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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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계훈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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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9933 [[삼미 슈퍼스타즈|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41번}}}
이선덕
(1982~1983)

최계훈
(1984~1986)


결번
결번

최계훈
(1989~1990)


조웅천
(1991~1995)
{{{#fab93d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88번}}}
박현식
(1982)

최계훈
(1995~1999)


김용일
(2000~2007)
SK 와이번스 등번호 81번
결번

최계훈
(2001~2004)


박철영
(2005~2009)
LG 트윈스 등번호 91번
배우열
(2009~2010)

최계훈
(2011)


김기태
(2012~2014)
NC 다이노스 등번호 00번
결번

최계훈
(2013)


홍민구
(2015)
NC 다이노스 등번호 83번
이호성
(2013)

최계훈
(2014~2016)


정진식
(2017~2019)
한화 이글스 등번호 85번
김재현
(2015~2016)

최계훈
(2017~2019)


김기남
(2021~2022)



파일:최계훈감독.png
최계훈
崔桂勳 | Choi Gye-Hun

출생
1961년 6월 6일 (62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사대부초 - 인천남중 - 인천고 - 인하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4년 1차 지명 (삼미)
소속팀
삼미 슈퍼스타즈 -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1984~1990)
지도자
태평양 돌핀스 잔류군 투수코치 (1995)
현대 유니콘스 2군 투수코치 (1996~1998)
현대 유니콘스 1군 투수코치 (1999)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01~2002)[1]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02)[2]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03)[3]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03)[4]
SK 와이번스 2군 투수코치 (2004)
롯데 자이언츠 2군 투수코치 (2005)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06)[5]
LG 트윈스 2군 재활코치 (2006)[6]
인천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2008~2010)
LG 트윈스 1군 투수코치 (2011)
NC 다이노스 잔류군 선임·투수코치 (2013)
NC 다이노스 잔류군 투수코치 (2014~2016)
한화 이글스 2군 감독 (2017~2019)
경력
KBO 심판위원 (1991~1993)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연도별 성적
5.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삼미 슈퍼스타즈-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 소속 투수, KBO 심판, 코치.

노상수, 양세종, 이영우, 정학수와 더불어 군 복무 기간의 공백으로 선수 경력에 타격을 입은 사례로 알려져 있다.


2. 선수 경력[편집]


학창 시절을 아는 야구 팬들이 많지 않기는 하지만 고교시절에는 초고교급 투수로 각광을 받으며 당시 인기의 절정을 달리던 고교야구 무대의 주인공이기도 했다.[7] 그러나 징그러울만치 질긴 불운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1977년 황금사자기 결승, 1979년에는 4개 대회 결승에 올려놓았지만, 문제는 이 5개 대회에서 모두 준우승(...). 대붕기,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그리고 전국체전까지 모두 준우승이었다. 심지어 전국체전 결승은 연장전이 없는 추첨패였다. 여기에 고등학교 1학년 때, 황금사자기 준우승 경력까지 합치면 고교시절 준우승만 다섯 번을 기록하였다. 고교시절 그의 공 스피드는 당시 국내에 도입된 구형 스피드건 기준 137km 수준으로 당시 강속구의 대명사인 최동원이 국내 구형 스피드건으로 140을 기록하고 해외 경기에서 신형스피드건 기준 157km를 기록하던 것을 볼 때 최계훈의 고교시절 속구 수준은 현재로 환산하면 150 초반 수준었을 것으로 보인다. [8]

그러나 고교시절의 혹사로 인해 대학 및 프로 무대에서는 고교시절 만큼 두각을 나타내는 투수는 되지 못했다. 그래도 인하대 시절 우승을 차지하면서 준우승 한을 풀기는 했다.

본래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중학교 때 인천으로 이주하여 인하대를 졸업하고 1984년 인천 연고 팀 삼미슈퍼스타즈의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현역 시절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1985년 4월 30일 소속팀 삼미가 악몽같았던 18연패의 구렁텅이에서 허우적대던 시절, MBC청룡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두며 그 연패를 끊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최계훈이 팀의 연패를 끊기 위해 어깨가 빠져라 공을 던지며 사투를 벌이던 바로 그 시각, 삼미그룹은 풍한방직과 구단 매각 협상을 벌이고 있었고, 다음 날인 5월 1일 구단 매각을 발표했다.

