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돌격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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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사 사례
3. 막장 부대
4. 속도전 청년돌격대의 부대 편성
5. 216사단의 부대 편성
6. 기타 청년돌격대
7. 조선인민군 건설부대


1. 개요[편집]


속도전청년돌격대는 건설현장이나 탄광, 광산 산하에 조직되는 직장으로 현역에 입대시키고 남는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소속 청년들을 대개 이쪽에 배치시킨다. 줄여서 '돌격대'라고도 불린다. 어?

방어진지 건설 혹은 고속도로, 비행장, , 살림집, 공장, 철도, 발전소, 농사 지원 등 각종 공사와 잡일에 투입하는 준현역급 건설공병들으로 이루어진 일종의 국가가 세운 국토건설단이다.노가다꾼 탄원 제도가 존재하지 않고 국토건설단이 폐지된 현대의 남한 기준에서 넓게 보면 일용직 건설 노동자들이 모여있는 국영 건설사 정도라고 볼 수도 있다.

최초 등장은 1946년 보통강 개수공사 때로, 이후로도 각종 전후복구 사업을 위해 임시적인 청년돌격대가 편성되다가 가장 유명한 '속도전청년돌격대'가 1975년 상설조직이 되어 40년 이상 운영되고 있다. 북한에서 "청년"이라는 이름이 붙은 시설들은 이들 청년돌격대가 건설한 것이다. 예를 들면 금강산청년역, 신의주청년역 같은 철도역들.

남한에서도 방위병이나 상근예비역이 있고, 공무원을 대신해서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으로 부려먹은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쪽은 대다수가 행정직이라 몸 쓰는건 덜하지만 북한의 청년돌격대는 몸 쓰는 노가다로 부려먹힌다는 차이가 있다. 김정은 시대가 온 뒤로는 경력이 쌓이면 어느정도 안정적으로 먹고살수는 있어졌기때문에 상황이 개선되었지만, 김정일 시대때는 막장인 경제상황과 부실한 보급이 겹쳐서 군기가 개판이기로 악명높았다.


2. 유사 사례[편집]


사실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채택한 국가에는 거의 유사한 제도가 있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인간론에 따라 의무교육을 받은 개인은 가장 적성에 맞는 직업[1]을 가져야 했다. 그러나 차마 사회주의 국가, 전체주의 독재국가라도 너의 적성은 노가다라고 강요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 문제.[2][3] 소련 초중기에는 학력수준이 낮았기에 단순노동을 기피하는 경우는 적었지만 사회기반시설 건설수요는 많았기 때문에 죄수들까지 동원했었고 학력수준이 고졸 이상으로 올라간 소련 후기에는 사무직보다 노무직의 임금수준이 더 높은 경우가 많았음에도 사무직 노동을 선호하는 현상이 생겨나서 단순노무직은 일손이 달렸다. 단순노무직을 확보하기 위해 제일 많이 활용된 방법은 죄수를 이용한 노동단련형과 군인이나 민간인의 노력동원이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붕괴하는 그 순간까지 단순노무직의 만성 부족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고, 그동안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갖은 방안을 고안했다.

동독에는 Bausoldaten(건설병)제도가 있었는데,[4] 건설병 제도도 이 제도와 마찬가지로 군복무 대신 건설, 토목 현장에서 노역을 하게 한 제도이다. 다만 이 둘의 가장 큰 차이점이 존재하는데 동독의 건설병 제도는 자신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따른 자발적 지원제였고, 북한의 건설부대는 그냥 비자발적 노예라는 것이다. 애초에 북한에서 군복무는 선택의 자유란 없으며 당에서 정해주는 대로 복무해야 한다.

베트남 전쟁 때도 북베트남에 청년충격여단이라는 청소년, 여성으로 구성된 건설부대가 있었다고 한다.

중국의 신장생산건설병단 역시 이 분류에 속한다.

