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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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최구현.jpg
성명
최구현(崔九鉉)
생몰
1866년 ~ 1906년 12월 23일
출생지
충청도 면천군
(현재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사망지
충청도 면천군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4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최구현은 1866년생이며 충청도 면천군(현재 충청남도 당진시 송산면 매곡리) 출신이다. 최구현 묘지석(墓誌銘)에 따르면, 그는 1887년 무과에 급제한 뒤 이듬해 훈련원 봉사(奉事)로 부임했으며, 이후 군부참서관(軍部參書官)을 역임했다고 한다. 그러나 1904년 일제가 한일의정서를 강요하자 이에 항거하여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제에게 넘어가자 1906년 봄 창의도소(倡義都所)를 기지시(機池市)에 설치하고 창의문(倡義文)을 각처에 포고해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서 370명의 의병을 모았다. 이 의진의 창의영도장(倡義領導將)이 된 그는 휘하 의병을 이끌고 4월 17일 면천성(沔川城)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왜의 수비대가 맹렬히 되받아 쏠 뿐만 아니라 왜의 신식 총포의 위력이 더 없이 강해 의병의 창과 칼, 화승총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동이 트는 새벽에 총탄이 비오 듯 하는 속에서 죽고 다친 의병을 들것에 싣고 부축하고 눈물을 삼키며 의병을 해산하려 할 때 결사항전의 결의를 다진 36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당진 소난지도로 들어가 의병 활동을 지속했다. 이때 소난지도에는 또다른 당진의병과 화성창의장(華城倡義將) 홍일초(洪一初) 휘하의 군사 등 4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의병세력과 연계하여 활동하기로 하였다.

그 뒤를 이어 윤 4월 초5일 서산의병(瑞山義兵)의 참모 김태순(金泰淳)이 거느린 의병 28명이 합류해 왔으며, 윤 4월 16일에는 홍주성전투에서 패한 홍주의병의 일부인 차상길(車相吉)이 거느린 의병 15명이 도착하니, 소난지도에는 모두 120여 명의 의병이 주둔하게 되었다. 이들은 장기적인 항일전을 벌이고자 간도로 가기 위해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1906년 7월 5일 새벽에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고 응전 중에 심한 부상을 당한 후 체포되고 말았다.

이때 체포된 최구현은 면천감옥에서 일본군으로부터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06년 말 무렵 답(畓) 30결(結)을 수탈당한 뒤 걸을 수 조차 없어 들것에 실려 출옥할 수 있었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1906년 음력 12월 23일에 운명하니, 13세 된 아들 치영이 술모루 언덕에 초빈하였다가 1907년 10월20일 면천 고잔리 선영 곁에 장사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최구현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