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운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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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서울 1945 최운혁.png

최운혁(崔澐赫)
가족관계
아버지 최은관, 어머니 조순이, 누나 최금희, 여동생 최은희 · 최송희
직업
교수군인
학력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레닌그라드 대학교[1]
소속
동북항일연군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 법학부
조선인민군 육군 (중좌)
정당



[[남조선로동당|
]]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배우
소년기: 김석
청년기: 류수영
1. 개요
2. 극중 행적
2.1. 어린 시절
2.2. 고등문관 시험 합격과 독립운동 투신
2.3. 광복과 월북
2.4. 6.25 전쟁과 빨치산 활동
2.5. 최후
3. 명대사



1. 개요[편집]


드라마 <서울 1945>의 주인공. 배우 류수영(아역은 김석)이 맡았다.

나이는 극중에서 나온적이 없다고 하지만 극중 수배중인 오철형의 명단에서 오철형의 나이가 1920년생이었고, 최운혁은 오철형과 서로 이름을 부르는 친한 사이니 동갑으로 추정됨으로 1920년생일 가능성이 높다. 함흥 최고의 수재로 평양고보를 수석으로 합격하고, 그 어려운 고등문관 시험에도 합격했으며, 광복 후 서울 대학 법대 교수와 월북 이후 김일성 대학에서도 법학 교수로 근무했었다. 그 만큼 머리가 좋은 수재 중 수재다. 비록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긴 했지만 그의 동료인 오철형과는 달리 극좌파가 아닌 몽양 여운형 쪽 노선에 가까운 중도좌파다.[2] 여러모로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닌 당시 한반도에 꽤 많았던 낭만적 사회주의자의 모습을 많이 띈다.

서울 1945에서 나온 여주인공이자 히로인이었던 김해경문석경 모두에게 사랑을 받은 히어로이자 능력자다. 모델은 실존인물이자 여명의 눈동자의 등장인물인 최대치와 리강국이다. 최대치가 가진 엘리트 속성이 극대화되면서 장하림 캐릭터가 많이 결합되었다. 최대치는 남방전선에서 고생하고 팔로군에 근무하면서 PTSD에 걸린 극단주의자로 변모하는데 그 속성은 오철형이 가져갔다.


2. 극중 행적[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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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어린 시절[편집]


일제시기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누나 1명과 여동생 2명이 있었다. 어린 시절 비록 가난하고 가진것 없는 집안 환경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함흥 최고의 수재로 이름을 날렸다. 함흥 최고의 수재 답게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그러나 그가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 문정관 자작의 제련공장에서 사고가 나서 누나를 잃는 슬픔을 겪게 됐고, 공장사고를 아예 덮고 가려는 문정관 자작에게 크나큰 분노를 느끼게 된다. 결국 최운혁은 분노한 노동자들과 함께 연회를 벌이던 문정관의 저택으로 항의하러 갔고, 그 과정에서 문정관의 동생 문동기를 다치게 했다.

이후 문정관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그 항의방문에 나섰던 이들을 체포하게 했다. 최운혁 또한 체포 되었고, 어린나이에도 불구하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마음씨 좋은 이동우가 문정관에게 부탁한 덕분에 풀려난다. 하지만 송도원 해수욕장에서 놀던 문석경을 보고 분노하여 어린 문석경을 납치했다가 다시 체포되었다. 다시 경찰의 취조와 고문을 받다가 문정관의 동생 문동기의 도움으로 풀려 난다. 풀려난 최운혁은 문동기의 권유에 따라 서울로 내려갔고, 거기서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공부한다.


2.2. 고등문관 시험 합격과 독립운동 투신[편집]


그렇게 최운혁이 서울에 내려와 공부를 시작한 지 7년이 되었다. 공부를 계속한 최운혁은 자신을 도와줬던 이동우와 서울에서 같이 지내던 오철형하고 친한 친구가 되었고, 공부를 열심히 하여 1940년에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하여 계속 엘리트 코스를 밟게 된다.[3] 이씨문중의 종손이자 부르주아 집안의 이동우가 고등문관시험에 불합격했던 데에 비해 최운혁은 순수히 자력으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도 보기 좋게 합격했다. 그러나 사법관 시보발령을 앞두고 지난날 문동기 상해사건 및 문석경 납치사건으로 인하여 총독부 법무국으로부터 문정관의 신원보증을 받아올 것을 요구받으며 다시 한번 꼬인다. 그러나 마인드가 바뀐 문석경의 도움으로 천신만고 끝에 시보발령에는 성공하지만, 그의 스승인 문동기가 석방 후 다시 파업을 지원한 일로 소련 탈출을 생각하게 되자 그것을 이동우 오철형과 함께 돕는다.

