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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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어
Herring



학명
Clupea
Linnaeus, 1758
분류

동물계 Animalia

척삭동물문 Chordata

조기어강 Actinopterygii

청어목 Clupeiformes

청어과 Clupeidae

청어속 Clupea

태평양청어 Clupea pallasii
대서양청어 Clupea harengus
자원보호
금지체장
20cm

1. 개요
2. 생태
3. 주요 종
4. 명칭
5. 청어와 인간
5.1. 수산업
5.1.1. 한국
5.1.2. 일본
5.1.3. 유럽
5.2. 관련 민요와 풍속
5.3. 음식
6. 여담



1. 개요[편집]


파일:청어 떼.jpg

청어목 청어과 청어속의 바닷물고기.


2. 생태[편집]


성체는 길이가 20~38 cm, 외견이 정어리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지만, 몸 측면에 방사형 융기선이 없고, 꼬리에 정어리 특유의 비늘이 없으며, 옆구리에 검은 점이 없는 점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몸빛깔은 담흑색에 푸른색을 띠지만 배 쪽은 은백색이다. 대표적인 한해성 어류로, 3월 하순부터 수온이 4~5°C 가까이 올라가면 성숙한 성어는 깊은 바다에서 연안의 해조류가 무성하고 암초가 있는 얕은 연안이나 내만으로 떼를 지어 몰려오고, 그곳에서 12월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산란한다. 성숙하는 데는 4년 정도 걸리고 수명은 20년 정도이다. 먹이는 플랑크톤성 갑각류이다.


무리지어 생활하고 개체 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생태적으로는 상위 포식자들의 먹이로 매우 중요하다.


3. 주요 종[편집]


  • 태평양 청어
학명은 Clupea pallasii. 북태평양 일대에서 잡히는 청어의 일종. 한국, 중국, 일본러시아 극동, 아메리카 서부 등지에서 어획된다. 동아시아에서 대다수가 소비된다.

학명은 Clupea harengus. 북대서양 일대와 발트해에 분포하는 청어의 일종. 서구권에서 소비되는 청어이다. 발트 해에서 잡히는 대서양청어는 크기와 지방량이 상대적으로 적어 별도로 발트 청어라고 볼리기도 한다. 특이하게도 이 청어의 아종으로 분류되는 백해 청어는 그 이름대로 대서양과 연결된 러시아 북서부의 백해에서만 서식한다.


4. 명칭[편집]


한국어
청어(靑魚), 비웃
영어
herring, shad[1]
중국어
鯡魚/鲱鱼 (fēiyú)
일본어
ニシン(니싱)
스페인어
arenque

청어를 식재료로는 '비웃', 청어의 알을 '비웃알'이라고도 불렀다. 그 외에도 겨울에 잡힌 아직 덜 자란 청어를 '굴뚝청어'라고 한다. 한국에서 일부 사람들은 청어의 새끼를 '솔치'라고 부르는 데, 경상도 사투리로는 송사리의 새끼를 가리키는 단어라서 혼란이 있다.


5. 청어와 인간[편집]



5.1. 수산업[편집]


물 반 청어 반이다 싶은 어마어마한 개체 수 때문에 근대 이전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바다를 끼고 있는 곳에서는 중요한 먹거리였다. 전 세계에 명물이 되어 남은 청어 보존 식품들이 그 흔적이다. 한국의 과메기[2]와 청어알젓, 일본의 미카키니싱,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 유럽의 훈제 청어와 청어 초절임 등. 또한 청어 어업이 창출한 거대한 규모의 경제는 한 지역과 국가의 흥망이 청어의 어획량에 좌지우지될 정도로 거대했다. 그래서 유럽에서는 대구와 함께 청어를 '바다의 은(The Silver Of The Sea)'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단 어업을 하면 엄청나게 잡혀서 예전부터 청어잡이를 할 때는 낚시보다는 그물을 사용했다. 워낙 대량으로 어획되는 탓에 기존의 시장 규모에서는 단시간에 소비가 불가능해서 냉동 유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2013년 12월 기준 남해안에서 잡힌 청어(산란기라 곤이이리가 있는)의 경매가는 20 kg 한 상자에 9천 원으로 매우 저렴하다. 참고로 고등어는 1 Kg당 1만 원가량이다. 청어는 꽤 저렴한 생선이라 주로 양식장 물고기들의 사료로 이용된다.


5.1.1. 한국[편집]


청어는 정월에 입포(入浦)하여 해안을 따라 회유하면서 산란하는데 무수한 청어가 떼를 지어 군래하면 바다를 뒤덮는다.

--

- 정약전, 《자산어보》 中


동아시아에서 청어 어업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은 한국으로, 고려 시대부터 그 기록이 존재한다. 하지만 청어 어획량이 급증한 것은 조선 시대, 그 중에서도 소빙기의 영향으로 냉수괴가 황해까지 대대적으로 확장했던 근세이다. 냉수괴가 확장하자 한류성 어종이었던 청어 또한 서식지를 넓혀 중국 연안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당시 조선에서 청어는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가장 인기 있는 등푸른 생선이었다. 수많은 등푸른 생선을 제치고 청어(靑魚)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 바로 그 증거. 즉 옛 조선인들에게 등푸른 생선의 표준은 어디까지나 청어였던 것이다.

당시 청어는 전국의 바다 연안 전역에서 매우 많이 잡혀[3] 비유어(肥儒魚: 선비를 살찌우는 물고기)[4]로 불릴 정도로 값싸고 친숙하며 맛있는 생선이었다. 이때는 시기별로 각 지역에서 청어를 잡아 올릴 수 있었으며, 지금은 상상도 못하지만 황해도 해주산 청어도 한때 이름을 날렸다. 해당 지역은 현재는 오히려 난류성 어종인 조기 어장으로 변했다.

특히 당시 소빙기의 영향으로 기근이 자주 발생할 정도로 식량 사정이 악화되었는데, 오히려 청어는 어획량이 폭증하면서 전국적으로 유통되기 시작했고, 배고픈 일반 민중의 배를 채워준 고마운 식품이었다. 그렇기에 당시 조선에서도 청어를 보존하기 위해서 다양한 가공 방법들을 개발했다. 대부분은 타국의 청어 가공품과 아주 비슷했다. 대표적인 것은 관목이라 불린 과메기로, 바닷바람에 청어를 말린 것이다. 현재는 꽁치로 만들지만 원조는 청어였다. 한편, 부엌 굴뚝에 걸어 훈연한 훈제 청어(연관목)도 있었다.

예로부터 청어죽은 보신재로 산후나 병후의 회복기에 좋은 식품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값도 싼 생선이라 어떤 선비는 "1냥에 청어 3뭇밖에 안 되는데 너무 비싸진 거 아니냐?"라고 하기도 했다. 참고로 1뭇은 10마리. 허균의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서는 한술 더 떠서 "청어는 옛날에는 극히 흔하였는데 고려말에는 감산되어 쌀 한 되에 청어 40마리밖에 주지 않았다." 하고 한탄했다.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은 병사들을 동원해 청어잡이로 수십만 마리를 잡아 군사와 피난민들의 식량으로 썼다고 한다. 한산도둔전을 일구기는 했지만, 거기에서 나오는 곡식만 가지고는 그 많은 입을 먹여 살리기에 부족했기 때문이다.[5] 잡은 청어들은 주로 그냥 먹기보다는 말려서 과메기로 먹었다. 청어는 내장에 지방이 많고 살이 쉽게 물러서 금방 상해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말린 청어를 농민들과 물물교환하여 군량미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순신 본인도 구운 청어를 즐겨 먹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생선이라서 조선 수군의 체력과 사기유지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여담이지만, 청어와 함께 조선수군에 기여한 또 다른 수산물은 미역.

