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용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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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참고 문헌



1. 개요[편집]


북한의 항일 빨치산 1세대 출신 군인, 정치가.


2. 생애[편집]


1916년 12월 4일,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학교 2학년이 교육의 끝이었고 1930년대초에 빨치산에 가담했으며 1936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유성철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 역시 빨치산이었으나 그의 아버지가 일본 경찰에 잡혀 변절하자 빨치산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직접 아버지를 죽여 죄를 씻었다고 한다. 1938년 시점에서 최용건 휘하의 동북항일연군 7군 제1사 1단장을 맡았다. 1940년에 7군이 2로군 2지대로 개편되면서 교도대 대장이 되었다. 이후 소련으로 후퇴해서 88여단으로 편제되었으며 1944년 2월, 제1영 제1련장에 임명되었다. 같은 빨치산 동료 김성옥과 결혼했다. 1945년에 최현, 김일, 리영호, 서철, 김광협, 최춘국과 함께 소련에서 붉은별 훈장을 받았다. 성격이 무척이나 괄괄하여 귀국 직후 김일성이 자신이 귀국한 것을 소문내지 말라고 지휘관들에게 지시하자 중국말로 웃기는 소리 하고 있다고 욕설을 퍼부었다고 할 정도.[1]

평양학원의 기틀을 잡았으며, 북조선중앙보안간부가 설립되면서 군사부교장에 임명되었다. 조선인민군 창설 이후 2사단 산하 연대장에 임명되었다. 1948년 12월 21일, 강건, 김광협, 김달삼, 김웅, 김일, 전태룡, 무정, 박달, 박훈일, 최광, 최현, 김경석과 함께 국기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 1950년 6월에는 13사단장에 임명되었다. 그의 참모장 리학구가 그와 불화를 빚고 그를 쏴버린 다음에 미군에 투항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 때문인지 이후에는 후방에서 강건군관학교 교장으로 사업하였다. 1951년 2월, 김책 장의위원을 지냈다. 1951년 6군단장을 거쳐 1952년에 5군단장으로 승진했으며 종전 후인 1955년에는 2군단장을 맡았다.

1956년 4월, 3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58년 1월 21일, 리권무, 최종학, 최현, 김봉률, 류경수, 김철우, 리림, 리방남, 지병학, 김화천, 정병갑, 전우, 김창봉, 김대홍, 한일무, 유성철, 최광, 김창덕, 허봉학, 오진우, 정화준, 박창림, 전문섭과 함께 조선인민군 창건 10주년 국기훈장 1급을 수여받았다. 1958년에 공군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8년 3월, 1차 당대표자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하였다. 1958년 11월, 류경수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0년, 민족보위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2월 27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수산상에 임명되었다. 나중에 김일성은 "그가 수산상을 할 때에는 고기도 많이 잡히였습니다. 그는 한때 부수상도 하였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1963년 3월까지 수산물 80만톤 고지점령 투쟁에서 공이 크다고 1963년 3월 2일에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1년 9월, 4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 1962년 11월, 3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대의원 자격심사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수산상에 유임되었다. 1963년 3월, 강점구에게 수산상 자리를 물려주었다. 1964년 2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따라 교통성이 폐지되고 교통운수위원회와 철도성이 새로 설치되면서 초대 교통운수위원장에 임명되었다. 7월 4일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 부수상을 겸하게 되었다. 1965년 8월, 강영창 장의위원을 지냈다. 1965년에 교통운수위원장에서는 해임되었으나 1967년 12월, 4기 최고인민회의에서 내각 부수상에 유임되었다. 1968년 3월, 홍명희 장의위원, 1969년 1월, 김갑순 장의위원, 1969년 3월, 김태근 장의위원장, 1969년 8월, 리주연 장의위원을 맡았다. 1970년 보도에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보도되는 것을 보아선 정치위원회 후보위원으로 한번 선출되었던 걸로 보인다. 1970년 8월, 김원빈 장의위원장을 지냈으며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1972년 12월, 정무원이 수립되면서 정무원 부총리로 유임되지 않았다. 다만 대의원에는 선출되었다. 북한의 설명에 따르면 최용진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고 1976년에는 급기야 뇌혈전으로 전신마비가 와버렸다고 한다. 이에 내각 체육책임참사라는 명예직을 신설해서 계속 부총리 대우를 받게 했다고 한다. 완전히 구라는 아닌지 유성철 역시 최용진이 중풍을 앓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으며 최용진은 실종되어버린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1980년, 6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 위원에 재선되었다. 하지만 1984년 11월,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소환되었다.

이후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을 기념해서, 1992년 4월 23일, 조선인민군 창건 60주년을 기념한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따라 오진우, 최광, 김철만, 전문섭, 백학림, 리을설, 주도일, 리두익, 최인덕, 황순희, 태병렬, 김룡연, 리종산과 함께 공화국 2중영웅이 되었다.

그러다가 북한의 선전에 따르면 1996년 6월 1일에 김정일이 "최용진 동지도 혁명적 원칙이 아주 강한 사람입니다."라고 그를 칭찬했으며 그의 팔순을 기념해서 생일상도 내려주었다 카더라. 하지만 1998년 12월 21일, 최용진이 죽었을때 북한 매체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김일성 직계가 아닌 7군 계열의 인물이며 성격이 더러워서 김일성에게도 막말을 서슴지 않았다는 일부 증언을 보건데 김일성이 껄끄럽게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1999년 1월, 애국렬사릉에 그의 시신이 묻혔으며 2002년에 북한은 최용진을 기리는 추모기사를 작성했다.


3. 참고 문헌[편집]


  • 김광운, 북한 정치사 연구 1: 건당, 건국, 건군의 역사(서울: 선인, 2003).
  • 와다 하루키,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서울: 창작과비평사, 1992).
  • 한국일보 편, 증언: 김일성을 말한다.(서울: 한국일보사,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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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에 따라서는 최용진이 아니라 최용이 이런 말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