이 일로 체포된 최운혁은 일제 법정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즉 이 재판을 통해서 일본내에서 출세하여 일을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던 문동기는 최운혁이 박창주가 이끄는 형무소에 수감된 것을 걱정하여 자신의 동료인 김기수를 시켜 최운혁과 그 일행들을 소련으로 탈출시킬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 실행 도중 친구 장우석이 죽고, 오철형은 부상당했으며 최운혁 혼자만 살아서, 소련으로 피신한다. 조선과 소련의 국경지대인 하산에서 스승인 문동기와 접선한 최운혁은 이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스승 문동기의 격려로 소련에서 유학 생활을 한다. 소련 유학 시절 최운혁은 레닌그라드에서 유학생활을 이어나간다.[4] 유학 생활 도중 독소전쟁이 격화되자 독일군의 진격으로 레닌그라드 또한 전투에 휩싸일 위험이 생기고, 최운혁을 사랑하게된 문석경이 김해경과 같이 레닌그라드에 오게 되자 이를 걱정한 스승 문동기는 최운혁을 대리고 레닌그라드를 빠져나온다.

레닌그라드에 있을 당시 문정관의 명령을 받고 문석경을 구출하러 온 박창주에게 총에 맞아 열차에서 죽을 뻔했지만, 간신히 고비를 넘겼고, 레닌그라드 전투의 위협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최운혁은 연해주에 있는 동북항일연군 잔존 부대에서 생활하게 된다. 이로써 최운혁 또한 동북항일연군의 일원으로 사회주의 계열의 활동에 참여하게 됐다.

제2차세계대전이 막바지인 1945년 2월 최운혁은 다시 조선에 잠입해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오철형과 잠시 면담을 하고 몽양 여운형이 조직한 건국동맹과의 접선을 위해 양평에서 여운형을 만난다.[5] 그 이후 최운혁은 친일파인 박창주를 암살하려 했지만, 여운형이 보낸 건국동맹원들의 저지로 포기하게 되고, 여운형을 다시 만나면서 그의 인품에 감복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이후 그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돤다. 그가 몽양 여운형과 접선한 이유는 중경 임시정부와 동북항일연군 잔존세력 그리고 건국동맹이 광복군 국내 탈환작전에서 협력하게 하기 위함이었지만, 1945년 8월 소련군이 만주에서 부터 밀고내려가면서, 무산된다. 일본의 항복 시점까지 최운혁은 동북항일연군 잔존부대에서 복무했고, 이후 소련군 선발대와 함께 해방군으로써 자신의 고향인 함흥에 입성하고, 감옥에 있던 정치범들을 해방시킨다. 그리고 감옥에서 썩던 오철형과도 만난다.[6]


2.3. 광복과 월북[편집]


