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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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정 당시 기관명은 문화부(1990~1993) → 문화체육부(1993~1998) → 문화관광부(1998~2005)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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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
취소선은 부정적으로 언급된 인물이다.
[1] 실제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후대 인물 허균이 창작한 의적 홍길동을 언급한 건지 논란이 있지만 간접적인 언급으로 소설 홍길동전에서 대중화된 의적 이미지를 노래 가사로 사용했으므로 저자 허균을 생각하고 언급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파일:최무선 표준영정.jpg
성명
최무선(崔茂宣)
본관
영천 최씨
출생
1330년(충숙왕 17년) 고려 경상도 영주[1]
사망
1395년 4월 20일(태조 4년) (향년 65세) 조선 서해도 해주
추존
증의정부좌찬성(贈議政府左贊成)

공의 지략이 때맞춰 일어나니 明公才略應時生

삼십 년 왜란이 하루 만에 평정되었네 三十年倭一日平

바람 실은 전함은 나는 새가 못 따르고 水艦信風過鳥翼

진(陣) 무찌른 화차는 우레 소리가 무색하네 火車催陣震雷聲

주유갈대에 불지른 게 가소롭고 周郞可笑徒焚葦

한신배다리 만들어 건넌 것은 자랑도 못 된다네 韓信寧誇暫渡甖

이제부터 큰 공이 만세를 전하고 말고 豐烈自今傳萬世

능연각에 초상 걸려 여러 공경 중 으뜸이리 凌煙圖畫冠諸卿

화포 만든 공의 지혜 하늘이 열어 주어 天誘公衷作火砲

한번 뱃싸움흉한 무리 쓸어냈네 樓船一戰掃兇徒

허공에 뻗친 적의 기세 연기 따라 흩어지고 漫空賊氣隨烟散[2]

세상 덮은 공명은 해와 함께 빛나도다 蓋世功名與日鋪

긴 맹세 어찌 긴 세월 후를 기약하리 永誓豈惟期帶礪

응당 정벌 맡아 군사의 대권을 맡으리라 專征應亦賜弓鈇

종묘사직 안정되고 나라도 안정되어 宗祧慶賴邦家定

억조 창생의 목숨이 다시금 소생하리 億萬蒼生命再蘇

- 권근, <하최원수파진포왜선賀崔元帥破鎭浦倭船>(진포에서 왜선을 깨뜨린 최 원수(최무선)를 축하하며)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여말선초장군이자 화약/화포 개발자이다.


2. 생애[편집]


출신지는 경상북도 영천시이다.[3] 동시대 인물인 포은 정몽주와 같다.[4] 영천 출신으로 위인전에 실릴만한 인물이 2명뿐인데다가 영천 시내에 최무선의 이름을 딴 도로인 최무선로가 있을만큼 최무선을 모르는 영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최무선에 대해 '일찍부터 병법에 관심이 많았고 왜구를 제압하는데는 화약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화약 개발에 나섰다.'고 했다. 당시에 송나라 등지에서 화약 무기와 화포가 개발되어 무기로 쓰이고 있었는데 최무선이 화약과 화포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대체로 중국 상인이나 지나가는 외국인의 이야기였다는 점, 나라의 지원없이 자체 연구를 통하여 개발하였다는 점[5], 어렸을 때 불꽃놀이를 보고 폭죽을 만들겠다고 결심했던 점을 감안하면 아마 최무선의 일가는 정부에도 대김을 넣을 수 있는 거대한 상인 가문이었던 것 같다.

性巧慧多方略, 喜談兵法。 仕前朝, 官至知門下府事。 嘗曰: "制倭寇莫若火藥, 國人未有知者。"

천성이 기술에 밝고 방략(方略)이 많으며, 병법(兵法)을 말하기 좋아하였다. 고려조에 벼슬이 문하부사에 이르렀다. 일찍이 말하기를 "왜구를 제어함에는 화약(火藥)만 한 것이 없으나, 국내에는 아는 사람이 없다."라고 하였다.

