다며 씁쓸해하는 모습을 보인다. 사실 천사오콴은 내전재개를 반대하여 명령불복종혐의로 파면되었으니 영화의 묘사가 딱히 틀린 것은 아니다.



4. 주요 경력[편집]


중화민국 역대 해군부장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ROC_Commanding_General_of_Navy_Flag.svg.png
1대

2대

해군 총사령부 수립
양수장

천사오콴
(1932년 1월 1일 ~ 1938년 1월 31일)

중화민국 역대 해군총사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ROC_Commanding_General_of_Navy_Flag.svg.png
해군 총사령부 수립

초대

해군 총사령부 폐지
천사오콴
1938년 1월 1일 ~ 1945년 12월 26일


5. 참고문헌[편집]


  • 중국 근대 해양방어사상사, 유중민, 해군해양전략연구소.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중일전쟁, 권성욱, 미지북스.
  • 김명호의 사진과 함께하는 중국 근현대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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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참고로 당시 국부군 육상병력(당시엔 국부군 휘하에 통일된 육군이 없었으니 육상 병력으로 갈음)은 170만명으로 육상병력과 비교해보면 정말 새발의 피이다. 병력수 만봐도 수천배나 차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