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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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가톨릭교회의 제9대 대구대교구장. 세례명은 '사도 요한'이다.
1942년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 서울 가톨릭대학교를 거쳐 1970년 사제서품을 받았다.[2] 포콜라레 운동[3] 을 우리나라에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평화방송 사장 등을 지냈다. 2001년 2월에 대구대교구 보좌주교(시티피스 명의주교)로 서품되었고, 2007년 4월 대구대교구장에 착좌했다.
최영수 대주교는 대구대교구 사제ㆍ부제 서품식을 주례하느라 같은 날인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에 거행된 교황의 팔리움[4] 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달 교황을 대신한 주한교황대사 에밀 폴 체릭[5] 대주교에게서 팔리움을 받았다.
2009년 6월 27일 건강이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8월 17일 건강상의 이유로 청원한 교구장직 사임서를 수락했다. 그 후 2주 만인 2009년 8월 31일(월) 06시 20분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후에 조환길 대주교가 이문희 대주교 추모 강론에서 이를 언급하며, 최 대주교가 너무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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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1. 개요[편집]
한국 가톨릭교회의 제9대 대구대교구장. 세례명은 '사도 요한'이다.
2. 생애[편집]
1942년 경상북도 경산군 하양면에서 태어나 경북고등학교, 서울 가톨릭대학교를 거쳐 1970년 사제서품을 받았다.[2] 포콜라레 운동[3] 을 우리나라에 도입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가톨릭신문사 사장, 대구평화방송 사장 등을 지냈다. 2001년 2월에 대구대교구 보좌주교(시티피스 명의주교)로 서품되었고, 2007년 4월 대구대교구장에 착좌했다.
최영수 대주교는 대구대교구 사제ㆍ부제 서품식을 주례하느라 같은 날인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축일에 거행된 교황의 팔리움[4] 수여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다음달 교황을 대신한 주한교황대사 에밀 폴 체릭[5] 대주교에게서 팔리움을 받았다.
2009년 6월 27일 건강이 악화되어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8월 17일 건강상의 이유로 청원한 교구장직 사임서를 수락했다. 그 후 2주 만인 2009년 8월 31일(월) 06시 20분 대구가톨릭대학교병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67세. 후에 조환길 대주교가 이문희 대주교 추모 강론에서 이를 언급하며, 최 대주교가 너무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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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코린 1,5)라는 표어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살며, 그리스도의 정신대로 생각하고 실천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의미이다. 외부윤곽은 대구대교구 주보 루르드의 성모를 푸른 망토를 입은 모습으로 형상화 하였다. 머리 위의 별은 12개의 별이 달린 월계관(요한묵시록 12,1)을 상징한다.[2] 반공 인사로 유명한 예수회 박홍 루카 신부가 최영수 대주교와 같은 날 사제서품을 받았다.[3] 1943년에 시작되어 교황청 인준을 받은 신심단체로, 한국에선 대전 성심당 빵집이 이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4]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키운) 양의 흰털로 만든 띠로, 관구장 대주교의 상징이다.[5] Emil Paul Tscherrig, 1947년생 스위스인 대주교로, 2004년부터 2008년까지 주한교황대사를 역임하였으며, 2021년 현재는 이탈리아 교황대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