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창호(야구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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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호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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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BO 로고(세로형, 2013~2021).svg KBO 포스트시즌
1996 플레이오프 MVP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등번호 31번
김주현
(1986)

최창호
(1987~1998.7.31.)


박종호
(1998.8.1.~2003)
LG 트윈스 등번호 67번
박종호
(1992~1998.7.31.)

최창호
(1998.8.1.~1999)


김동호
(2000~2003)
LG 트윈스 등번호 13번
김동호
(1998~1999)

최창호
(2000~2002)


박경수
(2003~2004)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87번
장채근
(2008)

최창호
(2011)


박승민
(2014~2018)
넥센 히어로즈 등번호 71번
조규제
(2009~2010)

최창호
(2012~2013)


류영수
(2014~2015)
SK 와이번스 / SSG 랜더스 등번호 79번
한혁수
(2012~2013)

최창호
(2014~2021)


채병용
(2022~2023)



파일:최창호2021.jpg

최창호
崔敞皓 | Choi Changho

출생
1966년 11월 8일 (57세)
경상남도 밀양시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display: none; display: 대한민국"
행정구
]]

학력
대구옥산초 - 대구중 - 경북고
신체
174cm, 71kg
포지션
투수
투타
좌투좌타
프로입단
1986년 연습생 (청보)
1987년 2차 3라운드 (청보)[1]
소속팀
청보 핀토스-태평양 돌핀스-현대 유니콘스 (1987~1998)
LG 트윈스 (1998~2002)
지도자
경북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3~2006)
성균관대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8~2009)
대전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09~2010)
넥센 히어로즈 2군 재활코치 (2011)
넥센 히어로즈 2군 투수코치 (2012~2013)
SK 와이번스 루키군 투수코치 (2014)
SK 와이번스 루키군 재활코치 (2015~2016)
SK 와이번스 루키군 책임·투수코치 (2017~2019)
SK 와이번스 PDA 투수코치 (2020)[2]
SK 와이번스 1군 투수코치 (2020)[3]
SSG 랜더스 2군 투수코치 (2021)
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 (2022)

1. 개요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4. 피칭 스타일
5. 연도별 주요 성적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 LG 트윈스 소속의 투수.

삼청태현을 대표하는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 중 한명으로 정명원, 김경기 등과 함께 태평양 돌핀스를 상징하는 선수이다.[5]


2. 선수 경력[편집]



2.1. 아마추어 시절[편집]


경상남도 밀양시 출신으로 대구옥산초, 대구중을 거쳐 야구 명문인 경북고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 불가능했고, 역대 최고의 내야수들인 최고의 명품 유격수 류중일과 '비운의 천재' 2루수 강기웅을 잡느라 외야수 이정훈을 버릴 만큼 자원이 넘쳤던 연고지 팀 삼성 라이온즈에 끼어 들어갈 만한 틈조차 없었다. 몇몇 실업 팀 입단을 타진해 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던 최창호는 최약체 청보 핀토스연습생으로 들어간다. 이 때 대구광역시를 떠나 인천광역시라는 먼 타향으로 가는 아들을 온 가족이 따라나섰고, 아버지는 숭의야구장 앞에 '홈런 슈퍼'라는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가게 옥상에서 벌을 기르고 꿀을 모아 최창호를 돌보았다. 최창호의 부친 최영규 옹


2.2. 청보 핀토스 - 태평양 돌핀스 - 현대 유니콘스[편집]



파일:external/image.ohmynews.com/punctum_287885_46%5B617926%5D.jpg


1986년 청보 핀토스연습생으로 입단한 후 가능성을 인정받아 1987년 청보 핀토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으며 정식 선수가 됐다. 참고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는 종종 연습생으로 입단한 선수들을 신인 지명에서 다시 지명하는 일이 있었다. 김상진조웅천도 그러한 케이스.

