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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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한글학자이자 문학인. 1962년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다.
최진립 장군의 10대손이다.
큰 아들 정음사 대표 최영해 선생으로 정음사에서 윤동주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펴냈고, 최영해 선생 큰아들이 고려대 화학과 최동식 교수이다.
2. 생애[편집]
1894년 10월 19일 경상도 울산도호부 내상면 동동리(現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에서 아버지 최병수(崔炳壽)와 어머니 박순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울산군 병영성 내부에 살았으며, 상경한 뒤에는 경기도 경성부 행촌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행촌동) 146-1번지에 거주했다.
출생 이후 병영성 내부에서 살면서 일신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뒤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10] 에 입학하였고 학생 시절 한힌샘 주시경을 처음으로 만나 조선어학강습원에서 국어학 및 국어문법 등을 이수하였다.[11]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를 거쳐 히로시마(廣島)에 있는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12] 에 한국인 학생으로 입학하여 졸업했다. 이때 중학교 교사 자격증을 받았으나 이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향인 울산으로 귀향한 후 조선인 상권확보의 목적으로 공동상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에는 경상남도 동래군[13] 으로 내려가 부산에 있는 동래고등보통학교[14] 에서 교사로 재임하였으며 1922년에 교토(京都)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고 1925년 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그해 동 대학원에서 교육학을 수학하였다.[15][16] 1926년 귀국해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을 맡았다가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이 터지면서 책임을 지고 사임하였다.
1930년 조선총독부의 "언문 철자법" 제정 사업에 같은 주시경 학파인 권덕규, 신명균(申明均), 심의린(沈宜麟), 정열모(鄭烈模) 등과 함께 참여했다. 이로써 교육을 포함한 일본 제국의 공적인 영역에서 주시경 학파의 형태주의 맞춤법이 표준이 되었다. 일본 제국의 이 사업은 주시경 학파가 주장하는 형태주의 맞춤법이 박승빈 학파가 주장하는 표음주의 맞춤법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1933년에 한글맞춤법통일안 사업에 참여하여 한글보급에 힘써 왔고, 미국인 학자 겸 선교사인 조지 매큔과 에드윈 라이샤워가 한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인 매큔-라이샤워 표기법을 만들 때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검거, 구금되었고, 1943년 9월 함흥형무소에 이감되었다. 그 뒤 공판에 회부되어 1945년 1월 16일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공소했으나 공소가 기각되었고, 상고까지 했으나 1945년 8월 13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같은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참고로 해당 판결문을 보면 창씨명이 쓰키나리 겐바이(月成鉉培)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성씨만 새로 만들었고 이름은 그대로 둔 채 한자 읽는 방식만 바꾼 것이다.
이후 8.15 광복이 되면서 석방되었다. 광복 직후 최초 정치 여론조사에서 7위를 했다. 울산 출신이 이관술과 최현배 두 명이나 있다.
해방 이후는 미군정청 편수국장이 되어서 국어 교과서 행정을 담당하였고 미군정의 자문기관이던 조선교육심의회의 전체회의에서 교과서와 공문서의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통과시켰다. 후에 한글학회 상무이사와 이사장을 겸임하였다. 특히 1948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정부 공인 로마자 표기법인 '한글을 로오마자로 적는 법'과 외래어 표기법인 '들온말 적기법'을 제정하는데 그의 이론이 반영되었다. 1951년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으로 문교부 편수국장을 맡았다. 한편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울산군 을 선거구[17] 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김택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휴전 후인 1954년 서울특별시로 돌아오게 되면서 연희대학교로 복직하여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고 이후 문과대학장, 부총장을 맡았으며 1958년에 학술원 부원장이 되었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명예 문학박사를 받았으며, 1959년 교수직에서 정년 퇴임하였다. 연세대학교는 2001년 문과대학 건물(구 인문관)을 그의 호를 딴 "외솔관"으로 명명하였다.[18]
1962년 생존인물로서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을 수여받았으며, 1970년 노환으로 향년 76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원래 남양주시 진접읍에 있었던 주시경의 묘 옆에 안장되었다가 1981년 주시경의 묘는 국립현충원으로 이장되었고, 최현배의 묘는 2009년 9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3. 기타[편집]
울산광역시 중구 동동 613번지에 외솔최현배선생기념관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관 누리집, 운영 시간 안내 한 때 912번 지선 버스가 여기를 종점으로 삼기도 했지만, 2013년부로 한블럭 아래 병영초등학교 정류장을 거쳐 더 북쪽으로 연장되었다. 또한 우정혁신도시에는 그의 호를 딴 외솔초등학교와 외솔중학교[19] 가 있다.