-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4월 19일 임오


최무선은 당시 대왜구 시대에 고려 백성들이 고통받는 현실을 보고 화약과 화포를 개발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이미 최무선이 어렸을 시절 송도에서 폭죽을 이용한 불꽃놀이가 있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려에서도 화약을 사용하고는 있었다. 이미 몽골이 송나라와의 전쟁 과정에서 기초적인 화약 무기를 사용했고 몽골의 일본 원정에 고려군이 적극 참여한 점, 고려 초의 기록에서 화약과 유사한 형태의 폭발이 기록된 점을 고려하면 이미 최무선 시기에 화약이라는 것은 고려에서도 익숙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흑색화약의 주요 재료는 염초(질산칼륨), , 목탄(숯)인데 이 중 가장 문제가 된 부분은 염초였다. 숯이야 말할 것도 없고, 황도 천연 재료인데다 예로부터 사용해 왔기에[6] 특별할 게 없는 재료였지만, 염초는 특수한 토양에서만 채취되기 때문에 구하기 쉽지 않을뿐 아니라 질산칼륨으로 정제하는 공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화약 제작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7] 게다가 주요 제조국이었던 중국이 최신 무기인 화약을 무작정 주변국들에게 공급할 리가 없었고, 제조법을 철저하게 국가기밀로 다루어 숨기고 완성된 화약만을 주변국에 판매했다. 실제로는 기밀이 아니었던 문익점의 목화 에 비하면 훨씬 엄중한 기밀.[8] 중국의 화약 계통 기술서에는 재료만 소개할 뿐 방법은 모든 재료를 적절한 양으로 적절하게 섞는다라는 두루뭉실하게 서술했다. 더구나 고려의 국체를 보전해 주는 대신 고려의 군사력을 의도적으로 약화시키려 했던[9] 몽골이 고려가 화약을 개발하도록 내버려둘리가 없다. 때문에 최무선은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제조법을 연구해야 했다.

최무선은 이러한 여러 중국의 화약과 화포 기술서를 모아 분석한 후 직접 만들어 보기 시작하는데 방법이 위험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중간에 사고사당하지 않은 것이 기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고려사>[10]나 <조선왕조실록>[11]의 기록마다 차이가 존재한다. 정확한 제조법 및 양산법을 몰랐을 뿐, 이미 고려에서도 화약을 소규모로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용법이나 위험성은 이미 알려졌을 것이므로 무작정 밑바닥에서 연구를 시작한 것이 아니다. 때문에 과도하게 위험한 방법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후대의 가필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것저것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 화약을 연구한 것은 확실하다. 그 후에는 자신과 평소 친분이 있던 강남에 살던 중국 상인(원나라 사람)이 최무선의 국가를 위한 목숨건 개발 행위에 감복하여 가르쳐줬다고 하나 그 전에 대충 거의 다 완성했다고 한다. 화약을 양산하는데 성공한 최무선은 이를 도평의사사에 보고하고 이를 시험해 확인하고는 화약국(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제조로 삼아 화약 무기를 개발하였다.

이후 진포(지금의 전라북도 군산시)에 쳐들어 온 왜구들을 상대로 부원수로 출진하여 개발한 화포를 가지고 왜구들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진포해전을 지휘한 사람은 고려 수군의 숙장 상원수 나세 장군이고 최무선 장군은 심덕부 장군과 더불어 부원수를 맡았으며 새로운 수군 창설을 주도한 정지 장군[12]이 작전 계획을 입안하였다.[13] 진포해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고.

及庚申秋, 倭寇三百餘艘至全羅道 鎭浦, 朝議崔公火藥, 今可試矣。 乃命爲副元帥, 與都元帥沈德符、上元帥羅世, 乘船齎火具, 直至鎭浦。 寇不意有火藥, 聚船相維, 欲盡力拒戰, 茂宣發火具盡燒其船。 寇旣失船, 遂登岸刼掠全羅以至慶尙, 還聚于雲峰。 上時爲兵馬都元帥, 與諸將殲盡無遺。 自爾倭寇漸息, 乞降者相繼, 濱海之民, 復業如舊。 雖由上德應天之所致, 茂宣之功, 亦不小矣。

경신년(1388) 가을에 왜선 3백여 척이 전라도 진포(鎭浦)에 침입했을 때 조정에서 최무선의 화약을 시험해 보고자 그를 부원수(副元帥)에 임명하고 도원수(都元帥) 심덕부(沈德符) · 상원수(上元帥) 나세(羅世)와 함께 배에 화구(火具)를 싣고 곧장 진포에 이르렀다. 왜구는 화약이 있는 줄도 모르고 배를 한곳에 모아 힘껏 싸우려 하였고, 무선이 화포를 쏘아 그 배를 다 태워버렸다. 배를 잃은 왜구는 육지에 올라와서 전라도와 경상도까지 노략질하고 도로 운봉(雲峯)에 모였는데, 이때 태조가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왜구를 남김없이 섬멸하였다. 이로부터 왜구가 점점 덜해지고 항복하는 자가 서로 잇달아 나타나서,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것은 태조의 덕이 하늘에 응한 까닭이나, 무선의 공도 작지 않았던 것이다.