연습생 입단 2년차인 1987년 청보 핀토스에서 데뷔했지만, 2년동안 23.1에 8점대라는 평균자책점을 거두며 그다지 두각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3년차인 1989년에 부임한 김성근 감독의 눈에 들었고, 김성근 감독 특유의 엄청난 지옥 훈련을 거쳐 그는 괴수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좌완투수라는 이점과, 그의 작은 키로 인한 낮은 릴리즈 포인트와, 거기서 나오는 140km/h 중반의 속구[6]라는 넌센스한 조합으로, 상대 타자들에게 무지막지하게 삼진을 먹이며 농락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라고 볼 수 있는 1989년 시즌 최종 성적은 223⅓이닝 10승 14패 평균자책점 2.22. WAR은 무려 7.28이었으며 그 해 선동열과 같은 팀의 박정현에 이어 평균자책점 3위. 탈삼진은 선동열에 이어 7개차로 191개로 2위를 차지하여 "닥터 K"의 위명을 얻게 된다. 그 해 리그 3위인 평균자책점 2.22를 기록했음에도 무려 14패나 먹은 것은 당시 태평양 돌핀스의 빈약한 개노답 타선 때문에 승운이 유독 없던 투수기도 했다.[7] 그 후 1990년 196이닝, 1991년에는 233⅓이닝을 던져 리그 최다이닝 1위에 올랐고, 승수 역시 15승을 거두면서 개인 한 시즌 최다승 기록을 올렸다. 이후로도 별 일이 없다면 이닝 잘 먹어 주고 10승과 ERA 2점대 후반 정도의 성적을 올려주는 투수로 태평양 돌핀스 마운드의 한 축을 담당했다.

그러나 그동안 무리한 탓인지 1995년부터 슬슬 부상에 시달리면서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태평양 돌핀스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팀명이 변경된 첫 해인 1996년에는 컷 패스트볼을 장착하며 선발로 부활해 규정이닝을 채웠으나 승운이 부족해 8승 9패에 그쳤고, 이것의 그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1997년과 1998년에는 잘 따라가던 후배 안병원과 다시 무너지면서 이후 다시 하향세를 보였다. 팔꿈치 부상도 있었지만, 앞에서 말한 그 특이한 투구 폼 때문에 생긴 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워낙 다리에 무리가 많이 가는 투구 폼이다 보니... 최창호는 훗날 인터뷰에서 자신의 투구 폼을 무턱대고 따라하지 마라고 말했다.


2.3. LG 트윈스[편집]


1998년, 현대 유니콘스는 정규 리그 1위를 질주하면서도 확실하게 우승을 노릴 겸 드림팀을 만들기 위해, 당시 팀 내 유일의 약점이던 2루수 자리를 보강하고자 했다.[8] 결국 투수진 보강을 노리던 LG 트윈스와 내야수를 찾던 현대 유니콘스의 이해관계에 따라 트레이드 마감 시한이던 1998년 7월 31일 박종호를 상대로 LG 트윈스에 트레이드됐다. 다들 알다시피 박종호는 이후 현대의 주전 2루수로 박진만과의 환상적인 키스톤 콤비를 이루면서 현대 왕조의 주역이 되었고, 반면 LG로 넘어간 최창호는 부진하다가 은퇴했다 보니 이 트레이드는 현대의 승리가 되었다.

그런데 1998년 한국시리즈는 하필이면 현대 유니콘스와 LG 트윈스가 맞붙었고, 그는 결국 염원해오던 인천 연고 야구팀의 첫 우승을 반대편 덕아웃에서 쓸쓸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당시 현대 주장이자 투수진의 맏형이던 정명원은 우승한 후 우승 인터뷰 소감에서 울컥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같이 동고동락해왔던 창호, 정현이가[9] 이 자리에 없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라고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이는 정명원, 최창호, 박정현 삼총사의 이 서로 간의 우애가 얼마나 깊은지 보여주는 사례다. 그리고 이 '태평양 짠물 트리오'는 인천 야구팬들에게 상당히 큰 그리움과 추억이어서, 아무도 그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10]

