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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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
天皇 | Emperor of Japan


파일:FC57F22D-1E67-49BE-AA3A-616E062E06E0.jpg

현직
나루히토,/ 제126대,
즉위
2019년 10월 22일
경칭
금상(今上, 긴조) / 폐하(陛下, 헤이카)[1]
연호
레이와 (令和)
관저
일본 도쿄도 고쿄 (皇居)


파일:천황기.svg

천황기[2]

1. 개요
2. 칭호
2.1. 어원
4. 신화
5. 역사
6. 국정에 대한 권한
7. 위상
7.1. 상징천황제와 국가원수성
8. 관계
8.1. 한국과의 관계
8.1.1. 방한(訪韓) 여부
8.2. 타국과의 관계
8.3. 일본공산당과의 관계
9. 논란
11. 여담



1. 개요[편집]


天皇は、日本國の象徵であり日本國民統合の象徵であつて、この地位は、主權の存する日本國民の總意に基く。[3]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고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며, 이 지위는 주권이 있는 일본 국민의 총의에 기초한다.

일본국 헌법 제1장 천황(天皇) 제1조[4]


천황(天皇)은 일본군주이다. 현재 일본의 천황은 제126대 천황인 나루히토이며, 2019년 5월 1일 즉위했다. 연호레이와(令和)이다. 직전 천황인 아키히토는 생전 퇴위하여 상황(上皇)으로 물러났다.[5]

역사적으로는 일본의 전통 종교 신토주신인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숭배하는 신앙의 제사장이었던 사람을 부르는 명칭으로,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본 제국의 사실상 국교[6]였던 국가신토교주이자 일본 제국국가원수(元首), 일본군대원수(大元帥)로 추대되기도 하였으나, 패전 이후 새롭게 시행된 현행 일본국 헌법하에서는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만 규정되고 있다.

일본국 헌법에 국가원수를 언급하는 직접적인 조문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국가원수가 수행하는 주요 행위인 '국사행위(国事行為)'[7], 즉 내각총리대신과 최고재판소 장관의 임명, 헌법·법률·정령(政令) 및 조약의 공포, 국회의 소집, 중의원 해산 등의 권한이 상징적으로[8] 천황에게 있으며, 또한 공식적인 의전서열상으로도 천황과 황족들이 내각총리대신 등 관료들을 앞선다. 따라서 일본 내외의 헌법학계에서는 천황을 일본의 국가원수로 보고 있다.


2. 칭호[편집]


한자 '천황(天皇)'의 일본어 발음은 음독(音読み)하여 '덴노(てんのう, 텐노-)'[9]가 된다.[10] 한국에서는 칭호의 한자를 그대로 읽은 '천황' 외에 이를 일본어 고유명사로 보고 외래어 표기에 따라 읽은 '덴노'라 부르기도 하며, 또 외국 군주에 붙이는 '국가명' + '왕' 식의 호칭인 '일왕(일본 국왕)'이라는 칭호로도 알려져 있다(이에 따르는 견해와 논쟁에 대해서는 천황/칭호 표기 논쟁 문서 참고).

영어에서는 음역인 'Tennō' 보다 격에 따른 의역인 'Emperor of Japan'으로 옮기는 것이 일반적이다. 서구권에서는 'Emperor', 즉 '황제'로 의역되어 불리며, 공식 직함에 황제를 의미하는 명칭이 들어가는 지위로는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다.[11][12] 서구 외에 다른 국가에서도 황제 칭호를 붙이는데, 일례로 태국에서는 자국 군주는 그냥 라자(왕)라고 부르면서도 일본 천황에 대해서는 마하라자(황제)라고 칭한다.

통상 일본인들이 천황을 언급할 때는 '덴노(天皇)' 혹은 폐하를 붙여 '덴노헤이카(天皇陛下, 천황폐하)'라고 하며, 일본의 뉴스나 신문사에서는 거의 '덴노헤이카(天皇陛下)'라고 한다. 또는 줄여서 헤이카(陛下). 간혹 옛날식 명칭인 미카도(帝) 혹은 덴시사마(天子様)로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 긴조(今上, 금상)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건 재위 중인 임금을 부르는 말로 군주정 시대의 한국의 '주상 전하'처럼 중국에서도 자국 임금에 대해 쓰던 말이다. 반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지간히 극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일상적으로 천황을 언급할 때는 대부분 '덴노'라고만 하며, 반대로 상당히 반극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도 연설 등 공식적인 발언에서는 대부분 '덴노헤이카'(天皇陛下)라고 한다.

'천황'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하늘황제, 중세시대 이후로 도교의 민간신앙 중에 인기 있는 신 중 하나인 옥황상제를 뜻한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 천황은 현신과 같다는 오해와는 달리 일본의 건국신화에서도 황실을 신의 후예(神裔)라고 주장하지 신 그 자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천황의 지위를 과도하게 높여 살아 있는 신 그 자체로 모시는 사상은 메이지 유신(대정봉환과 왕정복고) 후에 나온 것이며, 이 당시 민중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파급력을 고려하여 인지도 있는 중국의 민간신앙 등을 받아들여 자국신화와 기타설정과 섞어 명칭을 정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전에는 동아시아 주류 문화권과 격절된 섬나라의 이점을 살려 독자적으로 칭제하는 정도였다. 다만, 요메이 덴노차남쇼토쿠 태자는 607년 수양제에게 보낸 '해 뜨는 곳천자(日出處天子)가 해 지는 곳천자(日沒處天子)에게 글을 보내노라' 글로 간접적 하대를 한 적이 있었다.[13][14]


2.1. 어원[편집]


고대 일본의 지배자들의 명칭은 대왕(大王), 대군(大君) 등으로 표기되는 오키미(おおきみ)를 사용하였다. 야마토 왕권의 오키미가 중국으로부터 '왜왕'이라 불리며 책봉을 받은 일도 있다. 이후 유랴쿠 덴노의 치세인 478년에는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을 하사받기도 했다.[15] 오키미는 치천하대왕(治天下大王), 스메라미코토(すめらみこと)라는 명칭으로 변천했는데 바로 이 스메라미코토의 의미를 한자를 빌려 표기한 것이 천황(天皇)이다. 고대에는 '스메라미코토'라고 읽었지 '덴노'라고 읽지는 않았다.

천황이라는 표기를 사용하게 된 것에 대해서 일반적인 속설로는 중화권의 황제인 천자(天子)보다 높이려는 의도로 썼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중화권에서의 천황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주신인 옥황상제를 일컫는다. 니혼쇼키쇼토쿠 태자오노노 이모코수나라에 파견했을 때 당시의 서찰의 서두에 "동천황이 서황제께 보냅니다.(東天皇敬白西皇帝)"라고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천황'이라는 단어 자체는 원래 일본에서 썼을지도 모른다. 사실 천황이 '천신의 후손'(天神の後孫)이라고 주장하는 만큼 원래부터 이렇게 썼다고 하더라도 그다지 이상한 건 아니다. 다만 해당 구절에 대해 학계에서는 고구려 승려 혜자가 당시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해가 뜬다 진다가 일본 열도가 아닌 한반도 중심의 지리관이라는 점에서 고구려의 전략적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강한 지지를 얻고 있음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16][17]

도교에서는 천황(天皇), 지황(地皇) 등 방위구분이 있었으며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대신들로부터 모든 황의 가운데에 있는 태황(泰皇)이라는 명칭을 건의받았으나 황제라는 새로운 호칭을 만들었다. 중국의 도교 신앙이 일본에 영향을 미치면서 천황이라는 호칭을 수입한 것으로 보인다.

천황이라는 용어는 본래 옥황상제를 의미하는 말이다. 중국은 신의 계율사회를 정립하였기 때문에 하늘을 다스리는 황제인 옥황상제를 천황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국에서의 천황과 일본에서의 천황은 확실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 '천황'이라는 단어의 언급 문제는 중국 측과 일본 측의 자료가 확실하게 엇갈린다. 중국 측에서는 위진남북조 시절에 중국에서 사용했다고 주장하는 한편, 일본에서는 쇼토쿠 태자가 보낸 외교서찰이 시초라고 본다. 이에 대해 학계에서는 일본 측의 자료보다는 중국 측의 자료에 신빙성이 있다고 본다.

혹은 당고종측천무후당나라를 다스리던 시기에 일시적으로 황제를 천황, 자신을 천후(天后)라고 높였던 시대가 있는데[18], 이 때 일본이 당나라와 접촉하여 천황 칭호를 수입했다는 말도 있다. 현재로서는 이쪽이 거의 정설이다. 또한 도교에서는 북극성을 천황대제(天皇大帝)라고 하는데, 북극성은 천상의 궁궐인 자미원의 정점에 자리한 군주이기 때문이다. 지상의 군주도 이와 빗대어 군주는 북쪽에 앉아 남면하고 신하는 남쪽에 앉아 북면하며 궁궐도 북쪽에서 남면하여 남쪽으로 큰 주작대로를 낸다. 도교의 영향으로 군주를 북극성에 비기는 호칭이 퍼졌다는 것이다. 도교의 영향을 받기 이전 천황의 의례는 태양과 연계되는 동서축이 종교의례적으로 중요했다.

일본 내부에서는 미카도(帝, 御門)라고 호칭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스메라미코토/스베루미코토'라는 명칭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한자어를 발음대로 읽은 천황보다 더 '정통적인' 호칭인 셈이다. 천황이라고 읽기 시작한 것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 황실이 권력 투쟁에서 완전히 밀려나면서 스메라미코토라는 의미가 잊혀져간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흑선 사건 이후 일본의 군주를 부를 때 이슬람권의 술탄, 독일어권의 카이저, 러시아의 차르를 부르듯이 일본의 미카도(Mikado of Japan)라고 부르는 일이 많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며 그냥 Emperor of Japan이라고 불린다. 미카도 외에도 '슈조(主上)'[19], '오키미(大君)', '다이리(內裏)'[20], '덴치 사마(天子樣)'[21], '오카미(御上)'라고도 불렸다. 불교적인 의미를 부여하여 '십선지주(十善之主)'/'십선지왕(十善之王)[22] 또는 금륜성왕(金輪聖王), 성주(聖主), 성황(聖皇)이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유신 후 천황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확정하기 전에는 천황은 중국식 칭호를 수입했던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여러 명칭들 가운데 하나였을 뿐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지는 못했으며, 오히려 현재는 일부에서 천황을 격하하는 비칭이라 몰아가는 '일본(국)왕'이라는 명칭도 만만찮게 쓰였다. 오키미, 슈조, 미카도 등의 다른 명칭들을 제치고 천황이라는 명칭이 낙점된 이유는 바로 '천황'이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세상의 지배자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함이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3. 역대 천황[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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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신화에 따르면 '세계 유일의 황제'이자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아라히토카미(현인신)'이며 천황의 혈통이 초대 진무 천황 이후로 한번도 끊어졌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만세일계의 수호신'(万世一系の守護神)으로도 불린다. 역사가 오래된 나라라면 흔히 보이는, 군주를 신격화하려는 특징으로 인해 천황은 일본 신화의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 신의 자손(天照大御神の子孫)으로 불가침의 존재화되어 있다.

이자나기(男神)와 이자나미(女神) 등 두 남매가 각종 행위[23]를 통해 일본의 무수한 신을 창조하였는데, 그 중에 미하시라노우즈노미코(三貴者, 삼귀자, 산키시)라 일컫는 아마테라스(태양의 여신), 츠쿠요미(달의 신), 스사노오(추방당하여 사나운 바다의 신)가 가장 막강하다. 각각 하늘과 하늘에 있는 타카마가하라(아마테라스)와 달과 역법(츠쿠요미), 바다(스사노오)를 통치하고 있었다.

이 중 스사노오의 후손인[24] 오오쿠니누시가 여러 가지 시련을 겪은 뒤 스사노오로부터 마지막 축복을 받아 이즈모에 거점을 두고 '나라 만들기'[25]를 계속하여 땅 위를 다스렸으나, 지상은 여러 신들이 혼란스럽게 구는 어지러운 혼돈의 나라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아마테라스의 손자인 아마츠히코히코호노니니기노미코토(天津彦彦火瓊瓊杵尊, 이하 '니니기')와 니기하야히노미코토(饒速日命) 형제를 각각 규슈와 야마토에 내려오면서 '원래 니들 거니까 뺏어와'라고 해서 따지고 보면 사촌인 오쿠니누시를 몰아냈고 그 후 니니기의 자손인 진무 덴노가 또 사촌을 몰아내고 야마토를 통일했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서기에서 아마테라스의 손자 니니기 등을 내려보낸 주체가 전승에 따라 다르다. 일본서기는 여러 가지 전승을 취합했으며 본문이나 일서니 하는 식으로 다른 전승이 있음을 분명히 구분했다. 본문과 일서를 포함하여 가장 오래된 전승에서는 니니키를 내려보낸 주체는 천계 타카마노하라가 열릴 때 처음으로 나타난 세 신들 중 하나라는 '다카미무스히'이다. 그보다 덜 오래됐으며 일본서기 편집자들이 표준판으로 간주한 본문의 기록에는 '다카미무스히'와 '아마테라스'가 공동으로 명을 내렸다. 그리고 일서에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은 '아마테라스'가 단독으로 명을 내려 손자 니니기 일행을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아마테라스가 천황가의 조상신(皇祖神)이자 천계 다카마노하라의 주신으로 자리매김함을 알 수 있다. 사실 다카마노하라란 개념 자체가 민간층이 아니라 야마토 조정 내부에서 생긴 궁정신화이다. 야마토 조정의 초기 황조신이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아니라는 데에는 거의 모든 학자들의 의견이 모인다. 초기 조상신은 다카미무스히였을 가능성이 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정부니혼쇼키 중 일서에만 기록된 가장 후기의 전승을 표준판인 양 정책적으로 퍼트리고 교육했다. 전후 일본인은 물론 외국인(당시 일제강점의 치하에 있던 조선인들)마저도 그 영향을 강하게 받아, 그때의 천황관을 일본 고대의 천황관처럼 이해했다. 가장 후기의 전승을 메이지 정부가 표준판으로 간주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가장 후기의 전승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미코토를 지상으로 내려보내면서 '천양무궁의 신칙'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천양무궁의 신칙 내용은 요약하면 이러하다. "지상은 내 손자 니니기와 그 자손들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

천황이 신이면서 죽음을 맞는 부분도 신화를 이용해 구색을 맞춰뒀는데, 니니기노미코토가 지상에 내려오면서 코노하나사쿠야히메를 보고 미모에 반해 청혼했더니 그 아버지가 언니인 이와나가히메도 데려가라고 했는데, 니니기는 이와나가가 못생겨서 거절했다고 한다. 사쿠야를 통해 황실이 만발하는 꽃(はな・花)처럼 번성하라는 것이었고 이와나가를 통해 돌(いわ・岩)처럼 튼튼하게 유지하라(불사)는 뜻이었다. 니니기가 사쿠야를 취해 황위도 얻고 '만세일통'하지만, 이와나가를 버렸기에 신의 자손이면서도 불사(不死)를 얻지 못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니혼쇼키코지키 등 속칭 '기기신화'가 완성되기 전의 기록을 보면 신화적인 의미에서 진무 덴노 자신이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 자신으로 간주되었다. 신화적, 종교적 의미에서 천황의 계승식이란 아마테라스이자 니니기이자 진무 천황이자 역대의 천황이었던 바로 그 존재가 되는 의식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옛 신화적 관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다.


5.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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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여자들이 입은 옷은 쥬니히토에라는 옷이다. 남자들이 입은 옷은 소쿠타이, 머리에 쓴 관은 스이에이노칸이다.
천황은 명목상으로는 임금이지만 실제 권력은 없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기간이 긴 것으로 유명하다. 실권은 셋칸이나 막부, 군부가 잡고 상징적인 존재로서 군림한 적이 대부분이다.

사실 일본 역사 초창기에는 주변 다른 나라들처럼 천황이 실제 군주로서 통치를 했고, 아스카 시대에는 중국식 제도를 본따 율령을 도입했다. 즉, 일본도 고대, 헤이안 시대 초기까지는 동시대 고구려백제, 신라와 크게 다를 바 없이 천황이 직접 율령에 의한 정치를 하는 고대 중앙집권제 국가였다.

그러나 헤이안 시대 중기인 858년, 후지와라노 요시후사(藤原良房) 이래로 후지와라외척으로 권력을 모두 독점하면서 귀족 섭관정치로 변모하며, 국풍이 발달하면서 한국이나 중국과의 교류도 감소한다. 이때부터 중앙집권이 약화되고 일본 특유의 이중적인 권력 체계가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약 1000년 동안 대정봉환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천황은 실제 정치는 셋칸, 간파쿠, 쇼군 등에게 권력을 위임하고 명목상 일본 정부인 조정의 수장으로 수도인 교토나 직할 영지 등 일부 지역에서만 직접적인 통치를 했다. 다들 알다시피 무사 정권은 천황 자체를 쫓아낸다거나 찬탈하지는 않고 '신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았다'는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해 그대로 두었다.

물론 일본 역사상에도 또라이없는 건 아니라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교토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던 반도 땅[26]에서 거병해 본인을 신황이라 일컬으며 천황이 되려고 시도한 적이 있으나,[27] 결국 조정에서 보낸 쇼군[28]의 군대에 토벌당해서 죽었다.[29] 또한 현대에는 옴진리교의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천황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고 일본 정부와 천황가를 전복하려는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고, 2018년(平成30) 7월 6일 오전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일본 천황의 존재와 그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일본의 역사, 사회에서 놓고 볼 때 좀 삐딱하게 말하면 '머리가 깬 사람'에 가까웠다. 일본의 국왕인 덴노는 맹자의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유교적 정치문화 측면에서 보면 꽤나 이질적인 존재이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다른 왕조 국가들과 달리, 진승왕후장상 영유종호라는, 민중에 의한 혁명과 왕조 교체를 긍정한(나아가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부정으로까지 이어질 이론적 토대를 제공하게 되는) 그 유명한 말이라던가 "정치 똑바로 못하면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왕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천명사상, 역성혁명론으로 대표되는 맹자의 사상이 유독 현실 정치에서 좀처럼 통용되지 않았던 경우가 일본의 국왕, 덴노이다.[30] 이에 대해 혹자는 "일본의 경우는 집안 족보를 따지고 보면 왕실 후손이라서 덴노를 건드려 자기 정통성을 훼손할 필요가 없었다"[31]거나, "중국도 역성혁명을 하면서 자신들의 집안 혈통을 윤색하고 왕후장상이라는 신분제를 부정하지 않았다"[32] 는 점을 이유로 전근대 신분제 부정의 토대가 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하지만 그 의의는 더 면밀히 살필 필요가 있다.

