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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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允龜
1885년 8월 23일 ~ 1940년 2월15일

1. 본적 . 이명
2. 생애
3. 기타


1. 본적 . 이명[편집]


일제강점기 때의 항일운동가 최윤구(崔允龜). 본명은 최현구 항쟁명은 호(號)창강(蒼岡)이며‧최윤구(崔允九)‧최윤구(崔允求)‧최윤규(崔允奎)최윤규(崔允珪)최운구(崔雲龜)이다.

본적: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면 지촌리 (동경)에서 태어났다.

2. 생애[편집]


1885년 8월 23일, 1919년 경북.청도.운문 고향에서 3.1 운동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통의부에 입대하여 항일 무장투쟁을 맹활동 하였다. 친일파 숙청, 교민 보호, 국내 일제 기관 파괴, 일제 관리 제거, 악질 부호 응징 등을 주요 임무로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한가지는 늘 각 각 지역 구장과 최윤구는 군자금을 거두는 일을 해야만 했다.전쟁무기 구입등이 필요 하기 때문이다.조선혁명군 최윤구는 신빈만주족자치현(新賓滿族自治縣)의 영릉가등으로 이주한 이래로 남만주 당시 봉천성(奉天省)일대에서 활동을 하였다.1934년 양세봉장군이 사망 한 이후에는 가족들을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 하였다.

1929년 5월 .참의부.정의부.식민부를 통합 하여 국민부를 설립 하고 동년에 조선혁명당.군을 결성 하는데 여기에 참여 하였다.
1932년 3월 만주의 독립군단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 중대장으로서 봉천성 신빈현(新賓縣) 영릉가(永陵街)‧흥경현성(興京縣城)‧흑우(黑牛)‧목기(木奇) 등지에서 만주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최윤구(崔允龜)는 조선혁명군 사령관(司令官)으로 7월에는 쾌대모자 전투에서 단독으로 일 만군 80여명을 전멸 시켰다.

1933년 1월 일제가 건설한 심해선(瀋海線) 철도를 파괴시키기 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양세봉 총사령이 1934년9윌19일일제의 모략에 빠져 변절자에 의해 전사 한후 최윤구는 1935년 10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제1연대장을, 1936년 1월에는 조선혁명군 제2사단 사령관(司令官) 등을 역임하면서 동북인민혁명군(東北人民革命軍)과 연계해서 벌인 만주 주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일제의 삼광정책을 강화하면서 동북삼성은 그야말로 쑥대밭을 만들어 버리고 있었다. 조선혁명군과 동북항일연군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모색을 취하지 않을수가 없는 조선혁명군은 동북항일연군과 연대하여 싸울것을 모색하였다.

1937년 4월 이후 김활석의 휘하에 있던 조선혁명군 독립군의 잔존세력이 이러한 곤란한 현실에 직면하여 일부 간부들은 남만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중국공산당계 동북항일연군에 합류하여 싸울 것을 주장하였고, 다른 사람들은 조선혁명당을 마음대로 해체할수가 없어서 결국 박대호와 최윤구 등은 6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양정우가 인솔하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연대하여 투쟁을 계속하게 되었다.[1]
그럼에도 김두칠은 항일연군에 합류하는데 한축을 담당하는데 중대한 역활을 했다고 한다. 그후 1938년 9월6일 김활석등 이무렵 김두칠.정광호등이 요령성 봉황.단동등에서 체포된다.조선혁명군은 어렵게 되었다.

그리하여 1938년에는 중국 공산당에서 영도하는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제1군에 합류하여 본부 제1군 산하에 한인 독립사 사령은 최윤구가 추대되고 참모장(參謀長)은 박대호가 맡아서 계속 활동하던 중, 최윤구는 1938년7윌경 경위연대가 경위여단으로 확충될 때 갈라져 나와 제1군교도대대 대대장 겸 총참모장에 임명되었다.그리고 같은 해 12월 만주 주둔 일본군과 화전현에서 격전을 벌여100명을 격살하고 나니 일본군은 보복하기 위해 비행기까지 동윈하여 폭격 하므로 아군병력도 많이 잃어 최윤구는 양정우를 찾아 몽강현으로 이동하였다.일본군이 통화에 본부를둔 일본경찰대가 최윤구부대와 양정우부대를 추적하였다. 적의 끈질긴 타격에 최윤구 부대와 양정우부대는 많은 군인을 잃었다.결국 최윤구는 포위되어 변절한 정빈.최주봉.윤하태부대들 600여 명과 격전을 벌이다 1940년2월15일 최윤구는 제1로군 총사령 양정우를 엄호 하다가 전사하였다. 그후 양정우군장도 8일후 전사하였다.

원전
『容疑朝鮮人名簿』(朝鮮總督府 警務局, 1934)
단행본
장세윤, 『양세봉–남만주 최후의 독립군 사령관』(역사공간, 2017)
논문
장세윤, 「조선혁명군정부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11,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7)
경윤호, 「조선혁명군의 성격 연구」(『부대사학』 19, 부산대학교 사학회, 1995)
장세윤, 「조선혁명군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 4,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0)
황용국, 「조선혁명군 역사에 대하여」(『국사관논총』 15, 국사편찬위원회, 1990)
정원옥, 「양세봉:조선혁명군 총사령의 연구」(『국사관논총』 8, 국사편찬위원회, 1989)


3. 기타[편집]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애족장 200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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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편 김활석은 30여 년이나 면면히 계승된 민족주의계 독립군으로서의 조선혁명군 전통과 명의를 포기할 수 없는 사정이 있는 참모장 김두칠등10-20여 명의 부하를 이끌고 독자적으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