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근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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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군주 · 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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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대군 ~ 사도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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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도세자의 딸
청근현주 | 淸瑾縣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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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장조의 왕녀
청근옹주 | 淸瑾翁主


대한제국 장조의 황녀
청근옹주 | 淸瑾翁主


출생
1758년(영조 34년)
사망
1835년(헌종 원년) 10월 10일
(향년 7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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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전주 이씨
부황
장조 의황제
생모
경빈 박씨
부군
당은위 홍익돈(唐恩尉 洪益惇)
자녀
친자 없음
양자 - 홍병기(洪秉箕)
봉호
청근현주(淸瑾縣主)
청근옹주(淸瑾翁主)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편집]


조선 사도세자의 서장녀이자 어머니 경빈 박씨의 장녀로, 은전군동복누나이며, 정조의 이복여동생이다.


2. 생애[편집]


1768년(영조 44) 12월 12일에 영조경희궁 집경당에서 직접 8명의 후보자들을 불러 보았다.

송익무의 아들 송인재, 홍양유의 아들 홍익돈, 조덕해의 아들 조인갑

재간택 명단

영조는 후보 중 3명을 추렸다. 이들 외에 이날 부마 간택에는 이미 왕실과 인연이 있는 자들도 있었다. 조덕해의 아들 조인갑은 인원왕후의 외가 친척이었고[1], 조재선의 아들 조양진은 효장세자세자빈 현빈 조씨의 7촌이었고, 구윤빈의 아들 구수몽은 인조의 외사촌 능천부원군 구인후의 봉사손 집안이었다.[2] 특히 구수몽에게는 어찌 간택하겠느냐 하면서 다른 좋은 집으로 장가 들라고 말하였다.[3]

이틀 후인 12월 14일 영조는 홍양유의 아들 홍익돈을 부마로 최종 낙점하였다. 그리고 1772년(영조 48) 청근현주는 15세의 나이로 혼인하였다.[4] 여기서 부마 간택이 이미 끝났는데 실제 혼인이 늦어진 이유는 왕실의 재정 상황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1764년(영조 40)부터 화길옹주, 청연군주, 청선군주, 은언군, 은신군 등 계속해서 가례가 치러졌기 때문이다. 영조가 사도세자의 서출들을 안 좋아했지만 다들 제때 시집장가는 보내줬다

1778년(정조 2) 은전군이 정유역변[5]에 연루되어 사사되었으나, 청근현주는 사도세자의 혈육이었으므로 1795년(정조 19)의 원행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순조도 청근현주가 아프다는 소식에 의원을 보내줄 정도로 왕실의 종친으로 대우하였다.[6]

1835년(헌종 원년)에 사망하였는데, 사도세자의 자식들 중 가장 오래 살았다.[7]

3. 가족 관계[편집]



  • 남편 : 당은위 홍익돈(唐恩尉 洪益惇) - 홍양유(洪亮猷)의 아들[8]
    • 양자 : 홍병기(洪秉箕)
      • 양손자 : 홍난섭(洪蘭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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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인갑은 인원왕후의 외삼촌인 조정하의 증손자로 계보는 '조정하-조명욱-조덕해-조인갑'으로 이어진다. [2] 인조의 어머니 인헌왕후의 아버지이자 능안부원군으로 추증된 구사맹이 능천부원군 구인후의 할아버지다. [3] 승정원일기, 영조 44년 12월 12일. [4] 승정원일기, 영조 48년 1월 27일. [5] 정유역변에는 세 가지 사건이 묶여 있는데, 그 중 홍계능과 홍상길 등이 주도하여 은전군 이찬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6] 승정원일기, 순조 31년 2월 25일. [7] 승정원일기, 헌종 1년 9월 1일. [8] 본래 당은첨위(唐恩僉尉)였으나 청근현주가 옹주로 추증되면서 같이 당은위로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