조선에서도 청어의 포획과 소비, 가공업은 비록 타 국가들처럼 전국적/국제적인 유통망을 갖춘 산업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 활황이었다. 소빙기와 기근, 그리고 인구 증가와 화폐경제의 발전에 맞물려 삼면의 바다에서 대량으로 잡히기 시작한 청어는 조선 후기 어업과 유통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조선 조정의 수입 중에서도 청어 수산업에서 걷은 세금이 어느 정도 큰 비중을 차지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큰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주로 어살을 설치해 잡았다.#

한편 다산 정약용은 포항 유배 도중에 청어 어업에 적합한 그물을 만드는 법을 해당 지역의 어부들에게 알려 줌으로써 청어 어획량 증가에 기여했다. 원래는 어부들이 칡넝쿨로 만든 조악한 그물을 사용했기에 청어를 많이 잡아도 그물이 터지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정약용은 명주나 면사로 그물을 짜는 방법과 그렇게 만든 그물을 소나무 껍질을 달인 물에 담가 강도를 강화시키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이를 갈물 들인다고 하며, 이 방식으로 강화된 그물은 쉽게 끊어지지 않았다. 정약용의 그물은 일제강점기에도 절찬리에 쓰이다가 나일론 그물이 등장하는 1950년대에야 사라졌다.#

하지만 한국 근해의 청어들도 어획량 변화가 걷잡을 수 없이 큰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이후 청어의 이동이 시작되면서 청어 산업은 쇠퇴하고 만다. 소빙기가 끝나면서 우선 중국 연안의 청어들이 사라졌고, 한반도 서해안의 청어는 19세기부터 서서히 개체수가 감소하다 자취를 감췄다. 19세기 말에 들어서는 청어 서식지가 아예 인구 희박 지역인데다 높은 산맥으로 타 지역과 고립되어 있는 동해안으로 국한되었다. 이 덕에 인구 밀집 지역인 서부 지역과 생산지가 괴리되면서 생산량도 덩달아 급감했고, 자연스럽게 청어 어업도 다른 어종에 밀려 사양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 빈 자리를 꿰찬 것은 난류성 어종이라 서해안에서 원래 많이 잡히고 소비되는 조기, 그리고 삼면에서 잘 잡히는 고등어였다.[6] 한류성 어종인 명태대구(어류), 청어는 교통 및 냉장 기술이 발전한 근대에 들어서야 소비량이 다시 폭증한다.

이 때문에 조선 청어 어장은 19세기부터 국제적인 각축장이 되기도 했다. 18 ~ 19세기경 중국 연안까지 잠시 확장했던 청어 집단이 다시 조선 서해안 연안으로 돌아가자, 이를 쫒아 청나라 어선들이 조선 연안까지 와서 조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이 바로 황당선이라고 불렸던 선단으로, 기록에 등장하는 중국 어선의 불법 어로 행위 중 가장 이른 것이다. 이는 당시 조선 조정과 청나라 조정 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잠시 번졌을 정도였다.

19세기부터는 일본의 청어 어업이 개항 및 산업화와 맞물려 더더욱 활황을 띔에 따라 일본 선단이 조선 어장에 침투했다. 당대 일본은 서구 국가들에 비누 및 각종 기계유의 원료인 청어 어유를 수출하였는데, 홋카이도까지 병합해서 그 근해 어군을 싹 잡아들인 결과 청어 개체수가 격감한 것이다. 그러자 일본 어선단은 점차 일본 제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동해안으로 진출하여 어업권을 야금야금 갉아먹었고, 경술국치 이후 조선이 식민지가 되자 거리낌 없이 조선 동해안의 풍부한 청어 어장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편 서식지가 축소되었음에도, 19세기 말까지는 어획량이 엄청나 부산항에 배가 들어갈 수 없을 만큼 청어가 몰려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데 60년대부터 차차 줄어들어 7~80년대에는 1/100수준이 되었다. 70년대 중반에는 원래 제철이어야 하는 연초 때의 어획량이 아예 0이었다는 기록도 있었으나, 90년대들어 차차 늘고 있다.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수십 년간 청어가 거의 나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자산어보에도 이런 청어의 주기적인 이동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55년 주기로 서해에서 청어가 잡히다가 동해에서 잡히다가 한다고 한다. 이렇게 한국에서 청어가 씨가 마르면서 청어로 만드는 과메기는 거의 사라지고 꽁치 과메기밖에 남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청어 회유로가 40년이 지날 때마다 바뀐다는 설이 있으므로, 다시 연근해가 청어 떼로 넘칠 날이 올 것이라 예상했는데[7] 실제로 2010년대 이후로 국내에서 청어 어획량이 다시 늘어나고 청어 풍년인 해도 점점 늘어나는 중. 당연히 청어 과메기도 부활했다. 대한민국에서 잡히는 청어는 주로 양식장의 사료로 이용된다. 청어를 직접 식용으로 판매하기보다 청어로 넙치 같은 양식어종을 길러서 판매하기가 더 이득이기 때문이다.

주요 가공품은 다음과 같다.

청어를 막대기에 꿰어 겨울 바닷바람에 말린 건어물. 눈을 꿰었다 해서 관목(貫目)이라고도 한다. 이 한자어가 과메기라는 말의 원조인지, 아니면 단순히 과메기란 단어를 한자로 음차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한데, 공식적으로는 관목의 방언이 과메기라는 것이다. 현대 들어 청어의 개체수 감소로 인해 대체재인 꽁치로 주로 만들었지만, 청어 어획량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원조 청어 과메기도 다시 늘어나고 있다. 내장을 제거하지 않은 채 말린 것은 요새는 통과메기라고 부르는데 이쪽이 사실 원조다. 현재 유통되는 과메기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내장을 제거하고 반으로 가른 편과메기는 사실 1990년대 대량공급을 위해 새로 개발된 신식 기법이다. 포항 수협의 설명에 따르면 전통적으로는 부엌의 살창에 통째로 걸어 겨울 바람에 말리는 냉훈법으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부엌에서 나오는 연기가 자연적으로 청어를 훈연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별도로 연기 연(煙) 자를 앞에 붙여 연관목이라고도 불렀다. 연관목은 현재는 거의 완전히 사라져서 기록에서나 볼 수 있다. 본래 과메기는 동해안 전역에서 소비하는 보존식품이었지만 포항시 영일만의 청어로 만든 과메기가 특히 유명하다.

  • 청어 알젓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와 전라북도 부안군 곰소 일대의 토속 특산물. 말 그대로 청어알을 절여 만드는 젓갈이다. 갖은양념과 소금, 그리고 청어알을 켜켜이 쌓아 만든다.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도, 경상도 지역의 향토 음식. 말려서 썬 청어와 무, 마늘, 생강 등을 찹쌀과 함께 장독에서 삭혀 만든다. 일반적으로는 편과메기를 손질하여 만드는 경우가 많다.