소련군과 함께 해방군으로써 입성한 최운혁은 함흥에서 문동기와 함께 북조선인민위원회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스승 문동기는 자신의 형인 문정관을 심판해야하는 처지에 놓이게 됐고, 결국 최운혁은 문동기가 하려 했던 일을 대신하여 문정관을 탈출시키려 한다. 이 일로 인하여 어린시절부터 마음에 품고 있던 김해경과도 잠시 사이가 안좋아지고, 함흥에서 직업을 구하기가 좀 힘들어졌다.[7] 결국 최운혁은 가족들과 함께 함흥을 떠나 서울로 내려가 자리를 잡게 된다. 서울에 살게 된 최운혁은 서울대학교에서 법대 교수로 지내며 학생들을 가르치며 산다. 정치적으로 열정적인 학생들에겐 최소한 중립적인 위치를 보이는 것 처럼 얘기했지만, 그 또한 사회주의 성향의 인물이었기에 모스크바삼상회의 당시 학생들에게 자중할 필요도 있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광복 이후 점차 혼란과 좌우분열이 휩싸이게 되고, 여운형이 조선인민당 입당을 권유하자 그의 인품에 다시한번 감복되어 조선인민당에 입당한다. 조선인민당에 입당한 최운혁은 친일파 재산 환수에 관한 법안을 기초하는 등 자신의 재능을 살려 활동하게 된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에도 조선인민당 위원으로서 몽양 여운형을 모시고 참가하기도 한다. 이후 교수직도 하며 돈도 어느정도 벌게 된 최운혁은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던 김해경과의 관계도 좋아졌고, 김해경과 결혼하려고 하지만 19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에 휘말리면서 김해경과의 관계가 점차 불편해진다.[8] 이와 더불어 여운형 테러사건이 일어나 구타를 당하는 등 신변에도 위협이 따르게 되자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김해경의 모친인 정향금이 김해경과의 결혼조건으로 정치에서 손을 뗄 것을 요구하지만, 정치적 신념이 강했던 최운혁은 포기하지 않았다. 급기야 김해경 모친이 혼인예물까지 되돌려주기에 이르자, 좌우합작 성사까지만 정치활동을 하고 은퇴할 것을 약속한다.

역사에서와 같이 좌우합작운동은 이승만의 방해로 실패로 끝났고, 결국 최운혁은 약속대로 근로인민당에서 탈당하여 김해경과 가정을 이루려한다. 결혼식 주례를 몽양 여운형에게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다. 그러나 최운혁이 여운형에게 주례를 부탁하러 간 날짜는 1947년 7월 19일로 여운형이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당하는 날이었다. 따라서 최운혁은 여운형이 암살당하는 장면을 두눈으로 보게 되고, 거기에 과거 친일경찰 출신이자 장택상의 신뢰를 받는 박창주가 배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최운혁은 여운형 암살사건의 배후를 밝히기 위해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여운형 암살사건의 책임을 묻는 비판글을 인민일보에 게재한다.[9] 더 이상 남조선에서 활동을 하기가 힘들어진 최운혁은 이동우의 설득으로 자아비판을 통해 남을까도 고민했지만, 살아생전의 여운형을 잊지 못하여 김해경과의 결혼도 자신의 가족도 남쪽에 내버려 두고, 이동우의 도움을 받아 38선을 넘어 월북하게 된다. 38선을 넘는 도중 몰래 쫒아왔던 박창주와 최운혁을 환영하러 나온 북조선유격대하고의 충돌도 일어났지만, 무사히 월북한다.[10]

월북한 최운혁은 스승 문동기와 동료 오철형이 속해있는 박헌영세력 주도의 남로당으로 편입한다. 최운혁은 남로당에 편입된 이후에도 여운형의 좌우합작 통일 노선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못했는지 북조선에 있으면서도 백범김구에게 서신을 보내고, 북조선에서 구금된 고당 조만식과 그 측근들은 만나는 활동했지만, 그런 최운혁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8년 남북분단정부가 수립되면서 무산된다. 최운혁이 남북통일정부 노선을 확실히 버리지 않은 모습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이전까지인 것으로 추정된다. 여운형 암살이후 신변이 위험해지자 월북한 최운혁은 박헌영을 만나 남로당에 입당했을때 박헌영에게 "몽양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 조국통일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고 했고, 대한민국과 북한 정부수립 이전에 자신의 스승 문동기가 "남북분단은 기정사실"이라고 하자 주인공 최운혁은 "선생님께선 그럼 지켜만 봐야한다는 얘기입니까? 분단은 막아야죠!"라고 말한다. 1950년 대한민국에 남아있던 남로당 세력 결집을 위해 남하했을때 가장 먼저 여운형 선생의 묘를 들려 남북분단의 상황을 얘기하며 "이런 조국의 현실앞에 조약돌 하나 옮기지 못한 저는 대체 뭘해야 하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이후 문석경에 의해 구출되었을때도 조국의 분단을 막지 못한 것에 자책했고, 북한으로 돌아가자마자 전쟁이 일어날거라는 얘기를 오철형에게 들었을때 전쟁 자체를 굉장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그의 행적을 봤을 때 6.25전쟁 이전까지 여운형 선생님이 꿈꾸던 평화로운 통일 정부 수립을 꿈꿨던 것으로 추정된다.


