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목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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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9대 국왕
충목왕 | 忠穆王

파일:고려명릉.jpg
명릉 전경
출생
1337년 5월 15일
즉위
1344년 3월 1일
사망
1348년 12월 25일 (향년 11세)
고려 김영돈 사저
능묘
명릉(明陵)
재위기간
제29대 국왕
1344년 3월 1일 ~ 1348년 12월 25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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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부모
부왕 충혜왕
모후 덕녕공주
형제자매
3남 1녀 중 장남
종교
불교

흔(昕)
몽골식 이름
바스마도르지(八思麻朶兒只)
시호
고려: 현효대왕(顯孝大王)

: 충목왕(忠穆王)

1. 개요
2. 생애
3. 기타
4. 대중매체에서



1. 개요[편집]


고려의 제29대 군주.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목현효대왕'(忠穆顯孝大王). 는 '흔'(昕). 몽골식 휘는 '바스마도르지'(王八思麻朶兒只)였다. 희대의 폭군이었던 제28대 충혜왕의 장남으로 모후는 몽골인이었던 제1비 덕녕공주였다.

정식 시호는 '충목현효대왕'(忠穆顯孝大王)으로 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 '충목'을 빼고, '현효왕' 또는 '현왕'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남자 형제는 없고, 같은 덕녕공주 소생의 여자 형제로는 장녕옹주(長寧翁主)가 있다.[1]


2. 생애[편집]


어린 시절은 원나라에서 보냈으나 부왕 충혜왕이 숱한 막장 행각 끝에 폐위당하자 고려로 돌아가 8세의 어린 나이왕위에 올랐다.[2] 왕위에 오르기 전 당시 황제였던 원 혜종 토곤테무르 칸을 알현했는데 그가

"그대는 아버지를 닮겠는가? 아니면 어머니를 닮겠는가?"

라고 물었다. 이에 어린 충목왕이

"어머니를 더 닮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자 혜종은

"그대는 그대의 어미를 닮아 영특하고 선하군."

이라며 감탄했다고 한다. 어린 아이의 대답이라고는 하지만 그 나이에 아버지가 얼마나 막장 인간이었는지를 잘 알았을 수도 있고, 충혜왕의 막장 행각들을 보면 제대로 된 아버지 역할을 했을지부터 의문이라 어렸을 적부터 어머니와 가까워서 그랬을지도 모를 일이다.

임금의 자리에 올랐지만 나이가 어려서 모후인 덕녕공주가 섭정을 펼쳤다. 선대 충혜왕 때 만들어진 여러 정치적 폐단을 시정하는데 힘썼고, 정치도감을 설치하여 권문세족들로 인해 유명무실해진 토지 제도를 개혁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들이 독점하던 녹과전의 폐단을 시정하여 원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양전 사업을 벌이기도 했는데 나라에 기근이 들자 적극적으로 구휼하는 한편 제25대 충렬왕, 제26대 충선왕, 제27대 충숙왕 등 3대의 《실록》에 대한 편찬을 시작하는 동시에 서연(書筵)을 개최하여 학문의 진흥도 시도했다.

어머니의 섭정 속에서도 임금으로서의 치적을 착실히 쌓아갔지만 안타깝게도 재위 4년만인 1348년 10월에 병이 들었고, 2개월 뒤인 12월에 김영돈[3]의 집에서 사망했는데 12세의 어린 나이였다. 사인은 전염병이라고 되어 있는데 충목왕 당대에 세계를 초토화시키던 흑사병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처음에는 충목왕이 다른 병에 걸려서 요양을 떠나 치료받던 중에 흑사병까지 겹치면서 요절한 것으로 추정된다.