  • 청어 절임
유럽의 청어절임과 유사한 강원특별자치도, 함경도 지역의 향토 음식. 현재는 기록으로만 남은, 사라진 식문화이다. 청어 100마리에 소금 2되를 잘 말린 장독에 넣어 절여 만든다.


5.1.2. 일본[편집]


일본의 청어 어업은 동북아 3국 중 가장 늦었다. 하지만 에도 막부 시기인 17세기부터 폭발적으로 성장하여 전국적 유통망을 갖춘 산업으로 성장했다.

당시 일본의 농업 생산량과 상품 작물 생산량이 증가하면서 비료 제작 산업이 활황을 띄었다. 원래는 정어리를 가열하고 압착해 어유를 추출한 뒤 남은 깻묵으로 비료를 만들었는데, 때마침 정어리가 사라지고 소빙기의 영향으로 청어가 급증하면서 일본 북부 해안으로 넘어오자 원료가 정어리에서 청어로 변화했던 것이다. 에도 시대 어부들은 청어를 쫒아 북상하면서 마침내 당시는 아이누의 영역이던 홋카이도까지 도달했는데 이는 일본의 홋카이도 식민지화의 첫 단계였다. 홋카이도 남부에 위치한 마쓰마에 번에서는 청어와 연어를 찾아 가신들에게 특혜를 주어 홋카이도 해안 곳곳을 개척시켰다. 이때 임노동자로 아이누 부족들을 헐값에 동원하며 아이누의 생활 양식을 파괴하는 바람에 여러 차례 반란에 직면하기도 하였으며, 일부는 사할린까지 올라가다가 러시아 제국과 만났는데 이는 양국의 최초 조우였다. 쨌든 이렇게 잡힌 청어들은 인근의 집산지에서 크기별로 분류되어 가공된 후, 운송업자들의 전국적인 유통망을 거쳐 일본 각지에 납품되었다.

당시 일본의 주된 청어 가공 식품은 하술할 미가키니싱으로, 우리나라 연관목, 또는 유럽의 훈제 청어와 비슷한 제품이다. 우선 청어의 내장을 제거한 뒤 바싹 훈연하여 만드는 훈제품으로, 주로 상등품이 청어가 가공되었다. 청어가 나지 않는 서일본, 그것도 내륙인 교토의 명물이라는 점에서 당대 일본의 청어 산업이 얼마나 고도로 발전했는지 알 수 있다. 상품가치가 떨어지는 하급품 청어는 우선 대량으로 쪄낸 후 압착하여 청어 어유를 분리한 뒤 등유로 팔고, 남은 깻묵은 상술한 대로 비료로 가공해 각지의 농장에 팔았다. 버리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편, 일본이 개항한 뒤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는 기존의 어유 산업이 특히 발전하였다. 어유에 수소를 첨가해 경화유로 가공하면 윤활유 등의 각종 산업적 용도로 쓸 수 있었던데다 비누의 원료도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곧 일본 근해의 청어는 남획되었고, 식민지로 편입된 조선 동해안에도 수많은 어유 생산 공장이 들어섰다. 이때 가공된 청어와 정어리 어유는 일본 제국 해군 함대의 주요 동력원으로도 쓰였으며 한때는 일제가 바이오매스로 에너지 자급이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그러나 1940년대부터 청어와 정어리가 일본 근해에서 사라지며 안그래도 중일전쟁의 수렁에 빠져 있던 일본 제국의 연료 공급에 엄청난 차질이 빚어졌고, 일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소나무에서 송근유를 채취하기에 이른다.

  • 미가키 니싱
한국의 과메기와 유사한 말린 청어. 다만 간장 양념을 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교토의 특산물로, 교토에서는 청어 산지에서 건제품을 가져와 양념하여 완성한다. 일제강점기 한국에서는 일본 한자어를 그대로 읽어 청어신흠(靑魚身欠)이라고도 불렀다.

  • 어유
청어 기름. 에도 시대부터 생산하다 근대 들어 청어 산업의 주 상품이 된 제품. 어유 그대로는 하급 등유로 쓰지만, 수소를 첨가하는 정제 과정을 거치면 경화유가 되어 각종 산업용으로 쓸 수 있다.

기름을 짜고 남은 깻묵을 이용해 만든 유박비료이다.


5.1.3. 유럽[편집]


파일:bloaters.jpg
▲ 영국의 염장 훈제 청어인 블로터(Bloater).


바이킹들의 식사를 소개하는 영상. 청어포가 나온다. 얼마나 단단하면 먹기 전에 막대기로 두들긴다

유럽에서도 흔하고 친숙한 식재료였다. 일명 "바다의 (The Silver of the Sea)". 중세 유럽에서는 금육일에 단백질 공급원으로 주로 소비되던 것이 훈제 청어일 정도였다. 게다가 비타민 D 함량이 많은 음식 중 하나라서 우중충한 날씨가 일상적인 북유럽에서는 더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노르웨이 수산조합은 청어가 유럽 식문화에서 감자에 버금가는 위치에 있다고까지 설명한다.#

유럽에서도, 청어 어획량은 늘 들쑥날쑥해서 청어가 잡히는 지역의 경제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한자동맹의 성장과 몰락에 청어 서식지의 변경이 일정부분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도 있으며,[8] 대항해시대 시절 네덜란드도 청어 어획고가 감소하자 국가경제가 휘청거렸다. 스페인이 몰락한 이후 네덜란드가 유럽의 패권을 거머줬을 때 그 밑바탕이 된 것이 엄청난 청어 어획고로 벌어들인 돈이었다고. 대구와 함께 단백질 공급원으로서 청어는 매우 중요한 식량 자원이었다.

유럽에서 청어 어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는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었던 9세기경이다. 금욕을 강조하는 가톨릭 교리로 인해 사순절과 같은 시기에는 육류의 취식이 제한되었다. 그러나 동물성 단백질은 반드시 보충해야 했으므로 이는 곧 종교적 제한에 걸리지 않는 청어와 대구 가공품의 급격한 소비 증가로 이어졌다. 본격적인 어업이 시작되었던 곳은 발트 해 연안, 그 중에서도 스웨덴 남부의 스코네 지방이었다. 스코네 어시장(덴: Skånemarkedet/스: Skånemarknaden)은 청어 어업의 핵심적인 장소로, 덴마크 정부의 주요 자금줄이기도 했다.[9]

초기에는 바이킹의 후손인 덴마크가 주도하였으나 곧 북해와 발트해 일대의 상권을 장악한 도시 공동체인 한자동맹이 청어 어업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다. 당시 청어 가공의 중심지는 독일 북부의 뤼겐 섬. 이 지역은 독일 동부와 폴란드 일대에서 캐낸 암염을 조달하기 유리했기 때문이다. 덴마크령 스코네보른홀름, 에스토니아 등에서 잡힌 청어는 뤼겐 섬으로 모여 뤼네부르크산 암염으로 염장된 후 한자동맹 상인들을 거쳐 독일 서부의 베스트팔렌 지역의 상회들로 이동했고, 여기서 다시 전 유럽으로 팔려나갔다.