2.4. 6.25 전쟁과 빨치산 활동[편집]


즉 이와 같은 최운혁의 행보는 마찬가지로 북조선에서도 문제가 됐고, 당에서도 최운혁의 사상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한국전쟁 이전인 1950년 미군사고문단에 있던 이든중령은 김일성에게 숙청되거나, 카자흐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로 추방됐을거라 판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이든중령의 예측과는 달리 최운혁은 숙청당하지 않았고, 남로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950년 4월 ‘북극성’이란 가명으로 대한민국에 잠입한 최운혁은 38선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교전을 막기 위해 죽산 조봉암하고도 만나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11]

최운혁이를 끊임없이 추격하던 박창주는 그가 대한민국에 침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최운혁이를 체포하려 했다.[12] 이 과정에서 이동우와의 결혼을 약속중이던 김해경이 사건에 휩쓸려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간신히 북한으로 돌아온 최운혁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스승 문동기에게 남조선 감옥에 있는 김삼룡, 이주하와 함께 교환자 명단에 김해경을 포함시켜 달라고 하지만 실패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에서도 전쟁준비의 기운이 멤돌기 시작한다. 전쟁만큼은 무조건 반대하던 최운혁이었지만, 한국전쟁 발발하자 인민군 중좌(중령)으로써 참전하게 된다. 초반 의정부 함락 시점에서 동료인 오철형 대좌와 스승 문동기를 설득시켜 서대문 일부 부대를 이끌고 서대문 형무소를 해방시켜 박창주가 학살하려 했던, 정치범들을 석방한다. 서울로 돌아와 자신이 북한에 갔던 사이 약혼한 김해경과 이동우와 해후한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 최운혁은 가족들을 만나고 서울에서 인민재판 검사로써 활동한다. 그 시기 스승인 문동기를 생각하여 문석경을 살리고자 했고, 인민재판 시기 이인평 위원이 사형에 처할 위기에 놓이자 발빠르게 움직여 이동우의 아버지 이인평 의원의 사형만큼은 막는다.[13] 인민군 점령 치하의 서울에서 적잖은 민간인들이 무고하게 학살되는 모습을 보며 회의감을 느낀 최운혁은 전쟁에 대한 회의감을 더욱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14]

전쟁 막바지쯤 동료 오철형과 함께 낙동강 전선으로 배치될 예정이었다.[15] 그러나 1950년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지휘한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세가 국군과 UN군 쪽으로 기울이자 최운혁은 오철형과 함께 연희고지 전투에서 국군의 진격에 맞서 싸운다.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한 뒤 38선까지 올라가게 되는 과정에서 최운혁과 오철형이 지휘한 군대는 결국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고 고립된다. 사실 이들이 진격 속도가 느려졌던 것은 미군 전투기의 추격을 받았던 것과 정치범들을 같이 대리고 갔기 때문이다. 결국 후퇴가 늦어지는 바람에 이동우와 박창주의 군대와 교전을 벌이게 됐고, 최운혁은 이동우와 퇴로를 보장 받기 위해 협상하지만, 박창주는 그들에게 퇴로를 보장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오철형을 자극하여 다시 재교전을 벌이게 만든다.[16] 최운혁과 오철형 그리고 몇몇 인민군 잔존 세력은 산으로 숨어 피신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서울 수복 이후 최운혁의 아버지가 빨갱이의 부모로 몰려 사형직전에 몰렸다가 자결을 하게 되고, 막내동생인 최송희가 박창주에게 겁탈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듬해 10월에서 11월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국군과 유엔군이 밀리게 되자 1950년 12월에서 1951년 1월 당시 최운혁과 오철형은 서울 진입 전투에 참가한다. 이 전투에서 국군을 상당히 몰아붙이는 전과를 올렸지만 그러나 1.4후퇴 이후 상부의 명령에 따라 오철형과 휘하 인민군 잔존부대를 이끌고 서울로 진입하지 않은 채 강원도 치악산 일대로 숨어서 빨치산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정황상 역사에서와 같이 1.4후퇴 이후 리지웨이 장군 휘하의 유엔군과 국군이 다시 38선 인근까지 밀고 올라오자, 최운혁과 오철형의 군대는 빨치산 투쟁을 이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그 과정에서 휴전협상이 시작됐음에도 투쟁만을 요구하던 당의 명령에 불복종하려던 문동기가 결국 북한에서 내린 지령으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되고, 박창주의 부대가 토벌을 진행하면서 치악산 부근에 있던 빨치산 부대들은 사실상 거의다 죽거나 포로가 된다. 최운혁과 오철형 또한 결국 박창주가 이끄는 국군 토벌대에 의해 체포된다.