-

최무선 졸기, 태조실록 태조 4년(1395) 4월 19일 임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들어서자 나이가 많다는 이유[14]로 활약하지는 못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최무선이 정몽주계에 속했을 것으로 추측을 하기도 한다. 태조는 최무선에게 검교참찬 벼슬을 주었고[15] 이후 태조는 남아 있는 온건파를 견제하기 위해 몇 가지 수를 쓰는데 그 중 하나가 최무선의 화통도감 폐지였다. 막대한 경비 소요를 줄인다는 명분하에 화통도감이 폐지되는 등 최무선은 수난을 겪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여진족과의 갈등으로 북방이 어지러워지자 화기 전담 부서가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 때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16]이 관여해 개발한 화기의 위력을 절감한 조선 조정의 영향으로 후대로 갈수록 최무선 장군의 명성이 커졌다. 태조 4년(1395) 4월 결국 최무선이 몸져누워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슬퍼하며 최무선 집안에 후한 부의를 내렸으며 뒷날 우정승과 영성부원군에 추증했다. 최무선은 사망하면서 1권을 부인에게 주면서 "아이가 크거든 이 책을 주라."는 말을 남겼는데 부인이 책을 가지고 있다가 아들이 나이 15살이 되어 책을 주었는데 책은 다름아닌 화약 제조의 비법이 적힌 책[17]이었다고 한다.[18]

아들인 최해산(1380~1443)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화포 개발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최해산은 아버지와 다르게 평이 좋지 않은데 이유는 4군 정벌 때 직무 유기(정확하게는 최윤덕의 명령보다 늦게 진군을 했다.)로 파면될뻔 했으나 화포 제작의 공과 운빨(세종이 사면령을 내림)로 넘어가고 이후 강계부사로 있는 도중 직무 유기와 공금 횡령 등으로 4군 중 여연[19]으로 귀양갔다는 사실이다. 웃기는건 저 행동들이 고의였다는 것인데 "변방에 있는거 싫은데 사고라도 쳐서 파직되면 고향에 갈 수 있겠지?"와 같은 어처구니 없고 책임감까지 결여된 생각을 했다.[20] 그런데 생몰년을 보면 알겠지만 최해산은 최무선이 56세 때 얻은 늦둥이다. 아버지의 화약 제조법을 얻은 것도 그렇고 <조선왕조실록>에도 "아들로는 최해산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최무선의 후사는 그가 이은 것이 분명한데 위로 다른 자녀가 있었으나 일찍 죽은 것인지 아니면 첫 장가를 너무 늦게 들어버린건지 의문이지만 당시 50대 중반은 노인이나 다름없는 나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흥미로운 부분.

손자인 최공손(생몰년 미상)에 대해서는 듣보잡 수준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언급이 거의 없다. 단종 1년(1453년) 공병들을 기한 안에 역소에 보내지 못해 문책을 당했는데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들은 성품이 어리석고 사리가 어두운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다만 줄타기는 잘 했던지 우의정 정분을 잘 따라 공조좌랑이 되었고 이후 계유정난으로 정분이 실각하고 유배를 간 것과 달리 최공손은 원종 3등공신이 되었다. 생몰년이 알려져 있지 않으나 성종 때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그 때까지 살아있던 것으로 보인다. <용화포섬적도>라는 그림을 최무선의 증손자 최식이 성종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림 또한 최무선이 만들었다 한다.

그 후 여러 화포 테크와 주화신기전 테크까지 타는 등 최무선 이후 약 100년간 고려와 조선의 군사력은 차원을 달리 하게 된다. 최무선 덕에 조선 건국 이후 국방에 대한 개념이 병력의 수 중심에서 화력 중심으로 바뀌었다. 물론 완전히 병력의 수를 고려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고 기존에는 수량에 우세를 두든, 질에 우세를 두든 하나에 열중했다면 최무선 이후로는 화력과 수량의 적절한 조화를 추구했다.

이후 병력에 대한 인적 투자가 줄어들 수 있어서 산업에 대한 인력 투자가 더 많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21] 이는 당장 고려와 조선의 인구 수와 상비군 숫자를 비교하면 금방 알 수 있다. 물론 그 부작용으로 임진왜란 쯤에는 오히려 국방력이 약해졌다.[22]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때 활약한 조선 수군의 주무장도 최무선-최해산 부자가 개발한 화포류였다. 거북선, 판옥선 등 조선 수군의 대표함들은 모두 조선 초기에 그 기본형과 무장이 정립되었다.


