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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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고려시대
3. 조선시대
4. 대한민국



1. 개요[편집]


춘추관(), 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은 고려조선의 관청으로 역사 기록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대한민국의 국가기록원, 국사편찬위원회에 대응한다.


2. 고려시대[편집]


고려의 춘추관은 시정(時政)의 기록을 맡았다.

고려 건국 초기에는 사관(史館)으로 불리다 이후 춘추관으로 바뀐다. 1308년(충렬왕 34) 사명(詞命)을 작성하는 예문관과 합쳐서 예문춘추관이 되고 1325년(충숙왕 12) 다시 분리된다. 공양왕 시기에 역사를 기록하는 관청이 다시 둘로 나뉘어 사관과 문한관(예문관의 관리) 사이에 공조가 어려워졌다는 최견 등 사관들의 상소에 따라 두 관청을 다시 합친다.

공양왕 시기에 실록 편찬의 공정성이 확립되기도 했다. 위의 상소에 따라 사관과 문한관 8명이 사초를 2부 기록해서 임기가 끝나면 한부는 예문춘추관에, 나머지 한부는 사관의 집에 보관하게 했다. 예문춘추관에서 각 관청에 업무 내용을 모두 사관에게 보고하게 하고, 사관들은 이를 바탕으로 사초를 만들어 예문춘추관에 보냈다.


3. 조선시대[편집]


조선의 예문춘추관은 논의(論議), 교명(敎命), 국사(國史)를 관장했다.

태조 시기 예문춘추관의 관제는 고려 공양왕대의 제도와 유사했다. 시중이 겸하는 감관사(監館事) 1명, 정2품의 대학사(大學士) 2명, 종2품의 지관사(知館事) 2명[1], 학사(學士) 2명, 동지관사(同知館事) 2명[2], 4품 이상인 충편수관(充編修官) 2명, 겸편수관(兼編修官) 2명, 5품이 겸하는 응교(應敎) 1명, 정7품의 공봉관(供奉官) 2명, 정8품의 수찬관(修撰官) 2명, 정9품의 직관(直館) 4명, 서리(書吏) 4명이 있었다. 태종 시기에 다시 예문관이 분리된다. 관제에도 변화가 생겨 고려시대에 있던 영관사(領館事)가 다시 생기고, 5품의 기주관(記注官), 정6품에서 정9품의 관원이 겸직한 기사관(記事官) 등의 직책도 나타난다.

조선의 춘추관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의 사초를 보관했고, 임진왜란 전까지는 고려실록도 보관해 고려사 편찬의 기초가 되기도 했다.


4. 대한민국[편집]


청와대의 프레스센터가 춘추관이라고 명명되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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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2품인 자헌대부 이상이 겸직.[2] 종2품의 가선대부 이상이 겸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