맹자의 천명설, 혁명론이나 진승의 구호가 물론 '왕후장상'으로 대표되는 '신분 제도' 자체를 전적으로 부정한 것은 아니라지만, 그러한 '신분'이 태생이나 어떤 이유로 해서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정의하려 드는 선민사상적인 인식이나 혹은 그러한 신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부여되는 특권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동시에 그러한 '신분'간의 유동성을 긍정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33][34]

센고쿠 시대에 온갖 신분 세탁과 족보 위조를 통해서 등장한 유력 다이묘들이 자신은 덴노의 먼 친척이네 어쩌네 하면서 덴노 자체를 부정하거나 하지는 않았고[35], 진승이 비록 나중에 자신을 왕의 후손으로 윤색하기는 했지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는 진승의 말은 전근대적 신분제가 내세운 신분의 고정불변성에 대한 명시적인 부정이라는 점에서 "일본의 국왕은 하늘이 무너지고 집안이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오직 덴노의 일족만이 될 수 있다"고 못박았던 일본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36][37] "기존의 전근대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마치 저 북쪽의 '인민의 총의'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된 '민심'을 그 대리인인 '수령/장군/위원장' 비슷한 유덕자(라고 선전된 사람), '군자'에게 위탁하는 정치 형태가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내내 지속되었다"느니 "이때 민심이라는 것은 천인감응, 민귀군경 등의 수사적 표현을 통해 명분상으로는 군림하되, 실제적으로는 통치하지 못한다. 웃기게도 어찌 보면 덴노와 비슷한 신세다." 운운하는 것이야말로 일본 역사에 대한 이해 부족뿐 아니라 동아시아 역사, 민본주의를 지나치게 현대적 관점에서 곡해, 왜곡하는 논리라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되었다고 치부해 버릴 '민심'이라는 것이 입을 옷이 없어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즉위식 치를 돈조차 없어 글씨를 팔고 성금을 받아 연명했던 덴노와 달리 동아시아에서 사회를 움직이는 분명한 한 축으로 작용하며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천명사상이나 역성혁명론은 신분 자체를 완벽하게 부정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현대의 민주주의와 차이가 극명하지만, 국가를 통치하는 정치 권력의 작동 원리와 그 형성, 유지에 '하늘'이라는 형체 없고 불가지한 동시에 전지전능한 것으로 여겨지던 존재뿐 아니라 '백성'이라는 현실의 존재를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일본의 덴노와는 분명하게 결을 달리한다.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이라 불리는, 하늘과 인간은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연 현상과 인간의 행위 사이에는 명백한 인과 관계가 존재한다고 보는 유교적 천명사상과 역성혁명론은 전근대 사회에서 권력자가 피지배층을 멋대로 착취하지 못하게 하는 사상적인 안전장치인 동시에 그 피지배층에 대한 권력자의 다스림이 충분하지 못할 경우 하늘이 자연 현상을 통해 권력자의 '부덕'을 심판하는 것을 넘어서 아예 권력자를 갈아 치워버릴 수도 있음을 긍정한다. 누구처럼 "민본주의라는 것도 피지배층 착취 방지의 안전장치라고 하지만 사실상 최고지배층(군주)을 중간지배층(귀족)이 명분상으로 압박하는 용도로 기능하는 바가 더 컸지 않느냐"는 냉소는 위정자들이 그렇게 표면적으로나마 피지배층을 위한 '안전장치'를 만들 수밖에 없게끔 압박을 가한 사회적 공기는 무엇에서 기인하였는가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을 뿐 아니라[38] 당초에는 좋은 의도로 도입되었던 제도가 나중에 가서는 악용되는 경우도 많다는 점에서 피지배층 착취 방지의 안전장치, 명분상 압박하는 용도 운운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주객전도'에 가깝다. 민본주의나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 정의를 분명히 하겠다는 이유로 민본주의를 필요 이상으로 평가절하하고 민주주의 특히 현대 서구식 민주주의 원칙만을 절대적인 동시에 고정불변의 것으로 떠받드는 것은 그 자체가 동양을 '깨지 못한' 존재, 계몽해야 할 미개한 존재로 취급했던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비교는 단순하게 1대 1 또는 지금의 기준만을 가지고 하는 게 아니다. 타이라노 마사카도를 '머리가 좀 깬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논지에 대해 "마사카도가 운위한 천명론은 고대적 민본주의이고 현대 민주주의 원칙의 기준으로 그 민본주의에는 많은 한계가 있다며 마사카도를 '좀 깬 사람' 운운하는 것은 반발을 불러온다"는 말은 적어도 마사카도라는 인물과 천황이라는 존재를 운위함에 있어서는 해당이 되지 않는다.[39]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사회에서 어떤 위치이고 그 천황을 정점으로 세워진 일본이라는 나라의 사회 구조가 어떤 사상과 이념으로 이루어졌는가를 짚어보는 과정에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존재는 분명히 이색적인 존재인 동시에 이단적인 존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그 수많은 잇큐잇키도 마사카도처럼 체제 자체를 부정하거나 일본이라는 지배 체제를 이탈해 독립하려 한 것이 아니었고, 모기장을 뒤집어쓰고 살든 돈 없어 글씨 팔아 연명하든 '덴노는 신성불가침적 존재'라는 명제를 고정불변의 절대적 진리로 여기며 부정하려 하지 않았던 일본 사회에서 타이라노 마사카도 이외에 일본 역사에서 그 어떤 인물도 그러한 일본의 지배 체제와 사회 구조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기를 들 생각을 할 인물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민본주의는 위정자와 백성을 '대립'하고 '양립'하는 이분법적 존재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 또 받을 수 있는 모종의 계약 관계로 간주하며, 위정자의 권한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시점에서 무한정이고 고정불변의 것이라거나 백성이 마냥 위정자의 지배를 받아 들여야만 하는 일방적이고 수직적인 관계라는 사상을 부정하는 것이 민본주의이다. 지배자는 마냥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신성한 권력을 피지배자인 백성에게 마냥 행사하고 군림하기만 하면 되고 피지배자는 그러한 지배자의 군림을 '신의 뜻'이라고 수용해야만 하는 신민이 아니라 상호간에 각자의 생존과 행복을 위해서 권한을 위임하고 위임받은 일종의 '계약' 관계이며, 그 지배자의 엇나간 정치로 인해 피지배자가 생존과 행복을 위협받을 경우 그 지배자와의 계약을 철회하고 다른 이로 바꿀 수 있다는 사상은 왕권신수설의 토대를 마련한 로마 제국콘스탄티누스 이후 서양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토머스 홉스사회계약론을 주창하기까지 거의 천 년을 기다려야 했다.

위정자가 부여받은 것과 같은 '천명'의 또 다른 상징으로서의 인민의 존재를 '발견'해낸 것이 맹자와 민본주의의 가장 큰 업적이고, 이는 서구 민주주의 발달사에 비추어 생각해도 분명히 획기적인 사상의 전환이었음은 틀림없다. 백성이 위정자에게 있어서 천명의 대변자이기는 하지만 그 위정자도 백성과 마찬가지로 '천명'을 명분으로 존재하고 위정자가 위정자의 위치에서 자신이 해야 할 책무를 다하지 않아 백성이 도탄의 빠지게 되는(즉 위정자가 위정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을 때 그 위정자의 자리를 담보하는 천명은 백성의 민심과 마찬가지로 변화할 수 있고 위정자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당위성마저 부정된다, 라는 식의 사상은 굳이 자본주의 맹아론이니 하는 말을 가져오지 않아도 그 자체로 맹자 당대뿐 아니라 현대의 기준에서도 분명히 '혁명'적인 사상이라고 평가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신분제를 부정하거나 고정불변성을 부정하기는커녕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오히려 그것을 '중국과 다른 우리만의 특별함'[40]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중국 황제 앞에서도 대놓고 "우린 원래 이래요, 부럽죠?" 이러고 자랑하던 것이 일본이다.

덴노의 조정이나 막부의 쇼군이라고 그러한 천인상관설을 몰랐거나 혹은 '웃기고 있네' 정도로 치부한 것은 아니어서 국가 재난 사태에는 으레 '덕정(德政)'이라 불리는 국가적 대책들이 시행되었다.[41] 하지만 덴노의 경우 하늘과 백성을 거스르고 실정을 일삼는 왕의 덕이 쇠약해지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아예 다른 데로 옮겨갈 수도 있다는, 동시에 누구든 왕의 자리에 오를 만한 힘이 있는 자는 누구든 그 왕의 자리를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사고는 한국이나 중국과는 달리 일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라는 일본 신토의 최고 신이자 온 세상을 비추는 태양의 여신이 자신의 손자 니니기를 지상에 내려 보내며 "지상은 니니기와 그 후손이 영원토록 다스릴 땅이다"라는 이른바 '천양무궁의 신칙'에는 니니기와 그 후손에 대한 세상을 다스릴 권한에 대한 '약속'만이 있을 뿐이지, 그 권한을 '리콜'할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아무리 정치를 엉망으로 해도, 무모한 전쟁을 벌여 수천 수백의 목숨이 죽어나갈 망정 일본의 국왕인 덴노의 자리에는 오로지 덴노의 일족만이 오를 수 있었고, '천양무궁의 신칙'으로 하늘로부터 받은 덴노의 왕권에 리콜하거나 회수할 권리는 고사하고 이의를 제기할 존재는 일본 안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 권한을 준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마저도 그런 건 생각도 하지 않는다.[42] 이런 점에서 타이라노 마사카도는 당시 일본 사회에서 상당히 이색적이고 파천황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43][44]

사실 덴노의 입장에서 천명사상이니 역성혁명론이니 하는 말을 들이대는 비판이 좀 억울한 게, 덴노로서는 천명 사상이나 역성혁명론 같은 것으로 비판을 받을 정도로 뭔가 국왕으로서 권력을 행사하고 나라를 다스린 적이 별로 없었다. 뭐 정치를 해야 실정을 하고 천명이니 역성혁명이니 비판을 받을 것 아닌가. 일단 일본이라는 왕국의 유일한 '왕'이자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후손이라는 뼈대 깊은 혈통적 정통성을 가진 존재였기는 하지만, 실제로 다른 나라의 국왕과 같은 모습으로 전제 군주로서 스스로 권력을 행사한 시기는 나라 시대부터 헤이안 시대 중기까지 20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 등 길지 않았으며, 가신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센코쿠 시대 이래로는 권력을 잃은 단순한 얼굴마담 같은 존재로 전락해 있었다. 무엇보다 쇼군이 실질적으로 일본을 다스리던 막부 시대에는 그게 절정에 달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토키 요리토오라는 다이묘가 고곤 상황의 가마에 화살을 쏘고, 남조의 잔당 세력이 삼종의 신기 중 일부를 강탈하는 일도 있었다.

조정의 권위가 가장 초라하던 무로마치 시대, 고쓰치미카도 천황의 치세에는 오닌의 난을 시작으로 전란이 잦아 궁궐까지 불에 탔으며, 지방에서도 혼란이 커지고 영주들이 황실령을 침탈해 황실이 재정난에 빠졌다. 고쓰치미카도 천황이 귀족들의 저택에서 기거했음에도 화려한 궁전이 아닌 허름한 집에서 지냈다는[45] 헛소문이 돌은 것도 이러한 상황 속에서 나온 것이다. 천황과 귀족들의 본거지인 교토가 전란으로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도 황실의 권위는 계속 곤두박질쳤다. 104대 고카시와바라 덴노는 황실 재정이 없어 아버지 고쓰치미카도 덴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해 그 유해를 44일이나 방치해야 했었고 당시 키나이의 지배자로 칸레이를 역임하던 호소카와 마사모토가 형식적이고 무익하다는 이유로 천황 즉위식을 거부하여[46] 22년 동안이나 즉위식을 치르지 못하다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와 이시야마 혼간지에서 비용을 내주어 겨우 즉위식을 치렀으며 그 후 4년 뒤, 63세의 나이로 붕어했다. 그 다음인 105대 고나라 덴노(재위 1526년~1557년) 또한 즉위식을 치를 돈이 없어서 유력한 센고쿠 다이묘인 고호조(後北条)와 오우치(大內), 이마가와(今川) 등의 가문으로부터 성금을 받아 즉위 10년 만에야 즉위식을 거행할 수 있었으며, 천황 자신도 어필을 팔아서 황실 수입에 보탰다.

궁녀들이 매춘을 한다거나,[47] 동네 아이들이 천황 본인을 무시하며 마구 돌을 던져, 그 돌에 맞고 다녔다는 소문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황실의 권위가 무너지고 형해화된 수준까지 갔으나, 무로마치 - 센고쿠 시대 천황들이 무력하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프랑크 왕국 메로빙거 왕조의 군주들이 왕실과 왕권의 보존을 위해 노력했음에도 무능력했다는 오해를 사는 것처럼 센고쿠 시대의 천황들도 황실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오닌의 난이 터지기 전의 고하나조노 천황 때에는 형식상으로나마 정치적 권위가 살아 있어 반란이 터지면 막부에서 대부분 천황의 윤지를 요청했으며 오닌의 난 이후에도 전란과 조정의 무력화로 사라져 버린 여러 의례를 되살려 조정의 존재감을 살리고 권위를 회복하려 했다.

또한 천황들은 막부가 실정을 하거나 쇼군이 잘못을 저지르면 시나 글을 쓰거나, 퇴위하여 출가하는 것으로 막부의 통치를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민심을 샀으며 전염병이나 기근이 들면 종교 행사를 거행해 대중들을 진정시키고 위로했다. 또한 다이묘들이 헌금으로 관직을 사려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는 등, 천황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게다가 전국 시대의 다이묘들은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조정과 천황의 권위를 이용하려 했고, 이를 위해 천황에게 헌상을 바친다거나 형식적으로나마 조정의 권위를 인정하고 관위를 얻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에도 막부 시기에는 쇼군가였던 도쿠가와 가문의 막대한 후원과[48] 더불어 고위 사무라이 및 쇼군가와의 유착으로 인해 적지않이 권세를 누린 적도 있지만[49], 그 시기에도 당연히 정치적 실권은 쇼군과 그를 중심으로 한 막부에게 있었고, 천황은 그냥 바지사장에 불과했다.[50]

여담으로 이렇게 천황을 쥐고 흔들던 에도 막부가 무너지고 대정봉환으로 일본 제국이 성립되자 신정부의 주요 인사들은 에도 막부가 정당한 군주인 천황을 핍박했다고 보고,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과거 천황에게 충성한 충신이라고 판단되는 인물들을 찬양하기도 했다. 그중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있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처럼 무엄하게(?) 천황을 허수아비 취급하지 않고 존중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 조선 침략을 하지 말라는 고요제이 덴노의 어명을 무시했다.

물론 천황도 잃어버린 권력을 되찾기 위한 시도를 몇 번 한 적은 있었고 가장 성공할 뻔했던 것이 1333년에 일어난 겐무 신정이었다. 일본의 제96대 천황 고다이고 덴노가마쿠라 막부를 무너트린 뒤 고대 일본처럼 천황이 직접 통치하는 나라로 되돌리기 위해 싯켄이나 막부, 관백 등을 죄다 폐지하는 겐무 신정을 시도했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해 쇼군이 다스리는 막부 체제가 이후 500여 년을 더 이어갔다.

자신들 말대로는 일본 최초의 국가로 생각되는 야마토(大和)로부터 신의 피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져 내려오며 일본을 통치했다고 하여 '만세일통(万世一統)의 천황'라고 불리운다. 하지만 '천황'이라는 명칭이 사용된 건 비교적 최근이며 피나 이름이 끊긴 듯한 애매한 시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패전 직후인 1954년 미즈노 유(水野祐)가 주장한 '3왕조 교체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일본 황실의 역사는 10대 스진 덴노에서 15대 오진 덴노까지의 고왕조, 16대 닌토쿠 덴노에서 25대 부레츠 덴노까지의 중왕조, 26대 케이타이 덴노 이후의 신왕조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스진 덴노 이전의 천황은 역사상 실재하지 않는 허구의 인물"이라고 주장하였다.[51]

이 학설은 많은 비판 혹은 보충의 대상이 되었으나 이후 '기마민족 정복설'이나 '규슈 왕조의 야마토 지역 정복설' 등 다양한 왕조 교체설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런 학설들이 주류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단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세일계'라는 것은 허구적인 관념에 가깝다는 것이다. 다만 3왕조 교체설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한 것은 케이타이 덴노 이래 일본 천황의 역사는 최소 1500여 년 동안 끊기지 않았으며, 현존하는 왕조 중 가장 오래되었다는 것이다.[52]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천황이 태상황으로 물러나거나 상황(上皇)이 출가하여 법황(法皇)으로 물러난 뒤에야 오히려 실권을 가지게 되고 천황은 사실상 태자 정도의 지위에 불과한 시대도 있었다. 이를 인세이(院政)라고 한다.

가마쿠라 시대 고토바 상황이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죽음으로 겐지 쇼군이 단절되고 가마쿠라 막부가 호조 씨를 비롯한 고케닌들의 내부 항쟁으로 어수선한 것을 틈타 막부 타도를 외치며 이른바 '조큐의 변'을 일으켰다가 내부 항쟁을 멈추고 한데 뭉친 무사들에게 거꾸로 역공을 당해 고토바 상황은 물론 그의 아들인 츠치미카도 상황준토쿠 상황 모두 교토에서 쫓겨나 유배되고, 고토바 천황이 지명한 주쿄 덴노도 폐위되어 막부에 의해 새로이 고호리카와 덴노가 즉위한 이후로 덴노와 교토의 조정은 독립성을 잃고 막부에 의해 '관리'되는 신세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심지어 가마쿠라 후기에 이르면 왕위 계승을 놓고 또 내분이 벌어져 왕통이 둘로 쪼개졌는데, 고사가 덴노가 원래 맨 처음에 넷째 아들 고후카쿠사 덴노에게 양위해 놓고, 정작 고후카쿠사 덴노의 뒤를 고후카쿠사 덴노의 자손이 아닌 평소 총애하던 여덟째 아들 가메야마 덴노의 아들인 고우다 덴노로 정해 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자기 자손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 없게 된 고사가 덴노가 "이게 뭔 개소리야"라고 아버지와 동생에게 반발하면서 분쟁이 벌어졌고, 당시 조정을 '관리'하던 막부는 심플하게 "고사가 덴노의 자손과 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이 10년 단위로 로테이션으로 해먹어라"로 퉁쳐 버렸다. 이후 고사가 덴노의 자손을 지묘인 왕통, 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을 다이카쿠지 왕통이라 불렀으며, 이 두 왕통이 가마쿠라 막부 멸망 때까지도 돌아가며 덴노에 오르게 되었다. 이것이 남북조시대'라는 시대의 복선이 된다.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아시카가 다카우지,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 무사들의 지원을 이끌어내어 가마쿠라 막부 타도에 성공한 고다이고 덴노는 다이카쿠지 왕통에 속했다. 고다이고가 막부 타도를 꾀한 것도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게 기껏 왕이 되었더니 자기 아들한테 왕위 못 물려준다고 하면 그걸 국왕 치고 좋아할 사람 몇 명이나 되겠는가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 년 가까이 실권이 없어 정치적 경험이 모자랐던 데다 무사들을 도외시하고 공가 중심의 정책을 펼치는 고다이고에게 반발한 무사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결집해서 고다이고 덴노의 정치를 부정하고 다시금 막부를 부활시켜 버렸다. 고다이고 덴노도 무사들에 의해 반강제로 양위하고 삼종신기도 다카우지가 세운 막부에 의해 옹립된 고묘 천황에게 넘겨 주는 굴욕을 겪었지만, 고다이고 덴노는 이를 부정하고 교토를 탈출, 나라의 요시노에서 "너희에게 넘겨준 삼종신기는 가짜이고, 내가 여기 진짜를 가지고 있다! 그러니 일본의 정통 군주는 나다!"라며 요시노에서 자신의 조정을 선포한다. 이로서 교토의 조정 즉 북조와 요시노의 조정 즉 남조 이렇게 두 덴노가 양립하는 일본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고다이고 덴노가 무사들을 도외시하고 공가 중심의 정치를 펼쳤다고는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무사들이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결집해서 세운 막부와 그 막부에 의해 옹립된 덴노의 북조를 마냥 지지한 것도 아니었고, 고다이고 덴노 본인도 자신의 아들들을 일본 각지로 보내 무사들을 결집하게 하는 등 참 끈질기고도 집요하게 뛰어다녔다. 난보쿠초 시대 내내 일본 각지에서는 남조를 지지하는 무사들과 북조를 지지하는 무사들이 서로 양패로 갈라져 피 튀기며 싸워댔는데, 정확하게 말해 정통성이 남조에 있든 북조에 있든 무사들 입장에서는 "아 그딴 거 나는 모르겠고"였고, 그저 자신들에게 더 많은 영지 소유를 보장해 줄 명분과 그럴 힘을 갖춘 구심점을 찾아서 자신들이 상대의 영지를 빼앗아 차지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53] 박쥐마냥 남조에 붙었다가 북조에 붙었다가 하는 판이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궁지에 몰린 나머지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구하러 바다 건너 고려원나라/명나라레이드를 떠나게 되니, 한국사와 중국사에 '왜구'라고 기록된 존재들의 등장도 남북조 시대의 전란으로부터 파생된 사태였다.

가끔은 남조가 우세하기도 했지만 점차 막부가 세력을 넓혀가고 규슈를 완전 복속하면서[54] 결국 북조 쪽으로 기울고 만다. 결국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알선으로 남북조 두 가문이 왕위를 번갈아가며 계승할 것과 전국의 천황 직속령인 "고쿠가레(국아령, 国衙領)"를 다이가쿠지계의 소유로 삼을 것을 조건으로 남조의 히로나리 친왕[55]이 북조의 고코마츠 덴노에게 삼종신기를 넘겨 남북조가 통일되었다. 서기 1392년의 일이다.[56] 물론 이 시기 고쿠가레의 토지는 거의 조금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작 고코마츠 천황은 당초의 양통질립 약속을 무시하고 자신의 차남인 오구라노미야 미히토 친왕을 태자로 책봉해 버리면서 화의는 깨졌다. 이에 고카메야마 상황이 잠시 요시노로 가는 등 반발했지만 결국 화의가 성립되었다. 그때 남조의 실력은 이미 얼마 남아 있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저항만큼은 정말 끈질겼다. 1428년에 미히토 친왕 즉 쇼코 천황이 죽고 고하나조노 천황이 즉위하였는데, 이에 대해 옛 남조 지지파가 항의하며 다시 거병했다. 이를 후남조(後南朝)라고 한다. 후남조는 1443년 삼종신기 가운데 곡옥과 검을 가져가는 금궐의 변(禁闕の変)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때 검은 곧 회수했지만 곡옥은 후남조의 2대 천황인 자천왕(自天王)의 요시노 조정이 보유했다. 1457년 말에 아카마츠씨의 부흥을 목표로 하는 세력이 조로쿠의 변(長禄の変)을 일으켜서 자천왕과 그의 형제이자 후남조의 정이대장군 충의왕(忠義王)을 죽이지만, 요시노 향민들이 곡옥을 다시 빼앗는 바람에 1458년에야 북조는 곡옥을 마저 회수할 수 있었다. 그 후 오닌의 난 와중이던 1470년까지 여러 차례 후남조 세력의 거병이 이어졌고, 야마나 소젠을 총대장으로 하던 서군이 남조 계통의 황족을 데려다 이른바 '서진남제(西陣南帝)'로 옹립했지만, 1473년 소젠이 죽은 뒤에 서진남제는 완전히 힘을 잃었고 각지를 떠돌다 1479년 에치젠의 어느 절에 도착했다는 사료를 끝으로 기록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남조의 왕통은 그대로 끝났다.

