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도끼 사건

덤프버전 :


주의. 사건·사고 관련 내용을 설명합니다.
이 문서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사고의 자세한 내용과 설명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1. 개요
2. 전개
3. 결과
4. 대중매체



1. 개요[편집]


파일:이화룡심.png

충정로 도끼 사건으로 재판을 받고 있는 아오마스(가운데)와 이화룡(오른쪽).

이정재의 동대문패와 이화룡의 명동패가 충돌한 사건.


2. 전개[편집]


명동패는 2년 전 동대문사단과 황금마차 습격사건 당시 한바탕 싸우고 쭉 대립하던 관계였다. 그러나 당시 재력에서도, 정치력에서도 훨씬 밀리던 명동패는 차츰 무너지던 상황이었다. 유지광의 화랑동지회는 자신의 인맥과 우수한 두뇌를 활용해 주먹패들을 하나둘씩 영입하고 철저하게 관리하면서 육성을 병행해 명동을 압박해나갔다.

그러던 와중 동대문패는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그리고 각종 정치 테러로 인해 여론이 안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명동패의 전봉구가 동대문패에 넘어가면서 명동패와 동대문패의 사이는 더욱 악화되었다.

한편 동대문패의 행동대장인 유지광종로패의 아오마스, 서대문패의 최창수와 함께 삼우회를 결성하였다. 여기에 소공동패의 홍영철과 광화문패의 장영빈이 합류했다. 아오마스와 장영빈은 백운관이라는 댄스홀을 놓고 대립하였고 이에 동대문패의 보스인 이정재가 장영빈에게 백운장을 넘겨주자 아오마스는 이에 반발하며 내놓기를 거부한다. 장영빈의 부하들이 백운관을 급습하자 분노한 아오마스는 그대로 이화룡에게 항복했다.

그러던 차에 이화룡이 장악하고 있었던 구역에서 신원 미상의 폭력배 집단이 총을 쏘는 도발을 감행한 뒤 도주했다. 당시 이화룡은 이정재와 대립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정재의 도발이라고 판단하여 즉시 도끼 등의 무기를 준비하는 한편 지프차를 빌려 이정재의 근거지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이정재를 비롯한 동대문패의 고위 간부들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고 도리어 이화룡의 부하들은 경찰과 마주쳐 검문을 받던 중에 도끼로 경찰을 위협했다. 경찰이 대응하자 명동패는 지프차를 타고 현장을 벗어났지만 현장에 남아있던 도끼를 비롯한 여러 무기들은 이들의 범죄 행각을 입증하기에 충분한 증거가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당시 이정재는 자유당정치깡패로 활동하며 경찰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화룡과 그의 부하들이 전부 다 구속되었다.


3. 결과[편집]


이 사건으로 인해 이정재의 부하인 유지광은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고 명동파는 와해되었다.

하지만 명동파와 관련된 인물들도 법정에서 나름 가벼운 형벌을 받았다. 1심부터 검찰이 3년을 구형했지만 이화룡은 줄창 집행유예, 동대문을 배신하고 명동파에 가세했던 아오마스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을 받았으며 신상사도 집행유예가 선고되는 등 그런대로 관대한 형을 선고받았다. 이는 같은 이북 출신들의 도움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둘 다 나란히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

석방 이후 이화룡은 조직 세계에서 손을 씻고 영화계에 투신하였는데 제법 괜찮은 영화들의 제작을 지원했다. 그리고 5.16 군사정변 이후 동대문파가 괴멸 당하며 무주공산이었던 서울 일대의 암흑가는 명동파의 일원으로 이화룡의 부하였던 신상사가 이들을 어느 정도 수습하면서 다시 접수했다. 아오마스는 신상사에게 구타당하여 개망신당해 조직 세계에서 은퇴하였다.


4. 대중매체[편집]



4.1. 야인시대[편집]





이건 함정이야! 속았어! 속았다고!!! 철수하라우! 철수하라!! 동대문 새끼들한테 속았다고!!! - 이화룡


장충단 공원 집회가 끝난 후에 명동파 소속 하부 조직 겸 군소 조직 몇 개가 이정재의 동대문파로 넘어간다. 분노한 이화룡이 동대문 사단에 전화를 해 이정재에게 동대문으로 넘어간 나와바리를 돌려달라고 요구하는데 이것이 관철될 경우 전면전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이정재가 거절하자 이화룡은 전쟁을 선포한 후 소집한 부하들을 셋으로 나누어 각각 동대문과 종로, 서대문을 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듣고 있던 이정재는 어차피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으로 인해 유지광이 기자들에게 얼굴이 팔려 검찰에 나가게 된 상황을 이용해 한판 해 보기로 결정한다. 그리하여 장충단 공원에서 기자들을 이용한 김두한에게 당한 것을 역이용해 유지광에게 명동파와 자폭하라는 명령을 내린 한편 경무대의 경찰서장인 곽영주 경무관에게 연락을 취해 이 사건을 좀 도와달라며 자신이 생각한 계책을 얘기한다.