위의 사진을 보면 짐작이 가겠지만, 매우 엄격하고 근엄한 학자였다. 생전에 찍은 다른 사진들만 봐도 웃는 얼굴이 하나도 없다.[20] 나라와 나랏말을 외세에게 빼앗겼던 경험 때문인지 외솔이 국어학자로서 가지는 사명감은 남달랐으며, 평생토록 극히 엄격한 잣대를 자기 자신과 제자들에게 적용했다. 후배인 문학박사 양주동 교수는 유머러스한 일화도 많았으며[21] 아들 최신해 박사는 가끔씩 해학적 면모를 보여주곤 했는데, 외솔은 그런 게 일체 없었다. 그래서인지 연희전문에서 외솔의 지도편달을 받았던 교수들은 옆에서 누가 "최현배"나 "외솔"이란 말을 하면 자다가도 눈을 번쩍 떴다는 소문마저 있었다.
순우리말에 관심이 많아서 국가적으로 순우리말 쓰기 운동을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2] 또한 이승만 정부 시절 1955년 조선일보에 서울이란 이름은 수도 이름으로 맞지 않으므로[23] 바꿔야 한다는 논문을 쓰기도 했다. 이승만도 이것에 관심을 보여서 바꾸려고 논의는 했는데, 이승만 밑의 참모진들이 이승만의 호인 '우남'으로 바꾸자고 하는 통에 최현배 선생이 지금 장난치냐고 분노했으며 야당이 결사반대하고 김형민 초대 서울시장도 '서울'이라는 이름을 강하게 주장하여 '서울'이란 이름은 그대로 남게 되었다. 자세한 건 서울특별시/역사 참고.[24]
20세기에 연세대학교(연희전문의 후신)에 다닌 사람이라면 외솔의 영향으로 당시 학교 곳곳에 남아있던 순우리말 사용의 흔적을 보고 다소 의아했을 수도 있겠다. 예를 들어 연세대학교의 주차장은 20세기 말까지도 “둠”이라고 표시되어 있었으며,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해부학 교실은 해부학을 비롯한 의학용어의 순우리말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정인혁 교수의 “의학용어집”이 대표적인 예.
우리말의 가로쓰기는 최현배 박사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당시 소위 식자들은 세로쓰기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며 가로쓰기를 강하게 반대하였다.[25] 최현배 박사가 아니면 이들의 반발로 오늘날에도 우리가 세로쓰기를 사용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한글 풀어쓰기 및 이를 편하게 쓰기 위한 글씨체를 고안하기도 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풀어쓰기' 문서 참조.
사후에 그를 기리는 단체인 외솔회가 출범하였고 이 단체에서는 매년 그의 호를 딴 외솔상을 시상한다. 호인 외솔은 보기 드문 순우리말 호인 동시에 최현배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하는 멋진 호로 이름높다.
한국 정신건강의학과의 원로 의사이자 수필가로도 유명했던 최신해 박사(崔臣海, 1919-1991)가 그의 아들이다. 외솔의 아들답게 글솜씨가 뛰어났다. 말년에 역사책에 나오는 한국인의 여러 성문화를 다룬 책을 집필했는데, 근엄한 노교수답지 않게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속하다 느낄 정도로 해학적이고 맛깔나는 문체가 일품이다. 최신해 박사는 이비인후과 전문의인데, 전공을 살려 한글과 인간 발성기관 구조 간의 관계를 연구하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의 연희전문학교 문과 재학 시절 스승으로, 윤동주는 외솔을 매우 존경하여 강의를 수강하고 그의 저서를[26] 탐독했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의 시는 거의 전부 순우리말로 되어 있다.
그의 고향인 울산광역시에서는 매년 그와 관련된 글짓기 행사가 열리는 등 울산광역시 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존경받는 이 학자를 매우 자랑스러워 한다.