메이지 시대에는 남조의 정통을 인정했지만, 북조 계통인 이후 덴노들의 정통성이 부정된 건 아니었다. 당장 메이지 덴노 본인이 천황가 역시 북조의 직계 후손인 만큼 북조를 애써 무시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1911년(메이지 44년)에 메이지 덴노의 명으로 남조 2대를 정통 천황으로 인정하고 종래의 96대부터 100대까지의 천황을 "북조"로 보고 정통에서 제외하였고 남조의 노리요시 친왕, 히로나리 친왕은 천황이 아니었으나 즉위한 것으로 보고 고무라카미 덴노,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했다. 1926년(다이쇼 15년)에 다이쇼 덴노[57]의 명으로 남조를 정통으로 한 이후에도 즉위의 여부에 대해 의견이 갈린 유타나리 친왕에 대해서도 즉위한 것으로 보고 조케이 덴노로 시호를 올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자신이 남조의 후손으로 황위를 이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자신이 남조의 후손이라며 들고 나온 사람들의 경우도 남조의 후손으로 인정받을 경우 최소한 백작 이상의 높은 귀족 작위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을 것이다. 구스노키 마사시게나 닛타 요시사다 등 남조를 위해 목숨 바친 '충신'의 후손들까지 찾아내서 귀족 작위를 주던 시대적 분위기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총합 약 50여 명 정도가 나타났다. 그중에는 큰 반향을 일으킨 사람도 없지는 않지만 지금은 모두 근거 없는 주장으로 추정된다.[58]

쇼군과 천황의 관계는 흔히 만세일계로 상징되는 정통성의 천황, 권력을 위임받은 실권자 쇼군이라는 도식으로 흔히 설명되지만, 그것도 무로마치 막부 시절까지의 이야기이다. 센고쿠 시대부터는 이미 그 권력의 정통성도 원래부터 쇼군에게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에도 막부대까지 오면 쇼군이 금중병공가제법도를 제정해 천황에게 이런저런 규정을 강요하는 등 사실상 하급자 취급을 받았다. 쇼군이 직접 천황이 되지 않은 것은 초기에는 천황의 상징성 때문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천황이 진짜로 아무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덕일 같은 사람은 "중세 일본의 천황은 제사장 역할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59]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천황과 조정을 이루는 공경[60]들은 당대의 일본 상류사회를 이끄는 셀럽처럼 인식되었고, 아무리 정치적인 실권이 없다고 한들 적어도 문화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역대 쇼군들은 황녀와 혼인함으로서 황실 전체를 막부 권위의 상징처럼 여겼다. 그래서 에도 막부 때는 애들이 고나라 덴노에게 했듯이 돌을 던졌다가는 목이 달아나는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에도 시기 중기 이후 오규 소라이 등으로 대표되는 유교적 통치 이념이 지배층에게 퍼지자 천황이 다시 쇼군의 윗사람이라는 인식이 부활했다. 천황과 쇼군이 주고받는 친서를 살펴보면 이 시기부터 천황이 슬슬 윗사람인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물론 '윗사람'이라고 대해주는 선이었지, 막부를 타도하고 정권을 '진짜' 주인인 덴노에게 돌려줘야 한다느니 이런 소리하는 인간들은 가차없이 목을 잘랐다. 또한 윗사람이라고 해서 뭔가 실권이 있는 게 아니니 재력도 그렇게 변변치 못해, 왕실 보물을 교토 시장에다 내다 팔아서 살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61] 일본 메이지 시대에서 패전 뒤까지 활약했던 수필가 사토 고세키(佐藤垢石)가 쓴 '도미 감시(にらみ鯛)'라는 글에 보면, 만엔 원년 무렵 한여름이라 왕궁에 어선(御膳) 즉 수라상에 올라가는 생선들이 모조리 썩어서 악취가 나고 먹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고, 고메이 천황이 연회를 열었을 때 왕궁 안에는 언제나 술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술에다 물을 타서 마셨고 결국 몇 잔을 마셔도 취할 수가 없었다거나, 연회에 연어 한 조각이 남은 것을 보고 "버리지 말고 챙겨 두어라. 짐이 두었다 저녁 반주에 먹겠다(これを棄ててはならぬ。朕は晩酌の佳肴とするつもりである)"고 하는, 이게 진짜 한 나라의 국왕이 맞긴 한가 싶은 심히 안습한 에피소드가 소개되어 있다. #

그러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구심점이자 절대권력으로 옹립되어 막부에서 권력을 돌려주면서 '일본 제국'의 심볼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 이후 천황이 신이 아닌 인간임을 밝히는 '인간선언' 때문에 '신의 후예' 정도로 약간 위상이 내려갔다. 일본 제국 때에 로마 교황유럽을 포용하듯이 천황도 아시아를 포용해야 한다는 보편적 천황제(普遍的天皇制)는 끝내 정계, 학계 등에 등장하지도 못하고 무산되었다.[62]

이 시절에도 천황이 절대 군주였는지는 일본 근대사를 차분히 곱씹어야 할 일이다. 일본 제국 시절에 중요한 것은 천황이 전 일본을 다스리는 신국(神國)의 계승자라는 '이미지', 즉 권위를 지닌 구심점이었기 때문이다.[63] 메이지 덴노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의 뜻에서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였다. 보통 다른 사람에 의해 군주가 된 사람들이 대체적으로 그렇듯이.

메이지 시대 초기에 천황의 위치는 민중에게도 대단히 모호하게 여겨졌다. 당시 일본인들은 오랫동안 쇼군과 다이묘, 사무라이들의 지배를 받았지 천황의 지배를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랬기에 천황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64] '현인신(아라히토가미)'이라는 개념조차도 민간의 생각과 지배층의 생각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천황이 행차할 지역에 사전 파견된 정탐꾼이 그 지역의 민심에 대해 기록한 점이 이러한 점을 잘 드러난다. '천황께서 행차하시니 길을 닦으라고 명령해서 길을 청소했다. 천황의 행차라는 것은 정말로 귀찮기 그지없다.' 게다가 행차를 위해 뭘 만들라고 하면, 적당히 대충 만들고 끝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이를테면 메이지 초기에는 천황의 행차에 을 집어던지는 일이 꽤나 자주 벌어졌는데, 신에게 돈을 바쳐서 경의를 표하는 민간 신토의 전통을 그대로 천황에게 적용한 것이다. 돈만이 아니라 천황의 행차가 지나가면 이나 노래 또는 음식을 바치는 사람도 나타났다. 이것은 민간인들이 자신들이 아는 민간 신토의 방식으로 신이라고 하는 천황에게 경의와 숭배를 나타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천황에게 서양의 절대 군주와 같은 권위를 씌우려 했던 일본 정부는 이런 행동에 기겁하였고, 금지와 억압으로 이런 전통을 단절시켰다.[65] 같은 이유로 현인신인 천황이 존재하는데 신과 소통한다고 자처하는 것은 불경스럽다는 이유로 기존 신토계의 무속인들도 탄압당했으며, 이는 현재 일본 신토에서 무녀가 아르바이트 직업화하고 궁사(신관)는 사실상 신사 관리인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일본 민중들 사이에 거의 민중종교로 자리잡고 있던 불교가 특히 된서리를 맞아서 신불분리령에 수반한 폐불훼석(廢佛毁釋)으로 전국 각지에서 사찰들이 파괴되고 많은 승려들이 강제환속당했다.

메이지 정부는 천황에게 서양의 황제와 같은 권위를 덧칠하려 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위협 아래 최대한 빨리 이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한 세뇌 작업이 필요했으며, 당연히 폭력과 금지·억압이 덤으로 따라붙을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 초기의 '헌병경찰'도 일본에서 하던 짓을 식민지로 가져온 것에 불과했다. 학교에서는 위처럼 메이지 정부의 입맛에 맞게 각색된 신화를 사실로 가르쳤고, 천황의 사진과 초상화인 어진영(御眞影)을 모셔 놓고서는 천황을 섬기게 만들었다. 불타는 학교에 그 어진영을 구하려고 뛰어들어갔다 죽는 교사의 일화가 전설적인 미담으로 그려지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다이호가 피격당해서 함내에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함내에 걸린 어진영을 다른 구축함에 옮기겠다고 뻘짓을 해서 화재유폭-굉침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는 일이 나올 정도였다. 나중엔 궁성요배[66]식민지를 포함한 모든 사람에게 강요했다.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실패와 몰락은 이미 여기서 예견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실제 권력이야 어쨌건 근대 일본에서 천황의 상징성과 신성함은 함부로 건들 수 없는 신성불가침의 수준으로 격상되었다.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잠시 묵었던 집에서는 그가 썼다는 물건과 자리에 투명 덮개를 덮어 박물관의 전시물 다루듯 하였고 메이지 덴노가 마시고 목욕했다는 우물물은 '신이 사용한 물이니 신령함이 깃든 만병통치약일 것이다'라고 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그 물을 받아갈 정도였다고 한다. 천황이 잠시 머무는 집이더라도, 지역에서 유지 가문이어야 하고 가족 중 죽은 이가 없어야 하며 집안에 우환이 없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을 걸고 각별히 신경을 써 머물 집을 뽑았다.

대신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천황이었던 쇼와 덴노는 단순한 신성불가침의 대상이나 얼굴마담이 아닌 꽤나 실권이 있었던 국가원수였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쇼와 덴노가 직접 영향력을 행사했던 케이스는 단 3차례가 있다. 첫째는 다나카 기이치 총리를 질책해서 물러나게 한 사건, 둘째는 2.26 사건 당시 '이유가 어떠하건 내 허락도 없이 내 군대를 마음대로 움직여 반란을 일으킨 것들은 내 신하가 아니다', '장군들이 가만 있겠다면 내가 직접 근위사단을 지휘해 진압하겠다!'고 까지 할 정도로 강경한 태도를 보여서 반란 진압의 계기를 마련한 점, 셋째로, 패전 과정에서도 '성단(聖斷)'을 내리는 등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쟁 당시 쇼와 덴노는 일본 육해군의 동향을 일본 내에서 가장 잘 파악하고 있었으며, 작전을 수정하라고 지시한 사실도 있다. 그를 처벌하지 않았던 미국의 장군인 더글러스 맥아더에 대해서는 "히로히토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했다는 면에서 매우 잘못했다"는 떡밥도 은근히 나오고 있다.[67][68]

이 외에도 메이지 덴노 역시 시기에 따라 나름 권력을 지녔다고도 한다. 사실 실권이 없어 보인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 뭘 몰랐거나, 아니면 실제로는 히카루 겐지로 대표되는 일본의 이상적인 지도자 유형에 따라 신하들에게 다 맡기느라 그랬다는 얘기도 있다. 지도자는 생각 없이 인생을 즐기고, 실제 일은 아랫것들이 다 하는 스타일. 이런 문화 때문에 일본은 굳이 천황이 아니라도 막부나 번, 군부에서 유난히 중간층의 영향력이 강했다.[69]

대일본제국 헌법 등에서도 나타나 있듯이 실제로는 일본의 국사 중에서는 천황이 아니면 권신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못 건드리는 영역이 있었고, 메이지 6년의 정변이나 종전 당시 상황에서 볼 수 있듯이 진짜 답이 없으면 천황이 나서서 일을 해결하기도 했다. 또, 메이지 시대 말년에는 이토 히로부미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해 세상에 없었고 어지간한 신하들도 슬슬 나이를 먹고 은퇴했을 뿐더러 메이지 덴노 본인도 나이를 먹었을 무렵에는 그나마 활동을 좀 했다.

사실 쇼와 덴노는 서자였던 할아버지아버지와는 달리 다이쇼 덴노의 정실인 데이메이 황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였기에, 정통성에 흠이 없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미래의 군주로 태어나고 자랐다. 그리고 그가 천황으로 즉위했을 무렵엔 메이지 유신을 주도한 실세들은 이미 죽고 없었다. 쇼와 덴노를 위협할 힘을 가진 것은 일본군뿐이었지만, 당시 일본군의 육군과 해군은 견원지간이었고, 그 둘 모두는 특이하게도 "내각의 통제는 거부하지만 최고 지휘관인 천황에게만은 절대 복종한다"고 절대 맹세 및 복종했다.

만주사변 이전까지 쇼와 덴노는 공공연하게 민간정부를 지지했으며 이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연구는 없다. 문제는 내각이 천황의 신임을 등에 업고 군부를 컨트롤하려고 하면 군부는 통수권이 천황에게 있지 내각에 있는 게 아니라면서 반발하는 것이었다. 군부는 이른바 통수권 간범이라는 논리로 내각과 정당정치를 역적도당으로 만들어버리고, 이를 막으려는 궁중 중신들까지도 역적/간신배 딱지를 붙여 탄핵했으며 1930년대 중반에 들어서면 '천황기관설' 등 천황을 현대적 정책결정과정의 일원으로 편입시키려는 이치키 기토쿠로 등 쇼와 덴노 측근들의 시도를 격렬하게 공격, 축출시키고 메이지 시대의 원로였던 사이온지 긴모치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극에 달한 게 2.26 사건으로, 쿠데타군에게 총리대신이 살해당한 줄 알았던 쇼와 덴노는 쿠데타 당일 새벽에 반란군의 요구를 거부하고 자신이 직접 통수권을 행사하면서 육군에게 즉시 쿠데타군을 진압하도록 명령했으나, 육군상 가와시마는 이를 무시하고 쿠데타군과 3일이나 지리한 대치전과 협상을 벌였으며[70] 심지어 반란을 진압해야 할 계엄사령관 가시이는 사태 마지막 날까지도 육상과 참모차장에게 천황에게 대권을 쥐어주고 유신을 선언토록 하자고 설득하고 있었다.[71] 결국 진압작전이 시작되자 궁지에 몰린 쿠데타군의 투항으로 사태가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은 쇼와 덴노의 통수권이 얼마나 유명무실하였는지를 입증했다. 더군다나 사이토 마코토다카하시 고레키요 등 유력한 측근들이 살해당하고 권위를 실추당한 쇼와 덴노는, 쿠데타군이 자신의 바로 아래 남동생인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과 접선하여 황위 교체를 노렸다는 뜬소문까지 퍼지면서 자신의 위치까지 위협받기에 이르렀다. 쇼와 덴노가 무력화되는 시기도 바로 이 2.26 이후이다. 쇼와 덴노가 1937년 우가키 가즈시게를 총리로 임명하자 육군이 반발하여 무산시키고 하야시 센주로를 내세워 총리대신에 앉힌 사건이 가장 대표적이다. 육군에겐 천황에게 대놓고 거역할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이때부터는 현인신이라는 천황조차도 군부의 눈치를 봐야 했다. 실제로 작전회의에서도 쇼와 덴노가 직접 의견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군 수뇌부들이 낸 의견들을 듣고 다수가 찬성하는 쪽으로 승인해주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몇몇 개막장 작전에 관해서는 쇼와 덴노도 '이 작전이 실제로 가능하기나 한 건가?'라며 태클을 걸기도 했으나, 결국 수뇌부 다수가 찬성하면 본인의 의견은 접어버리고 '다수가 찬성했다면 짐 또한 반대하진 않겠소.'라며 결국 승인을 해주었다. 심지어 태평양 전쟁의 개전도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쇼와 덴노가 포로에 대한 인도적 대우를 명시한 제3 제네바 협약과 전시 생화학무기 사용을 금지한 제네바 의정서에 비준하는 것을 거부했다는[72] 말이 있으나 비준이 무산된것은 육군과 해군, 즉 군부의 반대로 1934년에 무산된 것이므로[73] 쇼와 덴노가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는 주장은 사실무근이며 오히려 외국과의 조약을 체결하고 비준한다는 천황의 권위가 얼마나 땅에 떨어졌었는지를 확인할수 있다. 섭정 시절인 1925년에 제정된 치안유지법을 1928년에 강화해서 반정부운동 탄압에 써먹었다고 주장되나 마찬가지로 쇼와 덴노가 섭정이었던 1922년 2월에 사법성에서 치안유지법의 전신인 '과격사회운동단속법안'을 제출했다가 기각된 사실과[74] 1925년 보통선거의 실시와 맞물려 내무성과 당시 보수양당이었던 헌정회와 정우회의 지지를 받아 입법되고 강화되었던 사실[75] 이 어디에도 쇼와 덴노가 관여했다는 주장이 끼어들어갈 자리는 없다.

우가키 가즈시게가 총리로 지명되었다가 육군의 반대로 조각에 실패한 것을 아돌프 히틀러발터 폰 라이헤나우를 2번이나 독일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려다가 육군의 반대로 실패한 사례로 비교하는 경우가 있으나 일국의 재상인 총리대신을 임명하려다가 군부가 인정을 거부하여 무산된것과 군부인사문제를 손대려다가 군 내부의 반대로 실패한 것을 같은 격에 둘 수 없는 것이고 또한 히틀러의 외교정책에 독일군부가 쿠데타 음모까지 벌여가면서 반대하다가 결국 모두 숙청되고 예스맨만 남아 히틀러에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과는 달리 일본군부는 정책결정과정에서 막강한 발언권을 행사했고 항복을 질질 끄는데 성공했던 걸 고려하면 독일 군부와 일본 군부의 권력 지위는 서로 비교하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중일전쟁 초반에 일본 육군중화민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후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을 고려했는데 쇼와 덴노는 협상을 거부하고 전쟁을 확대시킨 고노에 후미마로를 지지했다고 하나, 협상을 파토낸 건 육군성(이타가키)과 내각(고노에)이었고 협상으로 전쟁을 끝내고자 한 쪽은 지금까지 만주 침략 활동을 주도해 온 참모본부(간인노미야)였는데, 사이온지 긴모치의 비서였던 하라다 구마오의 일기에 의하면 1938년 1월 14일 내각의 반대에 직면한 간인노미야가 협상 지속 문제를 놓고 '어전회의(御前会議)'를 열어서 내각의 결정을 뒤집으려고 하자 쇼와 덴노가 "그러면 애초에 중국에서 일을 안 벌였으면 될 것 아니냐"며 질타했던 것이다.[76]

쇼와 덴노의 평가는 매우 복잡한데, 자세한 것은 쇼와 덴노/전쟁 책임 문서로.


6. 국정에 대한 권한[편집]


없다. 명목상으로도 국정에 대한 권한이 전혀 없다.

대부분의 입헌군주제 국가 군주는 실제로 사용하기는 어렵겠지만 일단 법률 거부권과 인증 거부권, 의회해산권 등을 명시적으로 지니고 있다. 태국의 경우에는 쿠데타 같은 비상상황에선 국왕이 제재를 가하거나 승인함으로써 실제로 개입할 수 있으며, 영국 국왕도 이론상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지만 내각에 자발적으로 위임한 형태로, 제2차 세계 대전 때처럼 필요에 따라 어느 정도 국정에 개입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일본의 천황은 지위가 일반적인 입헌군주와도 전혀 다르다. 이는 구 메이지 헌법이 사실상 전제군주제를 헌법적으로 보장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연합군이 정반대로 뜯어고치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다. 일본국 헌법 1조부터 8조는 천황의 권리와 의무에 대해 규정하는데, 1조[77]부터 이미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천황은 국민의 합의로 내세운 상징이라고 명확하게 규정이 되어 있다. 그에 따라 천황은 스스로 정치적 권력을 갖지 않고, 헌법에 명시된 몇몇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행위만을 내각의 조언과 승인에 기초하여 행해야 한다. 이렇게 완벽하게 권한이 거세된 군주는 세계사적으로도 전무후무하며, 어떤 비상시라 해도 현 일본 헌법이 유지되는 이상 천황은 국정에 절대 관여할 수 없다.

