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규하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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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2.1.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2.2. 최규하 정부
3. 여담



1. 개요[편집]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한민국의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최규하를 필두로 하여 1979년 10월 27일[1] 수립되어서 1980년 8월 16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사퇴하기까지 약 8개월간 존속한 정부를 이르는 말. 제4공화국, 즉 유신헌법상의 두 번째 대통령이지만, 임기 중 개헌을 목표로 했기에 대개는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 사이의 과도정부로 본다. 그러나 후에 12.12 군사반란으로 실질적으로 기능이 정지된다. 즉, 최규하 전 대통령이 외압 없이 실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기간은 6일 정도였다.[2]


2. 상세[편집]



2.1.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편집]


제4공화국 박정희 정부
최규하 권한대행 체제
崔圭夏權限代行體制
Acting Authority of Choi Kyu-hah

1979년 10월 27일 ~ 1979년 12월 6일
출범 이전
박정희 정부
대통령
,최규하 / 권한대행 국무총리 (1979.10.27.~1979.12.5.),
1979년 10.26 사건으로 당시 제9대 대통령의 임기를 수행 중이던 박정희김재규에게 저격당하면서 사망했다. 이로 인해 당시 국무총리를 역임하던 최규하가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 박정희의 권력을 승계받았다.

비록 대통령 유고에 따른 계엄 조치로 인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이 계엄사령관으로 임명, 계엄령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유신 헌법 제정을 통한 장기 집권으로 인해 국민의 신임을 잃어가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암살당하자 그간 박정희 정부에 의해 강력하게 억눌려왔던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이 본격적으로 터져나왔다.

거리를 메운 시민들은 유신헌법의 폐지와 정치적 민주화를 요구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을 비롯한 국가 원로들이 이런 국민들의 요구를 받아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유신 폐지와 새로운 민주선거를 통한 새 정부의 구성을 요청했다.

이에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은 1979년 11월 10일 특별 담화를 발표하며 기존 대한민국 제4공화국 헌법을 통해 간선으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되, 빠르게 민주화 헌법으로 개헌하여 차기 대통령을 선출해야할 것이라고 밝혔다.

2.2. 최규하 정부[편집]


제4공화국
최규하 정부
崔圭夏政府
Choi Kyu-hah Government

1979년 12월 6일 ~ 1980년 8월 16일
출범 이후
전두환 정부
박충훈 권한대행 체제
대통령
최규하 ,/ 제10대,
국무총리
신현확 ,/ 제13대 (1979.12.13.~19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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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제10대 대통령 최규하 취임 선서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을 통해 최규하 전 대통령 권한대행을 제10대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최규하 정부가 공식 출범하였다

윤보선[3] 등 원로들의 요청을 받아들인 최규하 전 대통령은 선출 후 이틀 뒤인 12월 8일, 악명 높았던 비상조치 9호를 해제해 그간 금지됐던 개헌 논의를 허락하며 이에 호응했다. 하지만, 이 순간까지도 누구도 4일 뒤에 있을 일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2.2.1. 12.12 군사반란[편집]


간선을 통한 정부 출범 후 며칠 지나지 않아 전두환, 노태우 등이 주도하는 신군부(하나회)의 군사반란으로 아직 정식 취임식조차 치르지 못한 최규하 정부는 실질적으로 기능이 정지된다.

2.2.2. 5.18 민주화운동[편집]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에 의해 이미 실권을 빼앗긴 최규하 대통령은 신군부 세력이 광주민주화운동을 유혈 진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막지 못했다.

2.2.3. 사퇴[편집]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을 필두로 한 하나회가 대한민국의 권력을 장악한 후, 5.18 민주화운동을 진압한 뒤 최규하 전 대통령에게 사퇴를 종용하여 최규하 전 대통령은 사퇴하였고, 동시에 최규하 정부 또한 해산했다.

3. 여담[편집]


제4대 대통령 윤보선과 자주 비교된다.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이다 보니 당시 실권자였던 장면 전 총리에게 묻힌다. 그러나, 윤보선은 정치인이었기에 김창숙, 박정희 등과 모두 선거에서 맞붙은 전적이 있다.

반면에 최규하는 정치인이 아닌 외교관이었다. 김종필의 후임자 추천으로 국무총리 직책에 올랐으나, 권력에 대한 욕심이 없었으며, 10.26 사건이 없었다면 대통령이 되지 않고 그 직책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감했을 인물이었다.

윤보선은 의원내각제 하의 대통령이기는 해도 5.16 군사정변을 진압하지 않고 우유부단하게 행동하여 대한민국을 18년간의 군사정권 하에 들어가게 만든 책임이 있다. 최규하와는 달리 2년간 실제로 권력을 행사했고 5.16 군사정변 당시에도 최규하와 달리 본인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음에도 행사하지 않았다. 이 점이 최규하와 평가가 엇갈리는 부분이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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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통령 권한대행으로서 업무를 시작한 날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으로서의 임기는 12월 6일 시작했다. 취임식은 12월 21일에 거행.[2] 권한대행이 아닌 대통령으로서의 권한은 대통령에 선출된 12월 6일부터 가졌기 때문이다.[3] 마침 당시 생존중이던 전직대통령은 윤보선 뿐이었다. [4] 물론 최규하도 완전히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자신이 정치력이 부족하다면 허정처럼 빠르게 민정이양을 해야했으나 헌법 논의 기간을 1년을 잡으면서 신군부에게 반격의 기회를 준 것이다. 민정이양 이후 쿠데타가 안 일어났으리란 보장은 없지만 자신이 맡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