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발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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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화
3. 그 외에



1. 개요[편집]


鄒勃素 (? ~ ?)

고구려 대무신왕 때의 관리이다. 권력을 믿고 행패를 부리던 탐관오리들을 말로 다그쳐서 참회하도록 한 일화로 유명하다.


2. 일화[편집]


본래는 남부사자(南部使者)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32년(대무신왕 15년), 구도(仇都)·일구(逸苟)·분구(焚求) 등이 비류부장(沸流部長)의 직위에 있으면서도 남의 재물과 처첩을 함부로 빼앗는 등 횡포를 부렸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백성들이 이 세 사람을 증오하고 원망하였다. 이에 민심을 헤아린 대무신왕은 그들을 파직시켜버리고 추발소를 후임 비류부장으로 삼았다.[1]

추발소는 비류부장이 된 이후로는 별도로 큰 집을 짓고 살았으며, 파직당한 구도 등을 당(堂)에 오르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구도는 스스로 추발소를 찾아가 잘못을 빌고 용서를 청하였는데, 추발소는 이에 대해 "뭐 그런거 가지고 그러냐. 뉘우치고 다시는 안 그러면 되는거지."라면서 당 위로 끌어 올려 같이 앉아 친구가 되기로 하였다.

이에 감격한 구도 등 세 사람은 다시는 나쁜 짓을 하지 않게 되었는데, 대무신왕이 이를 전해 듣고는 "발소가 위엄을 쓰지 않고 지혜로써 악을 징계할 수 있으니 가히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라고 치켜세워주며[2] 대실씨(大室氏)라는 성씨를 내려주었다.


3. 그 외에[편집]


비류부장 벼슬을 지내기 전에 남부사자 벼슬을 지냈다고 하는데, 이는 삼국사기 등을 비롯한 각종 문헌에서 볼 수 있는 고구려의 행정적 부(部)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3] 다만 이 남부사자라는 것이 '남부 출신의 사자'인지, 혹은 '남부의 사자'인지 그 뜻이 애매모호한데 아직 관료제가 정착하지 않아 봉건제적 특성을 유지하던 당대상 그냥 둘 다였을 가능성이 높다. 즉 애초에 관노부 출신이 아니었다면 관노부에서 커리어를 시작하기 힘들었을 것이고 관노부의 관직을 맡았다면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그냥 관노부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한편으로는 본래 관노부(灌奴部)라고 표시해야 할 대목인데 후대에 다시 기록하다 보니 후대의 표현방식으로 수식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4]

추발소에 관한 기록은 왕과 구세대 권력자들 간의 힘싸움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구도, 일구, 분구 등은 동명성왕 때부터 벼슬을 지내던 사람들이니 짬밥깨나 먹은 사람들이었을텐데, 대무신왕이 이들과 힘싸움을 벌이던 과중에서 추발소가 큰 활약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설도 그리 신빙성이 있지는 않다.

바람의 나라에서는 무휼이 명림으로 누나 세류를 찾으러 갈 때 길 안내를 맡은 소년으로 첫 등장했다. 이후 무휼에 의해 호동의 안위를 부탁받는 등 서서히 고구려 정계에 발탁되기 시작해, 후에 남부사자 직위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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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세사람의 죄는 죽어마땅하지만 동명성왕 때부터 관직을 지냈다면서 죽이지 못했다고 한다. 제법 굵직한 인물들이었던 것 같다.[2] 즉 '구제하기 힘들 정도로 나쁜 놈들'을 힘보다는 말로 제압한 일을 높게 평가한것이다.[3] 정확히 말하자면 관노부, 절노부 등의 5부가 아닌 남부, 북부 등의 방위명으로 된 부를 뜻한다. 후자는 기존의 5부를 지역 위치에 따라 새로운 행정체계로 재구성한것이다.[4] 고려사에서도 후삼국시대의 지명을 고려식으로 표기한 경우가 흔하다. 당장 나무위키에서도 조선시대의 지명을 표기할 때 현대의 지명과 혼용되기도 한다. 고구려의 관료제는 소수림왕대는 가야 제대로 정비되는데 대무신왕대면 극초창기이니 후대에 수식됐을 가능성이 지극하다. 게다가 삼국사기에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신집의 원문이 된 유기는 소수림왕대에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