일본국 헌법

제3조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요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78]

제4조

① 천황은 이 헌법이 정한 국사에 관한 행위만을 행하며, 국정에 관한 권능은 갖지 않는다.

② 천황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따라,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위임할 수 있다.

제5조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섭정을 두는 때에는, 섭정은 천황의 이름으로 그 국사에 관한 행위를 한다. 이 경우에는 전조 제1항의 규정을 준용한다.

제8조

황실에 재산을 양도하거나, 또는 황실이 재산을 양수 또는 사여(賜與)하는 것은 국회의 의결에 기초하여야 한다.


다만 국사행위에 거부권은 없는데 무조건 승인해줘야 한다는 조항은 없다. 정부가 어떻게든 섭정을 세우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섭정도 승인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냐?"라는 내부의 지적이 있고, 이에 대해선 답이 없다고 한다. 황실 전체가 천황이 하기 싫다고 파업을 하지 않는 이상 실제로 이런 일이 터질 가능성이야 없겠지만, 헌법적으로 보면 한계가 있는 셈이다. 성문법주의를 채택하고 있지만 관습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이기 때문에 천황의 일거수일투족에 굳이 제한을 두고 싶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

천황은 황실 사무에 관한 권한도 없다. 일본 제국 시대에 천황이 군주 스스로 제정하던 황실전범은 현재 법률의 형태로 의회에서 제정하거나 개정하며, 황위 계승권자도 황실전범이 정하는 바에 따르며, 부득이하게 순위를 바꿔야 하는 경우 내각총리대신이 의장인 황실회의의 결정에 따르며 여기에 천황은 관여하지 못한다. 천황 자신의 치세를 상징하는 연호조차 더 이상 즉위하는 천황이 스스로 제정할 수 없고 내각에서 정령으로 제정해 발표하고 있다.

천황은 선거권도 없다. 선거권은 만18세 이상의 모든 일본 국민에게 보장된 권리이지만, 천황은 주민등록이 없어서 선거도 못 한다. 일본 천황의 국정에 대한 권한은 일개 국민보다도 못한 것이다.[79]

심지어 퇴위할 권한조차 없다. 천황이 스스로 퇴위하는 방법은 죽는 것뿐이며, 생전에 퇴위를 하려면 내각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 퇴위 의사 표명도 국정의 일환이기 때문에, 천황은 퇴위 의사를 스스로 밝힐 권리조차 없다. 아키히토 상황의 경우가 그 사례로, 아키히토는 생전 퇴위를 원하였으나 퇴위할 방법이 없었고, 2016년 8월 "제가 나이가 80살이 넘어서, 나라의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하는 게 어려워질 것 같다"라는 식의 발표를 직접적인 문장은 하나도 쓰지 않고 에두르고 에둘러서 자신의 기분을 표명하는 방식으로 발표했다. 이를 두고 일본 언론은 천황의 '기분표명'이라고 보도하였고, 아베 신조 총리와 내각은 천황의 의사를 무시하기는 곤란하니 특별법을 제정하여 아키히토가 생전 퇴위할 수 있게 처리하였다.

천황은 헌법을 포함한 법률이 정하는 일부 공무원의 임명에 대해서는 '인증(認証)'이라는 국사행위를 한다. 가령 3권기관[80] 중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국가의 수입지출 결산 검사와 기타 법이 정하는 회계 검사를 담당하는 회계검사원(会計検査院)의 경우, 회계검사원의 구성원인 검사관[81]은 국회 양원인 중의원과 참의원 모두의 동의를 얻어 내각이 임명하고,[82] 검사관의 임명 및 면직에 대해서는 천황이 이를 인증한다.[83] 인증이라는 것은 해당 피임명자의 임명장에 천황이 직접 서명하고 옥새, 즉 어새(御璽)를 찍어주는 형식적인 행위이긴 하지만[84], 일본 헌법 제7조가 정하는 국사행위(国事行為) 중 하나이며, 이러한 인증에 관한 언급은 헌법 제7조 중 5호에 있다. 이러한 행위에서 천황의 주관이 개입할 여지는 전혀 없다.

7. 위상[편집]


실권의 유무와 별개로 현대 일본에서 천황이 가진 상징성은 매우 크다. 저 유명한 고노 담화(1993년)와 무라야마 담화(1995년)도 앞서 1990년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때에 아키히토가 "우리나라에 의해 초래된 불행한 시기에 귀국민이 겪었던 고통을 생각하며 저는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습니다"라는 발언이 그러한 담화가 나오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쉽게 말해 천황이 '통석의 염'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면 고노 담화도 무라야마 담화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는 천황이라는 존재가 일본 내에서 여전히 존재감이 강렬하다는 주장에 힘을 실어 주기 충분하다. #

일례로 일본국 헌법 1조부터 8조까지가 천황에 관한 조항이다. 비록 정치적인 권력은 없지만 여전히 일본인들에게 신성 불가침적인 존재이며 언론에서도 함부로 다루지 않으며,[85] 대부분의 일본인들도 천황폐하라고 꼬박꼬박 존칭을 붙힌다. 일본 만화일본 애니메이션에서 황실을 소재로 한 건, 마코 공주를 제외하면 거의 보기가 힘들다. 1990년, 아키히토 천황의 차남 부부인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당시 가와시마 키코)의 결혼을 기념하여 만든 애니메이션이 있긴 하다. 이런 모습은 쇼와 덴노의 서거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천황이 중병에 걸렸다고 일본 내 모든 행사가 전부 취소되고 자숙(自粛)하는 등의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물론 처음엔 야단법석에 침울한 분위기를 조성했지만, 해(1989년)를 넘어 질질 끌자 김이 샜는지, 쇼와 덴노가 사망한 당일에는 꽤 조용했다.

전임 제125대 천황인 아키히토는 사망하면 일세일원의 원칙에 따라 '헤이세이 덴노(平成天皇)'라는 시호가 추존될 것이 매우 유력하다 그러나 현행법상 반드시 그래야 한다는 법적인 근거는 없고, 어디까지나 관습상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현재 생존중인 아키히토를 헤이세이 덴노라고 부르지 않는 것은, 죽은 사람에게 붙이는 이름인 '시호'를 아직 살아있는 상황에게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금상(今上)이나 덴노 헤이카(天皇陛下) 등의 경칭으로 부른다. 물론 언론이나 공식 석상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천황제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 일반인들은 사석에서 천황 씨(天皇さん) 정도로 다소 스스럼 없이 부르기도 한다. 덴찬(天ちゃん)같이 보수주의자 기준으로는 막 나가는 호칭까지도 쓰는 사람도 있다.[86]

아키히토의 즉위식을 준비할 때는 테러를 방지한답시고 도쿄도 경찰 전체가 동원되어 도쿄도 내의 모든 맨홀 뚜껑을 일일이 열어 확인한 후 봉인하는 유난을 떨었던 적이 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를 "진저리나는 바보 짓"이라고 표현했다.[87] 또 당시 가이후 도시키 일본 총리가 즉위식에 참여해[88] 축사를 하고 만세 삼창을 불렀으며, 일본 국민의 대표인 일본 총리보다 천황이 높은 단에 위치해 있었음을 들어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위 비용으로 소비된 약 400억 엔의 금액이 전액 국고 지원되었음은 물론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조차 문제가 제기되어, 가나가와현의 시민단체가 흔히 만세소송이라 불리는 소송을 걸었으나, 14년을 질질 끈 끝에 2004년 고이즈미 준이치로에 의해서 기각되었다.

이 시기 시의회에 참석했던 당시 나가사키시 시장이던 모토시마 히토시(우익 성향의 자민당)가 좌익계열 정당에서 당선된 시의원과 이야기하던 중, 전쟁 책임에 대한 집요한 추궁 질문에 "천황에게도 전쟁 책임이 있다"고 답변했다가 글자 그대로 생명의 위협[89]을 받기도 했다. 그 시장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일본 경찰의 철통 같은 호위를 받으며 청사 안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집으로는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리고 사태가 좀 진정되어 다시 출근했다가, 1990년 차에 타던 중 우익 세력의 난동으로 등 뒤에서 발사된 총격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그가 평소 우익 성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입바른 소리를 시의회에서 한 번 했다가 생명을 잃을 뻔한 것이다.

나가사키 시장에 대한 테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후임으로 당선된 시장 이토 잇초는 전임자와는 달리 중도에 가까운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며, 평소 극우 정치인들의 일본 핵무장 발언이나 평화헌법 개정 움직임에 반대 목소리를 높였다가, 2007년 야쿠자 출신 극우괴한에게 총격을 당해 끝내 사망했다. 핵을 맞았던 전력이 있는 나가사키는 극우 성향에 대해 반발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 때문에 극우파들의 정치 테러의 목표가 된 셈이다. 이런 일본 앞에, 천황을 독극물로 암살하려 했던 옴진리교가 목 날아간 꼴이 됐음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90]

현재 황위 계승 서열 1위는 후미히토 친왕, 2위는 2006년에 태어난 아키히토의 유일한 손자인 히사히토 친왕. 2006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밖에 없는 현 황실을 우려해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필두로 하여 여자도 천황이 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려 했다.

그러나 당일 차남인 후미히토 부부가 셋째 임신 중을 언론에 밝혀 무산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 부부는 몇 번씩이나 아들인지를 확인했다고 한다. 히사히토 친왕(2006.9.6.)이 태어난 날, 아키히토 천황은 갓 태어난 손자에게 황실의 보물인 삼신기를 내렸다. 거의 출산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는 나루히토 천황 내외가 아들을 낳지 않는 한, 히사히토 친왕이 큰아버지 나루히토 천황의 황통을 이을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2011년에 일본 황족 23명 가운데 남자는 7명뿐인 사실을 감안하고 남녀평등의 여론이 불어, 여성 황족에게도 계승권을 주는 개정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아키히토 천황의 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는 2005년 11월 평민 공무원이자 작은오빠 후미히토 친왕가쿠슈인 동창이며 절친인 구로다 요시키(黑田慶樹)와 결혼하여 평민으로 신적강하되었다.[91]

2013년, 다카마도노미야 히사코 비가 IOC 총회에 모습을 드러낸 데 대해 논란이 일었다.

2013년 10월 31일에 야마모토 타로 참의원 의원이 천황에게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의 실태를 호소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가 정치문제가 되었고 결국 국회에서 사죄해야 했다. 정작 아키히토 천황은 편지를 읽어 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천황이 편지를 읽어 봤자, 전후(戰後) 체제에서 어차피 천황은 내각이 뻘짓을 하건 국민들을 어떻게 굴리건 진짜로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법률로 금지된 정치 개입을 하려 했다는 의심만 살 수 있고 이 경우 천황 자신도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해당 의원은 아예 "감히 신성한 천황에게 멋대로 자신이 쓴 편지를 건넨 놈"이라는 보수 극우들의 린치로 참혹한 꼴을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천황은 편지 자체를 안 읽어 봤고, 내용도 단순히 후쿠시마 원전 사고 실태에 대해 호소하는 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런 꼴을 당했다. 만일 천황이 직접 읽어 봤고 내용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면 더 나쁜 결과를 맞았을 것이다. 야마모토 참의원은 황실 행사 참석 금지 징계에 극우 단체의 협박 편지까지 받았다. 아키히토도 해당 의원을 보호하기 위해 편지를 읽지 않고 현장에서 그냥 측근에게 건넨 것으로 보이며, 해당 의원의 안위를 염려하기도 했다.

2014년 12월 23일, 아키히토의 생일에 맞춰 트위터에서 천황합성축제(天皇クソコラ祭り)란 게 퍼지면서 대규모 키배가 일어난 적도 있다.

2017년 5월 21일, 일본 보수인사 측에서의 천황에 대한 발언으로 논란이 일었다. 아키히토의 생전 퇴임을 논하기 위해 만들어진 아베 신조 총리의 자문위원회 인사들 사이에서 "천황은 제사에서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을 뿐, 그것 말고 무슨 역할이 있는가? 궁중제사만 계속하면 굳이 퇴위할 필요도 없다."는 주장이 나왔고 궁내청도 이에 상당히 격분하며, "그간 천황이 국내외를 다니며 나라를 위해 기여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느냐"며 항의했다. 해당 자문위원회의 인사들이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측근이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본 지도층에서 천황을 보는 시각을 엿볼 수 있다.

7.1. 상징천황제와 국가원수성[편집]


제국(帝國/帝国)이라는 의미는 2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1) 그 군주가 황제인 나라를 가리킬 수도 있고, 2) 문화적 그리고 민족적으로 전혀 다른 영역과 구성원에게도 통치권을 확장하는 국가를 가리킬 수도 있다. 1)과 2)가 일치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프랑스 제3공화국은 민주주의에 기반한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식민 제국(French colonial empire)으로 자주 표현된다.

일반적으로 군주국은 국호에 군주의 칭호에 따라 왕이면 왕국, 공작이면 공국 등을 함께 표기한다. 그래서 일본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기 전까지는 '대일본제국(大日本帝国, Empire of Japan)'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그러나 1947년 일본국 헌법 시행과 함께 국가를 새롭게 수립한 후로는 현재까지도 국제적으로 '일본국(日本国, Japan)'이라는 애매한 이름을 국호로 사용하고 있다. 일본이 공화국이 됐다면 '일본 공화국' 또는 '일본민국'이라고 하고, 군주국(황제국)을 유지한다면 '일본 (제2)제국'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국체를 나타내는 표현을 붙이지 않고 있는 것이다.

패전 이후 쇼와 덴노는 "더 이상 정치에 아무런 관여도 하지 않겠다"며 입헌군주로서의 최소한의 권한까지 전부 버리는 길(말하자면, 상징천황제)을 택했는데, 이때부터 일본의 군주인 천황은 단순한 입헌군주조차 아닌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의 천황처럼[92]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이라는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보통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헌법에 군주가 해당 국가의 원수라고 명시하지만, 일본국 헌법은 천황을 일본의 상징이라고만 서술할 뿐, 직접적으로 '국가원수'라고 하지는 않는다. 입헌 군주제의 국왕과 비주권군주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입지이다.

일본 보수 및 극우 내각은 천황을 국가원수로 받들고 있는 것을 넘어 개헌을 통해 천황이 국가원수라는 내용을 직접 명시하는 조항을 되살리자고 추진하고 있다. 그들의 주장은 이미 일본 내에서나, 해외순방 등에서 국가원수로 대우해 주고 있는데 법에 명시해서 그 근거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8. 관계[편집]




8.1. 한국과의 관계[편집]


한국 역사에서 일본의 교섭 주체자 내지는 천황이 처음으로 분명하게 기록된 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이다. 신라의 8대 군주 아달라 이사금 재위 20년(173)자를 보면 "왜의 여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 와서 예방하였다(倭女王卑彌乎 遣使來聘/倭女王卑弥呼 遣使来聘)"고 하여 아달라 이사금 때에 왜국과의 교류 사실을 전하고 있다. 특히 왜의 여왕 비미호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히미코(비미호, 卑彌呼)와 같은 인물로 보인다.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히미코는 일본 내 소국들이 서로 다투던 혼란한 시기에 여왕으로 공립(共立)된 인물로서 경초(景初) 2년(238)과 정시(政始) 4년(243)에는 중국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기사의 등장 시기가 173년으로, 삼국지에 등장하는 238년, 243년과 시간적 차이가 있어 사건의 진위여부를 놓고 이견이 존재한다. 이 기사를 부정하는 입장에서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비미호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게 되면 그 수명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점을 문제 삼아 중국사서에 근거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의 조작으로 이해하고 반면에 삼국사기의 비미호 기사를 인정하는 입장에서는 그녀가 왜국왕으로 공립되기 전에 야마타이국(邪馬臺國/邪馬台国)의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인사를 한 것이며, 그 연대는 신라의 고기록(古記錄)이나 구삼국사(舊三國史/旧三国史)에 기록되어 있던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한편 절충론은 기사 자체는 인정하되 삼국사기 초기 연대의 왜곡을 주장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히미코의 생몰기간이다. 히미코의 사망연대가 삼국지 위서 왜인전의 기록을 보면 247년경으로 되어 있는데 173년에 야마타이국 여왕으로 즉위했다면 최소한 75년 간 재위한 것이 된다. 비미호의 즉위시 연령은 확인할 길이 없지만 10살에 즉위하였다고 가정해도 최소 85살 이상은 생존했던 것이 된다. 만일 이러한 생몰기간이 가능하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 아달라 이사금 20년(173) 기록에 등장하는 비미호 기사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진다. 히미코는 왜국의 대표로 공립되기 이전에 이미 야마타이국 왕으로 재위해 있었고, 즉위 초년에 즉위 사실을 신라에 알리고 견사하여 우호관계를 맺으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위의 기록은 중국 문헌에도 전하지 않는 신라와 야마타이국 간의 교류를 시사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후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일본 열도의 군주는 신라, 백제, 가야 구별없이 일관되게 '왜왕(倭王)'으로 등장한다. 왜라는 이름이 7세기에 들어서야 '일본'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사에서 일본 열도의 군주들은 전부 '왕'으로 불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는 일본서기에는 몇 번 기록이 나오긴 하지만, 고구려본기에는 왜에 대한 언급이 없다.

八年, 夏四月, 日夲國王遣使, 進黄金三百兩·明珠一十箇.

8년(882) 여름 4월에 일본국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냥과 명주 10개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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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11 신라본기제11 헌강왕 8년[93]


大曆十四年己未, 受命聘日夲國, 其國王知其賢, 欲勒留之. 㑹大唐使臣髙䳽林來, 相見甚懽,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乃還.

대력(大曆) 14년 기미(779)[94]

에 명을 받아 일본국을 방문하였는데, 그 국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그를 억지로 잡아 두려 하였다. 마침 당의 사신 고학림(高鶴林)이 와서 둘이 서로 만나 매우 기뻐하자, 왜인들은 김암이 대국(大國)에도 알려져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때문에 감히 잡아 두지 못하였고 이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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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43 열전제3 김유신 하(下) 부 김암


삼국유사 권제2 기이제2 원성대왕조에는 당 정원(貞元) 2년 병인 즉 786년 10월 11일에 '일본왕 문경(日本王文慶)'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 원성왕에게 신라의 보물 만파식적을 요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일연은 여기서 '일본왕 문경'이라는 인물이 일본에 실제로 존재했던 군주인가 아닌가, 실존했다면 어떤 군주를 가리키는 것인가를 살피고자 《일본제기(日本帝紀)》라는 문헌을 끌어다 대조하며 고증을 시도했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 이 책에서는 일본의 55대 왕이 '문덕왕(文徳王)'이라고 전하고 있었고, 실제로 일본서기를 비롯한 육국사에서 55대에 해당하는 천황은 몬토쿠 덴노(文徳天皇, 재위 850.5.31~858.10.7)로 《일본제기》라는 문헌과 대수가 들어맞는다. 몬토쿠 덴노는 일연이 본 《일본제기》에 등장하는 '일본왕 문경'과 그나마 연대상으로 가까운 인물이었지만 문경이라는 이름 자체는 《일본제기》에서도 살필 수 없었기 때문에 일연은 '일본왕 문경'이라는 인물에 대해 실존했는지 의문을 제기했다. 신라에 만파식적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던 이 일본왕 문경이라는 존재 역시도 일본의 어느 호족이 스스로 '일본왕'을 사칭한 위사를 보낸 것일 가능성도 염두에 둘 수 있겠지만, 이것도 확실하지 않다.

재미있게도 삼국유사의 해당 원문에서도 몬토쿠 덴노를 가리켜 문덕'왕'이라고 쓰고 있는데, 책의 제목을 일본'제'기라고 한 이상 일연이 참고했을 원본 《일본제기》에서는(이 책이 신라 시대의 저술인지 고려 시대의 저술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분명하게 '덴노(天皇)'라고 표기되어 있었고 이를 일연이 인용하면서 '왕'으로 고쳐 표기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당시 고려가 몽골 제국의 부마국으로 반복속되어 기존의 외왕내제로 운영되던 독자적인 황제국 지위 역시 모두 격하되어 있던 상태였던 점을 감안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당시 중국 대륙에서 '황제'를 칭했던 송(남송)이나 금나라는 모두 원에 멸망당한 상태였고, 고려는 40여 년의 전쟁 끝에 고려의 왕조와 영토, 백성에 대한 통치는 그대로 유지한다는 '불개토풍'을 조건으로 원과 화친했지만, 고려의 왕이 자진해서 쿠빌라이 칸의 부마가 되기를 자처해 고려 왕실에 몽골의 공주가 시집오면서 이후 고려 왕실을 비롯한 사회 전반에 몽골 문화가 침투했고, 몽골에 반복속된 신세로 행정 기구마저 원의 제후국으로 강등, 통폐합되는 수모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차례에 걸치는 몽골의 일본 원정(1274년, 1281년)도 이 무렵에 벌어졌던 일이다.