충목왕이 열심히 학문을 익히고 선정을 베푼 기록으로 추측하건대 수명만 길었으면 성군이 될 수 있는 기질도 보였지만 승하 당시 나이를 생각해 보면 선정이라는 것도 국왕 자신의 뜻이라기보다 어머니 덕녕공주와 중신들의 의향이었을 가능성이 어느 정도 있으며,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재위 말기에는 외척환관의 전횡이 심해지기도 했다.[4] 제30대 충정왕 사후 그의 숙부로서 즉위한 공민왕은 충목왕을 9묘에 모시는 한편 덕녕공주를 우대하는 등 잘 대접했고, 또 다른 조카이자 충목왕의 남매인 장녕공주를 고려로 돌아오게 해서 같이 살게 해주는 등 조카의 가족들을 보살펴주었다.[5] 명군의 자질이 있었던 군주였으나 명이 짧았다는 것에는 후한질제와도 엇비슷하다. 충목왕이 오래 살아 남았다면 고려 왕실이 부흥할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고려 왕조의 운이 없었다. 공민왕도 몽골 왕족을 어머니로 두어 정통성이 강했던 충목왕 때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다가 고려인을 어머니로 둔 충정왕이 즉위하자 그를 폐위한 것으로 볼 때 충목왕의 요절은 고려 왕조의 마지막 기회가 사라지게 되는 비극의 단초가 되었다.


3. 기타[편집]


  • 휘가 (아침밝을 흔)이었는데 문제는 이 글자를 쓰는 흔씨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이 성을 쓰던 사람들은 예외없이 성을 바꾸어야 했는데 예천 권씨 전부와 안동 권씨 일부의 본관이 바로 이 흔씨이다. 예천 권씨 시조 흔적신(昕迪臣)은 고려 중엽 보승별장을 지냈다. 예천 권씨는 본래 흔(昕)씨였는데 고려 제19대 명종 때 '흔승단'이 안동 권씨 '권백서'(權伯諝)의 집안에 장가를 갔고, 그의 아들이 어머니 성을 따라 '권섬'(權暹)이 되어 예천 권씨 득성조가 되었다고 한다. 《안동 권씨 족보》에는 '권백서'(權伯諝)가 아닌 '권백시'(權伯時)로 기록되어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제20대 신종 원년에 고려 명종이 예천의 흔씨(昕氏)에게 '권성'(權姓)을 내렸다는 내용이 있다. 《예천 권씨 무진보》(戊辰譜)에 따르면 예천 권씨는 제29대 충목왕(忠穆王)의 휘 "흔"(昕)을 피하여 외가였던 '권'(權)씨로 개성했다고 한다. 안동 권씨와 예천 권씨는 고려 초기 내외손 관계를 시작하여 조선을 거쳐 현재까지 통혼을 하고 있다. 그리고 예천 권씨는 안동 권씨와 같이 고려 초기에 시작되어 매우 오래된 한국 토본이며, 충목왕의 이름과 중복되지 않았다면 현재까지도 흔씨 가문으로 남았을 것이다.

  • 고려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타살당하지 않은 국왕이다. 이후 국왕들[6]은 5명 모두 시해 및 사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4. 대중매체에서[편집]


  • 2005년 MBC 드라마 <신돈>에서는 배우 민병현이 연기했다. 초반에 등장하여 자주 골골대며 쓰러지다가 죽음을 맞는데 어린 나이에도 영특하고 효심이 깊다. 조금만 앉아 있어도 혼절할 정도로 위독한 상황에서도 팔관회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는 군주가 위엄을 보여야 한다는 어머니 덕녕공주(김여진 분)의 말을 지키기 위해 끝내 참여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은 혼절해 버리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자신이 죽으면 홀로 남을 어머니가 정치적으로 몰락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슬퍼하지 마시라, 마음을 강하게 먹어야 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어머니에게 당부할 정도로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 깊은 모습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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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몰년 미상이기 때문에 누나인지 여동생인지는 불명이다.[2] 역대 고려 군주들 중에서 최연소 즉위이다. 대조적으로 가장 최고령에 즉위한 군주는 제22대 강종으로 옹립 당시 나이가 60세였으며, 유일하게 60대에 즉위한 임금이었다.[3]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때 고려군 총사령관이었던 김방경의 손자였다. 충목왕 당시에는 정치도감의 판사로 국가의 기강을 다잡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4] 다른 의견으로는 원나라 공주인 어머니의 힘을 이용해 개혁을 추구했다는 설도 있다. 숙부인 공민왕 역시 아내 노국대장공주신분을 이용해 개혁을 추구했기 때문이다.[5] 또 다른 조카인 충정왕에게 보인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오히려 충정왕의 시해를 주도했다는 추정이 유력하게 제기될 정도이다.[6]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