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카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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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카이거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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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칸 영화제
파일:cannespalmedor.png
황금종려상
제45회
(1992년)


제46회
(1993년)


제47회
(1994년)

빌레 아우구스트
(최선의 의도)

천카이거
(패왕별희)

제인 캠피언
(피아노)

쿠엔틴 타란티노
(펄프 픽션)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BAFTA 로고.svg
외국어영화상
제46회
(1993년)


제47회
(1994년)


제48회
(1995년)

장이머우
(홍등)

천카이거
(패왕별희)


장이머우
(인생)


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파일:goldenglobe.png
외국어영화상
제76회
(1993년)


제77회
(1994년)


제78회
(1995년)

레지스 와그니어
(인도차이나)

천카이거
(패왕별희)


제라르 코르비오
(파리넬리)




천카이거
陳凱歌 | Chen kaige


파일:chenkaige.jpg

이름
천카이거[1] (번체: 陳凱歌, 간체: 陈凯歌)
영문명
Chen Kaige
출생
1952년 8월 12일 (71세)
베이징시
신체
186cm
국적
파일:중국 국기.svg 중국
학력
베이징전영학원
배우자
쑨자린 (1983~1986)
훙황 (1989~1993)
천훙 (1996~)
자녀
진비우, 천위앙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패왕별희>까지
2.3. <패왕별희> 이후
3. 필모그래피
3.1. 연출
4. 기타



1. 개요[편집]


중국영화 감독이다. 중국 영화 세대 구분에서 장예모와 함께 제5세대 감독이라고 부르는 감독의 대표주자이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영화 감독 천화이아이의 아들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문화대혁명 시절 그는 중학생이었고, 홍위병에 가담하여 아버지를 비난했다. 이 당시의 경험은 패왕별희에 잘 묘사된다.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문화대혁명이 끝나자 그는 대학입시를 치러 베이징전영학원에 입학, 1982년에 졸업한다. 이때 동문이 장예모와 톈좡좡.[2]


2.2. <패왕별희>까지[편집]


졸업후 동문 장예모와 함께 광시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영화 감독 커리어를 시작한다. 1984년 내어 놓은 <황토지>는 제5세대 영화의 효시격으로, 중일전쟁 시기의 농민들의 삶을 다룬 영화였다. 이 영화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그는 <대열병>과 <해자왕>을 내놓는다.

<대열병>은 국경절 열병식을 위한 훈련 과정을 다루는 영화로, 얼핏보면 배달의 기수식의 선전 영화 같지만, 실제로는 집단주의와 개인주의의 관계를 영화적으로 풀어내어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해자왕>은 과거의 홍위병상산하향 운동으로 산간 벽지 교사로 발령나서 겪는 이야기이다. 두 작품 모두 호평을 받았고 천카이거의 영화적 위상은 확고해진다.

그는 영화를 더 공부하러 뉴욕대학교의 영화학과에 방문학자로 유학했고, 그 때 듀란 듀란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어 <현위의 인생>(중국제목 변주변창, 1991)으로 서양 비평계의 상당한 호평을 받는다.

1993년 장국영공리(배우)를 기용해 내놓은 <패왕별희>는 대호평을 받았고,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2.3. <패왕별희> 이후[편집]


하지만 <패왕별희> 이후의 필모그라피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명성을 얻어 막대한 제작비와 유명배우를 쓸 수 있게 되었지만, 도리어 작품성은 더 떨어지는 기묘한 현상을 보인다.

1996년 다시 공리장국영을 캐스팅하여 193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풍월>을 내놓았으나, 중국 당국이 여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주인공을 위해 제3자와 성관계를 맺는 장면이 "풍속에 어긋난다"고 판단하여 본토 상영을 금지하였다.[3]

1999년작 <시황제암살>도 공리가 출연하나 범작이었다. 같은 주제를 다룬 장예모의 <영웅(2002)>이 정치적으로는 욕을 먹었지만, 흥행과 작품성에서는 성공을 거둔 것과 대조적이다.

2002년에는 헤더 그레이엄을 기용해 영어 영화인 <킬링 미 소프틀리>를 내놓지만 이 작품은 천카이거의 흑역사로 꼽힐 정도로 망작이 되었다.