이화룡정팔,[1] 오상사, 맨발의 대장은 동대문 사단 휘하의 화랑동지회를 치는 한편 명동패의 나머지는 서대문과 종로를 쳤다. 이정재의 부탁을 들어 준 곽영주는 사건 개입 이전에 동대문파를 제외한 명동파와 유지광만 잡아넣으라고 경찰의 실무진들에게 명령하였다. 한편 유지광은 기자들에게 얼굴이 팔리는 것을 감안하면서까지 오상사와 싸우다가 엉성하게 마무리를 지었고[2] 두 사람의 대결이 마무리되자마자 동대문패와 명동패의 패싸움이 시작되었다. 그러다 한창 패싸움이 진행되고 있던 도중에 이화룡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만 정팔은 상황이 자신들에게 유리한데 별 것 아나라고 말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하지만 이화룡이 느낀 불길한 예감은 정확하게 적중하여 패싸움 도중에 곽영주의 언질을 받은 경찰부대들이 난입하고 만다. 그러자 이화룡은 자신이 동대문패에게 속았다면서[3] 부하들에게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리나 이미 때는 늦은 상황. 결국 아무런 반전도 없이 경찰들은 곽영주에게 지시받은 대로 명동파와 유지광만을 잡아가면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이때 경찰들이 명동패를 체포할 때는 반말을 쓰는 것도 모자라 강제로 연행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유지광을 체포할 때는 정중한 태도로 연행하였다. 다만 유지광의 입장에서는 이미 장충단 집회를 테러한 주범으로 몰려 있는 마당에 경찰과 마찰이 있어 봤자 좋을 것이 없는 데다 어차피 당시 그가 속해 있던 동대문파는 자유당 정권의 비호 아래 공권력의 보호를 받고 있어서 재판을 받아 수감 생활을 하게 되어도 별다른 해를 입지 않고 최소한의 형기만 살다가 풀려날 것이 뻔했으니 순순히 형사들에게 붙들려가는 것이 이득이였다. 반면에 명동파는 본인들이 유리하다고 생각하던 패싸움의 형세가 갑작스런 경찰들의 난입으로 한꺼번에 무너진 것도 모자라 방금 전까지 자기들과 싸우던 동대문패 조직원들은 이미 수배중이었던 유지광을 제외하고는 단 한명도 구속되지 않은 것에 분노를 느꼈기 때눈에 체포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었다. 그와는 별개로 당시 1950년대 말의 공권력이 얼마나 썩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4] 자유당과 동대문패의 유착이 얼마나 심했는지 보여주는 단적인 장면이다.

이후 명동파는 재판에서 중형을 선고받아 최소 수 년을 감옥에서 보내게 되는 반면[5] 유지광은 불과 징역 8개월만 선고받은 데다 수감 도중에도 자신을 면회 온 부하들이 산 맥주통닭을 즐기는 등의 호화스러운 생활을 누리다가 석방되었다. 또 동대문패는 자신들의 유일한 경쟁자를 제거함으로써 서울의 주먹계를 평정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전화위복이 되어 4.19 혁명 이후에 집권한 장면 정부와 뒤이어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의 쿠테타 세력이 주도한 혁명재판으로 인해 이정재와 유지광 등의 동대문패의 주먹들이 중형을 선고받은 후 하나 둘 사형 집행을 당하거나 감옥에서 인생을 보내고 있을 때 명동파는 김두한과 그의 밑에 있었던 부하들과 함께 화를 피해갔다. 특히 감옥에서 동대문패에 대한 복수를 다짐하던 오상사 즉, 실존인물 신상사는 1965년에 명동으로 복귀한 이후 무주공산이 된 서울을 접수해 군사정권 시기 조폭들을 대표하는 네임드급 보스가 되어 범죄와의 전쟁 이전까지 활동하였다.

실제 역사에서 장충단집회 방해사건은 1957년 5월 25일, 충정로 도끼 사건은 1958년 9월에 있었지만 둘 다 유지광이 가벼운 처벌을 받았기 때문에 동 시기에 벌어진 사건으로 각색 되었다. 결말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결말 직전까지 이정재와 동대문 사단, 그리고 자유당 정권 이야기에 집중해야 하는 만큼 전개의 산만함을 방지하기 위해 서브 플롯인 명동파 이야기가 몰아서 정리된 것.
파일: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__CC.pn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2023-12-19 05:43:34에 나무위키 충정로 도끼 사건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 실존인물 정팔은 충정로 도끼 사건 이전에 주먹 세계에서 손을 씻은 후 사업하면서 명동패를 지원했다.[2] 참고로 이 장면이 드라마의 마지막 개인 대 개인 싸움이다.[3] 그도 그럴 것이 일반적인 두 조직폭력배들의 패싸움이라면 자기들끼리만 싸우지 절대로 경찰을 부르지 않는다. 따라서 경찰들이 개입하는 시점은 보통 패싸움이 끝난 뒤에 현장을 수습하러 오며, 설렁 패싸움 도중에 끼어든다고 해도 이는 당사자들과 관계 없는 외부자의 신고로 온다. 그리고 그런 정황은 이번 사건에서는 없는 상황. 따라서 이화룡 입장에서는 이정재가 곽영주와의 친분을 이용한 함정을 파서 자기들을 거기로 유도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다. 그리고 그의 예상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4] 일반적으로 경찰들이 조폭들이 패싸움질하는 장소에 도착하면 조직 상관없이 현장에 있던 깡패들 전원을 체포하는 것이 정상이다.[5] 실제로는 이 사건을 주도한 이화룡과 아오마스(심종현) 등의 오야붕급 주먹들도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으나 드라마에서는 이화룡은 물론이고 제일 서열이 낮은 달마조차도 꽤 오랜 기간 동안 징역을 살아야 하는 분위기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