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저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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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수가 자주 들렸던 낭야산 취옹정
중국 안후이성 동부의 지급시. 시내 기준으로 난징에서 서북쪽으로 30km, 허페이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전장시와 양저우가 장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것처럼, 난징과 추저우 역시 장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성도인 허페이(합비)와도 중국의 거리와 면적 개념상 상당히 가깝지만, 성의 동쪽 끝이라 오히려 난징이 더 가까우며, 지급시 내에서도 시내 지역은 동남쪽에 쏠린 편이라 난징과 더더욱 가까운데 그 사이에서 성(省)이 갈린다.
지급시 관할 인구는 400만명 중 소위 시내 지역에는 130만명이 거주한다. 이는 도심인 랑야구에 그와 연담도시화가 된 난차오구, 라이안현, 촨자오현까지 합친 인구이다.
주변 토지에서 생산되는 쌀과 보리 등의 농산물이 집산되고 기계/면직/전자/시멘트/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2000년 1천여명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해고와 연금 문제에 대한 항의로 철도를 점거하고 시위하기도 하였다.
서쪽의 랑야산은 당송팔대가 중 구양수가 즐겨 찾던 곳으로, 국가급풍경명승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낭야사와 취옹정(醉翁記)이 유명하다.
동쪽 30km 장강 부근의 츠산후 (池杉湖) 국가습지공원 역시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난징-허페이와 난징-벙부간 고속철과 일반철도가 지난다. 최근 장쑤성 성도 난징시로 이어지는 광역전철 닝톈도시간궤도교통(宁天城际轨道交通) 프로젝트가 진행 중으로, 추후에 난징 광역권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추저우 고성 유지
고대에는 구강군에 속하였다. 현 시가지 기준 동북쪽의 라이안현에는 건양현(建陽縣), 남쪽의 취안자오현에는 지명의 유래가 된 전초현(全椒縣)이 설치되었다. 삼국시대에는 현재 행정구역의 서쪽은 위나라 회남군, 동쪽은 오나라에 속했다. 남북조시대에는 북쪽 낭야군 (린이시) 사람들이 피난해와 정착하며, 현 랑야구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그리고 473년 유송에서 북조에게 상실한 동군 돈구현 (현 허난성 푸양시 칭펑현)을 이전하며 현 시가지가 도시화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신창군(新昌郡)을 거쳐 남초주(南譙州)가가 설치되었다. 그러던 581년 수문제가 현 지명의 유래인 저주 (滁州)를 설치하였다. 그 치소인 돈구현은 신창현을 거쳐 598년 청류현(淸流縣)으로 개칭되었다.
수양제 시기에는 양저우를 중심으로 한 강도군에 속하였다. 당송대에 다시 저주로 돌아갔으나, 일시적으로 군현제가 실시될 때에는 영양군(永陽郡)이라 불렸다.
북송 시기에는 좌천된 구양수가 저주에 부임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방랍의 난 이후 남송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저,호주진무사(滁,濠鎮撫使)가 설치되었고 원나라 시기에도 1278-83년 저주로총관부(滁州路總管府)가 설치되었다. 명청대에도 저주 청류현으로 유지되다가 1912년 추현이 되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및 개국공신 대부분을 배출하여 명나라판 풍패지향이라 할 수 있는 봉양(펑양)·정원(딩위안) 등은 지급시 기준으로는 서쪽에 치우쳐 있어 동남쪽에 치우친 시내지역과는 같은 동네라기보다는 이웃 동네였는데, 현대 들어 교통통신의 발달로 같은 지급시로 묶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49년 1월 인민해방군이 입성하였고, 이후 벙부시에 속했다가 1992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구양수가 자주 들렸던 낭야산 취옹정
1. 개요[편집]
중국 안후이성 동부의 지급시. 시내 기준으로 난징에서 서북쪽으로 30km, 허페이에서 동쪽으로 8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전장시와 양저우가 장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것처럼, 난징과 추저우 역시 장강을 사이에 두고 있다. 성도인 허페이(합비)와도 중국의 거리와 면적 개념상 상당히 가깝지만, 성의 동쪽 끝이라 오히려 난징이 더 가까우며, 지급시 내에서도 시내 지역은 동남쪽에 쏠린 편이라 난징과 더더욱 가까운데 그 사이에서 성(省)이 갈린다.
지급시 관할 인구는 400만명 중 소위 시내 지역에는 130만명이 거주한다. 이는 도심인 랑야구에 그와 연담도시화가 된 난차오구, 라이안현, 촨자오현까지 합친 인구이다.
주변 토지에서 생산되는 쌀과 보리 등의 농산물이 집산되고 기계/면직/전자/시멘트/화학 공업이 발달하였다.
2000년 1천여명의 방직공장 노동자들이 해고와 연금 문제에 대한 항의로 철도를 점거하고 시위하기도 하였다.
2. 교통 및 관광[편집]
서쪽의 랑야산은 당송팔대가 중 구양수가 즐겨 찾던 곳으로, 국가급풍경명승구로 지정되어 있으며, 낭야사와 취옹정(醉翁記)이 유명하다.
동쪽 30km 장강 부근의 츠산후 (池杉湖) 국가습지공원 역시 철새 도래지로 유명하다.
난징-허페이와 난징-벙부간 고속철과 일반철도가 지난다. 최근 장쑤성 성도 난징시로 이어지는 광역전철 닝톈도시간궤도교통(宁天城际轨道交通) 프로젝트가 진행 중으로, 추후에 난징 광역권에 포함될 가능성이 높다.
3. 역사[편집]
추저우 고성 유지
고대에는 구강군에 속하였다. 현 시가지 기준 동북쪽의 라이안현에는 건양현(建陽縣), 남쪽의 취안자오현에는 지명의 유래가 된 전초현(全椒縣)이 설치되었다. 삼국시대에는 현재 행정구역의 서쪽은 위나라 회남군, 동쪽은 오나라에 속했다. 남북조시대에는 북쪽 낭야군 (린이시) 사람들이 피난해와 정착하며, 현 랑야구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그리고 473년 유송에서 북조에게 상실한 동군 돈구현 (현 허난성 푸양시 칭펑현)을 이전하며 현 시가지가 도시화되기 시작하였다.
그후 신창군(新昌郡)을 거쳐 남초주(南譙州)가가 설치되었다. 그러던 581년 수문제가 현 지명의 유래인 저주 (滁州)를 설치하였다. 그 치소인 돈구현은 신창현을 거쳐 598년 청류현(淸流縣)으로 개칭되었다.
수양제 시기에는 양저우를 중심으로 한 강도군에 속하였다. 당송대에 다시 저주로 돌아갔으나, 일시적으로 군현제가 실시될 때에는 영양군(永陽郡)이라 불렸다.
북송 시기에는 좌천된 구양수가 저주에 부임하여 많은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다. 방랍의 난 이후 남송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저,호주진무사(滁,濠鎮撫使)가 설치되었고 원나라 시기에도 1278-83년 저주로총관부(滁州路總管府)가 설치되었다. 명청대에도 저주 청류현으로 유지되다가 1912년 추현이 되었다.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 및 개국공신 대부분을 배출하여 명나라판 풍패지향이라 할 수 있는 봉양(펑양)·정원(딩위안) 등은 지급시 기준으로는 서쪽에 치우쳐 있어 동남쪽에 치우친 시내지역과는 같은 동네라기보다는 이웃 동네였는데, 현대 들어 교통통신의 발달로 같은 지급시로 묶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1949년 1월 인민해방군이 입성하였고, 이후 벙부시에 속했다가 1992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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