2.5. 최후[편집]


이때 박창주와 박성주는 원수지간이었던 최운혁과 오철형 그리고 그들과 함께 체포된 인민군 잔존세력들을 전부다 죽이려고 했지만, 최운혁 동생 최은희의 발언으로 자신이 겁탈했던 최송희가 난 아들을 생각하며 망설였다.[17] 그러던 중 인민군 간부 쪽에서 "우린 포로들이다. 너희 연합군 총 사령관인 리지웨이가 천명하였다. 이 포로들에 대한 안전한 대우를 원한다."라는 말을 듣자 박창주는 "그래 최고사령관이 있었지! 전원 체포해!"라고 하며 전부다 체포한다. 그 때문에 최운혁과 오철형을 비롯한 인민군 잔존세력들은 국군에게 학살당하지 않고, 인천의 한 포로 수용소로 가게 된다. 여기서 국군 중령으로 참전한 이동우와 만나는 것은 덤이다.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들에게 구타 당하던 최운혁은 몇몇 친공포로들과 인천에 있는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철천지 원수였던 박창주와 교전 중 그를 권총으로 쏴죽인다. 이후 계속 북한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던 중, 결국 국군에 의해 다시 포로가 될 위기에 놓이는데 박창주가 죽게 된 일로 미쳐날뛰는 박창주의 친척 동생 박성주가 최운혁을 죽이려고 하지만 이동우가 그를 막아내고 협상을 시도하자 그에 응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와중에 옆에 숨어있던 인민군들 중 부하인 장교가 이동우를 저격하려고 하자, 그를 막아내며 자신이 대신 맞고, 그 틈을 타서 박성주가 뒤에서 쏜 권총에 맞는다. 그 후, 비극적인 혁명가의 최후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동안 자신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어준 이념적으로 반대편에 있었고 연적 사이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형제 이상의 진실한 우정을 나눈 친구인 이동우의 목숨을 구한 후, 슬퍼하는 그의 품에서 누나 최금희를 떠올리며 사망한다.


3. 명대사[편집]


억울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문자작을 재판정에 세워야 합니다. 친일파의 거두를 재판에 세워 정당하게 죄값을 물어야 합니다. 민족반역자의 최후가 어떤것인지 만 천하에 보여줘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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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관의 재판을 두고 한 대사


당신(문정관)을 용서하는게 아닙니다. 당신을 살리고 싶어 살리는게 아니란 말이오! 당신은, 민족의 죄인이요! 이 함흥을 떠나 어디로 도망간다고 해도 그 죄를 벗어날 수도 심판을 피할수도 없을거요! 민족을 배신하고 친일한 죄!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한 죄! 일본의 전쟁수행을 돕고 동포들을 죽음의 전쟁터로 내몬 죄! 당신은 결코 역사의 심판을! 민족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거요!


이미 제 마음속이 묘지입니다. 제안엔 무덤이 두개나 있습니다. 하난 제 누부가. 또 하난 우석이가! 그리고 어쩌면 철형이까지 여기 묻어야 할지 모릅니다. 상대는 박창주입니다. 그가 어떻게 독립투사들을 희생시켰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철형이라도 버티기 힘들겁니다. 전 법관이 되어서 세상을 바꿀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우리 은희 송희 잘 돌보면서 적어도 우리 누부의 억울한 죽음같은 것은 막을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자기 도피일 뿐이었습니다. 이 땅은 혁명이 시작된 땅입니다. 레닌의 땅! 레닌그라드! 여기서 제안에 남아있는 나약한 최운혁과 싸우겠습니다! 이 땅이라면 절 강하게 단련시켜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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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전쟁이 격화되자 최운혁을 탈출시키려 온 스승 문동기에게 한 대답.


