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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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최학기(崔學騏, 崔學麒, 崔學驥)
출생
1900년 8월 16일
경상남도 진남군 동면 면량동
(現 경상남도 통영시 정량동 1280번지)
사망
1967년 10월 15일 (향년 67세)
경상남도 충무시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58호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선거 이력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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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전 경찰공무원, 정치인이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편집]


1900년 8월 16일 경상남도 진남군 동면 면량동(現 통영시 정량동 1280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독학으로 한문을 수학하였다.

1919년 통영군에서 있었던 3.1 운동에 가담했다가 검거되어 그 해 4월 1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통영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같은 달 14일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통영지청에서 이른 바 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불기소처분을 받고 곧 출옥하였다.

한편, 1927년 3월 경상남도 도평의원(道評議員) 김기정(金淇正)이 도평의회 석상에서 한국인 교육의 불필요 및 한국어의 통역철폐를 주장한 매국적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한 그는 박봉삼·박태근·박중한 등과 함께 6백여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김기정 징토시민대회(懲討市民大會)를 열었다. 징토대회에서는 김기정의 친일발언 사실을 규탄하고 공동절교를 선언하며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27년 10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으나 이에 불복, 공소하여 1928년 5월 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 바 출판법 위반, 명예훼손, 상해·훼기 등의 혐의에 대해 문서 인쇄 및 배포한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선고받았으며, 명예훼손에 대해서는 공소가 기각되어 원심이 유지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출옥 후 같은 해 8월 30일 동아일보사 통영지국 총무 겸 기자에 임명되었으며, 10월 9일에는 통영지국장에 임명되었다.

그후 1929년 1월 말 원산 총파업이 일어나자 통영청년단장으로서 노동당 총무 배재학(裵在學)·김상호(金相顥)와 함께 격려문을 발송했다가 같은 달 23일 통영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되어 일주일간 구금되었다. 출옥 후에는 신간회에 가입하여 통영지부장에 취임하면서 통영지부를 중심으로 항일활동을 전개했으며 1931년 5월 16일 신간회 제2회 전체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신간회의 해소를 주관하기도 했다.

1938년 2월 1일 동아일보사 통영지국 지국장을 사퇴하고, 같은 날 고문에 임명되었다. 1939년 8월 29일 고문직에서도 사퇴하였다.

1942년 2월에는 박영근 등 8명의 동지와 함께 항일운동의 방안을 모색하던 중 붙잡혀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8.15 광복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서 창당에 참여하였다. 1946년 경찰공무원에 입직한 그는 그 해 12월 인천경찰서장(현 인천중부경찰서장)에 취임하여 1948년 3월까지 역임했으며, 1947년 경상남도 반탁독립투쟁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또 1948년 4월 17일 제주도 경찰국장(현 제주지방경찰청장)에 부임하였는데, 당시 제주 4.3 사건 진압 방식에 대해서 김정호 경무부 공안국장과 국방경비대 9연대장 김익렬 간의 견해 차이가 극심했던 때였다. 이에 최천은 무력 진압을 주도했으며, 2개월 간 재임하다가 1948년 6월 경상북도 경찰국 경무과장에 전출되었다. 이어 같은 해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나자 경비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사태의 확산을 막는 데에 일조했다.

1950년 5월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통영군 갑 선거구(현재의 도농복합시 통영시 지역)에 출마했으나 무소속 서상호 후보에 밀려 낙선했다. 그해 6월 6.25 전쟁이 발발한 뒤 7월에 경상남도 경찰국장(현 경남지방경찰청장)에 전임되어 본격적으로 참전했다. 재임 중에 함안지구전투에서 휘하의 경상남도 지역 경찰관을 비롯해 전남, 전북 지역 경찰관 6,800명과 미군 25사단 일부와 합세하여 1950년 8월 18일부터 많은 전투를 이겨내면서 북한군 4개 사단을 격퇴하고 끝내 방어선을 지켜냈다.

1950년 11월 경무관으로서 경찰공무원을 퇴직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경상남도 통영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이던 무소속 서상호 후보와 같은 선거구에서 제헌 국회의원을 지낸 무소속 김재학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후 민주국민당 중앙위원을 역임하다가 호헌동지회를 거쳐 민주당에 몸담았다. 민주당에서 구파에 속하였다. 한편 통영읍의 충무시 승격에 노력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신설 지역구인 경상남도 충무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충무시당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4대 국회 기간이던 1960년 5월 30일 국회 본회의에서 각 지역의 양민학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의 지방 출장을 승인·결의할 때 당시 제주도 북제주군의 김두진 자유당 국회의원이 등단하여 조사 대상 지역에 제주도를 포함시켜 줄 것을 제의했었다. 그리고 6월 1일 제주도 지역의 진상조사를 경상남도 및 제주도 국회의원들이 담당하기로 결정되자 그는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어 조일재 당시 민주당 국회의원, 박상길 자유당 국회의원 등과 함께 제주도에 조사차 들어가 10일간의 현지 조사를 통해 제주도 피해 상황을 '인명 피해 1,787명, 가옥 피해 4,179동, 가축 피해 25,185두' 라고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장구한 세월에 걸쳐 지속된 4.3 사건은 당시의 학살 진상을 규명하기란 어느 타도의 경우보다 난사(難事, 어려운 일)이며 조사에 신중을 기할 지역의 하나이다'라고 소견을 발표했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경상남도 충무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5대 국회에서 상공위원을 역임했고, 같은 해 8월 23일 태풍 카르멘(CARMEN) 호로 인한 해일한반도 남서부에 막대한 피해를 받았을 때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윤보선, 유진산, 양일동, 김영삼 등 민주당 구파 출신 정치인들과 민주당을 탈당하여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후보로 부산직할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조시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10월 15일 경상남도 충무시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8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88년 9월 9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3. 여담[편집]


  • 취미가 한시 짓기였다고 한다.

4.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종류
소속정당
득표수(득표율)
당선여부
비고
1950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통영군 갑)

[[무소속|
무소속
]]

5,087표 (11.32%)
낙선 (3위)

1954
제3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통영군 갑)


14,235표 (32.94%)
당선 (1위)
초선
1958
제4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충무시)


7,615표 (42.96%)
재선
1960
제5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충무시)
6,408표 (34.69%)
3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부산 중구)

파일:자유민주당1963.png

381표 (0.89%)
낙선 (4위)


5.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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