최창호는 훗날 은퇴한 후 2006년에 이뤄진 한 인터뷰에서 "당황스러웠다. 나는 저쪽 팀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게 된 걸까 싶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의 의지로 만들어진 상황이 너무나도 화가 나더라"라고 당시 현대 유니콘스에 섭섭했음을 회고하기도 했다.[11]

LG 트윈스 입단 후에는 아래의 통산 성적을 보면 알겠지만, 트레이드 첫 해에만 후반기와 포스트시즌에서 쏠쏠한 모습을 보인 것을 제외하고는 에이징 커브의 여파를 제대로 맞으며 만 신나게 질렀다. 거기에 반대급부 카드로 현대에 넘어간 박종호가 1999년도에 데뷔 첫 3할 타율을 친 것도 모자라 2000년도에는 타격왕+골든글러브+올림픽 국가대표 발탁이라는 커리어하이를 달성했고, 동시에 현대에서 3회 우승이라는 금자탑을 쌓아올렸다. LG는 말 그대로 이듬해 트레이드 시킨 임선동 사건까지 생각하면 치가 떨리는 상황.[12][13]

결국 부진 끝에, 통산 500경기를 찍은 2002 시즌 후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스승인 김성근이 말렸으나, 본인의 강력한 요청으로 결국 은퇴 수순을 밟는다.

선수 시절 우승 경력은 없고 준우승 경력은 1994년(태평양), 1996년(현대), 1998년(LG)로 콩라인 가입되었다.[14] 지못미.


3. 지도자 경력[편집]



파일:external/heros.tizkorea.co.kr/1363851872_player_photo.jpg


은퇴 후 2003년부터 모교인 경북고등학교의 투수코치를 시작으로 이후 성균관대학교, 대전고등학교에서 투수코치를 맡으면서 아마야구계에서 지도자 경력을 쌓았다. 동시에 가끔씩 사회인 야구에서 뛰면서 나이 풀린 선수출신(40세 제한)으로 130km/h에 가까운 직구와 120km/h에 가까운 스플리터를 던졌다고 한다. 그리고 '초이볼'이라는 야구 관련 사업을 하면서 간간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야구 교실을 여는 등 야구계 업종에서 활동했다고 한다.사업은 그리 잘 되지만은 못했는 듯. 그래도 변화구를 많이 던질 수 없는 아마추어 투수들을 위한 손목 강화용 운동기구를 개발하여 특허를 출원했다고 한다.출처

2010년 11월 2일 친정팀의 후신격이라고 할 수 있는 넥센 히어로즈가 최창호를 코치로 영입하며 지도자로 프로야구계에 돌아오게 되었다. 보직은 2군 투수코치. 머나먼 강진군에서 투수코치 생활을 하던 정명원이 말동무나 할려고 친구 최창호를 불렀다는 소리가 있다. 2011 시즌이 끝나고 정명원두산 베어스 투수코치로 떠나면서 2012년부터는 최창호 혼자 2군 투수진의 육성을 떠맏게 되었다.

하지만 지도자로서의 평가는 미묘한 상황.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층이 말 그대로 처참하게 무너지면서[15] 지도자로써의 평가가 급락했다. 이는 2013 시즌까지도 마찬가지, 2군에서 성장해서 1군에 올라오는 투수가 전무한 현실이다.[16]

2013 시즌이 종료하고 SK 와이번스의 러브콜을 받아 인천으로 간만에 환송을 하여, 3군 투수코치로 옮겼다. SK, 신규 코치 영입 포함 코칭스태프 보직 확정

2017 시즌 루키 책임 및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19년 본인이 키워보겠다고 했던 이케빈이 고질적인 문제였던 제구를 어느 정도 잡고 SK 입단 1년도 안되어 1군에 선발로 데뷔에 성공하자 평가가 올라갔다.

