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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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교육자, 교육행정가. 제4대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상세[편집]
1882년 경상도 성주목 가천방 천동(현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창천리)에서 아버지 최영한(崔永漢)의 9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는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세 되던 1901년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상경한다. 상경 도중 화성향교의 전신인 차씨 서당에서 하루를 묵으면서 처음 아라비아 숫자로 덧셈 뺄셈을 가르치는 것을 보게 되었고, 또 중교의숙(中橋義塾)[3] 에 들렀다가 서양 산법을 보고 그 과학성과 명료함에 탄복하여 현대 셈법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1905년부터 광성상업학교 야학부와 광신상업학교에서 일본어와 산술을 배웠으며, 이 무렵 안일영(安一英)[4] 과 유일선(柳一宣)[5] 을 만나게 된다.
이후 광성실업학교를 중퇴하고 광신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유일선이 설립한 정리사(精理舍)[6] 수학연구과에 입학하여 졸업했다. 이 무렵 황성기독교청년회학관, 융희학교, 기호학교, 대성학교, 휘문의숙, 기명학교(箕明學校)[7]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2년 중동학교에 부임했다. 당시 최규동은 '최대수'로, 안일영[8] 은 '안기하'로 불리며 장안의 화제가 될 정도로 수학 강의가 유명했다. 1918년에는 중동학교를 인수하여 교장에 취임했으며, 1919년 국내 최초로 중등교육 수학 교과서를 집필하여 출간했다.
1920년 6월 한규설, 남궁훈(南宮薰)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여 평의원(評議員)에 선출되었으며, 노동독본 등 야학교재의 편찬 간행과 정기강연회를 실시했다.
1934년 5월에 국학 연구단체로서 진단학회(震檀學會)가 창립되자 그 찬조위원이 되어 이를 적극 지원하였으며,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열린 세계언어학자 대회에 한국대표로 정인섭(鄭寅燮)을 파견하여 한글과 한국어의 과학성을 알리게 했다.
광복 후 미군정 학무국의 자문 기구인 한국교육위원회, 교육심의회 위원으로 교육행정을 담당하였고 서울시교육회 회장을 역임했다.
1948년 조선교육연합회 초대 회장에 취임하고 정기 간행물 '새교육'을 발간하였다. 1949년 제4대 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했으나, 이듬해인 1950년 6.25 전쟁 중 납북되어 같은 해 10월 18일 평양시 북구 미림이리(현 평양시 사동구역 미림동)에서 공습으로 숨을 거두었다. 종전에는 1953년 6월에 별세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1991년 10월 1일 전 북한 정무원 부부장(차관급)을 지내다가 1980년대 중반 망명한 박병엽(朴炳燁, 필명 신경완申敬完)의 구술기록이 공개되면서 사실이 알려졌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 친일 논란[편집]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변단체인 조선교육회 기관지 〈문교의 조선〉에 중동학교장 최규동 명의로 '죽음으로써 군은(君恩)에 보답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기고했다.
이 글은 '징병제도 실시의 감격’이라는 특집기획에 실린 네 편의 글 가운데 하나로[9] 설사 강요에 의해서 집필했더라도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조하는 친일행위임에는 틀림없다.관련기사
다만 당시 백농 선생 모르게 서무실 직원이 써 주었다는 증언이 있고, 서울대학교 총장 임명시에도 문제제기가 있었으나 직접 쓰지 않은 것으로 해명이 되어 임용된 사실이 있다. 관련기사
2015년 3월 교육부는 최규동을 '3월의 스승'으로 선정했다. 이에 대해 상기한 친일 행적을 한 인물이 스승으로 떠받들어질 자격이 있느냐는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교육부는 "당시 심사과정에서 최 선생의 친일행적 여부를 확인했다. 창씨개명 거부, 건국훈장 추서 등 대한민국 초기 교육발전에 기여한 공적이 인정됐다"고 해명했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이 논란에 대해 "일부 자료만을 갖고 전 생애를 친일행위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고 주장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1966년 영화 《남북천리》에서 배우 임운학이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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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881년생으로 기록된 자료도 있다.[2] #[3] 1896년 민영기가 외국어를 가르치기 위해 종로구 중학동에 설립한 근대교육기관으로 1906년 폐교되었다.[4] 중동학교 발전에 큰 역할을 한 수학교사. 양주동 교수의 수필에 나오는 유년기 시절 '몇 어찌' 일화에서 '기하'라는 한자어의 유래를 알려준 사람이다.[5] 동경물리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한국인 최초로 근대수학을 전공한 인물로 정리사를 설립해 근대수학을 가르쳤다.[6] 1906년 서울에 설립되어 1912년까지 운영되었다.[7] 1905년 평양 성당에서 세운 가톨릭계 학교이다.[8] 이 사람을 사사했던 사람이 시인, 영문학자, 국문학자 양주동 교수다. 양 교수가 유년기에 시골에서 한학을 공부하고 도시로 나가 근대 학문을 배울 때 안 선생 문하에서 기하학을 배웠었다. 한문을 통으로 뗐던 양 교수가 생각하기에 幾何를 그대로 훈독하면 "몇 어찌"가 되니 뜻이 통하지 않아서 무슨 뜻이냐고 물어봤더니, 안 선생은 처음에 "너 한자 공부하고 왔다며? 진짜 몰라?"라고 반문했으나 양 교수가 "한문에는 이런 말이 전혀 없고 뜻도 통하지 않습니다."라고 했더니 이 단어가 명말 서광계가 geometry를 중국식 발음인 '지허'로 음/의역한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라고 답해주었다. 이때 목을 어루만지며 "때를 좀 씻거라."라고 지적했다는데, 이것은 견문의 부족을 비유한 것이다. 이 일화는 양 교수의 수필에 실제로 나오는 내용이다.[9] 다른 세 편의 글을 쓴 사람은 연희전문학교장 윤치호, 한성상업학교장 김주익, 휘문학교장 홍산범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