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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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상서성 상서이부판사
고려의 중서문하성 문하시중
고려 이자겸의 장인
최사추

시호
충경공(忠敬公)
작위
대령군 개국후(大寧郡 開國侯)
본관
해주 최씨(海州 崔氏)
이름
사순(思順) → 사추(思諏)

가언(嘉言)
부모
최유길(崔惟吉)
대원군대부인(大原郡大夫人) 박씨
배우자
경원군대부인(慶原郡大夫人) 이씨[1]
자녀
2남 4녀 [ 펼치기 · 접기 ]
장남 - 최원(崔源)
차남 - 최진(崔溱)[1]
장녀 -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 최씨[2]
차녀 -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 최씨[3]
삼녀 - 대령현군(大寧縣君) 최씨[4]
사녀 -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 최씨[5]

사망지
개경 개성부 자운사(慈雲寺) 선적원(善積院)
묘지
개경 개성부 서쪽 곷(岬)
→ 개경 개성부 서북쪽 산(山)
생몰연도
1036년 ~ 1115년 2월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가족관계



1. 개요[편집]


고려왕조 숙종 명효대왕 시기의 문관.

최충의 손자로 해주 최씨 가문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한 인물이다. 자신이 가진 뛰어난 배경과 탁월한 재능으로 자신의 가문을 문벌귀족 중의 문벌귀족으로 만들었다. 최사추의 기록은 《고려사》 제신 열전 최사추 편과 최사추의 묘지명에 남아있다.


2. 생애[편집]


최사추는 당대의 명신 최충의 손자이자 유학자 최유선의 조카로 태어났다.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음서가 아닌 과거시험을 치러 2등으로 합격해 관리가 되었다. 문종은 이런 인재를 직접 접견하여 대화를 나누었고, 그의 응답이 문종의 뜻에 맞아 기뻐했다고 한다.

문종과 순종이 잇달아 붕어하고, 선종이 즉위한다. 최사추는 상서성 호부의 차관이 되었다가 중추원의 3인자가 되었고, 조부 최충이 그랬던 것처럼 서경의 관리가 되어 떠난다.[2]

서경에서 최사추는 잠재적 적국인 요나라를 상대하여 성과를 하나 거두는데, 고려에 온 요나라 사신 왕정(王鼎)이 매일 밤 쓰던 문서를 모두 빼돌려서 개경으로 보내버렸다. 선종은 이를 전해 받고 매우 기뻐하였으며, 직접 조서(詔書)를 내려 칭찬하였다.

선종이 사망하고 태자였던 헌종이 즉위하니, 헌종은 최사추를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叅知政事)의 자리에 올렸다. 최사추에게 높은 지위를 하사한 것은 그의 능력을 우대하고 조정의 원로에게 예를 표한 것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편이 되어달라고 요구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헌종의 외척이던 이자의가 반란을 모의하자 숙부인 계림공이 먼저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진압하고, 헌종에게 선위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오르니 그가 바로 숙종이다. 최사추는 선종 사후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숙종을 지지한 것으로 보이며, 본인의 묘지명에도 숙종이 최사추를 크게 믿고 중용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숙종 재위 중, 2군 6위 소속 대장군 3명과 장군 1명 등이 반란을 도모하여 최사추가 잡아들였는데, 숙종은 이들 모두를 남부 지방으로 유배보낸다. 이 공으로 최사추는 문하시중에 임명되고, 보정공신(輔正功臣)의 호를 받는다. 이후 나이가 든 최사추는 표문을 올려 사직을 요청하지만, 숙종은 문벌귀족의 대표인 최사추를 가까이 두기 위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예종이 즉위하고 드디어 퇴직을 허락받은 최사추에게 예종은 왕실의 일원으로 의전을 받게 했다.[3] 이후 최사추는 본궐 동쪽에 있는 자운사(慈雲寺) 선적원(善積院)에서 훙(薨)했다고 한다.[4]

최사추의 묘지명에서 기록된 그의 마지막 관작은:
  • 향직 품계: 삼중대광(三重大匡)[5]
  • 문산계 품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6]
  • 공신호: 보정치리추성봉국좌명공신(輔正致理推誠奉國佐命功臣)[7]
  • 직위: 중서령(中書令)[8]- 판상서이부사(判尙書吏部事)[9] - 감수국사(監修國史)[10]
    • 수직: 수태사(守太師)
  • 훈위: 상주국(上柱國)
  • 작위: 대령군 개국후(大寧郡 開國侯)
  • 시호: 충경공(忠景公)


3. 평가[편집]


최사추는 고려 중기 문벌귀족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해주 최씨라는 귀족가문 출신에 본인의 정치적 감각도 뛰어나 줄을 잘 탔고, 결국 제후로 등극하였다. 그는 경원 이씨, 정주 류씨(貞州 柳氏), 경주 김씨 등의 가문과 연결되어 귀족 간의 결탁을 더욱 강력하게 했다. 최사추의 묘지명에는 그의 죽음을 훙(薨)으로 기록되었는데,[11] 이는 이자연도 받지 못한 대우로 당시 그의 명성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4. 가족관계[편집]




최사추는 해주 최씨의 시조인 태자태보(太子太保) 최온의 증손이며 최충의 손자이고, 최유선의 조카이다.

아버지는 태위(太尉) 최유길(崔惟吉), 어머니는 대원군대부인(大原郡大夫人) 박씨(朴氏)이다.

최사추는 경원 이씨인 경원군대부인(慶原郡大夫人) 이씨(李氏)와 혼인하여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다.

  • 증조부: 최온
    • 조부: 최충
      • 부: 최유길(崔惟吉)
      • 모: 대원군대부인(大原郡大夫人) 박씨
        • 본인: 최사추(崔思諏)
        • 배우자: 경원군대부인(慶原郡大夫人) 이씨[17]
          • 장남: 최원(崔源)
          • 차남: 최진(崔溱)
          • 며느리: 옥구군대부인(沃溝郡大夫人) 임씨[12]
          • 장녀: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 최씨
          • 사위: 상장군(上將軍) 송염(宋琰)[13]
          • 차녀: 조선국대부인(朝鮮國大夫人) 최씨
          • 사위: 조선국공(朝鮮國公) 이자겸[14]
          • 삼녀: 대령현군(大寧縣君) 최씨
          • 사위: 판국자감사(判國子監事) 문공미[15]
          • 사녀: 대령군부인(大寧郡夫人) 최씨
          • 사위: 정간공(貞簡公) 류인저[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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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원 이씨[2] 조부 최충은 서경의 하급 관리로 시작하였지만 최사추는 차관이라는 고위직으로 서경에 갔다는 것이 차이점이다.[3] 《고려사》에 '왕이 잔치를 하사하면서 절하지 말도록 명령하고, 집안사람의 예로 대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4] 최사추 묘지명의 기록[5] 1품 1등위. 최고위 품계[6] 종 1품. 최고위 품계[7] 좌명공신호[8] 명예직. 명목상 중서문하성의 최고위 직위[9] 상서성 이부의 장관[10] 춘추관의 장관[11] (薨)은 왕이나 제후의 죽음에 쓰이는 표현이다. 이는 같은 가문인 최윤의도 묘지명에서 똑같이 기록되어 있다.[12] 옥구 임씨(沃溝 林氏 )의 시조 임개(林槩)의 차남 양헌공(良憲公) 임유문(林有文)의 딸. 최진의 처 임씨 묘지명[13] 여산 송씨[14] 경원 이씨[15] 남평 문씨[16] 정주 류씨(貞州 柳氏)[17] 경원 이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