파일:external/mlbpark.donga.com/1302453974.jpg
최계훈이 선발 등판하여 18연패를 끊던 경기의 스크린샷.영상은 여기로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최악의 전력이었던 삼미청보의 유망주였던 투수로 투고타저의 기조였던 당시로서 뛰어나다고 보긴 어렵지만 준수한 활약을 했다.

그러나 1986 시즌 후 현역으로 입대하여 군 복무를 하게 된다. 당시엔 프로 선수의 상무 입대가 불가능했던데다 현역 복무 기간이 더 길었던 탓에 3년의 공백을 감수해야 했고, 전역 후 1990년 태평양 돌핀스에 복귀하였지만 김성근 감독은 끝내 그를 외면했다. 결국 그는 군 전역 후 1군에서 1이닝도 못 던지고 쓸쓸하게 현역에서 은퇴하고 말았다. 군 생활로 인한 공백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선수 생활을 일찍 끝낸 안타까운 케이스였다. 동 시기의 노상수, 양세종[9], 정학수와, 2010년의 이영우[10]등도 마찬가지.


3. 지도자 경력[편집]


그 후 심판 자격을 취득하여 KBO 소속의 심판위원으로 몇 년간 활동하다가 지도자로 전향, 1996년 현대유니콘스의 창단과 함께 2군 투수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훗날 LG에서 감독으로 모시게 되는 박종훈과는 현대 2군 코치 시절부터 같이 일하면서 서로 출신 고교와 대학이 달랐음에도 척척 호흡이 잘 맞아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2011시즌 LG트윈스의 투수코치가 되었던 것도 박종훈 감독의 요청이 컸었으며, NC다이노스한화이글스로 옮길 때마다 그의 곁에는 프런트 박종훈이 있었다.

2006시즌에 이순철 감독 밑에서 1년 간 LG트윈스의 투수코치를 맡으며 정재복심수창을 선발급 투수로 키워 낸 성과도 있었다. 심수창은 이 해에 10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LG트윈스가 최하위를 기록한 후 재계약하지 못했다.

이후 모교인 인천고의 감독을 맡다가 박종훈 감독의 요청에 의해 2011년부터 투수코치로 컴백한다는 소식을 들은 LG트윈스 팬들의 기대도 컸다. 최계훈이 떠난 후 정재복심수창이 동시에 시망한 것을 본 LG트윈스 팬들은 제대로 된 투수코치의 영입을 강력히 열망했었는데, 최계훈이 다시 영입된 후 2011시즌 LG트윈스의 마운드는 적어도 지난해보다는 많이 강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시즌 윤학길 투수코치의 성과없는 모습에다 공셔틀에 불과했던 상황과 달리, 새로 투수코치를 맡으면서 LG 투수들의 구속이 전체적으로 4~5km/h씩 상승하고 기량도 많이 올라갔다.

코칭 스킬 또한 높게 평가받았는데, 특히 투수의 하체를 잘 사용하게 조정해 주고 구속을 끌어올리는 데 능하다는 게 LG 팬들의 평가였던 듯하다. 실제로 2011시즌 LG 투수들의 구속이 많이 올라간게 그 증거이다. 그외에 코칭 스킬도 그 동안 LG를 거쳐 갔던 투수코치들(이상군, 양상문, 윤학길)보다 높게 평가된다.

LG 팬들은 그동안 이상군, 양상문, 윤학길 등을 거치며 손발이 오그라드는 투수 조련을 보다가 최계훈 투수코치의 조련을 보고 안구가 정화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 동안 LG를 거쳤던 투수코치들의 삽질이 LG 암흑기의 주요 원인이었다는 것도 사실이니만큼 이제서야 제대로 된 투수코치를 가졌다며 환호했다.

여담이지만 상당한 노안으로, 인천고 시절에도 꽤나 겉늙은 얼굴이었다고 한다. 거기에 30대 중반부터 머리에 백발이 늘기 시작했으니, 노안 확정인 셈이다. 머리가 워낙 백발이고 얼굴도 나이들어 보여서 손주도 뒀을 법한 외모이지만, 실제로는 절친인 황정민 닮은 박종훈보다 2살이나 연하다.

