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시중(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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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937년 8월 4일 (86세)
경상북도 영일군 창주면 구룡포동 장안리
(現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장안리마을)[1]
본관
경주 최씨
재임기간
초대·제2대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2008년 3월 26일 ~ 2012년 2월 22일
학력
구룡포동부국민학교 (졸업)
대륜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병역
대한민국 육군 육군 일병 귀휴
종교
개신교
약력
새누리당 전임고문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한국갤럽 회장
민자당 비례대표
동아일보 편집국 부국장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김대중 대통령 및 김대중 정부와의 관계



1. 개요[편집]


이명박 정부 때 신설된 방송통신위원회의 초대, 2대 위원장이다.

2. 생애[편집]


1937년 8월 4일 경상북도 영일군 창주면 구룡포동 장안리마을[2]에서 태어났다. 구룡포동부국민학교, 대륜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1965년부터 1993년까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였고, 그 후 1994년부터 2007년까지 한국갤럽의 회장으로 근무했다.

최시중 전 위원장은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멘토이자 언론정책을 총괄한 실세중의 실세였다. 고향도 경북 포항으로 이명박과 같은데다, 이상득 전 의원과 대학동기다. 이에 이명박 전 대통령은 최시중을 정치적 멘토로 모셨고 이명박 정부 탄생 주역 ‘6인회’의 한 멤버이기도 한 최 전 위원장은 이상득 전 의원과 함께 ‘양대실세 대군’으로 꼽혔다. 방통대군이라는 별칭도 뒤따랐다.

특히 미국에서도 이 두 사람을 ‘MB정부 양대 브레인’으로 평가했는데,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미국 외교 비밀문서를 보면 버시바우 주한미국대사가 ‘친형 이상득과 최시중 방통위원장이 이 대통령의 정치적 두뇌로 생각된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 두 사람에 의해서만 영향을 받을 것’라고 상부에 보고했다는 문건 내용이 있었다.

2012년 파이시티 인허가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방통위원장 직을 사퇴했고 8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후 최시중은 상고를 포기했고 형이 확정된 이후 2013년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3. 기타[편집]


방통위원장 청문회에서 군복무 중 탈영 의혹을 받았으나, 귀휴로 알려졌다.

최 전 위원장은 방통위원장 시절, 기자들에게 생명선이 굵고 길게 이어진 자신의 손금을 곧잘 자랑하면서 자신은 해야 할 일이 더 있다고 말하곤 했다.


4. 김대중 대통령 및 김대중 정부와의 관계[편집]


의외로 김대중대통령에 호의적이었다. 즉, 처음부터 보수 인사는 아니었다. 유신정권김대중 납치 사건 직후의 인터뷰를 보도할 수 없는 현실에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으며, 15대 대선에서도 한국갤럽 사장으로 김대중 후보에 호의적인 도움을 준 바가 있으며 김대중 정부시절에도 각종 여론조사에서 김대중 정부에 호의적인 여론조사를 내놓기도 했다. 김대중 대통령 서거 당시에도 방통위 회의에서 묵념하며, "김대중 전 대통령의 85년 인생은 우리 현대사의 큰 획으로 남아있다", "오랜 인연을 가져온 분으로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라며 눈시울을 붉혔다.[3]

관련된 흥미로운 논란이 15대 대선 직전인 1997년 12월 12일 당시 스티븐 보스워스 미국 대사에게 여론조사 내용을 흘린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바로 그가 전달한 여론조사의 내용이다.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0%포인트 가량 큰 차이로 앞서고 있으며,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역 문제가 이 후보에게 걸림돌이 되고 있고 김대중 후보의 선전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으로, 미국측에 김대중 후보의 실제 선거 결과[4] 비해도 훨씬 우호적인 내용을 전달한 것이다. 그러나 여론조사 공표 금지기간에 미국 대사에게 한국 선거 상황을 전달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며, 2008년 방통위원장 후보자 당시 그 사건에 상당한 논란이 되었다.

사실 그 당시 김대중과 새정치국민회의DJP연합으로 과거 5공 6공 출신 TK인사들(엄삼탁, 박철언, 김중권등)을 상당수 김대중캠프로 영입하고 전두환 노태우의 사면 복권에도 동의하며 TK보수세력에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기에 최시중의 DJ 지원이 특별히 진보 행보도 아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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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구룡포리 장안리마을[3] 사실 이명박 정부 자체가 직전 정권인 참여정부에 대비 국민의 정부에는 상대적으로 호의적이었는데, 김대중 대통령 장례를 국장으로 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때 국장을 일요일에 끝내기 위해 7일로 줄이긴 했지만, 김홍걸의 증언에 따르면 국장 과정에서 지원은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4] 당시 김대중은 겨우 1.5%차이로 이회창과의 대선에서 접전을 벌여 신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