한글학회 이사장을 별세 때까지 맡았고, 이후 제자였던 허웅이 32년간 한글학회 이사장을 맡게 된다.
4. 선거 이력[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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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로마자 이름 출처[2] "외따로 서 있는 소나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3] 사성공파(司成公派)-현곡2파(見谷二派, 서파西派) 17세 석(錫) 현(鉉) 종(鍾) 항렬. 아버지 최병수(崔炳壽)는 16세 수(壽) 만(晩) 항렬.[4] #[5] 외솔보다 4살 연상이었다. 외솔이 작고하고 20일도 안 된 1970년 4월 9일에 이화여대 부속병원에서 당뇨로 별세했다. 가족들이 외솔의 사망 사실을 알리지 않았지만, 항상 문병을 오던 외솔이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 것을 보고 외솔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직감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나라사랑 창간호(1971년) 307~311쪽 참고할 것.[6] 교육학 전공[7] 오랫동안 석사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일본 제국에는 석사 학위가 없었고 학사 다음이 바로 박사였다. 그리고 교토제대 문학부 졸업 후 대학원에서 수학만 했지 졸업은 하지 않았다.[8] 1967년 상훈법이 개정되면서 현재는 건국훈장 독립장으로 개칭되었다.[9] 출처는 나라사랑 창간호(1971년) 310쪽[10] 현 경기고등학교[11] 이곳에서 받은 '익힘에주는글'(중등과정 수료증)과 풀어쓰기로 적힌 '맞힌보람'(고등과정 졸업장)의 영인본들이 외솔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12] 현 히로시마대학[13] 현재의 부산광역시 일대에 해당한다.[14] 현 동래고등학교[15] 석사학위로 잘못 알려져 있었으나, 일본 제국 시절에는 석사 학위의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1922년에 교토제대에 입학해 1925년에 졸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6] 그리고 일본이 석사학위가 없었던 1950년대 이전에는 학사학위가 석사학위를 대체하는 학위였다.지금은 학사 학위가 흔하지만 그 시대에는 학사 학위 가지고 교사나 대학교수가 될 정도로 석사와 비슷한 학위였고 1920년대 이전 까지는 박사학위는 문부성에서 수여하였지만 1920년대 학위법 제정으로 일반 대학에서도 박사학위를 수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에 석사학위가 도입된 것은 1950년대였으며 석사 학위의 역사가 비교적 짧은 잔재가 아직도 남아 석사 대신 '박사 전기과정'이라는 표현을 쓰는 대학들도 많다.[17] 울산군 농소면, 강동면, 온양면, 웅촌면, 범서면, 두동면, 두서면, 언양면, 상북면, 삼남면[18] 참고로 신관인 제2인문관은 1930년대에 조선학운동으로 연희전문을 한국학의 메카로 이끈 정인보의 호를 딴 "위당관"으로 명명했다.[19] 본래는 울산동중학교로 약사동에서 혁신도시로 이전한 학교이며, 2016년부터 현재의 교명으로 바꿨다.[20] 일설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발견되었을 때 큰 소리로 기뻐하며 웃었다고 한다.[21] 일화가 참 다양하지만 특히 "어이쿠 국보가 넘어진다!"와 "내가 모르는 건 학생들도 몰라도 돼", "(택시기사에게) 국보가 탔으니 안전운전 부탁하오"가 유명.[22] 그녀라는 낱말 사용을 강하게 비판한 사람 중 한 명이다. 그녀 항목 참조.[23] 서울이란 말 자체가 수도를 가리키는 순우리말이다. 수도 이름이 '수도'라는 것이 말도 안된다는 게 이 주장의 근거다. 원문은 1955년 9월 22일자 조선일보 논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24] 참고로 이승만 본인조차 대놓고 아부하는 뉘앙스가 강한 '우남'이란 이름을 붙이는 걸 원치 않아했다. 그래놓고 탑골공원에 살아있는 자신의 동상을 큼직하게 세운 탓에 우상화라는 비난을 받았고 4.19 이후 동상이 박살났지만...[25] 세로쓰기의 잔재는 오늘날에도 남아 있다. 법조문이나 공문에서 흔히 보는 낫표(「」,『』)가 바로 세로쓰기용 문장부호이다.[26] <우리말본>, 193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