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오(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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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제강점기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북한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 생애[편집]
1892년 6월 22일 평안도 의주부 월화면 마룡동(現 평안북도 피현군 용흥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평안북도 의주군 의주면 남문동(現 의주군 의주읍) 의주읍성 남문 밖 거리에서 최안국(崔安國)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만세시위를 주도했고, 3월 3일에는 기독교계 인사들과 공동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기 위해 독립민회를 결성한 뒤 간사에 취임했다. 이튿날인 3월 4일 양실학원(養實學園)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 제국 육군 헌병대에 체포돼 1개월간 수감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석방 후 그해 10월 중화민국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법무부장, 국민부 외교위원장, 화성의숙 숙장 등을 역임했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 과도입법의원 부의장, 민족자주연맹 상무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
1950년 5월, 체포되어 수감 중 6.25가 발발하였고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납북되었다. 이후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상무위원에 선출, 1963년 9월 16일 평양시 남산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이후 시신은 애국렬사릉에 애국지사 직함으로 안장되었으며 1990년 8월 15일, 조국통일상이 추서되었다. 이후 아들 최덕신도 월북 후 김일성에게 극진한 특별대우를 받으며 북한 내 단체 간부를 하다가 죽었고 부친처럼 애국렬사릉에 묻혔다. 한편,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고, 1991년 11월 22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최동오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봉안되었다.
3. 참고문헌[편집]
- 조선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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