드디어 1군 코치 승격을 2020년 8월 3일, 5연패에 빠진 SK의 코칭스태프 교체 방침에 따라 기존 1군 투수코치였던 최상덕과 보직을 맞바꿔 1군 투수코치로 올라왔다. 2021년 2군 투수코치로 다시 보직을 이동했다. 2021 시즌 후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으면서 팀을 떠났다.

SSG를 떠난 이후 2022년에는 제물포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부임하여 1년간 선수들을 지도 하였다.


4. 피칭 스타일[편집]




현역시절 투구폼

최고 145km/h의 패스트볼에 예리한 커브를 가진 좌완 선발 투수였다. 커브, 스플리터, 슬라이더, 체인지업도 있으며, 선수 생활 말년에는 커터를 던지기도 하였다.

키는 174cm으로 야구 선수로선 상당히 작았다.[17] 특히 투수로선 불리한 그 작은 키, 그리고 기본적으로 속구가 우완보다 4km정도 느린 좌완 투수로 최고 145km/h에 달하는 공을 던지기 위하여 개발된 최창호 특유의 역동적인 투구 폼은 '발석차 같다' 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최창호의 투구 폼은 상당히 독특하여 보통의 투수는 와인드업 자세에서 발을 올렸다가 앞으로 내딛으며 투구를 하지만 최창호는 발을 올렸다가 앞이 아닌 디딤발 쪽으로 내리며 잠시 주춤한 후, 갑자기 앞으로 내딛으며 투구를 한다. 그렇다고 키킹한 발을 땅에 닿지는 않게 하며, 한 발을 든 상태에서 무릎을 최대한 굽혀 던진다. 움짤을 보면 알겠지만, 일견 클레이튼 커쇼 특유의 투구폼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더 하드코어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18]

야구 팬들 중 그 특이한 투구 폼을 실제로 따라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준급의 근력이 없으면 거기서 주저앉게 된다. 즉, 근력이 없으면 이 투구 폼은 따라하면 안 된다는 것. 박정진처럼 상체의 움직임이 역동적인 것과는 정반대의 스타일. 고정된 포수 미트에 하루 500개의 공을 던지는 훈련, 10시간을 산행하고 얼음물에 입수해서 몸을 식히던 오대산 극기훈련 등의 극한의 체력 트레이닝과 엄청난 하체 근력 운동으로 이런 투구 폼이 가능했다.


5. 연도별 주요 성적[편집]


역대 기록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86
청보-태평양-현대
1군 기록 없음
1987
8
16⅔
0
1
0
0
0.000
7.56
6
4
3
1988
3
6⅔
0
1
0
0
0.000
8.10
25
10
8
1989
38
(5위)
223⅓
(4위)
10
14
2
0
0.417
2.22
(3위)
169
117
191
(2위)
1990
40
196⅔
(2위)
9
9
5
0
0.500
3.20
162
94
158
(3위)
1991
45
(4위)
233⅓
(1위)
15
(5위)
11
3
0
0.577
2.93
196
92
163
(3위)
1992
19
97⅔
3
9
2
0
0.250
3.87
92
57
70
1993
24
162⅓
7
12
0
0
0.368
2.99
134
55
104
1994
27
147⅓
12
11
1
0
0.522
4.09
141
64
84
1995
8
27⅓
0
4
0
0
0.000
7.24
30
20
11
1996
36
140⅓
8
9
0
0
0.471
3.85
117
66
97
1997
48
110
7
10
1
0
0.412
5.24
102
39
67
연도
소속팀
경기
이닝




승률
ERA
피안타
4사구
탈삼진
1998
현대 / LG
63
(4위)
46
3
0
1
0
1.000
3.13
45
21
26
1999
LG
50
26⅓
1
2
0
0
0.333
5.81
29
20
24
2000
28
9⅓
0
0
0
5
0.000
10.61
14
10
7
2001
54
35⅓
2
1
0
6
0.667
5.86
43
12
25
2002
19
12
0
0
0
2
0.000
6.75
13
10
11
KBO 통산
(15시즌)
510
1490⅔
77
94
15
13
0.450
3.66
1314
692
1048