이는 물론 덴마크와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발트 해의 도서지역 대부분을 장악한 패권국이었던 덴마크는 한자동맹이 자신들의 영해에서 이득을 보는 꼴을 좌시하지 않았고, 한자로부터 청어 산업의 주도권을 방어하고자 계속 시도했다. 온갖 규제와 통제가 도입되었고, 한자 상인들은 스코네 어시장에 계속 머물 수 없었다. 그리고 덴마크는 1109년에 아예 뤼겐 섬을 공격해 점령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독일 북부의 뤼베크로 중심지가 이동한 것 외에는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동유럽 슬라브 계통의 가맹도시 출신 상인들은 꾸준히 청어를 실어 뤼베크로 가져왔고, 이를 가공한 한자동맹의 청어 어업은 계속 번창했다. 1370년 한자동맹은 아예 덴마크에 대항한 전쟁에서 승리하였고, 슈트랄준트 조약을 맺어 발트 해 전역에서 독점적인 어업을 할 권한을 덴마크로부터 받아내면서 힘의 정점을 찍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한자동맹과 발트 해 청어 어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만다. 청어의 주 산지인 발트 해에서 한자의 힘이 독보적으로 강해지자 밀려난 네덜란드인들과 영국인들은 새로운 무대를 찾아내었고, 이는 곧 청어 어업의 무대가 북해 연안으로 이동하는 계기가 된다. 단순히 청어 어업 이외에도 다양한 이유로 인해 한자동맹이 몰락하는 반면에 이들 국가들은 강력한 해군력을 건설하며 청어 어업에서 한자의 지분을 잠식해 들어갔다. 때마침 청어들이 이동하여 발트 해에서 어획량이 급감하기도 했다. 때문에 발트 해의 청어 어업은 현대까지 이어지지만, 다시는 이때의 위상을 복구하지 못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83px-Willem_Beuckel_lithograph_1821.jpg
▲ 자신이 발명한 칼과 청어를 든 빌럼 뵈컬손

파일:468192001.jpg
▲ 네덜란드 청어 어업의 핵심이던 청어잡이 원양어선 하링부이스(Haringbuis). 출처: 대영박물관 #

이러한 주도권 전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요인이 또 하나 있었는데, 바로 빌럼 뵈컬손(Willem Beukelszoon), 영어로는 윌리엄 버클스(William Buckels)라는 네덜란드 어부였다. 그는 1380~1386년 시기에 갓 잡은 청어의 [10]이리[11]를 제외한 내장과 가시를 쉽게 제거할 수 있는 작은 칼을 만들고, 소금 대신 함수에 절여 통에 보관하는 통절임 방법을 고안했다. 옛날부터 소금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당히 중요하고 비싼 필수품이었고, 특히 연중 일조량이 적은 기후 탓에 바다에서 소금을 만들기 어려웠던 북유럽과 서유럽은 더더욱 소금이 귀했다. 이 때문에 기껏 청어를 잡아도 오래 보존하려면 소금에 절여야 했는데, 소금이 부족해서 충분한 양을 수출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네덜란드인들은 소금 대신 바닷물을 끓여서 수분을 날려 굉장히 짜게 만든 소금물(함수)을 소금 대신 쓸 수 있음을 알아냈다. 완전히 증발시켜 고체를 만들거나 암염광산에서 캐내어 정제해야 하는 기존 방식과 달리, 함수는 그저 바닷물을 끓이기만 하면 얻을 수 있으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렴했다. 거기다 네덜란드는 발전한 자국의 조선 기술을 바탕으로 원양어선 하링부이스 선단을 구성하여 북해의 청어를 쓸어담았고, 강대한 네덜란드 해군 함대는 이들의 안전한 활동을 보장했다. 네덜란드는 이 방법으로 청어를 기존보다 수십 배나 많이 생산했고, 기존의 노르웨이, 스웨덴, 한자동맹 등 경쟁 세력들을 밀어내고 대성공하였다. 당대 암스테르담을 '청어 뼈 위에 세운 도시'라고 했을 정도니#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 청어절임은 지금도 여전히 먹고 있는데 그것이 아래 문단에서 설명하는 하링(Haring)이다.

다만 이후 네덜란드의 청어 어업은 영국인들이 청어의 주 어장인 영국 연안에 대한 방어를 강화하고 네덜란드 함대를 무너뜨리면서 점차 쇠락했다. 이후 유럽 청어 어업은 네덜란드인들의 청어 어업 기법을 배우고 강대한 영국 해군의 보호를 받는 영국으로 넘어간다.



1920년 스코틀랜드의 스카보로 항구와 1925년 잉글랜드 그레이트야머스 항구에서 스카치 큐어 방식으로 청어를 손질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들. 스코틀랜드에서 온 피셔 걸(Fisher Girls)들이 청어의 내장을 작은 칼로 제거하고 나무 드럼통에 담는 모습이 담겼다. 영국 그레이트야머스의 Time and Tide 박물관의 설명에 따르면, 피셔 걸들은 청어잡이 철마다 스코틀랜드 선단과 함께 영국 동부 연안의 각 항구에 몰려들어 청어 내장을 손질하던 스코틀랜드인 여성 계절노동자들을 지칭한다. 그들은 나이가 얼마나 들었건 간에 걸(girl)로 불렸다. 또는 영상에서처럼 피셔 래시즈(Fisher Lasses)라고 불리기도 했다. 세 명이 한 조를 이루어 작업했는데, 두 명이 내장을 제거하면 남은 한 명이 이를 받아 나무 통에 담는 방식이었다. 작업 시간은 보통 하루에 12시간에서 15시간 정도였으며, 그들은 주로 노동요를 함께 부르며 고된 작업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당시 이들은 19세기 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청어잡이 항구이던 잉글랜드 노퍽주의 그레이트야머스에 특히 많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청어 어업이 쇠퇴하고 그레이트야머스가 관광도시로 변화하면서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유럽 대서양 청어의 주된 어장은 북해, 그중에서도 영국 이스트 앵글리아 연안과 북해 중앙의 거대한 모래톱인 도거 뱅크이다. 이 지역들은 낮은 수온과 함께 영양 염류가 풍부한데다 수심이 매우 얕기 때문에 청어의 중요한 산란지였기 때문이다. 특히 잉글랜드 동남부 노퍽 주의 그레이트야머스 앞바다는 그중에서도 가장 경제성 있는 청어 어장이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이 지역의 청어 산업은 확장된 철도망과 증가하는 국제 무역량에 힘입어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19세기 이전 청어 뼈 위에 세워진 도시가 암스테르담이었다면, 19세기에서 20세기는 그레이트야머스였다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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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야머스 부둣가. 빽빽하게 몰려든 어선들 전부가 청어잡이 어선이다.

청어잡이 시즌만 되면 수백 대의 어선이 몰려들었고, 유망 또는 저인망을 이용해 날마다 엄청난 양의 청어를 잡아들였다. 육지에서는 청어 가공 공장에서 날마다 청어를 가공, 영국과 유럽 전역으로 완제품을 납품했다. 이 지역의 청어는 독일 제국러시아 제국, 폴란드에서도 많이 수입해갔지만, 주된 고객은 남유럽 국가들, 그중에서도 이탈리아 왕국이었다. 남유럽에서는 아무래도 앤초비 젓갈 등으로 익숙해서 그런지 청어 절임을 많이 수입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야머스 항의 수많은 트롤어선들은 세계대전 당시에 징발되어 기뢰를 제거하는 소해함으로 쓰이기도 했다.

