쵸소카베 모리치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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쵸소카베 모리치카
쵸소카베 가문의 일곱가지 괭이밥 가몬

長宗我部盛親
1575년 ~ 1615년 6월 11일(음력 5월 15일)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4. 최후
3. 여담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일본 센고쿠 시대의 무장으로 쵸소카베가 제22대 당주. 당시로서는 매우 큰 6척(180cm)의 키였다고 하며, 인상이 매우 강하다.

2. 생애[편집]



2.1. 초기 생애[편집]


쵸소카베 모토치카의 사남이다. 어머니는 사이토 토시미츠의 누이로 도쿠가와 이에미츠의 유모인 카스가노츠보네의 고모 된다. 큰형 쵸소카베 노부치카가 죽자 위의 모토치카에 의해 어린 나이에 후계자로 정해졌다. 가신이자 모토치카의 사위인 키라 치카자네, 종제 히에야마 치카오키의 지지를 받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후계자로 추천한 차남 카가와 치카카즈가 후계자로 가장 유력시 됐으나 모토치카는 치카자네와 치카오키를 죽이고 기어이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밀었다. 모리치카가 원복하자 우에몬타로라 정하는 데 이 타로라는 게 원래 장남에게만 사용되는 이름으로 한마디로 치카카즈와 삼남인 츠노 치카타다는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단 소리. 결국 치카카즈는 울분으로 병사하고 만다. 일설에는 모토치카가 독살했다고도 한다.

부인인 도쿠코는 노부치카의 한 명 뿐인 자식으로 모리치카에게는 조카다. 장남 노부치카를 너무 사랑했던 아버지 모토치카가 쵸소카베 가에 노부치카의 피가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혼시켰다고 한다. 심지어 모리치카를 후계자로 정한 이유도 도쿠코와 나이 차이가 별로 안 나서라는 얘기까지 있다. 도요토미 정권은 이 모리치카의 승계를 별로 탐탁지 않게 여겼고, 이 때문인지 도요토미 가신에 불과한 마시타 나가모리에게 盛(모리)자를 받게 하여 이름을 짓게 하거나, 관직을 주지 않는 등 다른 가문의 당주나 후계자들과 차별대우를 하였다. 이후 임진왜란에도 참전하였고, 부친 모토치카와 함께 통치에 나선다.

2.2. 세키가하라 전투와 몰락[편집]


159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쵸소카베 가의 22대 당주가 되어 토사의 다이묘가 되었다. 당주가 되고 나서 얼마 안있어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게 되자, 처음에는 동군에 참가하고자 하였으나, 진군길에 서군의 나츠카 마사이에에게 진로를 막히게 되었고, 서군의 카키미 카즈나오 등과 아버지 모토치카 대부터 인연이 있어 서군에 속하게 되었다. 전초전인 후시미 성 전투 등에 참전했으나, 본 전투에서는 킷카와 히로이에에 의해 길이 막혀 전투 한 번 못해봤다. 패전 소식을 접한 후에는 동군의 이케다 테루마사아사노 요시나가의 추격을 뿌리치고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결국 세키가하라에서 서군이 지면서 카이에키, 다이묘의 신분에서 로닌(牢人)으로 전락하였다. 모리치카는 카이에키만은 피하기 위해 아버지 모토치카와 허물없이 지내던 이이 나오마사에게 탄원해줄것을 부탁했다. 이에야스도 도쿠가와 사천왕이라 일컬어질 정도로 신임하는 나오마사의 청을 받고 그를 용서하려고 했으나 모리치카의 가신 히사타케 치카나오가 모리치카의 명령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논란이 있으나 모리치카의 형인 츠노 치카타다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해 카이에키 당했다[1]. 또한 우선 도사를 압수해 동군의 야마우치 카즈토요에게 주고 쵸소카베 가문은 다른 영지로 옮기게 하는 처분을 내리려 했는데, 이 과정에서 쵸소카베의 가신들과 이치료구소쿠들이 거세게 저항하며 반란을 일으켜 본보기로 가이에키되었다는 설도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 후 다이묘로 복귀위해 노력하였고, 공가와 교류하거나 삭발하여 이름을 '타이간 유우무'로 바꾸고 교토에서 선생 노릇도 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의 감시하에서 살고 있었다. 친절하고 잘 가르쳐주는 선생님으로 학생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2.3. 오사카 전투[편집]