남한에서 그나마 가장 비슷한 성격을 가진 것은 1960년 11월 28일에 창단되었다가 1962년 12월 31일 해산된 대한민국 국토건설단이다. 원래 실직자 구제수단으로 만들어졌으나 병역미필자, 병역면제자들이 군복무 대신 국토건설단에서 건설, 토목 현장에서 노역을 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국토건설단은 감자 농사를 짓지는 않았고, 건설부대처럼 군기가 완전 막장인 단체는 아니었다.


3. 막장 부대[편집]


청년돌격대는 려단(도)-대대(시, 군)-중대(읍, 로동자구, 동, 리)-소대(인민반)로 이어지는 군대식 편제를 취하고 있으며, 실제로 대원들에게도 군대 계급이 나온다. 복무기간은 과거에는 군대보다는 짧은 2~3년에 불과했다고 하나 현재는 군대와 비슷한 10년까지 올라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속도전 청년돌격대의 인원은 약 40만명으로 파악되고 있다.[5]

이들이 주둔하고 있는 반경 몇 km 지역의 민가와 군부대(?!)에는 식량 한 톨, 처녀 한 명도 남아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약탈이나 강간 등 온갖 범죄가 벌어진다고 하며 그러다가 간혹 저격여단이나 경보병여단 등의 특수부대원들에게 걸려서 역으로 얻어맞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군관(장교)이라는 작자들이 부대원들을 , 곡괭이, 지렛대로 무장시켜서 몇십 명이 죽고 다칠 때까지 패싸움하는, 군기가 막장 중에 막장인 곳이다.

사실 이들이 이런 짓이나 저지르는 것도 나름 사정이 있긴 하다. 신분부터가 동요계층 출신 이하에 신체적으로나 사상적 토대나 성분이 현역으로 입대가 불가능한 계층들이 많다. 게다가 부모없이 떠돌아 다니던 꽃제비 출신들도 있다. 나이가 차니 직업배치를 받아 사회생활을 해야 하는데 북한 사회에선 군대 경력없이는 입당도 못하고 입당을 못하면 남자취급도 못받고 장가도 못간다는 인식이 많았기에 돌격대라도 가는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세가 거의 불가능 하고[6] 10년 동안 총대신 제대로 된 안전장비도 없이 노가다만 하는 부대에 걸려서, 강냉이밥과 염장무 따위가 제공된다. 물론 이렇게 부식공급이 열악한것은 타 부대도 마찬가지이지만 김일성 시절에는 군복무기간이라도 짧아서 사회로 빨리 나갈수있다는 장점이라도 있었는데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복무기간이 연장되어 타군과 똑같이 장시간 복무하게 되고 그 와중에 보급은 형편 없어졌으니 이들의 박탈감이 커졌고 결국엔 고삐가 풀려서 군기가 개판이 된것이다. 더군다나 그 식료품도 제때 보급되지 않아서 가만히 있으면 영양실조로 굶어죽는판인지라 자체적으로 텃밭을 가꾸거나 남는 시간에 장사질을 하든가라는식의 부업을 해야했다. 그리고 안전모랍시고 주는 게 싸리나무 가지를 엮은 것이니 말 다했다. 물론 그렇다고 약탈 및 성범죄 행위가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물론 이들이 100프로 성분불량자는 아닌게 모종의 경우로 인해 특정연도 졸업생들은 예외없이 돌격대로 보내버리는 무리배치가 잦다. 이 경우에는 부모들이 뇌물을 써서 다른곳으로 빼돌리니 없는 집 자식들만 남는게 대다수.

