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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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최광
崔光 | Choe Kwang


파일:external/monthly.chosun.com/1409_234_2.jpg

출생
1918년 7월 17일
함경북도
사망
1997년 2월 21일 (향년 78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적
[[북한|

북한
display: none; display: 북한"
행정구
]]

최종 계급
조선인민군 원수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3. 장의위원회 구성
4. 매체에서
5. 여담



1. 개요[편집]


북한군인, 1930년대 만주빨치산 시절부터 김일성과 함께 한 대표적인 심복이였다. 본명은 최명석(崔明錫)이다.


2. 생애[편집]


오진우, 리을설, 최현 등과 함께 북한에서 이야기하는 항일 빨치산 1세대였고 김일성의 권력 기반이었던 만주파의 주요 인물로 유명하지만, 다소 부침이 있는 경력을 갖고 있었다.

1918년 7월 17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북한에서 최광의 출생지를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료마다 출생지가 후창이나 라선 등 중구난방이다. 중국이나 러시아 출신이라 하더라도 '이국 땅에서 출생' 이런식으로 인정하거나 아니면 아예 본적을 따져서라도 공개하는데 왜 최광의 이력에서만 출생지를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는지는 불명이다. 1930년대 후반 무렵에 동북항일연군에 입대했고, 이 때 김일성과 처음 만나 최측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관동군의 항일 세력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1940년에 소련 연해주하바롭스크로 넘어갔고, 이 곳의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1942년에 동북항일연군이 소련군 제88특별저격여단으로 편입되자 해당 여단소대장에 부임했다.

만주 작전으로 관동군이 만주 지방에서 일소되자 대위로 진급했고, 동북항일연군 옌벤분견대를 이끌고 옌벤에 진주해 관동군 잔당을 소탕하는 작전에 투입되었다. 1946년 봄에 귀환해 김일성의 심복으로 조선인민군과 북한 정권 창건 작업에 참가해 인민군 제1사단 참모장과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 김일, 전태룡, 최용진, 무정, 박달, 박훈일, 최현,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파일:chgw.jpg
사단장 시절의 최광
한국전쟁 발발 후에는 인민군 제13사단의 사단장(계급은 소장)으로 참전했다. 조선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전쟁 초반에 큰 실수를 하여 격노한 김일성이 그를 총살하라고 지시했지만 전선사령관 김책이 선처를 호소하여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전쟁 후반기인 1952년 가을 강건군관학교 교장으로 이임했다. 1953년 7월 29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6.25 전쟁 중의 공을 인정받아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받았다.

이후 전선사령부 부참모장, 군단참모장을 거쳐 휴전 후에는 제5군단에서 군단장을 잠시 맡다가 1954년 1월에 중장으로 진급, 1954년 6월에 동부군구사령부(제1집단군)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장, 공군사령관 등을 역임,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최용진,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8년 3월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개전 10주년이었던 1960년에는 상장으로 재차 진급했고, 당 중앙위원과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 부상을 역임했다. 1962년 9월, 김경석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2년 10월에는 민족보위상으로 이임한 김창봉의 후임으로 총참모장에 부임했고, 동시에 대장으로 진급했다. 66년 2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총참모장 재임 기간 동안에는 김창봉, 허봉학 등과 함께 1.21사태푸에블로호 피랍사건을 비롯한 대남/대미 군사도발을 입안하고 실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푸에블로호 나포에 성공한 직후에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을 맡았고 중앙위원회 비서에 임명된다.

하지만 이렇게 군부와 정계의 실력자로 리즈시절을 한창 누릴 때였던 1968년 12월 무렵 갑자기 총참모장에서 해임되었고, 이듬해 1월에 열린 조선인민군 당위원회 제4기 4차 전원회의 확대회의에서 유일사상체계를 혼란시키고 당의 위신을 떨어뜨렸다는 이유로 김창봉과 함께 공개 비판을 받으며 숙청되었다. 일설에 따르면, 김창봉과 탁구를 치는데, 김일성이 김창봉에게 전화를 했지만 김창봉은 없다고 하라고 버럭 화를 내면서 무시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최광은 이 일을 보고하지 않았는데, 나중에 김창봉이 숙청되면서 반당분자의 행동을 보고하지 않은 방관자 입장을 취했다고 작살이 났다는 것이다. 다만 숙청 후 행방이 완전히 묘연해져버린 김창봉과 달리, 일개 노동자로 전락했을지언정 목숨은 건졌다. 소련 외교문서에서도 최광이 대책없이 허봉학, 김창봉의 실드를 쳤다가 숙청당했다고 적혀 있다. 이때 은률광산 광부가 되었단 말도 있고, 황해도 뜨락또르 기계화작업소 부지배인이 되었단 말도 있다. 북한에서 밝힌 자료에 따르면, 인민경제대학에서 공부한 후에 은률에 있는 자동차 수리공장 지배인으로 하방되었다고 하는데, 북한에서 지배인으로 하방된 것까지 인정했으니만큼 이것이 확실한 정보로 보인다. 최광의 노동자 하방 시절에 대해서는 북한 소설 <봄에서 봄으로>에서 자세히 나오는데 최광이 자기가 사단장으로 근무했던 사단 출신 병사들을 보고 반가워서 말을 걸자 부사관에게 아바이, 간첩이오?라고 괄시를 당하자 엉덩이를 걷어차버리고 싶어서 부들부들 떨다가 그냥 운전수로 근무했었다고 둘러대는 등 다소 코믹하게 묘사된다.