유럽의 주요 청어 가공품들은 다음과 같다.

  • 청어포
청어를 말린 것으로, 우리나라의 과메기와 사실상 동일하다. 유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이 주로 만들어 먹었다. 다만 한국과 달리 유럽에서는 춥고 습한 기후와 청어에서 흘러나오는 기름으로 인해 청어가 잘 마르질 않아, 나중에는 다른 방식들이 대세가 되었다.
  • 청어 피클(Pickled herring)
독일의 롤몹스, 포메른 지방의 비스마르크와 네덜란드의 홀란처 니우어(일명 하링) 등, 식초나 소금에 절여 만든 청어 가공품 전반. 독일의 롤몹스와 비스마르크는 청어 필레와 썰어놓은 양파를 후추와 겨자씨를 비롯한 향신료, 조금의 소금과 오이 또는 당근과 함께 화이트와인 식초에 절여서 만든다. 네덜란드의 하링도 비슷하지만 소금물을 쓰기도 하며, 어린 청어를 사용해 크기가작은 것이 특징이다. 그 외 과거 한자동맹에 청어 가공품을 내다 파는 어시장이었던 스웨덴스코네 지방에서도 여전히 생산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보트니아 만의 묽은 바닷물로 인해 발효가 된 게 바로 그 악명 높은 수르스트뢰밍이다.
영국에서도 전통적으로 만들었으며, 특히 스카치 큐어(Scotch Cure)라고 하는 방식이 유명하다. 1860년 스코틀랜드인들에 의해 당대 세계 최대 청어 어장인 그레이트야머스에 도입되었다. 위 영상에서처럼, 청어가 항구에 도착하자마자 내장을 바로 제거한 뒤 나무통에 굵은소금과 함께 빼곡하게 담는다. 그러면 소금이 청어에서 흘러나온 물에 녹아 섞이면서 함수가 되어 청어를 절이게 된다. 이 방식은 도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탈리아에 수출되는 물량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다만 영국에서는 하술할 블로터와 키퍼의 명성이 더 높았다.
  • Buckling(버클링)
훈제 청어. 그 중에서도 열훈법으로 바싹 훈연한 청어를 의미한다. 과거 발트 지역에서 기원했는데 강한 불을 피워 빠르게 청어를 보존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술할 영국의 레드 헤링과 다른 점은 강한 열에 빠르게 훈연한다는 것이다. 발트 3국 말고도 독일에서도 즐겨 먹었다. 덴마크 보른홀름 지역에서도 즐겨 먹으며, 여기서는 생선의 내장을 따고 잠시 절였다가 바싹 훈연하는 식으로 만든다.
  • Bloater(블로터)
1836년, 영국 노퍽주 그레이트야머스의 비숍이라는 염장업자가 개발한 방식. 야머스 블로터(Yarmouth Bloater)로도 불린다. 어원은 '담그다' 라는 뜻의 스웨덴어 blöta. 청어들의 내장을 제거하지 않고 통째로 함수 수조에 넣어 일주일 간 절인다. 이후 20마리씩 눈을 막대기에 꿰어 탑 형태의 훈연실 천장과 벽에 빼곡히 걸고 6시간에서 8시간 가량 잠깐 냉훈법으로 훈연하면 완성된다. 주로 생산되던 시기는 8월에서 11월 사이였다.
동앵글리아 지역의 청어가 기름기가 적어 적합했다고 하며, 주로 이탈리아로 수출되었다. 한때는 청어 가공품의 대다수를 차지했지만, 통과메기와 비슷한 이유로 현재는 찾아보기 힘들다. 레드 헤링에서 블로터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제품은 따로 실버 헤링이라고 부르는데, 이건 더 오랫동안 절이고 더 짧게 훈연했기 때문에 차라리 날생선에 가깝다.
  • Red Herring(레드 헤링)
영국의 훈제 청어. 염장법이 개발된 16세기 이전부터 만들어졌던 가장 기본적인 청어 가공품. 가장 이른 기록이 13세기일 정도로 전통적인 방식이다. 청어를 적갈색이 될 때까지 몇 주간 바싹 훈연한 것이다. 덜 훈연한 것은 은은한 황금색을 띄어 골든 헤링이라 하는데 이건 현재도 영국에서 볼 수 있는 해산물 요리이다. 한편 몇 달간 훈연해서 시꺼멓게 변한 청어는 블랙 헤링이라 부르며, 끝내주게 좋은 보존성을 자랑했다. 이건 주로 카리브아프리카 식민지에 노예들의 식량으로 수출하는 상품이었는데, 당연하게도 현재는 생산되지 않는다.
냄새가 매우 심해서, 근세 범죄소설에서는 범인이 이걸 마치 현대 전투기가 미사일 회피용 플레어를 뿌리듯 자신을 뒤쫓는 경찰견들에게 던져서 후각을 교란하는 묘사를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영어에서 레드 헤링이라 하면 논점일탈의 오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되었다.


브리티시 파테에 소개된 키퍼 제작 방법. 1948년, 그레이트야머스에서 촬영.
  • Kipper(키퍼)
영국의 훈제 청어. 내장을 제거한 청어를 세로로 반으로 갈라 편 다음 소금을 뿌려 몇 시간가량 염장한 후, 막대기에 스무 마리씩 눈을 꿰어 훈연탑에 건 뒤 훈제한 것. 영국에서 현재도 상당히 흔히 볼 수 있는 해산물 식단이다. 그레이트야머스의 염장업자 존 우저(John Woodger)가 1846년에 개발했다. 우리나라 과메기와 거의 같다. 1918년부터는 천연색소를 첨가했는데, 참나무 연기의 검은색을 내기 위함이었다. 부가적으로는 훈연하면서 청어의 무게가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바싹 훈연하면 위의 레드 헤링이 된다. 최대 생산지는 맨 섬이다.


5.2. 관련 민요와 풍속[편집]



청청 청어 엮자,

위도 군산 청어 엮자.

한국전라남도 서남부 도서 지역에서 내려오는 전통 놀이인 '청어엮기놀이'는 강강술래의 일종으로, '고사리 꺾자'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원을 그리며 모여 '청어 엮자'를 자진모리중중장단으로 반복해 부르며 손을 엮은 후, '청어 풀자'라고 하며 서서히 다시 푸는 것을 반복한다. 민속학자들은 어로 작업을 무용화한, 풍어를 기원하는 생산굿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


ヤーレ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ソーラン

来 鴎騒

야렌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소란

청어가 왔는가, 갈매기가 우는구나

일본의 경우, 홋카이도의 어부들이 청어잡이 어선에서 조업 도중 잠을 쫒기 위해 부르던 민요인 '소란부시'가 유명하다. '소란, 소란' 하는 반복되는 후렴구가 특징이다. '요사코이소란마츠리'라는 축제는 삿포로의 명물이다.


And you wish you were a thoosand miles awa fae Yermouth quay.