이곳 군관들도 하전사들 힘든 걸 알기 때문에 할당된 작업량만 달성하면 도둑[7], 강간 등의 웬만한(?) 군기 위반 등은 봐주는 편이다. 이미 강간 같은 강력범죄를 못 본 척 넘어가는 게 이 세상 군대가 아닌데... 이렇게 사고가 넘쳐나다보니 당연히 대민이미지가 나쁘니 해체되어도 할말이 없지만 북한의 사회 꼬라지 자체가 군을 우선시하는데다 무엇보다도 재정이 열악하기 때문에 까놓고 얘기하자면 인건비 날로 먹으려고 이들의 유용성이 커서 그럭저럭 존속은 되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10년을 복무해도 제대로 된 봉급 한 번 받지 못하고, 당원이 되어 당증이나 하나 받아오면 다행[8] , 대학추천을 받으면 횡재다. 그나마도 고된 노동을 뒷받침할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자체적으로 텃밭을 가꾸고 가축을 기르고 숙소를 직접 지어 해결해야 하는 판이니 총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어찌 보면 어지간한 군대 생활보다도 힘든 것이 청년돌격대 생활이다. 때문에 중도에 탈영을 하는 사례가 부지기수고, 최근에는 이런 사례가 많이 알려지면서 청년돌격대에 입대하지 않으려 기를 쓰는 사례가 잦아지고 있다. 군대는 적어도 총을 들고 사민(민간인)들을 약탈하든 뭘 하든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2010년대 북한에서 건설붐이 불자 청년돌격대도 일거리가 늘며 경우에 따라서는 제법 벌어먹고살수는 있어졌고, 이 때문에 코로나 이전 김정은 시대에는 돌격대가 밥벌어먹을수있는 직종으로 각광을 받았다고 한다.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평양에 아파트와 마천루 등의 신식건물의 건설이 늘어나면서 돌격대가 많이 투입이 되었는데 그전엔 개돼지 취급을 받던 돌격대원들중에 특히 아파트나 고층건물 건설에 기술이 좋은 돌격대원 출신들이 몸값이 올라가서 대접받게되었고, 특히 돌격대 건설지휘부 참모장은 건설인원을 수급해주는 용역업자 역할을 맡아서 꿀이 떨어지는 자리이기 때문에 호위국이고 보위국이고 나발이고 군관들이 돌격대 건설지휘부 참모장 자리 하려고 뇌물을 쓰는판이라고. 다만 이것도 부대사정에 따라 다르기는 해서, 사회초년생들은 여전히 강냉이밥, 콩밥이나 무짠지, 나물, 소금국 정도나 나오는 부실한 식사를 하면서 경력을 쌓는 경우가 여전히 많기는 하다. 번듯한 식단은 먹으려면 자비를 들여야된다.


4. 속도전 청년돌격대의 부대 편성[편집]


병력: 40만
소속: 사회주의애국청년동맹 산하
임무: 고속도로, 해안방어진지, 비행장, 댐, 아파트, 공장, 철도 등 국가건설 대상 공사투입
성격: 남측의 국토건설단[9]과 유사, 현역입영제외 상근성격
복무: 과거 2~3년→ 현역과 동일하게 10년 복무
현황: 4.25돌격대 효시, 1974년 속도전청년돌격대로 개편
군사지도원: 여단별 중좌배치
속도전지도대국 총국장: 김성철, 당위원장: 박창익, 지도국국장: 김영철, 부국장: 한복길, 참모장: 김원도·리영일·신기해

부대편성: 25개 여단
중앙편제: 지도총국산하 제1~11려단 등 성, 중앙기관별 14개 여단
지방편제: 도별 11개 여단-대대-중대-소대


5. 216사단의 부대 편성[편집]


제216사단: 삼지연군 복구작업
제922건설려단
제618건설려단: 백두산종합박물관건설
철길건설려단
백두산영웅청년려단
체신련대
전력련대
제914지휘부: 감자농사


6. 기타 청년돌격대[편집]


돌격대의 본부는 사단으로 간주된다.
105당원돌격대 -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828청년돌격대
수도건설청년돌격대 - 평양시건설돌격대에서 개칭
922건설돌격대
618건설돌격대 - 조선로동당 선전선동부 소속[10]
백두산영웅청년돌격대
차광수[11] 청년돌격대, 김혁[12] 청년돌격대, 강호영 청년돌격대 등 탄광 돌격대
려명거리건설돌격대, 화성지구살림집건설돌격대 등 건설현장에서 조직되는 셀 수 없이 많은 돌격대 - 대부분 산하에 각 성 및 중앙기관, 직할시 및 도 단위의 여단을 둔다.

