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천(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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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성천
崔聖天, 崔聲天

출생
1884년
충청도 충주목 신기리
(현 충청북도 충주시 신기리)
사망
1910년 12월 8일
대구형무소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910년 11월 12일 대구공소원 판결문에 따르면, 최성천은 1884년생이며 광부 출신이며 충주 신기리에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판결문에서도 그가 살았던 신기리가 어느 면에 속하는 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충주 일대에는 신기리라는 지명은 없으나, 충주와 인접해 있는 괴산군 괴산읍과 문광면에 신기리라는 명칭이 있는 것을 볼 때 둘 중 한 곳일 가능성이 있다. 한편 그가 서울 시해동(柴楷洞) 출신이라는 기록과 강원도 영월 하동면 직실리(稷實里)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일제가 세간에 떠도는 이야기를 첩보로 접한 것으로 신빙성이 높지 않다.

1908년 6월 김상태(金相泰) 의병장의 부대에 가담한 최성천은 이듬해 3월 김상태 의병장과 더불어 단양(丹陽)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의 밀정 권흑이(權黑伊)의 밀고로 붙잡혔다가 탈출하여 같은 달 30일 권흑이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전개하자, 그는 일부 병력을 읶르고 산속에 숨었다가 1909년 12월부터 의병 전쟁을 재개했다. 일제 기록에는 그가 이끄는 의병부대가 1909년 12월 22일 평창 미탄면에 도착하여 면장 박성현을 결박하고 군자금으로 55원 30전을 빼앗았다고 되어 있다. 이 때 그의 부대는 5연발총 2정, 단발총 8정, 총검 2자루, 군도(軍刀) 1자루 등의 무기를 휴대하였다고 한다.

1910년 3월 24일에는 안동 풍천면 가곡리에 있는 엄금용의 집에 이르러 엽전 605량, 백목포(白木布) 38척을 빼앗았고 3월 25일에는 의성 신평면 신방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도 하였다. 다음날인 3월 26일에는 일본 헌병대에 발각되어 전투가 벌어지기도 하였는데, 의병들은 응전을 하며 예천 용궁면 월곡 방향으로 퇴각하였고 같은 날 오후 5시경에 예천 호명면 오천(梧川)시장 주막에 나타나 일본 헌병과 재차 전투를 벌였다. 3월 27일에는 일본 헌병과 접전한 뒤 안동 풍산읍 소산리 북쪽으로 퇴각하였고 그날 오후 5시경 안동 풍산읍 서미리에 나타나 일본 헌병과 재차 전투를 벌였다.

1910년 4월 27일, 최성천의 부대는 영주 신덕면에 도착하였다. 이에 일본은 경찰대·헌병대·수비대 등을 파견하여 포위하였으나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이후에도 일제는 최성천 부대가 예천 북쪽 30리 지점에 모여 있다는 정보를 얻고 순사 5명을 급파하기도 했으나 이미 그의 부대는 사라진 뒤였다.

1910년 5월 24일, 최성천은 김상태와 함께 130명의 의병부대를 인솔하고 학가산 산중에 근거지를 두고 주둔하였다. 그리고 4~5명으로 1개조를 조직하여 안동·영주·예천·봉화의 장시와 부호의 집을 정탐해 두었다. 최성천은 5~6명의 부하를 이끌고 예천 감천면 미석리와 영주 문수면 대양리를 왕래했다.

이에 일제는 1910년 5월 26일 예천수비대를 파견하여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1910년 5월 31일에도 20명의 부하를 이끌고 안동 북후면 옹천리에 있는 강동수의 집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으고 식사를 해결한 뒤 영주로 향하였다.

1910년 7월 이후에도 그는 20명 내외의 부하를 이끌고 각지를 다니며 군자금 및 군수품을 모집하였다. 7월 12일에는 예천 호명면 본리에 도착하여 마을 주민들로부터 미곡 4석, 닭 8마리를 거둬들인 뒤 같은 날 오후 7시경에 사라졌다. 7월 13일에는 안동 풍산읍 수곡리에서 휴식한 후 풍산읍 노리에 있는 김형동의 집에 도착하여 60원을 걷었다. 7월 14일에는 낙동강을 건너 안동 풍천면 병산리에 이르렀고 이에 일제는 풍천면 인금리에 도착하여 진을 쳤으나 이미 산속으로 퇴각한 뒤였다.

1910년 7월 18일, 최성천은 경상도 계몽운동을 이끌던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습격하여 교감 김기수(金箕壽)[1], 교사 안상덕(安商德)[2]을 총살했다. 이후 7월 29일, 그는 결국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영주경찰서에 구금되었다. 1910년 9월 21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강도·강도살인·강도상인(傷人)·모살(謀殺) 혐의로 교수형을 선고받았고, 1910년 11월 12일 대구공소원에서 고살(故殺)·강도·강도살인 혐의로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1910년 12월 8일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최성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보성전문학교 졸업생이다.#[2] 보성중학교 졸업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