2011시즌 종료 후 박종훈 감독이 물러나고 김기태 수석코치가 후임 감독으로 승격되자, 계약 기간이 끝났다며 LG트윈스를 떠났다. 겉으로는 계약 기간이 끝나서 떠난 거지만,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잡을 수도 있는 문제였기 때문에 LG팬들은 2012시즌을 우려하였다. 최계훈 코치가 그동안 흑역사이던 LG마운드를 구해 냈다는 평가가 많은 데다가 불과 1년만에 또 투수코치가 바뀌면 마운드가 어찌될 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최계훈의 자리를 이어받은 차명석김기태 감독의 부임 후 다잡아 준 게 다행이라면 다행.

사실 박종훈 감독이 초년에 최계훈을 코치로 영입하려다 실패한 게 구단의 반대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많아서 LG트윈스구단이 박종훈 감독을 경질하면서 사실상 재계약 포기라는 형태로 최계훈을 내친 거라는 지적도 있다.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야인으로 지냈다고 한다. 박종훈 감독이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야인으로 지낸 것처럼...

2013년 5월 13일자로 NC다이노스 D팀(=3군)의 선임코치 겸 투수코치로 부임하며 현장에 복귀하였다. NC다이노스에서 신인 선발과 육성을 책임지고 있는 박종훈 육성이사의 요청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2015년 8월에는 외국인 선수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미국으로 출국했으며, 그를 대신하여 NC다이노스에서는 임호균과 2개월 단기 계약을 맺고 2군 인스트럭터로 초빙하였다.

박종훈한화이글스단장으로 취임한 후, 2017시즌을 앞두고 한화이글스 2군 감독으로 내정됐다.# 2018 시즌 한화이글스 2군에서 올라온 선수들이나 2군을 다녀온 선수들이 대체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어 공적을 인정받고 있다. 2018년 7월 19일 인터뷰

이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박종훈LG 트윈스 감독 시절에는 투수코치로, NC다이노스 육성이사 시절에는 3군 감독으로, 그리고 한화이글스 단장이 되자 2군 감독으로 항상 함께 움직인다. 전형적인 박종훈 라인.

이후 2019년 10월 8일 정민철 신임단장 체제 하에 재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 13년만의 2군 우승이라는 성과가 있었음에도 재계약하지 않아 의외라는 반응도 있지만, 박종훈 단장이 나갔으니 어쩔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최계훈이 2020년까지 한화이글스 코치로 일했다면 선수와 코치로서 소속팀이 18연패의 수모를 당하는 치욕을 목격했을지도 모른다.


4. 연도별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4
삼미
34
137⅓
8
8
9
(2위)
3.54
132
9
55
6
99
1.36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5
삼미 / 청보
20
118⅓
6
6
0
3.57
106
13
55
6
54
1.36
1986
청보
32
159⅓
6
14
2
3.67
164
12
67
5
62
1.45
1987
군복무
연도
소속팀
출장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WHIP
1988
태평양
군복무
1989
1990
1군 기록 없음
KBO 통산
(3시즌)
86
415
20
28
11
3.60
402
34
177
17
215
1.40


5. 관련 문서[편집]



[1] ~8월 11일[2] 8월 12일~[3] ~8월 13일[4] 8월 14일~[5] ~6월 6일[6] 6월 7일~[7] 당시는 지금의 외모와 다르게 동안이었음[8] 당시 기사 (1979년 7월 28일 기사 - 최초로 스피드건 사용) 에 박철순도 135km 이라고 하고 있다. 알다시피 박철순미국 마이너리그 밀워키브루어스에서도 93~95마일을 던지는 속구로 각광받았고 82년도 신형 스피드건 기준 148~149를 기록했다. 당시 구형/신형 스피드건의 측정방식이 달라 두 장비에서 측정된 구속의 차이가 심했다고 한다. http://egloos.zum.com/gminhee/v/2389311 참조 [9] OB 베어스 원년 멤버. 1984년 골든글러브 지명타자 부문 수상자.[10] 이쪽은 좀 복합적이다. 병역비리가 발각되어 늦은 나이에 입대했고, 전역 후 김인식 감독이 어깨 부상을 가진 그를 1루에서 홈으로 송구도 못할 수준까지 부려먹고 은퇴하게 된 케이스. 당시 재활 담당 의사도 이 어깨로 야구를 한 게 믿기지 않는다며 경악했다.[11] 2020년 한화의 18연패를 끊은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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