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강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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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江冷話
1. 개요
2. 내용
3. 외부 링크


1. 개요[편집]


조선 전기의 유학자인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이 성종년간에 저술한 한문 수필집.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2. 내용[편집]


조선 전기의 유학자로 육신전, 추강집, 사우명행록 등을 남긴 남효온이 성종년간에 저술한 수필집이다. 총 66편의 일사기문(逸事奇聞)이 수록되어 있다.

저자인 남효온은 절의로 이름 높은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그가 모은 66편의 야사들은 저자의 성정(性情)과 온유한 기풍이 잘 드러나는 작품들이라 평가받는다.

현대 인터넷 상에 떠도는 태조 3년 왕씨 제거에 대한 기록은 전적으로 이 추강냉화의 윤색에 기대고 있다. 고려 왕씨 성(姓)을 말살하는 피바람. 조선 개국과 동시 고려 왕씨를 말살하는 피바람이 시작.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추강냉화 10칙. 조선이 왕씨를 학살하다.

前朝王氏之亡也, 放諸王於海島中, 謀臣皆曰: “不除必有後患, 不如殺之.” 於是惡其殺無名, 使善水者具舟, 誘諸王曰: “敎書今下, 置諸君島中爲庶人.” 諸王喜甚爭登舟, 舟離岸, 舟人穿其舟, 潛入海底, 水沒半舟, 有僧人與王氏有素者在海岸, 擧手呼之. 王氏卽口占一聯, 呼謂僧曰: “一聲柔櫓滄波外, 借問山僧柰爾何.” 僧痛哭而返.

전조(고려)의 왕씨(王氏)가 망하여 여러 왕씨들을 바다의 섬으로 추방하자 모신(謀臣)들이 모두 말하였다.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니 죽이는 것만 못합니다.” 이에 그들을 죽이는데 명분이 없음을 싫어하여 물질을 잘하는 자에게 배를 갖추게 하고 여러 왕씨들을 꾀어 말했다. “교서(敎書)가 지금 내려왔는데 여러분들을 섬에 두고 서인(庶人)으로 삼는다고 합니다.” 여러 왕씨들이 몹시 기뻐하며 다투어 배에 올랐다. 배가 언덕을 떠나자 뱃사람이 그 배에 구멍을 뚫으니 바다 아래로 잠겨 들어갔다. 물이 배에 반쯤 찼을 때 어떤 승려 가운데 왕씨와 평소 친했던 자가 바닷가에 있다가 손을 들어 불렀다. 왕씨가 즉시 입으로 한 연구를 읊고 승려를 부르며 말하였다. “한 소리로 노 저으니 푸른 물결 밖이로다, 그저 묻노니 산승이여 그대는 어찌 하겠는가?” 승려는 통곡하다 돌아갔다.


왕씨 제거에 대한 추강냉화의 서술은 후대로 이어져 연려실기술 등에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었다. 실제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기술로 왕씨 제거로 숙청된 왕씨는 공주 동학사(東鶴寺) 초혼기(招魂記) 기준으로 135명, 개성왕씨대동보(開城王氏大同譜) 기준으로 154명이며 대동보에는 태조의 배려로 제거목록에서 빠져 목숨을 건졌는데 희생자로 올라간 인원들이 있어서 이들을 쳐내면 동학사 초혼기쪽 신뢰성이 더 높다. 뒤에 잡혀죽은 서자 4인까지 감안해도 대략 130~150명 안에서 잡힌다. 처형방법도 삼척의 공양왕 부자는 교살, 거제와 강화에 있던 인원은 바다에 던져 죽였다. 속여서 배에 태우고 구멍을 내는 복잡한 짓은 하지 않았다.

육신전도 그렇고 남효온은 사실에 기반한 저작은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은 야사이냐 민담집이냐의 경계선에서 줄타기 하는 수준으로, 해당책에서는 인용한 모든 글들의 출처를 남겼다.[1] 이 책의 신뢰성이 높아서 특별히 인용된 것이 아니고, 실제로 연려실기술의 내용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해보면 틀린 내용이 엄청나게 많다. 때문에 남효온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닌 일에 대해서는 '풍문을 들은 것' 정도로 평가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3. 외부 링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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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연려실기술이 역사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것과 함께 연려실기술을 일반 민담집과 구분하는 이유가 되지만, 동시에 인용된 책에는 그만한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인용된 수많은 책들중 하나라는 의미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