2005년에는 장동건장백지를 캐스팅하여 <무극>을 연출했으나, 이것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다. 2008년에는 다시 여명을 캐스팅하여 유명 경극 배우 매란방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매란방>을 연출, 이 영화의 홍보를 위해 한국에도 방문했지만 또 망했다.

2010년에는 갈우, 판빙빙, 황효명 등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조씨고아(한국 개봉명: 천하영웅)>를 내놓지만, 이것도 평이 미지근했다.

2019년에는 중국 정부가 기획한 옴니버스식 어용 선전 영화 <나와 나의 조국>의 한 에피소드를 연출했다.

2021년에는 또다시 어용 선전영화를 연출하였다. 장진호 전투를 다룬 영화 <장진호(영화)>를 연출하였는데, 노골적으로 유엔군을 침략자로, 중국군을 북한을 구원하는 구원자로 묘사하고[4], <패왕별희>의 배경인 문화대혁명을 일으킨 주범인 마오쩌둥을 우상화하였다. 또한 마오안잉을 우상화하는 등 상당한 역사 왜곡이 가해졌다.

2023년에는 한국전쟁 정전 협정 70주년을 맞이해서 장진호에 이은 또다른 항미원조 어용 선전영화를 연출하기로 확정이 났다. 제목은 <지원군 : 웅병출격>으로 아들 진비우주일룡, 장쯔이가 주연으로 출연한다. 10월 1일 국경절날 개봉했지만 장진호 흥행 20%에도 못 미치는 부진한 흥행을 기록하고 있다. 중국 관객들은 장진호 줄거리 재방송이라 지겹다는 평이다. 장진호의 등장인물들은 후속작인 장진호지수문교에서 거의 다 끔살엔딩이 났기때문에 더이상 후속작을 더 만들기 힘들다


3. 필모그래피[편집]



3.1. 연출[편집]


연도
제목
관객수
흥행
1984
황토지


1986
대열병


1987
해자왕


1991
현위의 인생


1993
패왕별희


1996
풍월


1999
시황제암살


2002
킬링 미 소프틀리


2005
무극


2008
매란방


2010
조씨고아


2017
요묘전: 레전드 오브 더 데몬 캣


2019
나와 나의 조국


2021
장진호


2023
지원군 : 웅병출격



4. 기타[편집]


  • 배우 경력도 있는데 <마지막 황제>에서 푸이의 근위 대장으로 단역 출연하기도 했고, 자기가 만든 <시황제암살>에서도 여불위 역으로 나온다.

  • 1980년대에 도미한 이후 미국 영주권을 따서 쭉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으며, 중국은 작업할 때만 들른다. 그러나 중국 정부와의 갈등은 없었으며, 2000년대부터는 아예 노골적인 중국 선전 영화나 공산당 찬양 내용이 담긴 국뽕 작품들을 주로 만들고 있는것을 보면 중국 정권과 상당히 친밀하다고 할 수 있다.

  • 미국에 유학한적 있고, 미국 대학에서 강사도 한 경력이 있어 영어가 굉장히 유창하다. 패왕별희가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던 당시 칸 영화제나 기타 해외 영화제 인터뷰를 보면 통역 없이 능숙하게 영어로 응답한다

1993년 미국의 유명 기자 비비 위건트와의 영어 인터뷰

  • 결혼을 3번 했으며, 현재의 부인은 1996년에 결혼한 배우 천훙이다.[5] 천훙과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얻었으며, 차남 진비우는 현재 배우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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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식 독음으로는 진개가로 읽는다.[2] 한국에는 잘 안 알려져 있지만, 중국의 국민 배우로 근래 소개된 작품으로는 먼 훗날 우리의 아버지 역으로 나왔다.[3] 비공식적으로는 이 영화의 주요 소재가 아편이라는 점도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4] 실제 역사에서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하여 유엔군이 결성되었고, 미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여한 것인데, 중국에서는 미국의 침략을 북한이 당한 것으로 역사왜곡을 한다.[5] 여담으로 前부인 홍황은 전 외무부장 차오관화의 의붓딸이자 신중국 최초의 미국 국비유학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