넌 야머스 항구에서 천 마일은 먼 곳에 있고 싶구나

영국의 경우, 상술한 '피셔 걸'들이 청어 내장을 손질하며 피로를 잊기 위해 스코트어로 노동요를 부르곤 했다. Song of the Fishgutters, 일명 '생선손질노래'라고 불리는 해당 노래는 이스트 오브 잉글랜드 노퍽주의 그레이트야머스 일대에서 전승되어 왔다. 각 절마다 '야머스 부둣가(Yermouth quay)'로 끝난다는 것이 특징. 스코틀랜드 출신 계절노동자들인 피셔 걸들이 그리운 고향을 생각하던 마음이 담겨 있다.


5.3. 음식[편집]


비늘이 얇지만 넓고 질긴 편이라 먹으면 소화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청어를 어획후 알만 빼서 버리는 지역에선 이걸 주워 먹은 바다표범들이 비늘 때문에 위장병에 걸려서 빼빼 말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도 한다. 요리를 할 경우, 얇은 비늘이라 방심하지 말고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한국에서는 소금구이로 먹거나 고등어처럼 를 넣고 졸여 먹기도 한다. 로도 먹는데, 썰어두면 살이 불그스름하고 맛이 다른 생선에 비해 담백한 것이, 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 맛을 보면 잊을 수가 없을 별미이다. 싱싱한 청어를 회로 먹으면 이렇게 맛있는 횟감이었나 싶을 정도로 달달한 맛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당연히 요리사는 고역이다. 뼈를 핀셋으로 하나하나 제거해야 된다. 칼집을 넣어 뼈채로 먹기 편하게 하기도 한다. 이러한 청어의 잔가시 때문에, 청어회는 거의 물회나 막회의 형태로 소비된다. 청어의 주산지인 동해안 지역에서는 청어가 막회의 중요한 재료로 통한다. 실제로 포항 일대의 물회/막회집 중에는 청어회의 가미 유무에 따라 메뉴 가격이 달라지는 곳들 또한 많다. 청어가 들어간 메뉴는 돈이 약간 더 붙는 식이다. 청어구이 자체는 단가가 싸서 스키다시로 제공되기도 한다.
과메기도 원래는 꽁치뿐만 아니라 청어로 만드는 것이었다. 다만 청어 어획량이 줄면서 꽁치로 만든 과메기만 남게 되어 과메기 하면 꽁치를 연상하고 청어는 따로이 청어 과메기라고 부르는 현실. 포항 구룡포의 과메기 상인들은 청어 과메기가 진짜라고 입을 모아 말할 정도다. 이게 와전되어서 '원래 과메기는 청어로만 만들었는데 청어 어획량이 줄어들자 대체품인 꽁치로 만들었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하지만 꽁치 과메기처럼 지속적으로 일정량을 공급할 수가 없어서 거의 잊혀졌다가 2020년대 이후로는 청어가 남아돌기 시작해서 다시 제조하고 있다. 쌈장에 찍어 싸먹거나 초장에 비벼먹는다. 기름져서 질리기 쉽지만 수르스트뢰밍처럼 독한 냄새는 안 난다. 단 생선을 잘 못 먹는 사람에게는 비린내가 심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강한 음식이다.
청어알도 별미. 보통 염장어란 하면 숭어 알이나 민어 알을 연상하지만 사실 청어 알도 염장하면 아주 맛있다. 특히 알 껍질이 아주 단단하면서도 오독거리는 식감을 내는데 그 풍미가 매우 특이해서 이게 동물의 조직이 맞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탄력으로 오독을 넘어 아삭거린다. 흔히 생각하는 명태알의 식감이나 톡톡 터지는 날치알과도 전혀 다른 재미있고 중독적인 식감을 느낄 수 있다. 상술한 대로 강원도와 함경남도, 그리고 전라북도 일대에서 청어 알젓을 담근다. 가격문제로 날치알 초밥은 대부분 청어알과 열빙어알이 30%씩 섞여있는 믹스를 쓰기 떄문에 다들 알게 모르게 먹어온 셈
청어 새끼는 찜말림(니보시)해서 국물재료로 이용하는데, 맛이 개운한 멸치나 디포리와 달리 기름기 있는 진득한 맛이다. 솔치라고 부른다.
많이 잡힐때는 정말 많이 잡히는 생선이라 굉장히 저렴해서 군대에서 청어튀김이 자주 나왔었다. 2000년도 이전에 군 생활을 한 예비역이라면 생긴 건 꽁치나 정어리 비슷한데 훨씬 통통하고 가시가 많아(특히 배 부분) 먹기 성가셨던 생선튀김이 기억날 터인데, 그 생선이 바로 청어일 확률이 매우 높다. 현재는 명태나 고등어, 삼치 등의 생선이 더 자주 나오는 편이고 청어는 나오지 않는 경우도 꽤 있는 편이다. 고등어나 명태는 어장이 비교적 일정한(지구온난화 문제로 변하기는 한다) 반면 근해의 청어나 정어리, 가다랑어 등의 어장은 마구 널을 뛰기 때문에 싸고 구하기 숴운 식단을 제공하는 군대밥 특성상 청어 비슷한 것도 안 나온 기간이 많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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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는 미가키 니싱, 또는 니싱미가키라고 하는 말린 청어가 있는데, 과메기와 달리 내장을 모두 손질하여 훈연 처리하여 북어처럼 바싹 말린다. 바싹 말린 것이기 때문에 물에 불려서 국물을 내서 같이 먹는다. 교토 지방에서 유명한데 교토 지방이 바다에서 멀기 때문에 해산물을 먹기 힘들어 자반 고등어돔베기처럼 보존성을 높이기 위해 유행했다고 한다.
초밥으로도 만들어 먹는데 알은 일반 영세 초밥집에서 판다. 오마카세 고급 스시야에서는 청어알보다 청어를 초절임 혹은 다시마절임으로 초밥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한편 교토 지역에서는 미가키니싱을 소바에 얹어 먹는 '니신소바'라는 음식이 존재한다. 청어를 달작지근하게 조려서 따뜻한 소바 국물에 그대로 넣는다고. 잔가시가 많은 청어라서 먹기 힘든 데다, 조린 생선을 소바에 고명으로 얹어 먹는 것에서 괴식의 느낌도 있지만, 입맛에 맞으면 의외로 맛있다.
그리고 소금으로만 절여 말려 단단해진 청어알을 가즈노코(数子)라 부르며, 이 가즈노코를 슬라이스해 스시 재료로 사용하거나 알이 빽빽하게 뭉쳐져있기에 자식을 많이 낳으라는 상징으로 여기면서 자손번영을 비는 의미에서 새해에 먹는다. '노란 다이아몬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귀하고 맛있는 식재료 취급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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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는 훈제 청어들을 즐겨 먹는다. 특히 내장을 제거하고 반 갈라 훈연한 키퍼(Kipper)는 전통적인 아침식사 메뉴다. 주로 팬에 버터를 두르고 구운 뒤[12], 토스트와 삶은 계란 또는 스크램블 에그와 함께 먹는다. 마트에서 반조리 된 상태로 시판되는 것은 전자레인지로 익히기도 한다. 다만 아무래도 생선구이다보니 신세대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반적인 구이 요리도 발달했다. 위 영상은 1940년 영국 식품부가 배포한 청어구이 조리 및 취식 방법 교육영상이다. 비늘과 내장을 제거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가시를 발라낸 뒤, 소금과 파슬리, 그리고 후추로 양념하여 오븐에 구워낸다. 진미로 취급받는 알집이나 이리는 따로 잠시 빼 두었다가 양념하기 직전에 청어에 도로 집어넣어 함께 조리한다. 과거에는 블로터(Bloater)도 비슷한 방식으로 먹었으나 현재 블로터는 거의 사라졌다.
영국인들 역시 독일식 청어 피클인 롤몹스(Rollmops)를 즐겨 먹으나, 유럽 대륙 국가들만큼 자주 먹지는 않는다. 보통은 키퍼를 먹거나, 상술한 튀김 또는 구이의 형태로 소비하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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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는 하링(Haring)[13]이라고 부르며, 늦봄과 초여름 사이에 잡히는 청어를 머리와 꼬리를 떼고 내장을 빼낸 뒤 소금에 절여서 보관한다. 소금에 절인 청어는 잘게 다진 양파나 오이피클(augurk)을 청어로 싸서 함께 먹는다. 그리고 꼬리를 집어 올린 다음 입을 벌린 채 고개를 젖혀 통째로 먹는 특이한 방식[14]이 보편적이다. 현대에는 전통적인 방법 외에도 핫도그빵에 끼거나 썰어서 이쑤시개로 찍어서 먹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통조림으로도 자주 접할 수 있는데, 대개 토마토 소스에 조린 것을 담아서 판다.