나 혼자 했습니다! 죽은 누부를 생각해, 죽은 형들을 대신해 당신과 당신딸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나도 아직은 몰라요. 혁명이 뭔지. 다만 상하도 빈부도 귀천도 없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겁니다. 석경씨도 개희도 나도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겁니다. 굶주림도 없고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는.


선생님(문동기), 너무 마음아파하지 마십시오. 조선에서 여운형 선생님을 만나뵙고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라 밖에서나 나라 안에서나 참으로 많은 분들이 우리 조선해방에 힘을 쓰고 계시는구나. 우리 조선이 해방된다면 모양이 어찌됐건 그건 외세힘 때문만은 아닐겁니다. 해방은 나라 밖에서 그리고 나라 안에서 지난세월 목숨까지 내놓았던 분들 그리고 지금까지 그 어떤 일본의 회유와 억압에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던 우리 독립투사들의 노고가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류없는 이념은 없다. 그래! 이 전쟁은 잘못된 것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까지 매도하지는 마라. 난! 선생님(문동기)의 위업을 받들어 인민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도록 사회주의 이념의 오류들을 바로 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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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활동하다 체포당한 뒤, 이동우와의 대화에서


동우는 내게 있어 너(오철형)와 같은 무게를 진 친구다. 아무리 이념이 다르고 전쟁중이라도 동우도 너와 마찬가지로 내가 목숨을 던져 구해야할 친구다.


왜 해경이가 죽어야만 합니까? 차라리 절 죽이고 그녈 구하십시오.


누구를 위한시대고 누구를 위한 역사냐. 전쟁만은 막아야해!


몽양선생님께선 한평생을 우리의 조선 하나의 조선을 외치셨다. 그게 그들에게 죽어야할 이유이냐?


진실을 밝힐수 없고 정의가 바로서지 않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그건 그냥 부패한 쓰레기 더미일 뿐이다.


나는 북조선으로 간다. 북조선으로 가기로 이미 마음을 정했다. 나는 거기서 몽양선생님께서 못다 이룬일을 하겠다. 조국이 둘로 분단되는 일만은 내 목숨을 걸고는 막을거야! 그게, 이시대가 내게 요구하는 것이라고 내가 이 땅에 이시대에 태어난 이유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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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운형 암살 이후 경찰에 쫒겨 월북하기 전 이동우에게 하는 말


선생님(여운형)! 운혁이가 왔습니다. 선생님의 유지도 받들지 못하고 이렇게 면목없이 왔습니다. 선생님께선 그토록 통일된 조국을 염원하셨지만 남에선 김구선생님이 암살되고, 북에선 조만식 선생님이 감금되었죠. 여순사건으로 만 명이 넘는 무고한 인명이 죽어갔습니다. 끝을 모르고 남과 북이 대치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조약돌 하나 옮길수 없는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선생님?


서대문엔 2,000명이 넘는 우리 동지들이 있습니다. 그중엔 선생님(문동기)을 구했던 김재혁군도 있습니다. 김삼룡 동지도 있고, 이주하 동지도 있습니다. 그곳엔 해경이가 있습니다. 국군 주력부대를 괴멸시키기 전에 모두 다 죽습니다. 희생이 없는 혁명은 없다 하셨지만, 생사를 같이한 동지들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시도도 안해본 채 그들에 죽음을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선생님 전 무엇보다 해경이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허락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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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서울 함락 이전에 김해경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했던 대사


