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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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최윤동[1]
崔允東[* 1924년 11월 6일 형사사건부에는 崔
東으로 표기되어 있다.]


파일:external/rokps.or.kr/12.jpg

출생
1897년 7월 3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
(現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2]
사망
1965년 5월 11일 (향년 67세)
서울특별시 성동구 도선동 자택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946호
본관
경주 최씨[3]
학력
윈난무관학교 (졸업)
의원 선수
1
의원 대수
1
참여 단체
대동청년당
신간회
별칭
해광(海光)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 개요
2. 생애
4. 선거 이력
5. 둘러보기



1. 개요[편집]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정치인.

노태우 정부 때 제29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최세창은 그의 아들이다.


2. 생애[편집]


1897년 7월 3일 경상북도 대구군 동상면 남성리(현 대구광역시 중구 남성로)에서 태어났다. 이후 대구부 명치정2정목(現 대구광역시 중구 계산동2가) 88번지로 이주해 본적을 두었다.

1909년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안희제, 이수영(李遂榮), 배천택(裵天澤), 남형우, 김동삼, 김사용(金思容), 윤세복(尹世復), 김홍량 등과 함께 비밀리에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윈난무관학교에 입학, 1918년 가을에 졸업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그해 5월 독립운동에 가담하고자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갔다가 그해 9월 임시정부로부터 길림군정사(吉林軍政司)[4]에 파견되어 군무국장에 취임하였다. 그해 10월경 군자금 모금을 위해 입국하여 이수영 등과 조선 내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모의를 하던 중 체포되어, 약 1개월간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유치되었다가 그해 12월경에 풀려났다.

그후 중국으로 다시 돌아가 신흥무관학교 교관에 취임하였고, 1920년 청산리 대첩김좌진 장군 휘하 지대장으로서 전공을 세웠고, 만주지역에서 최진(崔震)이라는 이름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대한독립군 의용단 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에는 동료 배천택의 권유로 북경에서 개최된 해외 소재 조선인 독립운동단체의 대표자 회의격인 군사통일책진회(軍事統一策進會)에 참석하기도 했다.#

1922년 9월경 귀국하여 경성부 인사동의 이수영 자택에 동지들과 회합하여 군자금 모금에 대한 모의를 계속하다가, 군위군 부계면 대율동의 홍정수(洪禎修, 1878 ~ 1964. 1. 17)[5]를 목표로 삼아 1923년 12월 3일 홍정수의 자택으로 가던 중 경상북도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 송림사 근처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관련자인 송두환(宋斗煥)·이수영·노기용·정동석·정두규(鄭斗奎)·정두은(鄭斗殷)·정내영(鄭騋永)·김봉규(金鳳奎) 등과 함께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924년 11월 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폭발물취체벌칙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시행규칙 위반·강도 예비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구류 90일 산입)을 선고받아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26년 9월 29일 가출옥하였다.


파일:최윤동(1928년).png

1928년 12월 16일, 모 경찰서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출옥한 후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여 운남육군강무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이후 귀국하였는데, 불명의 사건에 연루되어 1928년 9월 11일 경기도경찰부 유치장에 투옥되었다가, 그해 10월 29일 무사 방면되었으며, 위 사진처럼 이후 한 차례 더 구류되기도 했다.

그 뒤 신간회 대구지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8년 중외일보사 창립에 참여하여 영업국장, 1929년부터 1931년까지 중외일보사 이사#를, 1934년 상무이사를 거쳐 이후 전무취체역에 취임하기도 했으며, 1939년에는 경북상공주식회사 감사를 맡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정계에 진출하여 한국민주당에 입당, 중앙본부 연락부장 및 중앙상무위원 등에 취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국방·외무위원장을 맡았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북도 대구시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조경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대구 코앞까지 밀어닥치자, 발벗고 나서서 독자적으로 학도병 모병 활동을 벌였다. 이렇게 모인 학도병들은 제1 유격대대에 편입되어 장사 상륙작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전후 1957년에는 김준연통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 밖에 광복회 회장과 육해공군 출신 청년 의용단 단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가 1965년 5월 11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도선동 자택에서 병사하였다.#

1991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그의 유해는 2001년 10월 1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2묘역에 이장되었다.


3. 제헌 국회 활동[편집]


  • 1948년 6월 2일 국회기초위원 15인에 뽑혔다.[6]
  • 1948년 10월 11일 '재일동포 재산반입 긴급조치에 관한 건의안'을 대표발의 하였다.
  • 1948년 10월 27일 반란사건에 관한 건의를 올리며 반란 사건에 대해 격분하였다.[7]
  • 1948년 11월 1일 여순사건을 조사하러 전남에 간 관계로 이번 본회의에는 참여를 못하였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48
제헌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선거구(대구시 갑))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8,577표 (38.52%)
당선 (1위)
초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1선거구(대구시 갑))


2,052표 (5.9%)
낙선 (5위)



5. 둘러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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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명은 최진(崔震).[2] #[3] #[4]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라고도 한다.#[5] 부림홍씨세보 권상 994쪽 참조.[6] 장기영,전진한,최윤동,이원홍,김약수,김장열,정광호,김봉두,배헌,김명동,성낙서,정구삼,이유선,서정희,윤치영. [7] 정작 자신의 아들다른 반란에 가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