3. 기타[편집]


  • 화약 개발과 진포해전에 대한 공로를 기리는 의미로 대한민국 해군에서는 209급 잠수함 중 하나에 '최무선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진포해전의 계획을 입안한 정지 장군[23]도 배수량 1800톤급 손원일급 AIP 잠수함의 2번함에 명명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코에이의 게임 <칭기즈 칸/원조비사> 한국판에도 시나리오 3의 재야 인재로 등장하지만 전투가 B라는걸 제외하면 특출난 점은 보이지 않는다. 고려로 플레이할 경우 초반에 인재난에 허덕이므로 등용해 둘 필요는 있다. <징기스칸 4>에서는 이성계와 함께 시나리오 4의 고려 장수로 등장하는데 문화, 화공 특기를 보유하고 있고 능력치는 정치 64, 전투 67, 지모 59로 고려 장수 중에서는 이성계, 김통정과 고려 장수 중에서는 더불어 상위 능력치를 가진 장수다. 병과 특성은 보병 C, 궁병 B, 기병 C, 수군 B. 이 시나리오에서는 고려에 '화포법'이라는 아이템이 있는데 문화치를 올려주는 것 말고는 메리트가 없다.[24]




  • 북한의 소설가 강학태가 쓴 소설 <최무선>이 국내에 발간되어 있기도 하다. 최근 북한이 개발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슬슬 띄워줄 기미를 보이고 있다.(출처: 연합뉴스, 네이버뉴스)

  • 1976년 MBC 드라마 <예성강>에서는 배우 김호영이 연기했다. 최무선의 화약 제조 과정을 극화했는데 최무선에게 화약 제조 비법을 가르쳐 준 중국인이 사고에 휘말려 사망하는 걸로 나온다.

  • 2008년 KBS 드라마 <대왕 세종>에서는 아들인 최해산이 주요 인물로 등장해서 최무선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언급한다.

  •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인임최영의 대화에서 이름이 언급되지만 다음 사근내역 전투에서 고려군이 썰려나가는 건 덤. 이후 진포에서 타고 온 배 500척이 불타버리는 바람에 퇴각할 길이 없어지게 된 왜구들이 내륙을 돌면서 깽판을 치며 그들이 지나간 곳에 남아난 것이 하나도 없었는데 남원 지역으로 몰려가서 이성계가 이끄는 고려군에 의해 궤멸된다.