쇼토쿠 태자가 처음 수 양제에게 사신을 보내면서 "해 뜨는 땅의 천자가 해 지는 땅의 천자에게 글을 보낸다"라고 말한 그 유명한 문장은 쇼토쿠 태자 당대는 물론 후대의 고려나 중국 송 왕조 모두 알고 있었으며, 당대 고려나 송은 모두 이러한 일본의 태도에 대해서 "내버려 두고 상대하지 말자"라는 이른바 '치지도외'의 자세로 일관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병먹금. 자기들 나라에서나 천황이라고 부르든 말든 알 게 뭐냐, 그 대신 인정은 못 해 준다, 라는 자세였는데, 현대 한국에서는 이때 고려/조선이나 송의 반응을 들어 그때처럼 천황이라는 칭호를 대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거냐며 천황 칭호를 주장하는 이들의 주요 논거가 되고 있다.[95]

조선에서도 일본의 실권자는 쇼군(막부의 최고 주권자)이며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상징임을 파악하였다. 신숙주가 이미 해동제국기에서 '일본 황실의 세계'를 자세히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막부에 권력이 넘어간 이래로,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천황은 아무런 실권이 없었으며 일본의 얼굴마담 정도였다. 오죽하면 용재총화에는 당시(15세기~16세기) 조선에서 딱히 쥐뿔도 없으면서 괜히 떠받들어지는 존재를 두고 "니가 왜황이냐"라고 놀려 부르는 말도 있었다고 언급될 정도니 옆동네 조선에서도 천황은 자국 내에서도 실권이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었다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일본의 외교 주체는 쇼군이었고, 쇼군이 중국이나 조선에 대해 자신을 일컫는 말은 '일본국왕(무로마치 막부)'이나 '일본국 대군(에도 막부)'이었다. 이것이 잠시 수정된 것은 숙종 대의 일로, 아라이 하쿠세키가 건의하여 '일본국 대군'이라고 하던 쇼군의 칭호를 '일본 국왕'으로 상향시켜[96] 이후 조선에서도 천황을 '왜황(倭皇)'이라고 부른 것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의 역사에서는 이 호칭을 거의 신경쓰지 않았다.[97]

그러다가 19세기 말 막부 타도와 함께 대정봉환, 왕정복고(1876)가 이루어지고 개혁(폐번치현, 근대화와 사무라이 폐지)이 시작된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사신단이 대놓고 "일본 천황이 조선 국왕보다 의전서열이 높다."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시각은 이미 에도 시대 말기부터 있었다. 일단 '천황'은 황제의 칭호중 하나였고 조선 국왕은 명목상 청나라 황제의 신하였기 때문에 '천황=황제 > 조선 국왕'라는 논리였다.

일본은 막부가 존립한 시절까지만 해도 막부가 외교를 전담했는데, 심지어 쿠로후네 사건(미국 페리제독의 무력적 개항요구) 때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어서 총영사 해리스는 쇼군을 일본의 사실상 국가원수[98]로 간주하고 도쿠가와 이에사다에게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피어스의 친서를 건냈다. 또한 미일화친조약이나 영일우호조약 등 각종 불평등조약에서 일본의 대표자로서 최종적으로 서명한 사람은 도쿠가와 이에사다(당시 에도 막부의 쇼군)였다. 미국 정부영국 정부 역시 일본 조정이 아니라 막부를 협상대상으로 삼았음은 조선 조정과 다를 바 없다.

조선이 봤을 때 일본과 동등한 관계에서 화친해야 마땅하였다. 사실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에 빠진 당시 조선은 자신들을 '천하'라며 스스로 높임과 동시에 일본은 천하 바깥의 교화되지 않은 무리라고 여겨 서로 동등하게 생각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결국 조선 측에서 일본이 화친을 하고자 한다하여 여기서는 한 수 접고 들어가 주었다. 이후 조선이 독립국으로서 '대군주' 칭호로 격상시키고 대한제국으로 국제가 바뀌면서 '대한제국 황제'가 '대일본제국 덴노'와 명목상으로나마 동등해짐으로서 이 문제는 형식적으로는 완전히 해결된다. 그러나 한·일 불법병합(1910.8.29. 대한제국의 국권피탈) 이후 대한제국 황제는 왕공족의 일개 가문명으로 불리는 이왕가로 격하되면서 덴노보다 의전서열이 아래에 위치하게 되고 일본의 귀족인 화족보다는 높은 자리에 위치하게 된다.

청나라는 1871년에 일본과 청일수호조규를 맺었는데, 이것도 엄밀하게 '대일본제국 천황'과 '대청 황제'라는 대등한 관계로서 국교를 맺었던 것은 아니다. 청나라 건국 이후 일본을 당시 통치하고 있던 에도 막부와 조공-책봉 관계를 맺지 않았던 상태에서[99] 청나라로서는 일본이 감히 자국 군주를 천황이라 부르며 청나라 황제와 맞먹으려 드는 것을 도저히 용납하지 못했고, 청나라는 일본이 기존의 조공-책봉 관계가 아니라 서구식의 '대등한' 외교를 요구했을 때 그것이 자국 중심의 조공-책봉 체제라는 기존 질서를 와해시킬 것을 우려해 반대하는 목소리도 많았다. 이때 이홍장이 나서서 "일본은 조선이나 월남과는 달리 조공-책봉 체제에 속해 있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일본과 수교하지 않으면 일본이 구미 열강에 붙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이유로 일본과의 수교를 주장했고, 1871년 7월 조인된 ‘청일수호조규(淸日修好條規)’와 ‘통상장정(通商章程)’은 그 체결 주체가 청나라 황제와 일본 천황이 아니라 청나라 전권대신 이홍장과 일본측 전권대사 다테 무네나리로 됐다. 명칭이 조약이 아니라 조규인 것도 청나라 황제의 특별한 배려로 청일수호가 이뤄졌음을 드러내기 위한 이홍장의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 형식상 중국 황제와 일본 천황이 대등한 외교 관계를 맺은 것이 아니라 각자가 임명해 보낸 전권대신끼리의 외교 관계라고 간주한 일종의 편법이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천황, 일왕이라는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어 왔다. 그러다가 1989년 재일동포 지문날인 파동 이후 반일 감정이 상당히 격화되면서 언론에서는 일황, 일왕이라는 명칭만 사용하게 되었다.

'일왕'이란 당연히 '일본 (국)왕'의 줄임말로 영국 국왕을 '영왕'이라 부르거나 태국 국왕을 '태왕'이라 호칭하는 경우는 없고 일본이 유일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예전 한국의 언론에서 '영왕', '태왕' 이런 표기가 비교적 최근, 그러니까 1997년까지도 존재했다. ## '영왕' 표기는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검색해 보면 1947년부터 1999년까지 158건이 검색되고, '태왕'은 처음 등장하는 1959년부터 1999년까지 모두 15건이 검색된다. 1982년 2월 6일자 경향신문에서 조지 6세의 사망을 '영왕 조지 6세 서거'라고 사용한 것이 보이고, 1997년을 마지막으로 경향신문에서는 '영왕' 표기가 보이지 않는데, '영왕' 표기가 한국 언론에서 사라진 것은 아마도 영친왕 이은을 약칭하는 '영왕'이라는 표현과 헷갈릴 소지가 있어서였던 듯 보인다. '태왕' 표기도 1997년 1월 17일자 조선일보 기사를 마지막으로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리고 그전부터 죽 쓰이고 있었던 '영국 (국)왕' 또는 '태국 (국)왕'이라고 하는 표기가 한국의 각 신문지면에 주류 표기로 등장하게 된다.[100] 영왕이나 태왕이란 단어에는 다른 뜻도 있어 혼동의 여지가 있고, 벨기에 등 한국 내에서 통용되는 한자국명이 따로 없는 다른 군주국 군주는 '벨기에 국왕'과 같이 풀네임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점을 감안하면 '일왕'이라는 호칭이 유독 자리잡기에 좋은 환경이기는 했다. 미국군을 미군이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한 사례인 셈이다.

그러나 국민의 정부 시절인 1998년의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으로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호칭할 때는 '천황'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천황, 일왕 표현이 혼재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참여정부독도 분쟁으로 천황 표기의 일왕(日王) 전환을 추진하기도 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공문서 등에 명확히 사용하고 있다. #

명목상의 국가원수로서 필연적인 문제이기도 하지만, 근대 이후 강한 갈등 관계였던 한일관계 사이에서는 '천황', '덴노', '일왕' 등의 호칭 논란에서 알 수 있듯 중요한 갈등의 구심점이 되기도 하는 존재다. 특히 천황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는 것은 군국주의 시대의 만행이 천황의 이름을 걸고 행해졌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어, '일본(제국과 천황의 이름 아래 저질러진 범죄)의 대마왕'으로 여기기 때문이다.[101]

천황은 한때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에서 해당지 총독을 임명하는 고유권한도 가진 적이 있었기 때문에 천황이 전쟁 책임은 면책받을 수 있어도 아시아 식민통치의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총독부의 직속 상관이 천황이 되므로 총독의 위치가 사실상 총리대신과 비슷했다.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본국 내각의 수장인 총리대신이 강했겠지만. 물론 1945년 패전 이후 식민지를 모두 상실함에 따라 총독 자체가 사라져 임명권한도 폐지되었다.

쇼와 덴노가 공식상에서는 아니지만 황실의 풍습이 조선의 풍습과 비슷하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고[102] 전해지고, 아키히토 천황 스스로가 '일본의 황족에 백제인의 피가 섞여 있다'는 발언을 했을 때 한국의 소위 재야사학계에서 많은 관심을 가졌지만, 그 근거가 고사기에서 무령왕 - 간무 덴노가 모계 방향으로 먼 연관이 있다고 한 문구 수준이었으므로 확대 해석은 삼갈 필요가 있다. 맞을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여진족 신라인설[103]이 학술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지 않듯, 약 300년간 떨어진 이러한 머나먼 혈연 관계는 고대 백제와 왜국의 관계가 가까웠음을 일정 부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일본 황실의 혈통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볼 근거가 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단지 현 아키히토 천황이 외교적 수사[104]를 구사하였을 뿐이며, 오히려 저 발언을 악용해서 대한제국 병합에 대한 정당화를 주장할 수도 있다는 떡밥도 있었고, 일본 제국의 악명 높은 내선일체가 그 떡밥에서 피어난 부산물이기도 하지만, 사실 세계적인 관점으로 봤을 땐 이마저도 큰 의미를 두긴 어려운 것이, 한 국가의 왕실이 다른 국가의 혈통과 섞이는 것쯤은 매우 흔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당장 20세기 초 유럽만 봐도 그렇고. 현재는 군주가 먼 옛날 피 좀 섞였다고 다른 나라를 병합할 수 있는 시대가 이니다. 애초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 전혀 의미가 없는 떡밥일뿐.

일단 대한민국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명시한 호칭은 '천황'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천황을 공식 용어(고유명사)로 인정하고 이를 국내외 외교 용어로써 사용하고 있다. # 한편 북한에서는 일본의 왕조 체제를 강조하기 위해 '천황'이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조선 시대에는 주로 쇼군에게 부르는 칭호였던 '일본 국왕'을 천황에게도 사용하였으나 천황(天皇), 왜황(倭皇), 왜왕(倭王), 국왕(國王), 위황(僞皇, 가짜 황제), 기군(其君, 그 나라 임금) 등 다종다양한 명칭을 혼용하여 사용해 왔다.


8.1.1. 방한(訪韓) 여부[편집]


역사적으로나 현재까지도 역대 천황들은 역대 일본 총리나 각료들과는 달리 1907년 다이쇼 덴노가 황태자 시절 한 번 방문한 것 외에는 공식적으로 한반도를 방문한 기록이나 사례가 없다. 또다른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에는 쇼와 덴노가 방문한 적이 있으며 아키히토도 1991년과 1992년, 2017년에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중국, 베트남 등 다른 아시아의 일본 제국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국가들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제강점기도 겪었고 임진왜란 등을 통해 일본에 의해서 군사적으로 침략 받았으며,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들 못지 않게 일제 시기의 일본에게 더 큰 피해를 입었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는, 근방(近邦)임에도 불구하고 수상이나 각료들을 제외하고 천황은 물론 황족 등도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 부부가 방한한 것 외에는 따로 방한한 적이 없다.

다만 예전에 개인적으로 방문한 친족들이 있었다. 1970년 영친왕의 장례식 때나 1989년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가 그 예다. 이방자 여사의 장례식 때는 전술한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의 아버지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05]유리코 비 부부가 조문했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본 방계 황족 출신이기 때문.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차남인 이구의 장례식 때는 주한일본대사가 조문했고, 아키히토 덴노미치코 황후 부부 명의의 조화가 왔다.

일본 정부궁내청에서는 1998년 10월 7일,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의 일본 국빈방문시 천황과 김대중 대통령과의 만찬에서 처음으로 아키히토 천황이 한반도에 대한 '고통'과 '사과' 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석상에서 처음으로 언급함으로써 과거의 일본의 모습과 다른 면모를 보였다.아키히토 일본국왕 발언일본 국왕 김대통령 초청 만찬서 한국 고통 사과

2009년 이명박 대통령이 천황 방한을 추진할 것이라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국민들은 물론 호국 및 애국단체와 독립단체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과 반일단체들이 강력하게 반발하거나 규탄하고 나섰으며 한국 국민들 대부분도 천황의 방한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결국 한국 정부가 급히 "천황의 방한 계획은 사실상 없다"고 발표하면서 분위기가 누그러지기도 하였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은 천황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발언을 날렸고 이에 우려하는 말이 나오자 해명하였다.

사실 이명박 이전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도 천황 방한을 추진하거나 추진하려고 한 적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과거사 문제해결과 반일 성향이 짙은 국민정서 그리고 반일 및 여러 단체들의 반발과 반대, 일본 측의 거부로 인해 모두 실패하였거나 무산된 적이 있다. 게다가 노무현박근혜, 문재인의 경우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대일 외교와 관련해 천황 방한을 아예 언급, 추진하지 않았을 정도였다.[106] 일본의 상황도 비슷해서, 천황이 한국에 간다는 것은 또 다시 한국에서 천황에게 일제강점기일본군 위안부 등 한일 간 역사 문제와 관련해 사과를 요구할 수도 있는 등 난처한 입장이 된다는 것이 자명하기에 방한이 매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상기된 대로 천황은 정부의 통제를 강하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보다 일본과 더욱 사이가 안 좋은 중국에도 1992년 아키히토 천황이 중국을 방문한 것처럼, 언젠가는 한국도 방문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중국조차도 1970~80년대 당시 쇼와 덴노가 살아있던 시절까지는 천황의 방중이 중국 국내에서도 정치적으로 금기시되었고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고 현 아키히토가 즉위할 때까지 천황이 중국을 방문하지 못했다.

만일 성사된다면 대한민국에 방한한 국가원수들의 기념행사인 무궁화대훈장, 대훈위 국화장 훈장 교환이 천황에게도 이루어질지도 실로 주목된다.

그러나 2016년 아키히토가 생전 퇴위 의사를 밝히고 이로 인해 아키히토 천황의 퇴위 작업이 일본에서 진행되면서 큰아들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황위를 양위한 이후 현직 천황 신분이 아닌 '상황 신분으로라도 한국을 방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견해도 존재하며 차기 천황인 나루히토의 방한 여부 역시 귀추가 주목된다.

2017년 9월 23일 이낙연 국무총리가 일본 아사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하기 전 아키히토 천황의 한국 방문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다.# 이수훈 신임 주일대사도 "아키히토 천황의 방한이 한일관계를 녹이는데 큰 기여를 하는 게 아니겠냐"며 일본 천황의 한국 방문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천황 방한이 이뤄지면 한일관계에 발전될 것으로 본다"며 천황 방한을 거론하는 발언을 했다.# 생전 퇴위가 결정된 아키히토 천황의 방한에 대해 한국과 일본 국민의 70% 이상이 찬성한다는 설문조사 결과가 나왔다.#

2019년 2월 8일, 문희상 국회의장이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천황에게 사죄를 요구하는 발언을 날려, 일본 정계와 언론이 일제히 강하게 반발하였다.#

레이와(令和) 신연호 발표 하루 전에 2019년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88년 9월 당시 일본 외무성의 무라타 료헤이(村田良平) 사무차관이 이원종 주일대사와의 비공식 협의에서 '아키히토 황태자의 조속한 한국 방문이 실현되길 기대한다'는 일본 입장을 전달했고, 이 대사가 이를 본부에 보고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전했다.[107] 아베 신조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이 1986년 3월 당시 아키히토 황태자 부부의 방한을 검토하고 있다고 했으나 그해 8월 미치코 황태자비의 건강 문제 등으로 방한 계획이 보류됐다.#


8.2. 타국과의 관계[편집]


외교 프로토콜에 따른 영어 경칭은 His Imperial Majesty다. 정식 영어 명칭도 Emperor of Japan/Japanese Emperor이며 영어권에서 주로 이렇게 통용된다.

일본에선 각각의 천황은 여타 군주들처럼 칭호를 붙여 구분하며(진무 덴노, 덴무 덴노), 일세일원제가 확립된 현대의 천황은 홍무제, 영락제처럼 메이지 덴노쇼와 덴노연호를 붙여 지칭한다. 또한 옛 중국의 황실 용어를 받아들여 천황의 죽음을 붕어(崩御)라고 쓰고 부른다.[108]

중국의 경우에는 새 이름을 만들어서 부를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는지 그냥 천황(중국어로 톈황) 호칭을 쓰고 있으며, 난징대학살 연구자들도 쇼와 덴노를 비판할 때도 천황이라 표기한다. #


8.3. 일본공산당과의 관계[편집]


일본공산당은 과거 천황이 참석하는 국회 개회식은 물론 1990년 아키히토 덴노의 즉위식에도 불참하고 축사의결에 반대했다.

1932년 5월 당시 코민테른에서 결정된 '일본의 정세와 일본 공산당의 임무에 관한 테제'에서는 일본지배체제를 절대주의적 천황제, 지주적 토지소유, 독점 자본주의의 세 축으로 규정하였고 지주 및 독점 자본의 대변자 그리고 절대주의적 정치체제로서의 천황제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따라서 천황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혁파하고 이윽고 프롤레타리아 민중 혁명을 통해 일본을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는 것을 일본공산당의 제1과제로 삼았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인민공화국 문서로.

그런데 2003년을 기준으로, 아키히토 천황의 거듭된 평화주의적 행보와 여성 천황도 수용해야 한다는 여론으로 인해 상징에 불과한 천황제에 대해 마지못해 인정해 준다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꿨다. 이는 대중정당으로의 도약을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는데 노선 전향 이후 일본공산당 내부의 국제파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천황에 대해 마냥 곱게 보는 입장은 아니긴 하다. 해당 기사는 시위대처럼 천황제를 당장 없애자는 건 아니고, 즉위식이 정교분리에 어긋난다며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이건 일본국 헌법에 명시된 일본과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천황을 인정했다는 것으로, 천황의 국정에 관한 권한이나 권위는 일절 인정하지 않는다. 시이 가즈오 일본공산당 위원장은 "천황은 정치권한이 없으므로 과거사 사과를 할 자격조차 없다"는 요지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이는 공산당이 평화헌법 개정을 막기 위해 호헌파에 속해 있지만 정작 일본국 헌법(평화헌법)의 첫 조항에 천황제가 명시되어 있다는 아이러니함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공산당이 여당의 자리에 올라 그들이 꿈에 그리던 민주주의 혁명을 달성한다면 국민들에게 천황제 존속을 묻는 여론조사나 국민투표를 시행할 수도 있다. 현재는 천황제 적극 반대도 아니고 적극 지지도 아닌 애매한 입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일본공산당 강령에서 "천황의 제도는 헌법상의 제도이며 그 존폐는 앞으로의 정세가 익었을 때 국민의 총의에 의해서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天皇の制度は憲法上の制度であり、その存廃は、将来、情勢が熟したときに、国民の総意によって解決されるべきものである。)"라며 국민의 총의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9. 논란[편집]


일본 사회, 일본인 사이에서 천황이나 황실에 대해 '감히' 비판하거나 그 행적을 평가하기라도 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기시되며, 역사적 평가 뿐만 아니라 단순한 풍자 및 해학, 가공의 패러디나 오마주를 생산하는 것도 일체 용인되지 않는다. 표현, 언론 및 출판의 자유는 황실을 대상으로는 사실상 예외사항이 되며, 일본 어디에서나 천황에 대한 화제를 입 밖에 꺼낼 때에는 그저 '국민으로서 예의를 지켜 최소한의 인사치레, 경의만 표하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 되어 있다. 이를 가리키는 일본 내 시사용어가 국화 터부(菊タブー, 키쿠타부-)로, 곧 "국화(황실) 이야기만 나오면 터부(금기)가 된다"는 말이다.

