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소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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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되자, 내전을 회피하고 통치권을 이양하는 조건으로 자금성에서 1924년까지 12년 동안 유지된 옛 청나라 황실을 의미한다. 청나라 황실은 자금성의 일부[2] 와 이화원, 승덕의 피서산장, 심양의 선양고궁 등을 소유하고 있었다.
2. 우대조건[편집]
통치권을 넘겨주는 조건으로, 새로 건국된 중화민국과 청실우대조건을 체결하였기에 청나라 황실은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명목상 자금성에서 외국 군주의 예로 대우받고 신해혁명 이전 수준으로 생활하면서 자금성의 소유자로서 성 내부에서 황제로 군림할 수 있었다. 비주권군주제의 한 사례였다.
청실우대조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생활[편집]
청나라 소조정 내의 생활은 부의의 제사(帝師)였던 영국인 레지널드 존스턴[4] 의 <자금성의 황혼>에 잘 묘사되어 있다. 소조정 내에서는 여전히 선통(宣統) 연호와 함께 음력이 사용되었으며, 비록 손글씨로 간략하게 소량 간행되기는 하지만, 자체적 관보도 발행하였다.
4. 역사[편집]
1912(선통 4)년 2월 12일, 효정경황후는 청실우대조건(淸室優待條件)을 받아들이고 퇴위조서(退位詔書)를 반포하여, 이로써 청나라는 종언을 맞았다. 위 우대 조건 문단에도 나와있지만, 중화민국이 건국되었어도 청나라의 황제는 자금성 내에서 황제였고, 이 12년의 기간을 청황실 소조정, 혹은 청나라 소조정이라고 일컬었다.
선통제는 퇴위했지만, 선통제 등 일부 황실 종친과 소속 직원들은 원 황실 대신 등과 같이 황궁 내에서 거주하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다. 자금성 내 천안문, 태화전, 보화전, 무영전, 문화전 등의 외조는 중화민국의 영토였으나, 내조(內朝)는 여전히 청나라 황실의 소유였다. 황실은 황궁인 자금성 내에서도 생활하는 동안, 이전처럼 "상유(上諭)"를 반포했고, 연호를 음력과 같이 사용하였으며, 궁 내에는 청나라 시절처럼 내무부(内務府), 종인부(宗人府)와 신형사(愼刑司) 등의 기구를 두었다. 이외에도 시호를 내리기도 했으며 청 시절의 의복을 유지했다. 결정적으로 청나라의 법을 범한 자는 신형사에서 처리하는 등, 자금성 안은 나라 안의 나라였다.
1913(선통 5)[5] 년 계축전쟁으로 쑨원을 비롯한 국민당 인사들이 일본으로 추방되고 1914년(선통 6) 국회가 해산되어 정당정치가 붕괴되자, 1915년(선통 7)부터 만청의 왕공들과 복벽파들이 대대적인 청나라 복고운동을 벌였으나 위안스카이는 복벽금지령을 선포하며 탄압했다. 위안스카이는 홍헌제제를 선포,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나 호국전쟁이 발발하자 퇴위한 뒤 얼마 안 되어 사망했다. 이 시기 국무총리 쉬스창이 복벽으로 국가질서를 안정하고 위안스카이에게 총리대신 자리를 주는 것을 제안했지만 청나라 소조정이 거부했다.
1917년(선통 9), 부원지쟁 중에 장강순열사 장쉰이 국회를 해산하고 복벽을 선포했지만, 국무총리 돤치루이가 1주일 만에 진압했다. 이 때문에 쑨원은 청나라 소조정을 폐지하고 푸이를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북양군벌 대다수가 청나라 황실에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묵살하였다. 하지만 1924년(선통 16), 2차 직봉전쟁 중 직예군벌 북경 육군검열사 겸 3로군 총사령관 펑위샹이 장쭤린과 내통하여 북경정변을 일으켰고, 그리하여 그 동안 청나라 소조정에 우호적이었던 차오쿤 정권이 붕괴했다. 펑위샹은 부하 녹종린과 베이징의 아나키스트들과 진보주의 정치가들을 규합하여 청나라 황실에게 자금성에서 나가라고 요구하며 수정청실우대조례를 체결하라 강요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통제는 이를 수락하여 자금성을 비롯한 황실의 재산을 헌납하고 생가인 순왕부로 돌아갔고, 12년 간 유지되었던 청나라 소조정이 해산되었다. 이를 핍궁사건이라 부른다. 이후 푸이는 톈진의 일본 조계지로 도주하였다. 1928년 장제스는 2차 북벌로 베이징을 점령하고 1931년에는 선통제에게 청나라 소조정을 복구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문단을 참조할 것. 그러나 선통제는 황릉 도굴 사건 때문에 국민당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않아 이를 거절하고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여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했다.
참고로 신해혁명 당시 청 황실은 존호의 세습을 요구했지만 중화민국 정부로부터 거부당하였다. 따라서 선통제의 후손이나 후계자는 황제 작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어디까지나 내전을 회피하게 해준 선통제 개인에 대한 선물이었던 셈. [6]
[1] 국호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편의상 청황실 소조정, 혹은 청나라 소조정으로 불린다.[2] 자금성 전체가 청나라 황실 소유는 아니었고, 외조(外朝) 부분인 태화문, 문영전, 무영전,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까지는 중화민국이 소유하고, 그 안쪽인 내정(內庭)만이 청나라 황실 소유였다.[3] 만주족, 몽골족, 위구르족, 티베트족을 말한다.[4] 후에 영국령 웨이하이웨이 최후의 총독을 역임(1927~30)[5] 청나라 소조정 내에서는 선통 연호가 계속 쓰였으니 이렇게 표기.[6] 물론 계속 소조정이 유지되었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