6. 여담[편집]


  • 파일:태평양_삼총사.jpg
박정현, 정명원과 같이 '태평양 삼총사'라고 불리웠으며 그 셋의 친분도 굉장히 강했다 한다. 참고로 정명원과는 동갑, 박정현은 그들보다 3살이 어리다. 더불어 정명원은 189cm의 거한이었고, 박정현도 192cm의 깡마른 장신이어서, 머리 하나가 차이 나는 174cm인 최창호가 그 둘과 같이 다니면 리얼 '키다리와 땅딸보'를 보는 듯 하였다 한다. 그 세 명은 1989년과 1991년에 같이 동반 활약하며, 태평양 투수 삼총사의 명성을 드높였다.

  • 문제의 태평양 데이 때 SK 와이번스의 시구자로도 나섰다. 1년 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족보 문제에 대해 “원조를 굳이 꼽자면, 아니 팀 모태를 보면 히어로즈로 볼 수 있죠. 하지만 워낙 복잡미묘한 문제라서 단언할 수는 없어요. 단, 분명한 것은 현재의 상황입니다. SK가 지금 인천 야구를 대표하잖아요. 히어로즈를 인정하되, SK를 믿고 사랑하는 것도 팬들의 몫이 아닌가 싶어요.” 라는 말을 하였다. 이 부분은 삼청태현 문서 참조.

  • 김은식 작가는 SK의 원조 에이스였던 이승호를 보면 최창호가 떠오른다고 SNS를 통해 언급한 바 있다. 김 작가의 표현을 그대로 적자면 신인 때부터 강속구와 커브로 리그를 뒤흔든 선한 눈매를 지닌 단신의 좌완 투수라는에서 최창호가 떠오른다고. 그러나 닮았지만 조금 더 가파른 이승호의 내리막길이 안타깝다는 말도 했다.

  • 친동생인 최승호도 경북고등학교를 나와 태평양에 입단한 야구선수였으나,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은퇴. 현재는 평범한 회사원이라 한다.

  • 심수창과 함께 한 이닝 최다 투구수 2위 기록을 가지고 있다. 1990년 4월 21일 삼성전의 7회에서 기록한 59개. 심수창은 LG 시절이던 2006년 8월 23일 두산전 1회에 기록하였다.[19] 이후 앤더슨 프랑코가 2021년 4월 17일 삼성전 1회에 61개를 던지며 이 부문 1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SK 퓨처스 파크의 멘탈코치이자 반려견 '강비'[20]의 큰아빠를 맡고 있다. 처음에 강아지 시절 집에서 키웠다고.

  • 제자인 SK 투수들의 평가에 의하면 견자단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한다.