법률상으로는 일본 천황과 황실 역시 일반 국민에게 적용되는 모욕죄명예훼손죄를 똑같이 적용받으며, 황실이 이 죄의 피해를 입을 경우 총리가 황실을 대신하여 고소권을 행사할 수 있다. 과거 일본 제국 시절에는 황실에 대한 불경죄 조항이 형법에 있었으나 현행 일본 형법에서는 삭제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이러한 일로 국민을 고소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반면, 민간에서 합의된 사적제재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어 극우 단체로부터 집단 협박이나 스토킹은 물론 직접적인 테러 및 살해 위험에까지 노출될 수 있다. 이들의 표적이 될 경우 일본 경찰에 신고해도 표면적인 조치만 이루어질 뿐, 일본 사회의 역린을 건드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신변 보호를 받기 어려우며, 사실상 일본 국내에서 정상적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워진다.

일본 외에 주요 강대국이나 지역강국이면서도 아직 왕실이 존재하는 영국이나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유럽의 입헌군주제 국가들은 국왕과 왕실에 대한 국민의 평가가 상당히 자유로운 데 비하여[109][110] 일본에서는 자국 군주에 대한 신성불가침성이 매우 강력하며, 특히 일본 제국 시대의 천황제 파시즘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연합국 최고사령부에서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일본 황실에 전쟁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합의하면서 황실을 정치적 '금기'로 보는 인식이 더욱 견고해졌다.[111]

2012년 이명박 대통령 천황 사과 요구 때는 일본에서 집단 반발이 일어나서 한일관계가 얼어붙은 적도 있었다.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은 "일왕이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면 우선 지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저질렀던 악행과 만행에 대해서 진심으로 반성해야 한다. 일왕이 독립투사들 앞에서 고개를 숙여서 사죄를 한다면 일왕 방한(訪韓)도 가능했을 것"이라고 발언했는데, 이것에 대해 엄청난 반발이 일어나서 한일관계가 악화된 바 있다. 한국에서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만이 주로 언급되지만, 일본 내에서는 좌우를 가리지 않고 큰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다. 집권 민주당과 자민당은 물론 과거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던 공산당 역시 비판 성명을 낼 정도였다. 다만 공산당이 비판을 한 건 천황을 신성시해서는 아니라 오히려 아무런 공식적 권력도 없는 천황에게 과거사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천황제를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하였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2019년 2월 문희상 국회의장이 다시 천황의 사과 요구를 했을 때에도 일본 여론은 한국에 대해 굉장히 싸늘해졌고, 평소 한국에 중립적으로 알려진 인사들까지도 혐한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만 자국 군주에 대한 태도에 있어 일본 사회가 유럽보다 경직된 것은 맞으나 그렇다고 태국이나 아랍 왕정 국가들마냥 완전히 비판을 틀어막는 건 아니고 실제로 천황제에 대한 반대시위도 소수나마 존재한다. 일례로 2019년에도 참여 인원은 극소수였으나 천황제에 반대하는 시위가 열렸으며 과거 천황제 폐지를 주장했던 일본 공산당 또한 그러한 이유에서 정치 활동의 제약을 받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천황은 일본인들에게 중요한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소수의 급진적인 좌파나 공화주의자를 제외하면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은 많지 않다. 황족 개개인의 인간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는 일본인들은 상당수 있지만 천황과 천황제 자체를 모욕하는 것은 일본 내에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다만 친왕이나 내친왕, 친왕비 등 다른 황족들에 대한 비판은 약간 느슨한 편이다.[112]

일단 히로히토 천황은 태평양 전쟁에 있어 엄연히 책임이 있는 인물이다. 적어도 2차대전 이후로는 평생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으며 전후 '극우주의' 세력과는 선을 그었고, 그의 아들과 손자인 아키히토나루히토는 적극적으로 과거사에 대해 반성하는 언행을 보인 인물들이다. 2차 세계 대전 이후로 일본에서 '과거사 문제'나 '극우주의'를 일으키는 세력은 자민당 내 보수방류가 주류이며, 온건파인 보수본류는 과거사 문제 및 극우주의와는 선을 긋고 있다.


10. 칭호 표기 논쟁[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천황/칭호 표기 논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1. 여담[편집]


실권이 없기 때문에 한가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천황은 생각보다 정말 바쁘다! 맘편히 개인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시간은 생각보다 상당히 제한적이다. 내각이 이미 결정한 일에 관한 것이라도 그 문서에 형식상 도장찍어 인증을 일일이 해줘아하며, 고위 공무원을 임명하는 등 형식적인 국사행위는 천황이 일일이 해주어야 하고, 이 행사 저 행사 불려다니며 항상 반듯한 모습과 표정을 유지해야 한다. 또한 건강문제로 아프다고 하루 병가 내는 것 또한 쉽지가 않다.

천황 본인뿐 아니라 황후와 공주, 친왕 등 대부분의 황족이 이와 같이 정해진 일정에 따라 행사에 참석하고, 얼굴을 비추고, 카메라 앞에서 웃어주는 일들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황족의 공적인 거동을 일본에서는 '공무(公務)'라고 칭한다.

천황을 비롯한 일본 황실성씨가 없다. 히로히토(裕仁), 아키히토(明仁), 나루히토(徳仁) 등 모두 개인 이름만 있다. 결혼 전 성씨가 있었던 황후나 친왕비도 황실로 시집 올때 성씨가 없어진다. 성씨는 인간들이나 가지는 건데 일본 신화 구조상 천황은 '보통 인간'이 아니고 신의 혈통에서 직계로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한다.[113]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고 쇼와 덴노인간선언을 했고 21세기에 천황이 사실은 인간인 걸 모르는 사람은 일본에도 거의 없지만 그래도 성이 없는 상태는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단 방계 황족은 미야고(궁호)라는 걸 가지는데, 성씨와는 다르지만 학교에 다닐 때에나 사회생활을 할 때 등등 성씨 비슷하게 사용된다.

친왕제는 과거 대한민국중국에서도 볼 수 있지만, 공주를 '내친왕'으로 봉하는 건 일본만의 특징이다. 친왕/왕은 평민 여성과 혼인하더라도 지위를 유지할 수 있지만, 내친왕/여왕은 평민 남성과 결혼할 시 황적을 이탈해 평민으로 강등된다. 사야코 공주, 노리코 공주, 아야코 공주 등이 이에 따라 평민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즘 들어 문제가 되고 있는 남자 황족 부족 우려와 맞물려, 앞으로는 이러한 경우에도 황족 신분을 유지할 수 있도록 황실전범을 개정하자는 얘기도 잠깐 있었다. 그러나 이 논의는 히사히토 친왕이 태어나자 흐지부지됐다. 또한 일본 황실에서도 어김없이 남존여비의 분위기는 지속되어, 아무리 천황의 딸인 내친왕이라 할지라도 남편보다 먼저 앞서 걷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자세한 내용은 구로다 사야코 문서 참고.

쪽바리와 더불어 소일본(小日本), 일본귀자(日本鬼子) 등과 같이 일본을 욕하는 말조차도 거침없이 모에화해버리는 21세기 일본의 오타쿠들이 워누(倭奴)와 더불어[114][115] 절대로 모에선으로 건드리지 않는 존재이기도 하다.[116] 천황은 일본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로 취급받기 때문에 이를 모에화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 비난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존하는 황족을 모에화하거나 천황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는 것뿐이다. 미카도니 하는 명칭으로 천황 비슷한 위치에 있는 캐릭터로 만든다.[117]

초대 진무 덴노, 여성 천황들(사이메이, 메이쇼 등), 근대 천황들(메이지, 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그리고 근대 이전에 그려진 초상화가 있는 천황들을 빼고는 다들 초상화의 모습이 유사하다. 이는 당연히 천황들의 어진이 대개 당대가 아니라 거의 후대의 상상화이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역대 일본 천황 125대 진무 천황 ~ 헤이세이 천황(歷代の日本天皇125代[神武天皇 ~ 平成天皇])이라고 치면 천황들을 그린 모습이 나오는데 너무 부자연스럽다. 특히 2대 ~ 49대 천황의 경우에는 초상화의 색깔이 없고 단조롭다. 그리고 75대 ~ 93대 천황 중 81대 안토쿠 덴노를 제외하고는 초상화에 나오는 얼굴이 비슷비슷하다.

한편 초상화가 없는 천황도 있는데 바로 고분 덴노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는 그가 태어나서 죽은 이래 천 몇 백 년 동안 천황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1년 도쿄에서 아키히토 천황이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사고로 대국민담화를 할 때 테레비 도쿄에서는 대국민담화 방송을 틀지 않고 정규방송을 하는 용자(?) 짓을 하였다. 왜 그런지는 테레비 도쿄 문서로.

