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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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 ~ 13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최태복
崔泰福 | Choe Tae Bok


파일:최태복.png

출생
1930년 12월 1일 (93세)
평안남도 진남포부
국적
파일:북한 국기.svg 북한
학력
만경대혁명학원 (졸업)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라이프치히대학 (학사)
정당

파일:조선로동당 한글.png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이력
2.2. 교육비서 및 최고인민회의 의장 시절
2.3. 은퇴
3. 경력
4. 참고문헌




1. 개요[편집]


북한정치인으로 북한 교육, 외교 분야의 여러 요직을 역임했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이력[편집]


1930년 12월 1일 지금의 남포시평안남도 진남포부 항구구역에서 태어났다. 일각에서는 그가 항일 빨치산 2세대로, 만경대혁명학원을 졸업한 이후 김일성종합대학, 동독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주물학을 전공하고 소련에서 연구원 과정을 수료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나, 최태복이 만경대 출신이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어쨌거나 대학 졸업 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학교교육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었다가, 1961년 함흥공업대학 교무부장에 임명되었다. 1965년 과학원 함흥분원 연구소장에 임명, 이후 김책공업대학 교원, 학부장을 역임하였으며, 1973년부터 1981년까지 김책공업종합대학 학장으로 재임하였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1972년 조선로동당 교육부 과장에 임명, 1976년 교육부 부부장으로 승진하였다고 한다. 학교교육부 시절, 과학기술 교육, 외국어 교육, 독서 운동을 독려하였으며, 교육 분야에서 김정일 유일사상 지도체계 확립을 위해 큰 공을 세워 김일성, 김정일 부자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1978년, 정무원 고등교육부장 겸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임명이 확인되었다.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으나 김책공업대학 학장 역시 역임하였다. 1980년 12월, 교육위원장 임명이 확인되었다. 이렇듯 교육 전문가로서 경력을 쌓아왔다. 다만 한번 지방 출장을 나갔다가 현지의 젊은 여성과 농담 따먹기하고 낄낄거렸다가 희롱죄로 가벼운 처벌을 받은 일이 있었다 카더라.

1981년 8월, 조선-불가리아 친선협회 위원장을 겸하였으며, 교육대표단장으로 동유럽, 소련, 방글라데시, 아프가니스탄, 인도, 네팔 등을 순방하였다. 1982년 2월, 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되었으며 4월 5일, 최고인민회의 7기 1차 회의에서 교육위원장에 유임되었다. 1983년 9월, 김일대 장의위원을 지냈다.

2.2. 교육비서 및 최고인민회의 의장 시절[편집]


1986년 11월, 8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86년 12월, 6기 12중전회에서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보선, 비서국 비서로 선출되면서 권력 핵심부로 진입하였다. 교육비서으로 조동되기 위하여 교육위원장 자리는 변영립에게 물려준 것으로 보인다. 1987년 4월, 김일성 75세 생일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았다. 1988년 4월, 림춘추 장의위원을 지냈다. 일솜씨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 마음에 들었는지, 1990년 4월, 9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1990년 5월, 6기 18중전회에서 정치국 후보위원에 선출되었다.

1991년,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시리아, 이집트, 리비아, 중국, 인도 등을 순방하였다. 1991년 5월, 허담 장의위원, 1991년 6월, 허정숙 장의위원, 1992년 3월, 현무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1년 12월, 6기 19중전회에서 과학교육부장에 임명된 것으로 보이며, 1992년 4월, 김일성 팔순 기념 김일성훈장을 받아 이중수훈자가 되었다. 1992년 7월, 홍기문 장의위원, 1992년 9월, 서철 장의위원을 지냈다. 그러다가 1992년 12월, 6기 20중전회에서 김용순이 대남비서에 임명되면서 국제비서 자리가 공석이 되자 후임 국제비서 겸 국제부장에 뜬금포로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김용순의 뒤를 이어 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93년 5월, 세계인민들과의 련대성 조성위원회 위원장을 겸하였다. 하지만 교육 문제를 주로 다뤄왔던 최태복에게 국제부 업무가 상당히 어려웠던 관계로 1993년 12월, 6기 21중전회에서 다시 교육비서 겸 과학교육부장으로 옮기게 되었고, 후임 국제비서로 황장엽이 임명되었다. 이에 따라 1993년 12월,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황장엽에게 외교위원장 자리를 물려주었다.

1994년 7월, 김일성 장의위원, 1995년 2월, 오진우 장의위원, 1996년 2월. 리승기 장의위원, 1997년 2월, 최광 장의위원을 지냈다. 1998년 7월, 10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으며 9월 5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선출, 21년간 재임하면서 황장엽-양형섭-김영대-최태복 4인 체제를 구성하게 된다. 1999년 9월, 리종옥 장의위원, 2002년 6월, 최홍희 장의위원을 지냈다. 과학교육부장에서는 정확히 언제 물러난지 알 수 없으나 2003년에 리광호에게 물려준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2003년 7월, 1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9월 3일의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의장에 재선되었다. 2005년 10월, 연형묵 장의위원, 2008년 10월, 박성철 장의위원, 2009년 3월, 홍성남 장의위원을 지냈다. 2009년 3월, 1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2009년 4월 9일,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의장에 재선되었으며, 2010년 4월, 김중린 장의위원을 지내는 등 북한의 거물이 죽을 때마다 불려다녔다. 2010년 5월, 김정일의 비공식 방중을 수행하였으며 2010년 7월, 스위스에서 열린 제3차 국회의장대회에 북한 대표로 참석하였다.

