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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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번째 가톨릭 사제
최양업 토마스
崔良業
| Thomas CHOE Yang-Eop


파일:최양업 신부님.jpg

본명
최정구(崔鼎九)
아명
최양업(崔良業)
출생
1821년 3월 1일
충청남도 청양군
본관
경주 최씨[1]
사망
1861년 6월 15일 (향년 40세)
경상북도 문경시 또는 충청북도 진천군
국적
파일:조선 어기.svg 조선
신분
신부
사인
과로 및 장티푸스
안장지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시복시성
5. 대중매체



1. 개요[편집]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이은 한국 가톨릭 교회의 두 번째 사제이다.

2. 생애[편집]


1821년 충청도 홍주 다락골 새터[2]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최경환 프란치스코는 1839년 기해박해에서 순교한국 103위 순교성인에 오른 인물이고,[3]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도 남편과 함께 순교했다. 다만 어머니는 순교 전에 아이들이 굶주리는 모습을 보고 잠시 배교했던 전력 때문에 103위 성인 시성에는 들지 못했다가, 2014년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가 시복되면서 복자품에 올랐다. 여하튼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난 인물이다.

그의 가족은 이미 증조부 때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의 권고로 천주교에 입교했다. 본시 한양에서 살았는데 조부 때 박해를 피해 낙향, 당시 홍주 땅인 다락골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최양업의 부친 최경환이 출생하였다. 최경환은 이성례와 결혼함으로써 김대건 신부 일가와 친척관계를 맺게 되었다.

피에르 모방 신부에 의해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1836년 김대건 안드레아,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4]와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임시로 만든 신학교에 입학했다. 1839년 아편문제로 민란이 일어나자 필리핀 롤롬보이 도미니코 수도회 농장으로 피난갔다 오는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신학 공부를 꾸준히 했다. 다만, 중국의 정치적인 사정과 겹치면서 신학 공부는 했다가 중단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1844년 부제서품을 받았다. 먼저 사제서품을 받은 동기 김대건 신부는 조선에서 사목을 하다가 순교하고 말았다. 이때 그도 귀국하려다가 실패한다.

1847년 홍콩으로 이주한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에서 기해박해 때에 순교한 천주교 신자들의 행적을 프랑스어에서 라틴어로 옮기는 작업을 했으며, 결국 1849년 상하이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이후 요동에서 사목하면서 지내다가 극적으로 귀국에 성공하여 1850년부터 사목을 시작하는데, 그 여정이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충청북도 진천군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천안 이남의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삼남지방의 127곳에 달하는 공소를 모두를 도보로 걸어 다녔는데, 한 해 동안 7,000리(약 2,800km)를 걷는[5] 이 생활을 11년 6개월이나 계속했다. 1,000리가 대충 392.7km고, 서울 강남터미널에서 부산 터미널까지 거리가 약 380.4km다. 즉 1년에 서울-부산을 3번 반 걸어서 왕복한 셈이다.

바쁠 때에는 하루에 80~100리(약 32~40km)를 걸으며[6]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다른 공소로 떠나며 한달 동안 잠을 잔 날이 나흘밖에 안 됐다고 한다.

각지에 흩어진 공소 127군데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고해성사와 미사를 집전했으며, 이 와중에 기해박해 이후 조선에 못 들어오고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주교와 신부들을 다시 초청해 조선 천주교회를 재건하는데 성공했다.

이전 시대의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도 수집했는데, 이 기록이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7]를 통해 교황청에 전해지면서 조선 시대의 최초 103위 성인을 선정할 때 중요한 자료로 남게 되었다.

이런 왕성한 활동은 필연으로 과로로 이어졌고, 결국 1861년 과로에 장티푸스가 겹치면서 경상북도 문경에서 사망하였다.[8] 그가 세상을 떠난 후 35년이나 지난 1896년이 되어서야 3번째 한국인 사제가 서품받는데, 바로 강도영 마르코이다.(#) 그리고 최양업 신부가 선종하고 5년 뒤인 1866년 조선 최대이자 최후의 박해였던 병인박해가 발생한다. 만약 최양업 신부가 이때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박해를 받아 순교했을 확률이 높다.[9]

최양업 신부의 묘는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에 있는데, 이곳은 박해가 한창일 때 많은 가톨릭 신자가 숨어있던 신앙촌이었고, 최양업 신부는 살아 있을 때 이곳을 중심으로 사목 활동을 했다. 황사영이 백서를 썼던 토굴도 여기 있다. 한국 천주교에서는 이곳을 성지로 조성하였는데, 천주교 원주교구 배론성지가 바로 여기다. 유명한 성지이기 때문에 순례하러 오는 신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3. 평가[편집]


그의 초인적인 활동으로 인해 한국 천주교에서는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로 부르면서 공경한다.

한국 가톨릭에서 '양업'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 있다면, 100%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딴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국통합양업시스템’이다. 한국 천주교에서 모든 신자들에 대한 기록 등의 행정업무를 전부 전산화해 기록하는 시스템이다. 1998년 9월 27일 ‘양업시스템’으로 개통하여(관련 기록), 2008년 10월 18일 전국 본당 통합으로 개통했다.(#)[10]

방계 후손 중에서도 성직자수도자많이 배출되었다. 그 중 하나인 원주교구최기식 베네딕토 신부[11]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과 연루되어 범인은닉죄로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하였다.

서강대학교에는 최양업 신부를 기리는 최양업관이 존재한다.[12] 김대건관도 당연히 있고.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인천가톨릭대학교 강화캠퍼스(신학대학)에도 같은 이름의 건물들이 존재한다.