2018년 야스쿠니 신사에서 당시 천황인 아키히토에게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참배를 요구하였으나 아키히토는 거절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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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 중 하나만 쓰거나, 혹은 두 단어를 합쳐서 '긴조 헤이카(금상 폐하)'라고 부르기도 한다.[2] 가운데 문양은 금빛 국화 문양을 띠고 있는 일본 황실의 인장으로, 관습법상 일본의 국장이기도 하다.[3] 일본국 헌법은 신자체와 현대 가나 표기법 시행 이전에 제정된 뒤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문 원문은 구자체(정자)에 역사적 가나 표기법에 따라 표기되어 있다.[4] 대부분의 공화국이 1장에 국체의 성격(예: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 헌법)이나 국가(권력)의 존재 이유(예: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 존엄성을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 독일 기본법)를 삽입하나, 일본국 헌법에서 천황이 가장 앞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천황의 존재가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단, 일본국 헌법의 제1조에서도 '일본 국민에 주권이 있으며', '천황 지위의 근거는 국민의 의사에 기초한다'고 하여 그 권력 구조를 드러내고는 있다. 비록 이게 일본 국민이 그 의사를 직접 밝혀 근대적인 투표를 통해 천황을 선출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카리야 테츠의 "일본인과 천황"에서도 '천황 선거는 불가능하다'면서, '상징'이라는 표현은 대단히 모호하고, 주권을 지닌 일본 국민과 천황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도 나타내지 못한다며 짚은 부분이다.[5] 생전 퇴위는 고카쿠 덴노 이후 202년만에 발생했다.[6] 일본국 헌법 시행 이전 일본 제국은 공식적으로 국가신토를 종교가 아니라 본래 일본인의 정신의 일부인 '국체(国体, 고쿠타이)', '초종교(초신앙)'으로 취급하여, 일본의 신민이 천황을 섬기는 것을 '종교의 자유 이전의 문제'로 취급했다. 그러나 비교종교학적 측면에서는 엄연히 종교였으며, 이때 천황에 대한 숭배 거부로 탄압당했다가 전후 복권된 교파의 신도들에게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하면 직접적으로 비난하지는 못하고 "야스쿠니 신사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우리 신사의 신(神様)은 몇백 년 전부터 모셔온 신입니다." 라 에둘러 말한다. 신토 문서 참고.[7] 일본국 헌법 제3조에서 "천황의 국사에 관한 모든 행위에는 내각의 조언과 승인을 필요로 하며, 내각이 그 책임을 진다.(天皇の国事に関するすべての行為には、内閣の助言と承認を必要とし、内閣が、その責任を負ふ。)"에서 따 온 명칭이다.[8] 이 열거된 국사행위들은 '내각의 지명'으로, '국민의 이름'으로와 같은 단서가 붙어 있고, 따라서 제도적으로는 실권이 천황에게 있지 않고 국회, 내각 및 국민투표를 통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시행되도록 되어 있다.[9] 일본어의 청음은 한국어의 거센소리만큼 강한 소리가 아니기 때문에 실제 발음상으로도 덴노에 가깝다. 한국어에선 유성 자음(울림소리) 자체가 ㄴ, ㄹ, ㅁ, ㅇ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래어 표기법에서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일본어의 청음을 예사소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영하여 어두의 청음을 거센소리(ㅋ, ㅌ, ㅊ)가 아닌 예사소리(ㄱ, ㄷ, ㅈ)로 표기한다.[10] 한자를 따로따로 읽으면 てん(ten)과 おう(ō)이지만, 붙여 읽을 때는 연성(連声)이라는 현상 때문에 n이 덧난다.[11] 상대적으로 최근인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에티오피아 제국, 팔라비 왕조 등 황제 혹은 그와 동등한 직함을 가진 제국들이 더 있었지만 군주정의 무덤이라 불리는 20세기를 넘기지 못하고 이들 역시 혁명으로 무너졌다.[12] 한자문화권 명칭의 경우 교황과 함께 단 둘인 직함이다. 서양에서는 교황을 원래 '파파'라고 불렀으며 여기에는 '황제'나 '군주'라는 의미는 들어 있지 않다(교황 문서 참고).[13] 일본서기: '日出處天子致書日沒處天子無恙云云', 수서: '開皇二十年,倭王姓阿每,字多利思北孤,號阿輩雞彌,遣使詣闕。上令所司訪其風俗。使者言倭王以天為兄,以日為弟,天未明時出聽政,跏趺坐,日出便停理務,雲委我弟。高祖曰:『此太無義理。』於是訓令改之。'[14] 고려 원종이나 조선 선조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원종은 당시 일본 원정을 추진하던 쿠빌라이에게 이 말을 가져다 들며 "쟤들은 이만큼이나 멍청하고 교만해서 애초에 상종할 가치가 없다니까요"라며 일본 원정을 중지하게 하려는 의도였고, 선조는 심유경이 일본과의 강화 협상을 추진하려 한다는 말에 "저들은 중국한테도 동황제(東皇帝)이니 서황제(西皇帝)이니 하던 근본도 없이 막나가는 것들인데 저런 것들하고 무슨 강화 협상이 되겠나? 저놈들이 어떤 놈들인데."라며 회의적으로 반응했다.[15] 백제는 425년에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의 칭호를 받았다.[16] 김후련, 「동아시아에 있어서의 고대일본의 자타인식」, 『역사문화연구』21, 2004[17] 그러니까 수와 대립하던 고구려가 일부러 왜를 대국인 양 포장해서 수를 견제하려 한 일종의 뻥카라는 이야기. 정작 수 양제도 그렇고 중국 사람들은 일본에서 '해 뜨는 동쪽의 천자' 운운한 것에 대해서 이건 뭐 병신도 아니고 이상의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18] 당태종 말~ 무주 말까지를 다룬 드라마 무미랑전기에서도 이점을 반영하여 작후부터 황제 즉위 전까지의 무후를 천후라고 칭한다.[19] 전근대 한국에서도 널리 쓰였던 칭호인 '주상'의 일본어 발음이다.[20] 한국어로 번역하면 '대궐'이다.[21] 그냥 '천자'라는 한자어를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22] '십선계(十善戒)를 지킨 공덕으로 왕이 되었다는 뜻이다. 십선계란 ① 살생하지 않는 것 ② 도둑질하지 않는 것 ③ 삿되게 간음하지 않는 것 ④ 망령된 말을 하지 않는 것 ⑤ 현란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것 ⑥ 험담하지 않는 것 ⑦ 이간질하지 않는 것 ⑧ 탐욕을 부리지 않는 것 ⑨ 성내지 않는 것 ⑩ 삿된 견해를 갖지 않는 것 등이다.[23] 코를 만지거나 귀를 씻거나 기타 등등[24] 기록에 따라 스사노오의 아들/6대손/7대손이라고 하며, 스사노오의 딸 스세리히메와 결혼해 스사노오의 사위가 된다.[25] 이자나기이자나미가 미처 다 하지 못한 나라/땅 만들기를 오쿠니누시가 계속 이었다는 의미.[26]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중앙의 권력 지배가 좀처럼 닿지를 않아서 교토 조정이나 교토 서쪽 지역 주민들에게는 아즈마에비스(東夷)라 불리며 '오랑캐' 취급을 받았고, 그런 탓에 지방관들이 중앙의 권력이 미치기 어렵다는 점을 악용해서 좋을 대로 해먹는 일도 많았다.[27] 타이라노 마사카도가 신황을 자처한 데에는 자신이 50대 간무 덴노의 4대손이라는 것도 중요한 요인이었지만 동시에 후지와라노 다다히라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고금의 역사를 살펴봐도 힘이 있는 자가 한 나라를 차지하는 일은 흔하디 흔한 일이었다. 바로 얼마 전에 대거란국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땅을 차지하지 않았느냐?"라는 다분히 패도지향적인 이유도 드러내고 있었고, "내가 가진 이 힘도 하늘이 나에게 주신 힘이니 내가 이 일본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해서 안 될 것이 없다"라고, 일본 전통관으로 보자면 이미 황적이탈돼서 딱히 정통성이 없는 자신에 대해 일종의 중국식 천명사상도 드러내고 있었다.[28] 이때의 쇼군은 막부 시대의 쇼군과는 다른 개념으로, 천황이 임명하는 단순한 무관직에 불과했다.[29] 이마저도 중앙에서 보낸 군세에 의해서 진압되었다기보다는 타이라노 사다모리(마사카도의 친척으로 역시 간무 덴노의 후손, 간무 이세 헤이시의 선조), 후지와라노 히데사토 같은 현지 호족들이 주축이 된 군세에 의해서 진압되었다.[30] 다만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는 맹자의 사고방식 자체는 일본에도 분명히 존재했고 긍정되었다. 당장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사서를 다 읽기 힘들면 맹자만이라도 읽어야 한다"고 했던 맹자 애독자였다. 메이지 유신도 그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요시다 쇼인이 맹자를 강의했다거나 그 문하생인 타카스기 신사쿠의 기병대 역시 맹자의 '하늘과 백성의 이름으로 실정하는 국왕을 갈아치운다'는 천명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 일본 역사에서 맹자가 '위력'을 발휘한 몇 안 되는 사례로 해석할 수 있다. 사실 후지와라 세이카 이래 맹자 중심의 신유학인 성리학이 일본에 본격 보급되고 도쿠가와 막부 시대를 거치면서 연구가 심화됨에 따라, 막부 말쯤 되면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을 비롯한 유신지사들 중 많은 사람이 맹자 정도는 기본 교양으로 다 알고 있었고, 유교적 이념에 따르면 문제가 많은 천황-막부 이원 구조에 대한 불만도 이로 인해 증폭되었다. 시부사와 같은 인물은 아예 맹자를 직접 읽다가 혁명을 부추기는 구절에 영향을 받고서 막부를 타도하려는 무리를 소집했던 사람이다. 문제는 "너 정치 똑바로 못하면 갈린다"의 대상이 어떤 경우에고 '일본 국왕'인 덴노가 되지는 않았다는 점이고, 이는 덴노가 실권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차이가 없었다.[31] 쇼군은 56대 세이와 덴노의 후손인 세이와 카와치 겐지 계통(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아시카가 다카우지,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관례적으로 차지했고, 유사시라도 황가, 황실의 오랜 외척인 후지와라가,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간무 헤이시의 인물을 데려오려고 했다. 이것이 바로 <<맹자>>에서도 말하기를 " 임금은 동쪽 오랑캐 사람이고, 문왕은 서쪽 오랑캐 사람이다"하는, 대놓고 혈통이 다른 걸로 소문이 다 나서 천명을 명분으로 선양 혹은 역성혁명을 통해 집권할 수밖에 없었던 중국 등의 경우와 다른 점이다.[32] 주로 자신이 삼황오제 중 누군가의 후손이라는 프로파간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개중에서도 자기 집안이 황제 해먹을 차례라는 프로파간다 등을 애용했다.[33] 혹자는 민본주의의 한계점인 "새 권력자 1인 혹은 새 권력층의 집권 명분에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제도적, 정치문화적으로 현대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게 자생 발전하지 못했다"는 것을 들며 "민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친화적으로 연결해 이해하려는 시도는 어디까지나 근대 서구의 충격이 있은 이후에나 출현"한 것이니 "현대 민주주의로의 발전을 위해서 결국 외부적 충격을 기다려야 했다는 교훈에 주안점을 두어야 하겠다."며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것을 기준삼아서 외부적인 요인만을 강조하려고 드는데, 애초에 그 기준으로 제시되는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것도 민주주의의 '태동기'부터 '현대'라는 시간대에 이르는 과정에서 기존에는 '문제점'이라는 인식도 없었던 것들이 '문제점'으로서 서서히 인식되고 수용되며 보완되는 과정들을 거쳤고, 동시에 단지 문제점으로서 '인식'되지 않았을 뿐 여전히 '현대 민주주의'에도 그 '보완점'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현행 민주주의 체제를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며 고정불변의 원칙으로 삼아 민본주의를 평가절하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예를 들어 로마의 성산 사건과 함께 '능동적으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시민의 역할과 권리를 보장, 증대'했다는 평가가 존재하는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는 너무나도 당연한 상식이 된) '여성 참정권'은 '말 같지 않은 헛소리'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근현대에 해당하는 19-20세기에 들어서까지 그것을 용납하지 못한 국가가 '민주주의'가 뿌리내렸다는 구미권에 상당히 많았다.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의 전범이라고 할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참정권이 허용된 것은 18세기, 19세기 같은 근대도 아니고 역사 연구에서 '현대'로 분류되는 20세기 1965년의 일이었다. 국제학계나 시민의식의 도태니 고립이니 하는 거창한 말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이름으로 현행 민주주의 체제를 민주주의 그 자체로 동치시켜서 아예 고정불변한 도그마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나 더 어울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34] 또 민본주의 아래 백성은 '시민 사회'라는 것을 구성하고 체계화하고 운영할 생각도 능력도 인프라 등 여타 여건도 없었다며 '시민 사회의 적극적 활동'을 민주주의의 제3의 요소 운운하며 민본주의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역시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라는 잣대로 민본주의를 어떻게든 평가절하하려 하려는 자들도 있는데, 민주주의라고 해서 그러한 '시민 사회의 적극적인 활동'이 처음부터 긍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시민 사회의 적극적 활동'이 단지 혁명 정부의 개악된 지방 정책 수립에 대한 반발과 항의라는 모습을 띠었다는 이유만으로 철저하게 짓밟히고 공화주의를 부정하는 '반동'으로 매도당해 20세기에 들어서까지 온갖 비난을 감수해야 했던 방데 전쟁의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 300년이 지난 현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이 존재하는 21세기에조차 어떻게 해석해야 될 것인지 당장 프랑스 본국에서조차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그럴 수가 있느냐?"라는 비난과 조소를 듣기 충분한, 민주주의의 흑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에 대한 '재조명'도 이러한 문제점들을 '문제점'으로 인식하지 않고 있던 풍조가 서서히 변화하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재해석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나온 산물이며, '시민 개개인의 적극적이며 자유로운 각양각색 의사의 개진과 취합에 따른 체제'라는 현대 민주주의라는 것도 그러한 형태를 이루기까지 진화생물학처럼 그러한 다양한 논의와 재해석, 시행 착오와 보완이라는 '과정'을 거치는 중인 어떻게 생각하면 매우 불완전한 동시에 완전한 것이고 그 자체가 처음부터 완성되어 등장한 고정불변의 완벽한 결과물은 아닌 것이다. 그걸 가지고 현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평가절하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35] 헤이케 후손을 자처한 오다 노부나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라이벌이며 같은 겐지 일족인 닛타 요시사다의 후손을 자처한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이 대표적이다. 헤이케의 경우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출신이 의심스럽다' 소리를 듣기도 했는데, 평민이면서 귀족 후손인 것처럼 족보를 위조했다는 게 아니라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생모인 기온노 뇨고가 원래 시라카와인의 후궁이었다가 다다모리에게 하사된 인물이라서 기온노 뇨고가 낳은 키요모리가 사실은 다다모리의 아들이 아니라 시라카와인의 사생아라고 수군댔다는 것이다. 이는 시라카와인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 타이라노 다다모리 같은 이세 헤이시를 끌어들여 고위 관직을 주고, 일개 무사의 신분이었던 타이라노 다다모리를 덴조비토로 승진시킨 것뿐 아니라 그 아들인 키요모리는 원복하자마자 종5위 관위를 주고 나아가 정4위상이라는 당시 무사로서는 과분하다고 할 정도로 황족에게나 베풀 법한 특전을 받았기에 그것을 후지와라 씨 등 기존의 귀족들이 뒤에서 씹고 까느라고 "키요모리가 다다모리의 친아들이 아니고 사실은 시라카와인의 사생아였다"라는 썰을 지어내 퍼뜨린 것이다. 이는 노부나가나 이에야스와는 분명히 다른 점이다.[36] 어떤 사회의 변혁은 전에 없던 뭔가 '혁명적인' 어떤 것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사상이나 묻혔던(혹은 당대에는 부정당했던) 이론을 시간이 흐르면서 시대의 변화상에 맞추어 '재해석'하는 과정 혹은 '재발견'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당장 현대 민주주의의 모델이 태동한 서구만 해도 현대와 같은 민주주의의 모델을 갖추는 과정에서 신분제에서 기인한 차별 의식, 고정불변의 것이라는 선민사상이 완벽하게 바뀌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단순히 민주적 형태의 의회를 세우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머리에 앉은 왕을 끌어내리고 재판에 회부해 목을 날려버리기까지 하는 급진적인 사태에까지 치닫고도 결국 왕정이 일시적으로나마 복고되었던 프랑스 혁명이나 미국 독립 혁명도 그 자체로 전근대적 신분제를 완벽하게 부정하고 떨쳐내는 데까지는 여러 진통을 겪어야 했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당연한 상식이 된 여성 참정권을 비롯해 노동자나 부르주아나 귀족이나 인종, 장애 여부에 상관없이 인민 모두에게 동등하게 투표권이 주어져야 한다는 사상은 서구에서도 민주주의가 뿌리를 내리고도 한참 뒤에나 이루어졌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는 사람들의 고정관념, 시대와 사회의 한계라는 것이 넘기 어려움을 보여준다.[37] 사실 어떤 사회의 변혁이 아래로부터의 혁명보다는 위에서부터 조금 생각이 깨어 있었던 이들 몇몇으로부터 시작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 아울러 한고조홍무제처럼 밑바닥으로부터 시작해 위에 올라선 이들이 더 발작적으로 신분제에 집착해 더한 짓을 벌이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실제 사례가 있다. 하지만 그들을 예로 들며 "진승, 만적 같은 '근본 없는 것'들의 대다수는 그냥 난 일으킨 역적으로 몰살당해버리고 2500여 년 내내 민주주의와는 하등 상관 없는 분열-통일-숙청-전제-부패의 단일 패턴을 반복하였다"고 그것을 마치 주지의 통설인 것처럼 주장할 수는 없다. 진승 문서에 나오듯 진승은 한나라 조정에서 결코 마냥 '근본도 없는 주제에 기어오르려 들었던 것'으로 치부되었던 적이 없었고, 홍무제가 신하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긴 했어도 맹자 나아가 유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또 백성에 대한 빅브라더식 감시망을 만들어 통제를 강화한 것이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에서 보면 분명 인권 침해이긴 했어도 동시에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리의 부정부패를 감소시키는 데에 효과가 있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 [38] 맹자가 "군자의 과오는 일식과 같아서 저지르면 백성이 지켜보고 고치면 백성이 우러러 본다."는 말을 반민주적 정치관에 속박된 형태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단장취의에 가까운 억측인데, 해당 구절의 청자는 백성이 아니라 군자이다. 백성이 군자로 표징되는 위정자를 우러러 본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 군자로 표징되는 위정자가 어떤 과오를 저지르면 하늘의 일식이나 월식처럼 백성에게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고(즉 군자의 과오를 백성 앞에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군자라는 존재는 그 자신의 과오를 고치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백성에게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고, 잘못한 것을 숨기려고 하지 말고 드러내고 고치라고 권하는, 현대 민주주의 원칙에서도 충분히 도덕적 경구로서 수용이 가능한 위정자로서의 자세를 강조하는 말이기 때문이다.[39] 타이라노 마사카도의 봉기에 그가 거점으로 삼고 있던 반도 지역의 백성들이 대부분 호응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며, 마사카도가 사후 역적으로 몰리고도 여전히 반도 지역에서 그를 영웅으로 받드는 전설이나 민담이 전승되었다는 것은 "민심이 천명인지 그냥 못된 역심인지를 판정하는 것은 지배층끼리 자기 셈에 따라 아옹다옹하며 결정하는 것"이라는 일부 논자들의 민본주의에 대한 냉소 자체를 비웃기 충분하다.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 운운하며 백성의 수동성을 운위하지만 엄연히 중앙 정부로부터 '역적'으로 몰린 인물을 긍정적으로 전하는 전승 자체가 그러한 긍정적 전승의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이냐 아니냐에 상관없이 그러한 전승을 공유하는 이들의 강렬한 의지가 반영된 산물이고 '권력에 대한 능동적 저항'이라 부르기 충분한 것이다. 애초에 민본주의를 평가절하한답시고 백성을 '폭정이 있은 연후에야 지배층에 대한 불만으로 반응하고 덕정이 있은 연후에야 지배층에 대한 찬양으로 반응'한하는 존재로 정의하며 그것을 시민과는 다른 '수동성'이라고 평가절하하는 문장도 이율배반적이다. 폭정이라고 표징되는 위정자의 실정에 불만으로 반응하는 것은 '현대 민주주의의 원칙'으로 분명하게 보장된 저항권의 일종이고, 덕정이 있은 연후에 지배층에 대한 찬양으로 반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동성이 아니라 인과율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40] 혹자는 동아시아의 민본주의를 현대 민주주의 원칙으로 평가절하하는 입장에서 "기존의 전근대 왕조 체제를 유지하며 마치 저 북쪽의 '인민의 총의'와 같이 집단주의적으로 추상화된 '민심'을 그 대리인인 '수령/장군/위원장' 비슷한 유덕자(라고 선전된 사람), '군자'에게 위탁하는 정치 형태가 동아시아 2500년 역사 내내 지속", "2500여 년 내내 민주주의와는 하등 상관 없는 분열-통일-숙청-전제-부패의 단일 패턴을 반복하였음이 주지의 사실"이라느니 말하는데, 그게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국가의 민본주의의 실상이라기보다는 그냥 일본이라는 나라의 현실 그대로였다.[41] 이 점은 전근대 중국이나 한국의 왕조 국가에서 시행한 여느 정책과 마찬가지였다.[42] 이러한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덴노의 관계는 비유하자면 구약의 야훼이스라엘 왕국의 왕들의 관계와 비슷한데,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에는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나 일본 신토의 신들이 덴노의 자손에게 덴노를 그대로 잇게 하는 것은 '인간은 도를 벗어나고 약속을 쉽게 저버려도, 하늘은 도를 벗어나지 않고 한 번 한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다'고 해석되어, 아마테라스가 니니기에게 했던 천양무궁의 신칙이라는 신대의 서약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므로 결국 덴노의 자리는 힘 있는 자가 아니라 정통성을 가진 자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음을 역설하기 위한 것이다. 야훼 역시 다윗 이후 이스라엘 왕국의 역대 왕들을 보면 예언자의 말 따위 무시하며 야훼를 믿지 않고 이방의 신들을 믿거나 하는 등 야훼의 뒷목을 잡게 만든 인간들이 줄줄이 왕으로 즉위하지만, 그럼에도 야훼는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한다!'고 했던 때처럼 다윗 왕가로부터 이스라엘의 왕위를 거두어 다른 가계로 옮겨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다윗 왕의 후손들이 잇게 하는데, 이는 야훼 스스로가 "내가 너를 왕위에 앉히고 네 후손 대대로 왕 노릇 하게 하리라"(시편 89:4)라고 했던 야훼 자신이 다윗과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동시에 다윗 왕의 후손으로서 세상 모든 인류의 대속과 구원을 위해 나타날 나자렛 목수의 아들의 등장의 복선이기도 하다)고 해석되며, 지카후사의 천황관과 비슷한 점이 있다.[43] 동아시아에서 전근대 신분제의 부정을 불완전하게나마 한때의 구호가 아닌 체제로 실현한 건 서구의 체제를 수입해 이식한 근대 일본이 최초이지만, 그렇게 서구의 체제를 수입해 이식했다는 근대 일본은 끝내 한국이나 다른 나라와 달리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자신들의 체제를 개혁하지도 못했고, 그렇게 불완전하게 도입된 서구의 체제를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 항쟁이라는 방식으로 자기화해가며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성공한 한국과 달리 일본은 그러한 서구의 '민주주의'라는 체제를 자기화할 이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앞에서 설명한 여성 참정권도 일본은 태평양 전쟁으로 깔끔하게 패망한 뒤인 1946년에나 시행되었다. 한국이 불완전하나마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임시헌장(1919)에서 남녀 모두의 참정권을 인정한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다. 혹자의 견해처럼 "대통령 선출을 일종의 5년 주기 역성혁명으로 등치하여, 사실상 괘씸한 왕과 붕당을 5년에 한 번 심판하고 좀 덜 괘씸한 왕과 붕당에 또 다른 5년을 일임할 뿐"이라고 한국의 현행 정치 양상을 단순히 비판하는 것을 넘어 '본질적 전근대성'으로 규정한다면, 덴노라는 존재에 대한 전근대적인 신성불가침성이 공공연하게 온존하며 심지어 특정 정치인이 대를 이어 정치에 뛰어드는 것을 넘어 아예 특정 지역의 지역구마저 대대로 세습하다시피 하며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루스 베네딕트가 그의 저서 국화와 칼에서 일본의 모습을 "일본 역사의 전체 기간을 통틀어 현저한 계급 카스트적 사회"라고 분석한 그대로인) 일본의 '본질적 전근대성' 역시 만만치 않다.[44] 그리고 타이라노 마사카도와 비견할 만한 파천황적인 인물이 나중에 한 명 더 나오는데, 바로 고다이고 덴노이다.