그러다가 1976년에 김일성이 조직지도부에 최광의 근황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는데, 최광은 옥수수밥에 된장국, 시래기로 연명하고 있었다고 한다. 원래 최광은 권력 중심부에 있을때 소등심이 없으면 밥을 안 먹을 정도로 사치스러웠다고 하는데 그가 거친밥과 형편없는 반찬을 거리낌없이 먹는걸 조직지도부에서 최광이 혁명화가 다 되었다고 보고했고, 이에 김일성이 최광을 복권시켜주었다고 한다. 이후 1976년 봄에 황해남도 인민위원장으로 부임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복권 움직임이 포착되기 시작했고, 일부 기록에 따르면, 1976년 10월,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선되었다고 한다. 남한에서는 황해남도 인민위원장 최광이 숙청당한 그 최광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고 초반엔 별개의 인물로 여겼다.

1980년 10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제6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과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면서 공식적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때 북한에서 떠도는 비화 중 하나로, 농기계 작업소에서 뜨락또르를 몰면서 개고생할 때 모두가 그를 반동 출신이라고 경원했지만, 어차피 성분이 형편없어서 더 나빠질 것도 없었던 화물차 운전기사가 마침 그의 아들뻘이라서 그를 잘 모셨는데, 최광은 복권이 되자마자 그에게 소좌계급을 주고 자신의 전속 운전기사로 임명하였으며 나중에 군 소속 외화벌이 회사 지도원으로 배치해주었다고 한다. 최광의 노동자 하방시기의 모습은

1982년 4월, 7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강점구의 뒤를 이어 수산위원장에 임명, 거기에 정무원 부총리를 겸하였다. 1982년 3월, 전창철 장의위원, 1982년 4월에 최현 장의위원, 1983년 1월 강량욱 장의위원, 1984년 3월에는 김일(1910) 장의위원, 11월에 김만금 장의위원, 1986년 4월 김좌혁 장의위원을 지냈다. 이후 정무원 부총리와 수산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1987년 8월, 박영순 장의위원을 지냈다. 1988년 2월 12일, 정무원 부총리에서 해임되어 정치위원 폐지 문제를 거론했다가 실각한 오극렬의 후임으로 재차 총참모장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에 부임했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 1989년 11월 최덕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9기 1차 회의에서 김정일의 군부 승계 작업 일환으로 중앙인민위원회에서 분리된 국방위원회의 부위원장이 되었고, 1990년 5월 23일, 6기 18중전회에서 한성룡과 함께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했다. 1992년 4월 20일,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의 공동 정령에 따라 리을설, 주도일, 최인덕, 백학림, 리두익, 김봉률, 김광진과 함께 차수로 진급하였으며 4월 23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 김철만, 전문섭, 백학림,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최인덕, 황순희, 태병렬, 김룡연, 최용진, 리종산과 함께 공화국 2중영웅이 되었다.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 1993년 1월, 리계백 장의위원을 지냈다. 김일성 사망 후에는 국가장례위원회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5년 7월. 김봉률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5년 10월 7일,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조선로동당 창건 50주년을 기념하여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95년 10월 8일, 오진우가 죽은 이후 8개월간 공석이었던 인민무력부장 자리에 임명되었으며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공동결정에 따라 리을설과 함께 조선인민군 원수로 진급하여 김씨 일가를 제외한다면 2번째로 원수 계급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군부 복귀 후에도 계속 개혁파와 갈등이 있었고, 김일성 사후에는 그냥 퇴물 늙은이 취급을 받는 등 말년의 입지는 좁았다고 한다. 그리고 건강 상태도 계속 악화되어 공식 석상에 등장하는 빈도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고, 1997년 2월 21일, 8시 30분에 78세를 일기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는 공동명의로 부고를 발표, "동지는 수령에 대한 숭고한 의리심을 지니고 오랜 기간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령도밑에 혁명투쟁을 벌려오면서 참다운 충신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최광동지는 조국과 인민에 대한 헌신성으로 하여, 확고한 혁명적 원칙성과 고결한 품성으로 하여 우리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인민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최광동지의 전생애는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모든것을 다 바쳐 헌신적으로 투쟁한 견결한 공산주의혁명가의 빛나는 한생이였으며 그의 숭고한 혁명정신과 혁명가적풍모는 우리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전체 근로자들의 모범으로 되여왔다. 지금 전체 인민과 인민군장병들은 우리 당과 국가, 군대의 탁월한 활동가를 잃은 커다란 슬픔에 잠겨있다."라고 북한 역사상 드문 수준의 칭송을 해주었다. 장례는 오진우와 마찬가지로 김정일의 명령에 따라 국장으로 치러졌고, 유해는 대성산혁명렬사릉에 묻혔다.


3. 장의위원회 구성[편집]



4. 매체에서[편집]


  • 오진우 기념영화 백옥에서는 공훈배우 김수일이 분했다.

  • 북한 소설 <봄에서 봄으로>에서 리철봉과 함께 주인공급으로 나온다.

5. 여담[편집]


최광의 아들 최진성은 군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조선인민군에서 복무하다가 고령으로 퇴역하였고, 김정은 시대 각종 행사에 초대받고 있다. 다만 친아들은 아니고 6.25 전쟁 고아를 입양했다고 한다.

군사적 능력은 오진우 만큼 나쁘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역시 밑바탕이 부실하고 과거 빨치산 시절의 경험만 중시해 신무기나 전술의 도입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때문에 인민군 내 개혁파의 수장이었던 오극렬을 비롯해 프룬제 군사대학 출신의 소장파 장성들과도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며, 오극렬 실각 후 총참모장이 되면서 오진우와 함께 개혁 세력을 억누르고 군의 보수화에 앞장섰다. 이 때문에 북한군은 이후 고난의 행군 등을 거치면서 막장화가 심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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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례식이 끝나고 일주일뒤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