최양업 신부의 이름을 딴 대안학교양업고등학교도 있다.


4. 시복시성[편집]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데, 최양업 신부는 순교한 것이 아니라서 증거자로 분류되어 있다. 그래서 시복시성운동의 공식 명칭도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와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사제'다. 길다

다만 2014년 8월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과 함께 시복된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와는 달리, 최양업 신부에 대한 시복 심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순교자는 순교 자체와 그 이전에 받았던 박해가 기적으로 인정되어 기적 심사가 절반은 면제되는데 비해, 증거자인 최양업 신부는 기적 심사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최양업 신부의 시복시성이 무사히 통과된다면, 증거자로서는 최초의 한국 성인이 될 전망이다.(기사 참조) 그러나 현재로썬 시성될 확률이 반반인데, 악마의 대변인까지 동반해서 받아야 하는 증거자에 대한 기적 심사가 엄청나게 까다롭기 때문이다.

2016년 4월 27일, 교황 프란치스코는 최양업 신부를 가경자선포했다.

6월 15일, 한국 가톨릭에서 진행한 최양업 신부의 기적 심사가 종료되었다. 시복 청원인이자 서류 운반자로 지정된 천주교 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가 관련 서류를 6월 17일 교황청 시성성에 제출하면 이때부터 시성성의 기적 심사가 진행된다.

그러나 2021년 5월 교황청 시성성은 최양업 신부를 시복할 만한 기적 증거가 부족하다며, 시복심사 탈락을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 통보했다. 그래서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동년 10월부터 시복 운동을 재추진, 전구를 통한 기적과 관련한 제보를 각 교구별로 다시 받고 있다. 한국 주교단의 관련 담화문


5. 대중매체[편집]



2008년 평화방송에서 《탁덕 최양업》[13]이란 제목의 순교사극을 제작하여 이분의 삶을 조명하기도 했다. 주연은 주몽영포 왕자로 잘 알려진 원기준 그레고리오. 영포 왕자에 식객민우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심지어 식객의 경우 2008년에 방영중이었기 때문에... 식객민우 이미지는 실시간이었다.) 사람들이 이게 무슨 캐스팅이냐고 비명을 질렀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정말 훌륭하게 연기했다. 순교사극 시리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당연히 거의 모두 천주교 신자로[14], 대표적으로 이윤지 마리아가 있다. 평소에 받는 지상파 출연료에 비하면 쥐꼬리만한 출연료에도 기꺼이 촬영에 임했다고 한다. 특히 조선으로 돌아와서 감격에 몸을 떨며 십자성호를 긋고 땅에 입을 맞추는 장면이나 과로로 인해 병을 얻어 고통스러워하는 장면 등을 보면 배우 원기준의 매우 훌륭한 연기력이 돋보인다.

마찬가지로 평화방송에서 제작한 순교사극 《성 김대건》에도 짤막하게 등장하는데, 차광수가 연기하였다.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출신의 현대 작곡가 박영희도 2007~2009년 동안 최양업 신부가 외국 선교사들에게 라틴어로 써보낸 편지들 중에서 가사를 취한 테너 독창과 관현악을 위한 《빛 속에서 살아가면(In luce ambulemus)》, 무반주 합창곡들인 《주여, 보소서. 우리의 비탄을 보소서(Vide Domine, vide afflictionem nostram)》와 《주님, 당신의 자비를 기억하소서(Attende, Domine, misericordiam tuam)》 3곡을 작곡해 발표하기도 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탄생 희년 200주년을 맞아 제작된 영화 탄생(영화)에서 이호원이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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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치원(崔致遠)의 41대손이며 조선 시대 평정공신(平定功臣)으로 이조판서 (吏曹判書)를 지낸 최확(崔確, 1548 ~ 1617)의 11대손[2]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3] 경기도 안양시 수리산에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묘가 조성되어 있고, 천주교 수원교구 수리산성지로 조성되어 있다.[4] 두 동기들보다 1살 위. 유학 도중 위열병으로 요절하여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5] 하루 평균 약 7.7km[6] 군대에서 행군을 해 봤으면 알겠지만, 평균적으로 8-10시간을 걸어야 하는 거리다.[7]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5대 교구장.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8] 최양업 신부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과로에 변질된 소고기를 먹고 걸린 식중독까지 겹친 합병증으로 인한 장티푸스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9] 최양업 신부 선종 전후로 조선은 어느 정도 박해의 수위를 줄이기도 했고 대원군은 집정하면서 천주교, 정확하게는 천주교의 뒤에 있는 서양 열강에 관심이 있었기에 생전 최양업 신부와 친분이 있었고 이미 조정에 출사해 있던 남종삼 요한을 만나 이미 잠입해 있던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하려 했다. 그러나 그사이에 국제 정세가 악화되고 천주교에 대한 여론도 다시 나빠지면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된다.[10] 2012년 신(新) 교구양업시스템 개발에는 우리은행도 상당 부분 협력했다.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11] 최양업 신부의 종증손. 남동생인 최의정 야고보의 증손자이다.[12] 전인교육원을 비롯해 각종 행정업무 관련 부서들이 위치해있다. 아마도 이 점을 고려해 이름을 명명한 듯.[13] 탁덕은 천주교 신부를 뜻하는 말로 '덕을 행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사람'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지금도 교회법의 공식 번역에서는 신부를 탁덕이라고 칭한다.[14] 차광수와 같이 현재는 개종했거나 냉담자인 배우, 조연 중에서 종교가 가톨릭이라고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은 있다.[15] 김대건 신부 역에는 윤시윤이 캐스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