그러나 그의 진정한 기량은 오사카 전투에서 발휘되었다. 1614년에 모리치카는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부름을 받아 자신을 감시하던 이타쿠라 카츠시게를 동군에 가담하고 싶어한다거나 하는 말들로 속여 방심시키고 요시다 마사시게 등 옛 가신들과 함께 오사카에 입성하였다. 입성의 이유는 도요토미의 천하가 찾아온다면 토사의 옛 영지를 되찾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모리치카는 사나다 노부시게, 고토 마타베에, 아카시 테루즈미, 모리 카츠나가와 함께 오사카 5인중 중 하나로 꼽히는 중요 인물이었다.

오사카 겨울 전투 당시에는 사나다마루 전투에서 이이군이나 에치젠 마츠다이라군을 격퇴하며 사나다군을 지원했다.

오사카 여름 전투의 격전 중 하나인 야오, 와카에 전투(음력 5월 6일)에서 키무라 시게나리와 함께 토도 다카토라 군과 싸우며 다카토라의 조카인 토도 다카노리까지 쓰러뜨리고 옛 가신인 쿠와나 요시나리까지 전사시키며 토도군을 궤멸 직전에 몰아갔으나, 이이 나오타카의 원군이 극적으로 도착해 중과부적으로 시게나리는 전사, 모리치카 자신도 군이 궤멸되어 철수했다.


2.4. 최후[편집]


오사카 성이 함락되자 재기를 노리고 도주했으나 5월 11일 교토에서 하치스카군에게 체포된다. 싸움에 패배하였음에도 할복하지 않고 사로잡힌 것을 도쿠가와 측에서 비난하자, '목숨은 아까운 법. 이 목숨과 오른손이 남아있기만 한다면,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를 이 꼴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출가하여 중이 될테니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간청하였다고도 하나, 그의 재능과 간청 뒤에 숨겨진 뜻을[2] 안 이에야스는 후환을 없애고자 이를 거부하였고 모리치카는 5월 15일 교토 로쿠죠가하라에서 적남 쵸소카베 모리츠네를 비롯한 자녀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죽기 직전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였다고 한다. 토사로 도망친 차남과 삼남도 야마우치 가문에 의해 처형되었고 사남과 오남 또한 교토에서 처형되었다. 이로서 쵸소카베 직계혈통은 완전히 멸족된다.

이후로는 삼촌 시마 치카마스의 후손들이 시마 가문의 이름을 쓰며 토사번의 하급 번사로 메이지 유신까지 살아남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 쵸소카베 가문의 재흥을 허락받아 시마 치카마스의 후손들이 쵸소카베 가문의 당주 자리를 잇게 되었고, 현재의 당주 쵸소카베 토모치카 또한 치카마스의 후손이다.

유이 쇼세츠의 난에 가담한 창술가 마루바시 츄야가 모리치카의 사생아라는 설이 있다. 실제 사생아라 하더라도 츄야 역시 처형됐으니 멸족은 기정사실이다. 다른 몇몇 무장과 같이 모리치카도 오사카 전투에서 살아남았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의 경우는 혼간지 계열의 절에서 승려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3. 여담[편집]


모리치카가 죽은지 400년이 되는 2015년 5월에 고치현시에 위령패가 건립되었다.

아키츠키 타네노부라는 조선 출신 사무라이의 여동생이 모리치카의 측실이었다. 오사카 전투까지도 따라왔고, 이후 지금의 나라현에서 죽었다고 한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파일:長宗我部盛親.jpg
100만인의 노부나가의 야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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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노부나가의 야망 창조 전국입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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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나가의 야망 신생 pk

노부나가의 야망에서는 통솔, 무력만 높은 C급무장이다.

[1] 도도 다카토라는 치카타다와 친분이 있었고 이를 이에야스에게 참소하였다.[2] 사회가 안정되는 치세 중기 이전까지 농민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아마 잠시 출가해서 숨어지내는 척하다가 대규모 농민반란이 터지면 그 때 환속하여 바로 반란군에 가담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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