기쁘지!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 생각하면 왜 안기쁘겠어? 원칙있는 사회가 되면 안되는 걸까? 가난한 인민들에게 공정하게 무상으로 임대하고 불하하고 그런세상을 만들순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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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서울에 집을 얻고나서 김해경과의 대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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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소련은 무상교육을 실행하고 있었으니, 최운혁 또한 무상교육의 혜택을 누렸을 것으로 추정된다.[2] 최운혁은 광복 후 여운형의 좌우합작노선을 추구했고, 남로당 입당과 6.25전쟁이 터지기 이전까지도 평화적인 방법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에 반해 그의 절친인 오철형은 골수 공산주의자로써의 모습만 보여줬다.[3] 서울로 간 뒤에는 문동기의 주선으로 일도하고 공부도 하면서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중간에 문석경이 그가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것을 목격한 것을 보면 학문과 노동을 같이 한것으로 추정된다.[4] 당시 소련은 무상복지를 실행하고 있었기에 외국인 유학생들은 무상으로 공부하고, 또 소련 공산당에서 제공한 몇몇 일자리를 통해 돈을 벌기도 했다. 아무래도 최운혁도 그런 혜택을 누렸을 가능성이 높다.[5] 광복군 국내 탈환작전에 건국동맹의 협력을 받아내기 위함이었다.[6] 작중에선 박창주에 의해 잠시 형무소에 갇힌 최운혁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석방되고 난 뒤 함흥에 입성한 소련군과 더불어 같이 해방군으로 입성한 최운혁도 보게 되는데, 엄청나게 감동한다.[7] 이걸 걱정했는지, 김기수의 경우 좋은 일자리를 찾아주겠다고 위로를 해준다.[8] 작중에선 조선 공산당이 위폐를 찍은것으로 묘사되지만, 위폐 생산의 경우 미군정과 경찰측에서 날조한 것이라는 것이 2000년대 학계 연구로 밝혀졌다. 따라서 정판사 사건은 조작된 사건이었다. 임성욱 박사가 박사학위 논문으로 이를 밝혔으며, 정판사 사건의 복원된 재판기록은 임성욱 박사의 블로그에서 볼 수 있다. 사건 관계자는 국군의 형무소 재소자 학살 당시 학살당했기 때문에 관계자들이 잘 살았다고 나오는 것도 역사왜곡이다.[9] 애초의 목적은 미군정과 하지를 거론하여 재판을 받은 다음 여운형 암살사건을 공론화하는 것이었으나 우익측에서는 그를 살해하여 입을 막으려한다. 그리고 박창주는 사전방지를 위해 최운혁을 죽이려한다.[10] 작중에 묘사된 전투 장면을 보면, 북조선측 국경 수비대 병력의 피해가 결코 적지 않았다. 박장추와 박성주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님이 작중에서 드러나는 것이다.[11] 이때 오철형은 "그런 변절자와 만나서 뭘할겁니까?"라고 묻지만, 최운혁은 남쪽내에 있는 진보세력을 결집하기 위함이라고 한다.[12] 김해경에 대한 그리움을 못잊은 최운혁이 반도 호텔에 들리자, 이를 알아보고 최운혁을 체포하려 했다. 박창주는 최운혁이 가명으로 쓰던 '북극성'이라는 이름을 예의주시했으며, 실제로 최운혁일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13] 형식상 검사가 최운혁이었기에 이 사실을 모르고 있던 김해경은 최운혁을 비난했지만, 그 사실을 나중에 알게되고 나서는 미안함을 느끼게 된다.[14] 전선으로 떠나기전 스승 문동기에게 자신의 심정을 다 털어 놓는다.[15] 작중에서 최운혁과 오철형은 한국전쟁 시기 친공포로로 유명했던 이학구 사령관을 상관으로 두게 된다. 이학구는 새로 배치된 최운혁과 오철형에게 "해방전쟁에 마침점을 찍게 되는 부대네"라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걸로 봐선 낙동강 전선에 배치되려 했다는 것이 정황상 맞는 판단이다.[16] 이동우와 최운혁의 합의가 성사만 되었다면 이동우 아버지를 포함한 정치범들은 한명도 죽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운혁과 오철형에 대해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던 박창주와 박성주가 이를 묵인하지 않았고, 일제시절 본인의 고문으로 성불구자가 된 오철형의 컴플렉스를 건드렸다. 그 때문에 오철형이 기관단총을 난사했고, 다시 재교전에 돌입하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17] 최송희를 겁탈했다는 것과 자신의 아이까지 있으니 이 부분에서 만큼은 나름 죄책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