2010년 9월, 3차 당대표자회 집행부로 선출되었으며, 정치국 위원에 선출, 다시 교육비서에 임명되면서 김정일-김정은 권력교체기에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010년 11월에서 12월 사이,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 중국과 몽골을 다녀왔다. 2010년 11월, 조명록 장의위원, 2011년 1월, 박정순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1년 3월 26일부터 4월 2일 사이, 영국 의회의 초청으로 최고인민회의 대표단장으로 영국을 다녀왔다. 2011년 5월, 김정일의 비공식 방중을 또 다시 수행하였다.

2011년 12월, 김정일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2년 2월, 김정일훈장 1차 수훈자로 선정되었다. 2012년 4월, 4차 당대표자회 집행부로도 선출되었으며, 2012년 11월 4일,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가체육지도위원회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1월, 몽골 국가대후랄 의장괴 회담을 가지기 위해 몽골에 다시 다녀왔다. 2013년 12월, 김국태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4년 3월, 13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 4월 9일의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최고인민회의 의장에 또 재선되었으며, 2014년 7월, 전병호 장의위원, 2015년 11월, 리을설 장의위원, 2015년 12월, 김양건 장의위원을 지냈다. 2016년 5월, 7차 당대회에서도 대회 집행부에 선출, 정치국 위원 및 정무국 부위원장에 또 재선되면서 그야말로 황희 급으로 혹사를 당했다. 2016년 5월, 강석주 장의위원을 지냈으며 2016년 6월, 조선로동당 대표단장으로 베트남과 라오스를 방문하였다.

2.3. 은퇴[편집]


그러다가 2017년 10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및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2018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3기 6차 회의에서 의장에서 소환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으나, 의장직에는 남아 2019년 초까지 최고인민회의 의장 직무를 계속 수행하였다. 2018년 4월 2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 참석하였는데 이를 보아 최고인민회의 의장 자격으로 당중앙위원회 위원 자리는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2019년 3월, 14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서 탈락하였으며,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마침내 최고인민회의 의장에서 물러나서 박태성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2019년 12월, 김정은의 양덕온천문화휴양지 준공식에 김영남, 양형섭, 최영림, 김기남 등과 함께 참석 '당과 정부의 중요직책에서 오랜 기간 사업하여온 로간부'로 보도되면서 북한 당국에서도 은퇴를 확인해주었다. 2020년 10월, 조선로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 및 경축연회에 초대받았으며 2021년 1월, 8차 당대회 기념 열병식 및 경축 대공연 '당을 노래하노라'에서도 귀빈으로 초대받았다. 2021년 9월, 정권수립 73주년 안전무력 열병식에 귀빈으로 초대되었으며, 2022년 정권수립 74주년 기념행사에 김영남, 최영림, 박봉주, 리명수, 김경옥, 박재경, 황병서, 김정각과 함께 초대받았다. 9월 9일에 열린 경축연회에도 다른 노간부들과 함께 참석했다. 김영남에 비해서는 걸음도 잘 걷고 비교적 정정한 모습을 보였다. 7월 27일, 노간부 자격으로 조국해방전쟁승리 70돐경축 대공연에 참석했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3대를 섬기면서 크게 처벌받았다는 얘기도 없고 북한 간부 중에서도 손에 꼽히게 성공적으로 말년을 마무리하는 중이다. 한달 후인 9.9절 열병식에도 노간부 자격으로 초대받았다.

3. 경력[편집]


임기시작
임기종료
비고
조선로동당 교육비서
1986년 12월 27일
1992년 12월 10일
6기 12중전회에서 선거
6기 20중전회에서 국제비서로 조동
조선로동당 6기 정치국 후보위원
1990년 5월 23일
2010년 9월 28일
6기 18중전회에서 보선
3차 당대표자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진
조선로동당 국제비서 겸 국제부장
1992년 12월 10일
1993년 12월 8일
6기 20중전회에서 임명
6기 21중전회에서 교육비서로 조동
9기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장
1993년 4월 9일
1993년 12월 11일
최고인민회의 9기 5차 회의에서 임명
최고인민회의 9기 6차 회의에서 조동
조선로동당 교육비서
1993년 12월 8일
2016년 5월 9일
6기 21중전회에서 임명
7차 당대회에서 직함 개편
10,11,12,13기 최고인민회의 의장
1998년 9월 5일
2019년 4월 11일
최고인민회의 10기 1차 회의에서 선출
최고인민회의 11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2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3기 1차 회의에서 재선
최고인민회의 14기 1차 회의에서 은퇴
조선로동당 6,7기 정치국 위원
2010년 9월 28일
2017년 10월 7일
3차 당대표자회에서 선거
7차 당대회에서 재선
7기 2중전회에서 은퇴
조선로동당 7기 정무국 부위원장
2016년 5월 9일
2017년 10월 7일
7차 당대회에서 선거
7기 2중전회에서 은퇴

4. 참고문헌[편집]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21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21).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9 03:19:53에 나무위키 최태복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