  • 1990년 9월 3일, 인천 도원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의 홈경기에서 KBO 최초이자 역사상 단 두 번뿐인 세 타자 연속 볼넷 후 세 타자 연속 탈삼진을 기록하였다.[21]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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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87년 2차 3라운드 정식 지명을 받고 정식선수로 전환되었다.[2] ~8월 2일[3] 8월 3일~[4] 통산 1500이닝 이상을 소화한 투수들 중 가장 적은 승수를 기록했다.[5] 통산 성적은 77승 94패 15세이브 1,540⅔이닝 1,048탈삼진 평균자책점 3.54. 이와 같은 훌륭한 통산 평균자책점으로 통산 승이 통산 패를 넘기는가 하면 통산 77승[4]밖에 못한 이유는 그가 전성기를 무지막지한 물타선을 자랑하던 태평양 돌핀스에서 보냈기 때문이다.[6] 추억보정이라 비판하는 사람이 있으나 당시 스피드건은 지금보다 5-8km 정도 낮게 나온다는 게 정설이다. 당시 선동열도 국내에서 TV 중계에서 가끔 찍히는 직구가 145 정도였다. 그게 더 나이들어서 일본에서 150까지 찍혔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피드건에 의한 차이도 심하다. 당시 140 초중반을 던졌다는 건 지금 150까지 던졌다고 충분히 유추가 가능하다. 구대성도 154-157까지 던졌다고 하지만 국내 스피드건에 그렇게 찍힌 게 아니라 해외에서 찍힌 것을 고려해야 한다.[7] 89년 플레이오프 2차전 선발로 나가 1:0 완투패.[8] 원래 1998 시즌 전 OB 베어스에서 방출된 베테랑 내야수 이명수를 영입해와 시즌 내내 주전 2루수로 기용했지만 그도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베테랑이었기 때문에 이명수의 노쇠화를 대비해 미래에 2루수를 봐야 할 자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명수는 1998년 한 해만 2루수를 보다가 박종호가 트레이드로 들어온 뒤 이듬해부터 주전 2루수 자리를 박종호에게 내주고 1루수나 지명타자로 자리를 옮겼다.[9] 박정현은 당시 재기불능 판정을 받고 조규제를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되었다.[10] 과거 야구장에 많이 들었던 도원아재들도 회고하기에 인정하는 추억이 있다고 한다.[11] 초창기 1980년대 프로야구 및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프로에 지명되는 팀 선수에게 있어서는 친정이자 보금자리였던 곳이였다. 승승장구 하던 팀들은 항상 앞도 뒤도 가리지 않고 선수들에게 저런식으로 트레이드를 했었으니 선수들이건 코치들이건 섭섭하고 눈물이 나는 건 매한가지다. 특히, 트레이드로 떠나면서 팀의 기둥을 잃었던 2명 최동원김시진은 옮긴 팀에 사그라지지 못하고 씁쓸하게 떠났다.[12] 조금 재밌는 부분이라면 후배 투수 안병원도 선배 최창호처럼 LG로 가서 거하게 불만 지르다 은퇴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기엔 뭐하고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이 있으나 당시에는 패전처리로 올라오면서 방어율도 4점대라 좋지 않았다. LG도 꽤 투수 보는 눈이 없는거 같다.[13] 신국환만 바라보고 박종호를 내준 LG는 2013년 손주인이 오기 전까지 2루수 잔혹사에 시달렸다.[14] 2002년 한국시리즈 때는 소속팀 LG가 준우승을 했으나 최창호는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다.[15] 이건 또 문제가 있는데 그놈의 김시진 소위의 쓸놈쓸 및 쓸만하다고 판단 된 유망주 및 1군 투수들을 팔아 버리는 팀의 사장 이장석 때문에 제대로 못 한듯.[16] 하지만 여기에 반론을 제시하자면, 넥센 히어로즈의 투수팜이 무너지게 된 또다른 이유는 과거 현대 시절 연고지 문제로 인해 2003년부터 해체 전까지 무려 6년동안(거기에 2007년 신인지명에는 1차 지명권이 2장이라 사실상 7명을 날려먹었다) 무연고지 상황에 처해 1차 지명을 할 수가 없었고, 이는 히어로즈 창단 초기 2군팜 황폐화의 주 원인이기도 했다. 거기에 그나마 있던 유망주들도 1군 감독이던 김시진의 특유의 쓸놈쓸로 인해 2군에만 박아두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죄다 타팀으로 이적해 포텐이 터지는 등(전유수, 임창민, 이태양이 해당된다) 무조건 최창호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상황.[17] 이마저도 프로필상 174cm이며 실제 키는 이보다도 더 작을 거라는 예상이 대부분이다.[18] 클레이튼 커쇼는 키킹한 발을 땅에 닿지 않게, 디딤발 쪽으로 내리며 주춤하는 것까진 같지만 그 상태에서 무릎까지 굽히진 않는다.[19] 참고로 4위는 허프장원삼의 58개.[20] 풍산개인데, '강화도 비룡'의 약자.[21] 두 번째는 2022년 9월 24일 KIA 타이거즈이의리가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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