네덜란드에서 발트 해로 이어지는 동북유럽 국가들은 유사한 청어요리들, 특히 청어 피클을 즐겨 먹는다. 이들은 청어에 보통 양파, 감자나 호밀빵, 사워크림, 오이 피클, 딜을 조합한다. 국가별로 조금씩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 유사한 레시피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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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들은 술을 마시고 난 뒤 해장 겸 아침식사(Katerfrühstück)로 청어를 즐겨 먹는다. 독일에서 청어 피클은 '롤몹스(Rollmops)', 또는 '비스마르크 헤링(Bismarckhering)'라고 불린다. 롤몹스는 말 그대로 한입에 먹기 좋게 동그랗게 말아 놓은 청어 피클 요리이고, 비스마르크는 그냥 필렛을 펴 놓은 것이다. 딜과 오이 피클, 양파, 빵이나 감자와 함께 즐긴다. 작은 아침식사용 빵인 브뢰첸(Brötchen)을 갈라 그 사이에 양파, 양상추와 함께 끼워넣은 피시브뢰첸은 독일 북부에서 즐겨 먹는 간단한 식사이기도 하다. 그 외에도 함부르크 등지에서는 이웃한 네덜란드식 하링을 마티예스(Matjes)란 이름으로 부르며 자주 먹는다.
열훈법으로 만든 뷔클링(Bückling) 또한 먹는다. 이건 영국의 버클링과 같은 음식. 다만 영국과는 달리 독일에서는 일반적으로 훈제 청어보다는 절인 청어를 주로 소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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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핀란드는 이웃한 발트 3국과 더불어 청어를 일상적으로 가장 많이 소비하는 국가들이다. 이들은 유사하면서도 다양한 청어요리 문화를 공유한다.
이 지역에서는 청어 피클을 실(Sill, Sild)이라고 하는데 맛은 피클 비스무리하면서도 살짝 달달하고, 고소하면서도 생선 살 특유의 쫄깃한 식감이 좋다. 위의 사진은 스웨덴에서 미드솜마르 기간 동안 즐겨먹는 취식법으로, 청어 초절임에 삶은 감자, 삶은 계란과 차이브를 썰어넣은 사워크림 소스를 곁들인다. 여기에 생 양파를 추가하기도 하며, 넓은 노르웨이식 감자빵(Lefse)이나 딱딱한 호밀빵(Knäckebröd)에 올려 일종의 오픈 샌드위치로 만들어 먹기도 한다. 이 샌드위치는 스웨덴에서는 실마카(Sillmacka), 덴마크에서는 실데스뫼레브뢰드(Sildesmørbrød)라 부른다. 또는 생 청어를 가시를 잘 바른 뒤 튀겨서 으깬 감자와 월귤잼을 곁들이기도 한다. 청어 튀김은 특히 핀란드에서 많이 소비되며, 호밀 가루를 묻혀 튀기는 것이 특징이다.#
그 외 스웨덴 북부에서는 수르스트뢰밍이라는, 극한까지 발효된 청어 통조림을 즐겨 먹는다. 이 역시 취식 방법은 일반적인 실과 유사하다. 다만 냄새에 상당히 신경을 써야 할 뿐. 그리고 스웨덴 남부 고틀란드와 덴마크 보른홀름에서는 지역 특산물로 훈제 청어를 만든다. 스웨덴에서는 뵈클링(Böckling)이라고 하며, 영국의 버클링이나 독일의 뷔클링과 기원이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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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지역에서도 훈제 청어를 즐겨 먹는다. 특히 발트 3국은 열훈법으로 훈제 청어를 만드는 법을 최초로 개발한 지역 중 하나이다. 한국에서는 외국인 대상 수입식품점에서 통조림 형태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같은 발트해 지역이다 보니 북유럽 및 독일과 유사한 청어 피클 요리들도 즐겨 먹으며, 특히 청어 샐러드가 유명하다. 감자, 양파, 비트, 그리고 청어를 이용해 만드는데, 에스토니아에서는 로솔리예(Rossolje), 러시아에서는 셀료드카 포드 슈보이(Сельдь под шубой)라고 부른다. 위의 사진이 바로 러시아식 청어 샐러드로, 켜켜이 층을 쌓아 만들었다. 한편 에스토니아와 폴란드에서는 러시아처럼 쌓지 않고 한데 섞어버린다.
폴란드에서도 마찬가지로 청어 피클과 청어 샐러드를 비롯한 다양한 청어 요리를 소비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슬레지예 볼레유(Śledź w Oleju)라 불리는 요리가 유명한데, 기름에 담근 청어라는 뜻이다. 뼈를 바른 청어 필렛을 썬 생양파와 함께 식물성 기름에 재워 만든다. 기름은 요즘은 보통 남유럽산 올리브 오일을 쓰는 편.
북미에서도 청어 피클은 쉽게 구해 먹을 수 있다. 가격도 비싸지 않아서, 고등어 초밥이 먹고 싶은데 고등어 초절임을 구하기 마땅치 않을 때 대용으로 사용해 만들어 먹어도 좋다. 사실 위의 하링도 보통은 피클 형태로 먹는 것이 일반적인 편. 위키백과의 초절임 청어 항목
미국 토착원주민 중에는 청어의 산란기 습성을 이용해 솔송나무가지를 물에 넣어서 청어알을 채집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는 아직도 청어가 아닌 청어 알을 먹기 위해 그물을 설치한다고도 한다.