  • SNL 코리아에서도 짤막하게 등장, 역사 공부하기 싫다고 정이랑이 다 쏴죽이려던 인물로 나왔는데, 그녀가 권총을 겨누자 되려 화포를 겨누면서 꺼지라고 말해, 그녀가 되려 겁을 먹고 최무선은 그냥 외우겠다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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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2] 다만 진포해전의 결과로 죽은 왜구의 수가 많은지는 의문이다. 여기서 배를 잃은 왜구들이 본격적으로 내륙을 휩쓸었기 때문이다. 이 왜구들이 소탕된 전투가 바로 황산대첩이다.[3] 글로리아 위인전 등에서는 개경에서 태어났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명백한 고증오류. 모 백과사전에 따르면 '최무선은 1325년 경상북도 영천시 오계동 마단에서 광흥창사(廣興倉使)를 지낸 최동순(崔東洵)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 역시 영천(永川)으로 시조는 최한(崔漢)이며 아마도 증조부인 최익겸 때에 이르러 영천에서 과거를 통해 개경으로 진입해 들어간 것으로 추측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4] 정몽주의 본관이 영일이기는 한데 고향은 영천이라는 설과 포항이라는 설 2가지가 있다. 그런데 영천시는 포항시와 서로 우리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고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포항에는 정몽주 선생의 호를 딴 포은중앙도서관과 포은중학교, 정몽주로가 있다. 반면 영천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원래 금호여자고등학교였으나 2014년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있다. 현재로서는 영천이라는 쪽이 우세한 편으로 영천에는 임고서원과 가설 선죽교, 새로 복원한 포은 선생의 생가가 있다.[5] 개발 의사를 타진했다가 거부당했다 한다.[6] 다만 한반도에서 유황 광산이 발견된건 조선 현종 때 일이었으며 이전까지는 전량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다. # 이 때문에 화약은 최고 귀중품 중 하나였고 재정 부담도 무시못할 수준이었다. 총통 만드는 재료인 동철(구리)도 수입품이어서 조선시대부터는 절간에 동종이 남아나지를 않았다. 다만 임진왜란 시기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중국 명나라에서 조선에 유황을 군수 물자로 제공했다는 내용이 언급된다.#[7] 임진왜란 시기까지 조선의 염초 생산 방식은 민가의 오래된 부뚜막 흙을 긁어서 재료를 조달하는 방식이라 비용과 인력이 많이 들었고 민폐도 장난이 아니었다.[8] 그래서 문익점의 이야기가 최무선의 일화를 원작으로 윤색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9] 대표적인 것이 일본 원정이 실패로 끝난 뒤 고려의 수군을 해체한 것으로 고려는 이것 때문에 훗날 왜구의 침공에 제대로 저항 1번 못하고 곤욕을 치렀다. 훗날 조선의 상국이 된 청나라도 비슷한 경향을 보이기는 했으나 원나라만큼 심하지는 않았다. 청나라가 상국이던 당시의 조선군은 원 간섭기의 고려군에 비하면 군대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 견제는 하되 위급할시 차출해서 써먹기 위함도 있는데 예시로 병자호란 직후 명나라와의 결전에서 조선의 검증된 수군과 조총수를 원해 임경업이 이끄는 조선군 일부가 파병되었고 나선정벌 당시 조선에도 병력을 보내라고 했다.[10] <고려사>에서는 원나라 염소장 이원에게서 화약 제조 기술을 알아냈다고 하는데 조선시대의 최해산이나 최무선의 후손들은 중국인의 도움없이 자체적으로 이미 화약의 체계는 완성했다고 언급하므로 최무선이 독자적으로 화약의 원리나 제조법은 거의 완성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이를 대량 생산하고 체계화하기 위해서 중국 쪽 지식이 필요했던 정도로 학계서는 본다.[11]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가르쳐준건 아니고 최무선이 이원에게 의복음식을 주어 구슬렸다는 기록도 있으나 최무선의 화약 개발에 대해서는 아들과 손자의 진술에도 차이가 있고 <조선왕조실록>에서 권근 등 대신들의 견해도 조금씩 다르다.[12] 정지 장군은 왕조 교체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말년에 고초를 겪었다.[13] 아래에 기재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관련 내용에 위 숙장들의 활약이 어느 정도 기재되어 있으니 궁금한 사람은 보기 바란다.[14] 최무선은 이성계보다도 10살이 많다.[15] 참찬은 정2품으로 판서와 같은 위치였으나, 검교참찬은 조선 초기에만 있었는데 고려시대 원로 관리들에게 준 명예직 비슷한 것으로 한직이다.[16] 선친이 저술한 화약 수련법을 공부했으며 당대에 화기 연구로 명성이 있었다.[17] 화약 수련법과 화포법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18] 최무선과 부인 이씨의 합장묘가 개성시 오적동 승제문 밖 옥련사라는 부근에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위치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를 않다.[19] 오늘날의 중강군으로 뉴스에서 겨울철마다 기온이 영하 20도로 내려가는 압록강변의 중강진이다.[20] 사실 이런 막장 행동들은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가능했는데 당시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화포 및 화약 제작 능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 실제로 태종 앞에서 불경죄를 범하는 등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목이 여러 번 날아갔겠지만 그의 화포 기술 때문에 여러 번 용서받았다. 세종 대에 자신의 비법을 저서로 남겨 국방력 강화에 기여했으니 목을 붙여둔 값은 치른 셈이다. 한마디로 재능은 아버지 뒤를 이을 만하지만 공직자로서의 자세 등은 호부견자에 가까운 인물.[21] 병력에 투입된 인적 자원은 생산력이 없다. 물론 둔전 개념 등이 있지만 이것도 군 유지에 따른 생산성 손실을 메우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22] 다만 이건 조선이 오랫동안 평화로워 북방에서 여진족들을 막을 궁기병만 있으면 충분할 정도로 군사의 필요성이 고려 때보다 낮아진 탓도 있다. 청나라의 팔기군도 17세기에는 매우 강했지만 평화가 지속되자 유명무실해진다.[23] 정지는 다음 싸움인 관음포 해전에서 공을 세운다.[24] 차라리 고려가 대포를 탑재한 군선을 사용하게 해주는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고려에서 화포가 실전에 투입된건 우왕 치세라서 그렇게 틀린 고증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