협동농장 산하의 청년작업반과 청년분조도 돌격대의 명칭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탄광돌격대와 건설돌격대와 같이 탄원을 통해 형성되는 조직이다.

이외에 돌격대의 명칭을 하고 있지만 217과학자기술자돌격대(국가과학원 소속)와 415기술혁신돌격대(조선과학기술총련맹 소속)은 청년돌격대와는 성격을 완전히 달리한다. 덧붙여 217과학자기술자돌격대는 공장, 기업소, 농장에 파견되는 것이고, 415기술혁신돌격대는 공장, 기업소, 농장에 설치되는 것이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전자는 연구직, 후자는 생산직 기사라고 보면 될 듯.


7. 조선인민군 건설부대[편집]


건설부대는 분명 국방성 공병국 예하의 육군 여단급 부대이지만, 절대 정규 공병부대가 아니며, 10년동안 만들고 고치는 일이나 뼈빠지게 시키는, 대놓고 말하면 그냥 노가다 노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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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 창건 70주년 열병식에 등장한 '도로군단' 열병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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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금 더 정확히 설명하자면 자본주의에서의 소외 현상을 불러오는 생산수단과 생산력(노동자)의 분리를 타파하고, 생산력을 가진 노동자가 생산수단을 장악할 수 있는 직업을 의미한다. 즉, 똑같은 1차 노동이라도 농민은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고 농작물 생산의 모든 과정을 본인이 장악하여 본인이 생산 자체를 통제할 수 있고 공장의 노동자도 마찬가지기 때문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따른 모순이 없다. 문제는 건설현장의 단순 노무직은 그 생산수단과 결과물로부터의 소외가 불가피했다는 점인데, 쉽게 말해서 노동자가 원하는 대로 건물을 지을 수도 없고 건물을 짓는다고 그 건물을 노동자에게 줄 수 없다는 것.[2] 계획경제 사회주의 국가에서 '건설노동자'로 분류되는 직업이 없던 것은 아니나, 대개는 집을 수리하는 기술직이나 목수와 같은 업종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규모도 작고, 임업종사자와 같이 조직되는 경우가 많았다. 1, 2차 산업에서의 육체노동자는 존재했고 교육 수준 향상에 따른 육체노동 기피와 차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현대 한국의 노가다 같은 직종은 별도의 직업 분류 없이 노력동원으로 충당하였다.[3]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도 시민대중의 교육 수준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21세기의 시점에는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국제노동시장의 개방, 아니면 노동시장에서 낙오된 인원의 수급으로 해결하는 추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가다상하차로 대표되는 단순노무직의 만성부족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2020년대 현재 한국도 단순노무의 일급은 단순 최저임금보다 상당히 높게 책정되고 있다.[4] 참고자료[5] 北, 청년동맹 산하 청년돌격대 40여 만명…"무보수 강제동원" [6] 부대마다 입당 가능 쿼터가 내려오는데 당연히 일반부대보다 적다. 재일교포 출신 탈북자는 기어이 입당하려고 자원으로 12년 복무까지 했다고..[7] 민간인의 이나 농작물 등을 서리하는 등[8] 그런데 대부분 입당이 안된다. 이 쪽에 가는 사람들은 출신성분 등 북한 당국의 말도 안되는 기준에 걸리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9]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조직한 조직으로 불량배들과 부랑아, 군 미필자 등 "반사회적 성격"의 인원들을 강제 징집해 토목공사에 동원했다.[10] 922건설돌격대와 618건설돌격대 및 철길건설돌격대는 청년돌격대가 아닌 직맹돌격대이다.[11] 초창기의 김일성을 지원한 공산주의자로 모아산에서 중국 공산당 예비당원이 될 때 그의 입당보증인이 돼 주었다고 한다. 1930년대 중국 공산당의 세력다툼에서 피살되었다. 북한은 그를 김일성을 위해 충성한 청년 공산주의자의 전형으로 선전하고 있다.[12] 차광수와 마찬가지. 본명은 김근혁으로 1931년 일제에 체포된 후 변절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