청어 살에 첨가물을 넣고 오징어 먹물을 입혀 까맣게 만들어 가공해 파는 것을 '아브루가'라고 하는데, 캐비어와 비슷한 외형 때문에 캐비어의 대용품으로도 쓰인다. 물론 가격도 훨씬 싸고 알도 아니다.#, # 오세트라 캐비어가 15g에 7만~9만 원을 왔다갔다 하는데, 아브루가는 50g에 1만 원 후반 ~ 2만 원 초반이다.

6. 여담[편집]


  • 알래스카 근처의 한 청어 산란지는 산란철에 원양어선들이 어획그물(주로 설치형)을 치면, 위험을 느낀 청어들이 알과 정소를 뿌려대는데 청어의 정액 때문에 물 색깔이 희뿌옇게 변할 정도이다. 수정된 알들은 그물에 달라붙으면서 어장이 망가지기도 하는데, 문제는 수정된 알은 끈기가 엄청 강해서[15] 그물에서 제거하기 매우 힘들다고.

  • EBS 프로그램 극한직업에 따르면 이 청어도 회가 맛있긴 하지만 대중들에게는 전어회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지고 덜 알려져서 판로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부들에게는 전어에 비하면 찬밥 대접을 받는다.

  • 낚시용 미끼로 사용되기도 한다.



  • 논쟁에서 논점에 맞지 않는 쓰잘데기 없는 말로 논점일탈을 일으키는 것을 훈제 청어 기법이라고 한다.

  • 탈무드에도 관련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차를 타고 가던 한 사람이 랍비를 만났다. 그는 랍비에게 그들의 지혜가 어디서 나오는지 물었다. 그러자 랍비는 말린 청어를 머리까지(혹은 통째로) 먹으면 된다고 하며, 자신에게 청어 한 마리당 10달러에 사 보지 않겠느냐고 한다.[16] 그 사람은 랍비에게 청어를 사 머리까지 꾸역꾸역 먹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생각해보니 다음 역에서 잠시 내려 10달러로 청어 다섯 마리를 살 수 있었고, 당신이 사기를 쳤다'고 하자, 랍비는 '그것 봐라, 벌써 지혜로워지지 않았느냐.'고 응수했다. 일부 판본에서는 랍비 대신 장사꾼으로 나오는 경우가 있다.

  • 'ㅅ' 자가 여러개 겹쳐있는 듯한 형태를 헤링본(herringbone)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청어 가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주로 직물이나 벽돌, 타일의 쌓는 방식에서 이 표현을 사용한다.

  • 디시인사이드국내야구 갤러리나 일부 보수 성향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전라도 지역 차별 표현홍어드립에서 따와서 정치적 보수주의 성향을 보이는 전라도 사람을 지칭할 때 사용된다. 좌파 전라도 사람은 홍어지만 정치성향이 반대인 우파 전라도 사람은 붉을 홍의 반대인 푸를 청을 써서 청어라는 논리.[17][18]
사실 홍어-청어 밈은 이전부터 사용하던 것이었는데, 특히 게임속 가챠에서 좋은 아이템을 먹고 자랑하는 유저(네덕항목의 비틱질 참조)는 나쁜 유저이므로 홍어라고 부르고, 반대로 운이 나빠 돈을 쓰고도 아이템을 먹지 못했거나 천장을 친 유저는 청어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 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 먼 옛날 침몰한 노르웨이배에 장기 숙성된 청어를 발견한 펭귄들이 리코 빼고 다 먹고 물고기 중독증[19]이라는 병에 걸려 맛탱이가 훼까닥 가버린 에피소드가 있다. 그외에도 마다가스카의 펭귄에서 기본적으로 나오는 가장 흔한 물고기이기도 하다.

  • 2022년 9월에는 조선소 도크에 청어 떼가 가득 찬 진풍경이 벌어졌다. 선박을 진수하기 위해 도크에 바닷물을 채울 때 청어 떼가 밀려 들어온 것. 상당히 드문 사례라서 조선소에선 앞으로 좋은 일이 일어날 길조라고 여겼다고.[20] 청어들은 수거해서 모두 폐기 처리했는데 페인트나 중금속 등에 노출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바이오매스로 재활용이라도 하지[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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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어 무리[2] 본래 과메기는 청어와 꽁치 둘 다 사용하여 만드는 것이었다. 과메기 참조.[3] 기록에서 보면 청어 떼가 너무 많아 배가 나아가질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4] 청어의 순우리말인 비웃을 음차한 것(또는 비유어가 비웃이 된 것)이다. 절인 청어는 자반비웃아라 한다.[5] 또한 전쟁 중엔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동물성단백질 섭취가 필수였을 테니, 이를 그나마 구하기 쉬운 생선으로 해결했을 것이다. 여기서 이순신의 인품이 훌륭함을 어느 정도나마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해산물을 포함한 지역 특산물의 경우 지방관이 중장에 뇌물로 바치는 경우가 잦았다. 그런데 이순신은 뇌물로 바치기는커녕 군사와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데 썼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의 인격에 감탄하게 된다.[6] 다만 한국 내 고등어의 주 생산지는 동해와 남해다. 서해로 올라오는 건 가을 한 철.[7] 맛의 달인에서는 청어-고등어-꽁치-정어리 순으로 순환이 일어난다는 설을 제시했다.[8] 출처 "이야기로 읽은 부의 세계사".[9]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스코네는 덴마크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스웨덴이 이 지역을 완전히 점령한 것은 18세기가 되어서였다.[10] 간의 효소가 염장된 청어에 발효 과정을 일으켜 풍미를 이끌어낸다.[11] 청어의 이리는 진미로 인정받는 고급 부위다.[12] 또는 키퍼에 버터 한 조각을 얹은 후 오븐에 굽기도 한다.[13] 영어의 herring이나 표준독일어의 Hering이나 네덜란드어의 Haring이나 동일한 어원의 게르만어계 어휘다.[14] 꼬마펭귄 핑구에서 핑구가 생선을 먹는 장면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15] 산란지인 해초에 잘 붙게하기 위함이다.[16] 머리만 남은 것에 입맛 다시는 것을 본 랍비가 머리 하나당 온전한 청어 한마리 값으로 팔았다는 내용도 있다.[17] 사실 청어의 청은 푸를 청(靑)이 맞지만, 홍어의 홍은 붉을 홍(紅)이 아니라 넓을 홍(洪)이다.[18] 일단 홍어여야 홍어의 반댓말인 청어가 될 수 있으므로 아무 우파에게나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전라도 출신 우파에게만 사용한다.[19] 오래된 물고기를 먹어서 걸리는 병으로 계속 물고기를 찾게 되고 이병에 걸린상태에서 물고기를 하나라도 먹으면 미친상태로 평생을 산다.[20] 위에 쓰여 있듯 청어는 바다의 밀과도 같은 존재로 많은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부를 안겨준 물고기인데 진수식을 위해 바닷물을 들였더니 느닷없이 바다의 밀이 떠밀려 들어왔고 이를 활황의 징조라고 여긴 듯. 실제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미중 패권 경쟁이 본격화되어 중국으로 갈 만한 물량이 한국으로 쏠렸는데, 한국 조선업계의 큰 문제점이라면 낮디낮은 인건비로 인한 숙련공의 이탈과 신규 인력의 부재라는 것이다.[21] 바이오매스로 쓰려면 매우 많은 양이 잡혀야 타산이 맞는데, 그정도로 많진 않고 애매한 양이어서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