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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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고려의 문신. 황주 토산현(현 황해북도 토산군) 출신이다.#
2. 약력[편집]
3. 생애[편집]
기록에 의하면 황주의 대상(大相, 태봉의 품계로 당시 9등급 중 3위에 해당) 최우달(崔祐達)의 아내가 임신을 했는데 집의 오이 가지에 참외가 열리는 일이 일어났다. 최우달의 이웃에서 이 일을 궁예에게 고하자 궁예는 점을 쳤는데 "이 집에서 아들을 얻으면 나라에 불리하니 기르지 말라"라고 엄포를 놓았다고 한다. 궁예의 말대로 아들이 태어나자 최우달은 아이를 숨겨서 길렀는데 어릴 때부터 오경에 능하고 문장에 통달하여 불과 10대의 나이에 궁예가 발탁하여 관직에 나가게 된다. 최응의 뛰어난 학식에 감탄한 궁예는 "이야말로 성인을 얻는다 함이 아닌가"라고 최응을 총애했다고 한다. 최응은 궁예 밑에서 한림랑으로서 왕명을 기초하며 최측근으로서 활동했다.
915년 왕건이 궁예에게 모반을 의심받아 관심법으로 시험하려 하자 옆에 있던 최응은 붓을 일부러 바닥에 떨어뜨린 뒤에 그것을 줍는 척을 하면서 '일부러 모반하였다고 말하면 살 것'이라고 은밀히 충고했다.[3] 왕건이 최응의 충고대로 따르니 궁예는 왕건이 정직하다면서 왕건을 용서하고 되려 큰 상을 내렸다.
훗날 왕건이 궁예를 타도하고 고려를 세우면서 최응은 왕건의 총애를 받아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는 원봉성의 지원봉성사, 국무를 담당하는 최고 의결 기관인 광평성의 광평낭중, 오늘날의 행정안전부에 해당하는 내봉성의 내봉경을 거쳐 광평성의 광평시랑 등을 역임했는데 이로 볼 때 권력의 핵심부에 있었음을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문장에도 탁월한 면모가 있었는지 왕건이 삼한통일을 기원하기 위해 세운 개경의 7층탑과 서경 중흥사의 9층탑에 쓰일 발원문을 쓰라고 명하자 지었다고 하나 오늘날에는 전해지지 않는다.
성인이라는 이름답게 매일 목욕재계를 하고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심지어 병이 들었을 때도 고기를 먹지 않아 왕건이 동궁 왕무를 보내 고기를 먹기를 권했으나 거절하자 몸소 직접 행차해 병문안을 하며 "고기를 먹지 않으면 불충이요, 불효로다"라고 하자 고기를 입에 댔다고 한다. 그리고 왕건이 최응을 너무 빠르게 승진시키려 하자, 동료인 윤봉이 자신보다 10년 연상이니 윤봉을 먼저 승진시켜 달라고 양보하기도 했다.
932년 삼한통일을 몇 년 앞두고 만 34세의 나이에 요절했다. 시호는 희개(熙愷)이다. 대광 사도 태자태부로 추증되고, 현종 연간에 태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고려사 태묘 예지에 기록된 배향공신 중 개국공신을 비롯한 삼한공신은 모두 개국공(開國公)이 되었는데 최응은 개국공이 아니다.[4] 태조 공신 중 다른 5명은 성종 연간에 배향된 반면 최응은 후대인 현종 연간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또한 다른 태조 공신은 모두 태사(太師)직을 추증받은 반면 최응만 그보다 아래인 태부(太傅)이다. 최응이 상대적으로 소외된 이유는 사료가 부족해 알 수 없다. 사후에 최응의 집안이 몰락했거나, 구체적인 숫자로 나타내기 어려운 참모 공적의 특성상 지휘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정받기 어려웠던 전근대의 풍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4. 대중매체[편집]
자세한 내용은 최응(태조 왕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 대상(大相) 품계를 가진 고위 호족이었다.[2] 천자의 조칙을 서문화하는 부서.[3] 궁예는 신하들 중 가장 위상이 높은 왕건이 모반을 시인하며 자신에게 진심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만족하고 살려주지만 부정하여 반항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죽이려고 들 테니 진심이 아니어도 원하는 대답을 해주라는 뜻이다.[4] 복지겸, 홍유, 박술희, 유금필, 최지몽, 서필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은 개국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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