[45] 사실 아무리 귀족 저택이라 해도 정식으로 건축된 왕궁과는 규모로 보나 경비로 보나 결코 비교가 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에서 광해군이 임진왜란으로 주요 대궐들이 모조리 불타버리고 부왕이 종친의 사저를 수리해 쓰던 행궁을 박차고 나와서 창덕궁이나 창경궁의 재건을 감행한 것도, 그 당시는 물론 나중에 가서 '궁궐병'이라 불릴 정도로 지나치게 공사를 많이 벌인다는 비판이 일고 결국 광해군 자신의 실각으로까지 이어졌다고는 하지만, 전쟁 이후 실추한 왕실이나 국가의 권위 쇄신 및 회복을 위해서 어느 정도는 필요한 조치였다는 옹호가 가능한 것이 이런 이유에서다. 아무리 "정치가 잘 되면 땅에 금 그어놓고 넘어오지 말라고 해도 안 넘어간다"는 논리로 토목공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유교라고는 하지만, '형식이 뭐가 중요하냐 실속만 있으면 그만이지'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하지 마라"며 형식과 실속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 공자 본인이었고, 왕이라고 지나치게 검소한 것만 따져도 결국 대외적인 이미지를 비롯한 왕가로서의 품위나 권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겉으로 드러나는 시각적 이미지도 전근대에는 엄연히 권력의 한 작동 원리였고 왕권의 중요한 요소였다.[46] 엄연히 군주국인 일본에서 신하가 군주의 즉위식을 두고 "그딴 거 치러서 뭐하게?"라고 한 것이다.[47] 이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냐면, 일본에서 천황을 모시는 것 이전에, 궁녀들의 대부분은 공가의 귀족 출신이었다. 즉 조선으로 치면 반가의 부인과 따님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몸을 팔았다는 소리다.[48] 재산이 없었던 황실에 10만 석의 영지를 선물해 주었는데 천황 개인의 영지가 3만 석이고 황실의 영지가 7만 석이었다. 참고로 에도 막부 직할령인 천령은 400만 석가량이고(도쿠가와 막부의 수입이 230만 석), 하타모토 같은 직속 무사는 전부 합쳐 300만 석 가량의 영지를 보유했다. 에도 시대의 다이묘 중에는 가가 번처럼 웬만큼 이름 있는 다이묘는 백만 석을 넘어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그 영지 보유의 기본 단위가 사쓰마(77만 석), 센다이(62만 석)처럼 10만은 거뜬히 넘는 이들도 많았다.[49] 그 유명한 추신구라 사건이 천황이 쇼군에게 보낸 칙사를 대접하던 사무라이들끼리 예법이 어긋났다는 이유로 쪼인트를 까다가 벌어진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다이묘아사노 나가노리까지 할복해야 했을 만큼, 천황의 칙사 앞에서 무례한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한 파장이 컸다는 소리니, 당시 천황의 권세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다.[50] 이는 에도 막부의 쇼군가 쪽에서 천황이 실권을 회복할 가능성을 우려해서 황실과의 혼인을 거부한 탓이 컸다. 그래서 그 막부의 권위도 나락으로 떨어진 개화기 때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모치와 황실의 딸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과의 결혼이 성사되자, 세간의 지대한 관심을 모았다.[51] 만세일계와 같은 말은 한민족의 시조라 불리는 단군이 하늘의 신 환웅과 웅녀의 후손이며, 한국은 하늘과 곰의 기운을 받은 국가라는 식의 신화적 이야기에 불과하다. 정치적으로 천황의 정당성을 위한 상징적 단어일 뿐이다.[52] 비단 현존하는 왕조뿐 아니라 옛날에 존재했던 왕조들까지도 이잡듯이 뒤져도 가장 최장수 왕조에 꼽힐 것이다. 보통 왕조는 500년을 넘기도 힘들며 문명별, 시대별, 지역별로 왕위 계승의 법칙도 달라서 A라는 왕조가 500년을 넘겼다 쳐도 B라는 왕조에서 채택했던 왕위 계승의 법칙 방식으로는 아닐 수도 있다. 한국사의 신라, 고려, 조선만 해도 하나의 나라가 쭉 이어진 것으로 인식하지만 서유럽식으로 보면 왕조가 몇번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예시를 들자면 신라의 혜공왕-원성왕 교체기, 고려의 목종-현종 교체기, 조선의 철종-고종 교체기는 서유럽식으로 보면 다른 왕조로 세야 할 만큼 촌수가 멀어졌다.[53] 상대의 영지를 빼앗기 위해 "나는 남조(북조)의 명을 받들고 있는데, 넌 북조(남조)의 명을 받든다며? 넌 역적이야!"라며 쳐들어가고, 상대 입장에서는 "남조(북조)는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북조(남조)에 비하면 쥐뿔도 없는 것들이" 또는 "나도 남조(북조)인데? 이게 어디서 팀킬을 하려 들어?"라며 맞서 싸우는, 그리고 이렇게 양측이 서있는 편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건 예사였다.[54] 고다이고 덴노가 각지로 자신의 아들들을 보내 현지에서의 논공행상권을 맡기고 무사들을 포섭하라고 했는데, 이들 왕자 가운데 그나마 유의미하게 북조에 대항할 만한 힘을 갖추었던 곳이 규슈였고, 가네요시 친왕이 호족 기쿠치 씨와 결탁하여 수립한 정서부(征西府)는 북조가 규슈 통치를 위해 임명한 규슈 단다이나 가마쿠라 막부 이래로 규슈의 슈고로써 전통적인 지배 세력이었던 쇼니 씨와도 항쟁을 벌여 여러 차례 승리하고 한때 다자이후를 점령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 일본국왕으로 책봉되는 등 외교적인 지위도 확보했다. 여기에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서자였던 아시카가 다다후유까지 끼어들어 자신의 세력을 결집하려 하면서(이후 다다후유는 쇼니 씨의 사위가 되었다) 규슈는 '가네요시 친왕 - 기쿠치 씨'의 남조 세력(정서부) 대 '잇시키 씨 → 이마가와 씨'의 북조 세력(규슈 단다이) 그리고 전통적인 지배 세력이자 남조나 북조 모두와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아시카가 다다후유-쇼니 요리히사의 '제3세력' 이렇게 삼파전 양상을 띠었다.[55] 후에 고카메야마 덴노로 추숭[56] 이 해는 마침 한반도에서도 공양왕이 강제로 폐위당하고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세운 해였다.[57] 실제는 섭정을 한 황태자 히로히토[58] 남북조 시대 혈통 분쟁과 관련한 부분은 교고쿠도 시리즈 3권 <광골의 꿈>에서 소재로 사용된다.[59] 이러한 인식은 지금이라고 별로 다를 것은 없는지 2017년 생전 퇴위를 밝힌 아키히토 당시 덴노에게 이른바 유시키샤 회의(有識者会議)라 불리는 아베 신조 당시 총리의 사적 자문 회의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덴노는 기도나 하고 있으면 그만이다(天皇は祈っているだけでよい)"라는 비아냥이 나왔을 정도니. 히라카와 쓰케히로(平川祐弘) 도쿄대 명예교수 등에 따르면 이 발언을 전해 들은 아키히토 당시 덴노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적어도 아키히토 자신은 일본의 천황으로서 과거 일본의 침략으로 식민지로 전락하고 전쟁에 강제 동원되어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목소리를 내 왔건만 그 모든 것이 그것도 덴노를 받든다는 우익 관계자들로부터 단박에 부정당한 것이나 다름없으니. 궁내청 관계자도 "지금까지 폐하께서 해 온 활동을 모른단 말이냐"라는 반응이었다. ##[60] 일본의 전통적인 문벌귀족.[61] 일본 만화 히카루의 바둑에 이를 보여 주는 장면이 있는데, 작중 히카루가 어느 골동품점 주인이 히카루의 지인으로부터 몰래 빼돌려 가지고 있던 토라지로의 물그릇 도자기를 걸고 바둑을 두는 에피소드에서 후지와라노 사이는 골동품점 주인이 빼돌린 그 물그릇 도자기에 대해 "분명히 토라지로를 따라 들어간 교토의 황궁에서 봤던 그 물그릇"이라며 "당시 황실의 재정이 몹시 궁핍했다고 알고 있는데 그때 외부로 반출된 것일까..."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나온다.[62] 사실 일본 덴노가 아시아 세계에서 보편적인 군주가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티베트 불교의 달라이 라마나 바티칸의 로마 교황 같은 종교적 권위를 내세우자니 일본의 신토는 불교나 그리스도교처럼 동아시아 세계 전체에서 통용되는 종교도 아니었고, 문자 기록부터 시작해서 인문학, 정치학, 철학, 기술 등 온갖 인프라의 발상지로 말 그대로 '세계 문화' 그 자체였던 중국처럼 뭔가 일본이 고안하고 내세울 수 있는 보편적인 철학을 제시하고 내세울 위치에 있지도 못했다. 이는 지금이라고 별로 다를 것은 없다.[63] 이토 히로부미가 다른 나라 외교관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일본 황족으로 태어남은 큰 불행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예절에 얽매여 살고 자기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하면서 손으로 마리오네트 다루는 시늉을 하여 지켜보던 외교관들이 당황했었다는 말은 도시전설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실제로 그랬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이토 히로부미는 군주에게 매우 강력한 권한을 부여하는 독일 제국 헌법을 모방해서 대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할 정도로 메이지 천황을 존중하고 섬겼다.[64] 메이지 정부가 전국 각지에 징병령을 내려 농민들로 구성된 징집 군대를 편성할 계획을 세웠을 때도, 농민들이 죽창 들고 관공서 몰려가서 "천황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데 우리 목숨을 혈세로 거둬가겠다는 거냐"며 화를 냈을 정도였다.[65] 아직도 남아 있는 곳도 있다고 한다.[66] 천황이 있는 도쿄 황거(고쿄)를 향해 신민으로서 절을 하는 일.[67] 맥아더는 천황에 대해서 “천황 한 명의 가치는 미군 사단 21개와 맞먹는다”며 그런 영향력을 지닌 천황을 굳이 교수대에 올려서 괜히 패망한 일본인들 감정만 자극해 사태를 악화시킬 바에는 자신이 목표로 하는 일본 개혁에 적절하게 이용해먹는 것이 차라리 더 효율적이고 일본인들의 저항도 덜할 것이라고 주장했다.[68] 패전 직후 일본 전국 각지로부터 맥아더와 미군을 환영하는 무수한 편지들이 쇄도했는데, 오사카 인근에 사는 오우치 하나코라는 사람이 1945년 12월 맥아더 사령관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아예 “식량 배급을 늘려주면 천황제를 폐지해도 대중들은 환호할 것”이라고까지 썼다고# 특히 일본국 헌법 공표당시 일본 대중들 대다수가 군대와 전쟁포기 조항을 지지했을 정도로, 정말 당시 대중들은 전시상황만 끝날 수 있다면 뭐라도 좋은 상태였다. 물론 맥아더가 포섭하려 한 건 대중이 아니라 반공에 협력해줄 지도층이었기에 얘기가 달라진다.[69] 그래서 일본의 역사물을 보면 막부나 번 등에서 '가로(家老)'라든지 하는 사람들이 주축이 되는 경우가 많다. 쇼군이나 번주는 가끔 몇 마디 던지는 정도고, 아예 참석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쉽게 말하자면, 사장은 없이 전무, 상무 등이 이사회 의장을 맡고 있는 격.[70] Ikuhiko, Hata, Hirohito: The Showa Emperor in War and Peace, Global Oriental Ltd, 2007, p.24[71] Ikuhiko, p.31[72] 당시 일본에서는 의회가 아닌 천황만이 조약을 비준할 수 있었다. 참고로 일본은 제네바 의정서는 1925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70년에 했고 제네바 협약은 1929년에 서명했지만 비준은 1953년에 했다.[73] Sherman, Christine, War Crimes: Japan's World War II Atrocities, Turner Publishing Company, 2001, p.258[74] Tipton, Elise, The Japanese Police State: Tokko in Interwar Japan, Bloomsbury Academic, 2014, p.22[75] Tipton, p.22-23[76] Harada, Kumao, Saionji-ko to seikyoku, vol.6, Iwanami Shoten, 1951, pp.206[77]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며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그 지위는 주권을 가진 일본국민의 총의로부터 나온다.[78] 이 조항에는 '천황이 내각의 조언을 받아 자의로 승인을 한다'는 식으로 해석될 요지도 있지만(주로 극우들이 펼치는 논리다), 잘 보면 마지막에 내각이 책임을 진다는 문구가 있다. 책임을 지는 쪽이 당연히 권한도 갖는 것이다.[79] 유럽의 입헌군주들은 대부분 법적으로는 선거권을 가지고 있으나, 관례상 선거에 참여하지 않는다. 다만, 국가에 따라서 국민투표에는 참여하기도 한다.[80]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81] 정원 3인. 검찰에서 일하는 그 검사가 아니다. 検査官. 검사관 중에서 호선된 1명이 회계검사원장이 된다.[82] 회계검사원법 제4조[83] 회계검사원법 4조 4항[84] 서명은 붓글씨 친필서명을 해주며, 옥새는 워낙 크고 아름다운 물건인지라(...) 실제 국새는 찍어주는 관리가 따로 있다. 어쨌건 천황의 친필서명이 있어야만 옥새를 찍을 수 있으므로 도장을 찍을 권한 자체는 천황에게 있다.[85] 언론은 기본적으로 중립성을 위해 모든 인물에게 반말체로 말하지만, 천황만큼은 깍듯이 존칭과 경어로 보도한다. 심지어 진보 언론중 꽤 과격한 아사히 신문도 얄짤없다.[86] 작가 아가와 히로유키(1920)가 썼다고 알려진 호칭이다. 참고로 그는 해군선옥론자로 육군식 천황 신격화를 혐오했지만 역사 교과서 수정은 지지하는 등, 딱히 우익에서 벗어나지는 않은 인물이다.[87] 참고로 무라카미 하루키좌파 성향의 아나키스트이자 공화주의자다보니,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다. 그리고 아무리 천황이 신성불가침이라도, 일본도 사람사는 곳이다보니 쇼와 덴노의 죽음을 앞두고 각 방송사들이 자중한답시고 대부분의 예능 프로그램을 무기한 결방하자, 천황 하나 때문에 TV를 못 본다고 방송국마다 항의가 빗발쳤다. 그래서 우습게도 이 시기 비디오 대여점이 아주 장사가 잘 되었었다고 한다.[88] 아키히토 즉위 당시의 총리는 다케시타 노보루였으나 헤이세이 개원 후 얼마 안 있어 리크루트 사건으로 사임하고, 후임 우노 소스케마저 스캔들로 사임하여 즉위식을 할 무렵에는 가이후 도시키가 총리를 하고 있었다.[89] 협박을 비롯해 인터넷 개인메일 테러.[90] 물론 옴진리교를 이토 시장 등과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옴진리교는 일본 국가 전복을 꾀하고 여러 차례에 걸쳐 많은 무고한 생명을 살상했기에 더욱 큰 문제가 되었다.[91] 물론 말이 평민이지, 가쿠슈인을 다니며 황족과 친구로 지낼 정도였다면, 꽤나 좋은 집안일 가능성이 높다.[92] 사실 엄밀히 말하면 메이지 덴노 이전 고메이 덴노에도 시대 천황보다도 오히려 권위가 약해졌다. 비록 에도 막부 쇼군들이 막부 중기 이후로는 사실상 교토에 상경하지도 않는 쇼군들이 대부분인 등(막부 말기에는 오히려 에도에 한 번도 안 가보고 교토에만 거주한 쇼군 또한 있긴 하다.) 쇼군이 실질적인 권력을 독점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형식적으로는 쇼군의 결정을 천황이 재가하는 형태를 갖추긴 했었던 데에 비해 현대의 천황은 그러한 형식적 권한조차 없다. 애당초 막부 말기 외양 웅번들이 토막을 외치고 반란을 일으킨 근거 자체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천황의 허락 없이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는 것 때문이었다.[93] 한국의 기록에서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670) 뒤 일본의 덴노를 '일본국왕'이라고 부른 최초의 기록이다. 정확하게는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해야겠지만.[94] 신라 혜공왕 15년이다.[95] 그런데 천황 표기 논쟁은 주로 국내 언론 등에서의 표기에 대한 논쟁이고 국가간의 외교에서는 상대국의 표기에 따라 천황이라고 쓰고 있으므로, 치지도외의 원칙에 따르면 국내 언론에서는 일왕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맞다. 왜냐하면 상대국이 천황이라 주장하는 것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지만, 국내에서 그 칭호를 인정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96] 이미 조선은 국초부터 일본측 외교 대상에 대해 '일본 국왕'이라고 불렀고 이건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가리킨다. 군주국끼리의 교섭인데 조선의 군주가 사신을 보내 교섭하는 일본측 총책임자가 일본 군주가 아닌 다른 존재여서는 당연히 안 되기 때문에 그렇게 칭하였던 것.[97] 정확하게 말하면 '별 웃긴 놈들 다 보겠네'라는 비웃음 내지 병먹금 정도로 취급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애초에 가마쿠라 시대 이후 일본 전국의 군사권을 틀어쥔 쇼군에 의해 '관리'되는 처지로 쇼군이 '일본 국왕'이나 다름없는 위치에서 조선과 외교를 진행하고 있었고, 애초에 '왜황'이라는 단어에서 일본이 그토록 컴플렉스로 느끼는 '왜'라는 단어를 가져다 조어를 만든 것만 봐도 조선이 일본 천황의 존재를 얼마나 같잖게 봤는지 알 수 있다. 성호 이익이 살았던 조선 후기와 달리 신숙주 등이 살았던 조선 전기는 조선 후기처럼 성리학이 크게 자리잡지도, 교조적인 명분론이 그렇게 맹위를 떨치는 시대도 아니었다. 성호 이익은 성리학적인 입장에서 "쇼군은 엄연히 천황의 신하이고 쇼군이 무너지고 천황이 다시 복벽하면 그때는 외교 어떻게 할 거냐?"라고 말할 수 있었지만, 신숙주나 조선 전기의 사람들은 그런 성호 이익의 문제 제기에 대해 쇼군이나 무사들이 실권을 쥔 당시 일본의 현실에 주목해서 "쇼군이 무너지고 천황이 복벽? 그때는 내전 좀 겪고 다른 쇼군이 나와서 또 실권을 잡겠지. 저 비실거리는 천황이 복벽은 무슨"이라고 치부했을 것이고, 버젓이 천황이 싸우지 말라고 명령을 하거나 말거나 수도인 교토 안에서 27만 대군이 편을 갈라 싸우고 다시 전국적으로 백여 년 가까이 내란을 벌이는 그런 나라에서 별다른 힘도 못 쓰는 천황이 복벽을 해봤자 다시 쇼군 중심의 막부 정권의 재탕에 불과할 것이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당시 시점에서는 천황막부를 무너뜨리고 친정을 행했지만 몇년 안 가서 말아먹고 도로 막부가 세워진 전례도 있었고 말이다. 심지어 그 메이지 유신조차도 천황이 모든 것을 주도하는 정권이 아니었다.[98] 문서에는 황제라고 했다.[99] 반청복명의 거두 가운데 하나였던 정성공이 보낸 주순수 등이 일본에 건너가서 원병을 요청하면서 조선의 강항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에도 막부에서는 정성공의 요청대로 대륙에 원병을 보내 명나라를 부흥시키자는 의론도 있었다. 내부에서 반대해서 그만뒀지만.[100] '영국 왕'이라는 표기는 1923년 3월 5일자 조선일보에 처음 등장한 이후 1999년까지 168건이 검색되고, '태국 왕'은 1950년 6월 1일자 조선일보 기사 이후 1999년까지 195건이 검색되고 있다. '일왕' 표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일왕' 표기를 검색하면 1950년부터 1999년까지 1778건, '일본국왕'으로 검색하면 1950년부터 1999년까지 51건이다. 중복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수치상 '일왕' 표기가 '영왕'이나 '태왕' 표기보다 많기는 하지만, 그것도 보도되는 기사가 많았던 만큼 표기가 많이 검색되는 것 뿐이지 대놓고 격하했다는 증거로 보기는 어렵다. 한국과 일본의 거리, 한국과 영국의 거리를 생각하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다. '영왕'이나 '영국 왕' 표기 모두 같은 기간(1947~1999) 동안에 각각 158건과 149건으로 어느 한쪽이 그렇게 많은 것도 아니다. 태국은 애매한 게 해방 전의 신문지상에서는 태국을 '섬라(국)'라고 부르고 그 왕도 섬라(국)왕/섬라황제라고 불렀기 때문에 그것까지 치면 더 늘어날 여지가 있다.[101] 도산 안창호가 임종하기 전, "목인아, 목인아. 네가 큰 죄를 지었구나"라고 당시 천황이던 메이지 덴노를 유언으로 나무란 사례가 있다.[102] 이도학의 <새로 쓰는 백제사>에 실려 있는 일화인데, 기마민족 정복왕조설로 유명한 일본의 사학자 에가미 나미오가 쇼와 덴노를 만났을 때에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중세까지 일본에서 "천황가는 조선(즉 한반도)에서 건너왔다"는 인식은 존재했던 듯하다. 기타바타케 지카후사가 자신의 저서 신황정통기에서 간무 덴노 때까지 "일본 천황은 삼한과 같은 종족"이라고 적은 책들이 있었는데 간무 덴노가 그 책들을 싹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고 언급하기도 했고, 일본 사람들은 식사할 때 젓가락을 주로 쓰고 숟가락을 안 쓰는데 천황가에서는 숟가락을 쓴다더라# 하는 얘기도 있다.[103] 다만, 여진족 신라인설과 달리 한반도와 일본 천황 사이의 관계는 고사기를 비롯한 여러 고서적이나 신화/전승들과 관련되어 직/간접적으로 그 관계를 나타내는 근거들이 상당히 많이 등장한다.[104] 이 발언은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양국간의 우호와 화합을 강조하기 위해 나온 것으로 사돈의 팔촌 엮듯 자그마한 부분이라도 한일간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근거 동영상을 보면 "속일본기에 조상의 어머니가 백제계라 기록되어 있어 인연을 느낀다"고 했는데 그게 굉장히 과장되어 퍼졌다.[105]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4남 중 막내.[106] 노무현아키히토 천황의 한국 방문 대신 아키히토 천황의 장남인 나루히토 황태자와 차남 후미히토 친왕의 한국 방문을 제안했을 정도로 천황 방한에 소극적이었고, 박근혜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사태가 터지고 대통령직에서 탄핵 당하기 이전 콘크리트 지지율 30%를 자랑할 정도로 당시 고정 새누리당 지지층들로부터 높은 지지율을 보였지만, 그와는 별개로 자신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이 일제강점기 일본군 장교로 복무, 부역하는 등 아버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논란과 비판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당시에 일본아베 신조 총리가 군사대국화 등 우경화 정책을 펼치면서 박근혜 정부 시기 초반기에 한국과 외교적으로 대립, 갈등을 빚던 시점이었는지라, 당시 박근혜 본인이 천황 방한을 추진하고 싶어도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문재인은 직접 천황 방한을 언급하진 않았으나 2017년 9월 이낙연 국무총리가 천황의 한국 방문을 제안하는 발언을 했고, 이수훈 신임 일본대사와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천황 방한을 거론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임기 중반 일본제철 강제징용 소송 배상 판결이 확정되고부터는 한일 무역 분쟁으로 한일 관계가 광복 이후 사상 최악의 국면까지 치달으면서 천황의 한국 방문은 언급조차 나오지 못했다.[107] 이때가 알다시피 1988 서울 올림픽을 개최하는 달이라 올림픽 개최식에 참석해서 한일관계를 발전적으로 나아가려는 고려를 엿보일 수 있는 대목이다.[108] 다만 1989년 쇼와 덴노가 사망하였을 때에는 일본 국내에서도 "붕어"라는 말이 일상적이지 않음을 감안한 것인지 당시 소식을 전하는 아나운서가 '붕어하셨다'라는 말 뒤에 '돌아가셨다는 뜻'이라고 짤막하게 추가 설명을 덧붙인 적이 있다. 실제로 '붕어'라는 어휘를 살면서 이때 처음 알았다는 반응의 일본인들도 아주 많았는데 마지막 붕어 소식을 전한 지 60년이 훌쩍 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그 60년도 그냥 60년이 아니었는데 60년 전에 살던 사람도 대중매체를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 일부 대도시에서만 공업이 이루어져 신문과 라디오의 보급률이 낮고 아직 농업이 주류 산업이던 시대, TV 구경도 할 수 없던 시대가 이 60년 안에 정보화 사회로 바뀌었다. 까놓고 말해서 천황의 붕어를 한날한시에 전국에 생방송으로 알린다는 것이 다이쇼 시대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109] 일례로 영국에서는 공식적으로든 비공식적으로든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로 개편하자"는 목소리를 줄기차게 주장한다. 이런 경향은 정도의 차이일 뿐 네덜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같은 다른 유럽의 입헌군주국들도 마찬가지이다.[110] 다만 스페인은 예외. 스페인에서는 래퍼 파블로 하셀이 왕실과 경찰을 비판했다가 징역형에 처한 적이 있을 정도로 유럽의 입헌군주국치고는 왕실에 대한 비판을 금기로 여기는 경향이 제법 강하다.[111] 다만 유럽은 군주제에 반하는 여러 큰 혁명들을 겪었다. 대표적으로 프랑스 혁명러시아 혁명이 있으며, 유럽의 군주들은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안전과 국민들의 민심을 달래기 위해, 왕은 존재하되 상징적인 존재일 뿐 통치하지 않고, 법 앞에서는 국민과 평등하며, 신분만 왕일 뿐 국민들이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도록 '명령으로 사람 목 자르는' 두려운 권력자가 아닌 '법과 민주주의를 존중하며 전통으로 존재하는' 친근한 지도자라는 것을 내세우며 씁 어쩔 수 없지 하고 반쯤 자발적으로 입헌군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반면 일본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적이 없어 현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군주라는 존재가 자신들과는 다른 사람이라는 인식이 남아있다. 또한 굳이 입헌군주제가 아니더라도 '천황'이라는 명칭 및 왕조가 바뀌지 않은 역사를 칭하는 '만세일계'라는 용어에서도 볼 수 있듯 과거 자신들의 군주를 신에 준하는 위상으로 신성시한 일본과 달리 유럽에서는 그 정도로 자신들의 군주를 신성시하거나 숭배하지 않았고 어디까지나 기독교적 세계관 내에서 신 아래의 존재인 인간 중 가장 위엄 있는 인간 중 최강의 존재 정도로 여겼다는 차이가 있다. 유럽은 왕을 어디까지나 인간 신분으로서의 '신의 대리자', '종교의 수장' 정도로 바라 본 반면 전근대 일본은 천황을 '신의 후손'으로 보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의 신격화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천황을 아예 '신의 현신 그 자체'로까지 격상했다. 어디까지나 왕 역시 '죄 많은 인간이자 신에게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인식한 유럽인들과 달리 천황을 숭배하던 일본인들은 쇼와 덴노의 인간선언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112] 특히 후미히토 일가의 경우 마코 공주의 결혼 소동으로 인해 일본 현지에서도 평판이 썩 좋지는 않다.[113] 성씨가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미디어물에서는 천황가의 성을 야마토라고 쓰기도 한다. 군주의 공식 성명에 통치국의 이름이 붙는 유럽식 관례를 생각하면 나름 적절하다.[114] 워누는 노예를 모에화하는 꼴인데 이는 자기 나라를 모욕시키는 꼴이니. 그러나 워누조차도 최근에는 모에화되고 있다...지만 극소수이며 워누가 '왜국의 노예'라는 뜻인데 이를 모에화하는 건 좀(...).[115] 실제로 절대다수의 중국인들이 일본을 비난할 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워누다. 중국인들이 이러한 맹점을 노린 것.[116] 물론 이러한 태도 때문에 "천황은 언터쳐블 최고존엄이 맞다."는 조롱이 더더욱 커졌다.[117] 마코 공주로 윤간 임신 동인지를 냈다가 철퇴를 맞은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