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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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제28대 국왕
충혜왕 | 忠惠王

파일:pan004710.jpg
영릉 전경
출생
1315년(충숙왕 2년) 2월 22일
즉위
1330년 2월 18일
사망
1344년 1월 30일 (향년 28세)
악양현
(現 중국 후난성 웨양시)
능묘
영릉(永陵)
재위기간
고려 왕세자
1328년 2월 이전 ~ 1330년 2월 18일
제28대 국왕
1330년 2월 18일 ~ 1332년 3월 21일 (2년)
제28대 국왕 (복위)
1339년 5월 3일 ~ 1344년 1월 7일[1] (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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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개성 왕씨

정(禎)
부모
부왕 충숙왕
모후 공원왕후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배우자
덕녕공주, 희비
자녀
3남 1녀
종교
불교
몽골식 이름
부다시리(寶塔失里)
시호
고려: 헌효대왕(獻孝大王)

: 충혜왕(忠惠王)


1. 개요
2. 시호
3. 생애
4. 평가
5. 가계도
6. 대중매체
7. 기타



1. 개요[편집]


고려 제28대 군주.

묘호는 없고, 시호는 '충혜헌효대왕'(忠惠獻孝大王). 휘는 '정'(禎). 몽골식 휘는 '부다시리'(寶塔失里). 제27대 충숙왕공원왕후 홍씨의 장남으로 제31대 공민왕의 형이다.

2. 시호[편집]


충혜왕(忠惠王)이라는 시호원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다.

충(忠)원 간섭기에 재위했던 고려 왕들한테 '너희는 신하니까 우리한테 충성해라' 라는 의도로 원나라에서 준 글자이며, 뒤의 혜(惠)는 왕의 행실상 좋은 시호를 줄 수는 없으니 마지 못해 은혜 혜(惠) 자를 썼다고 한다.

굳이 충혜왕뿐만 아니라 한국이든 중국이든 시호에 '은혜 혜(惠)' 자가 들어간 군주는 인품만 좋을 뿐 심각하게 무능했거나 사이코패스였거나 적어도 둘 중 하나라고 봐도 무방하다.[2] 사실 충혜왕이 저지른 막장 짓을 보면 금나라의 해릉양왕이나 수나라의 수양제를 연상시키는데 대체 왜 시호에 양(煬)이 안 들어갔나 싶을 지경이다.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올린 시호는 헌효대왕(獻孝大王)인데 뒤의 효(孝) 자는 효성스러웠다고 형식상 올리는 시호이며, 앞의 헌(獻) 자는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나 고려 제14대 헌종과 같이 연약한 군주들에게 올린 시호였다. 자주적인 시호를 올린 고려 국왕은 공민왕인데 비록 자신의 형이지만 그의 악행이 커버가 안 돼서 이런 시호를 올린 것으로 보인다. 물론 충혜왕 따위와 고려 헌종, 후한 헌제를 비교하는 것은 후자에 대한 크나큰 모욕이지만.


3. 생애[편집]


세자 시절, 절 지붕 위의 새를 잡기 위해 불교 사찰방화를 한 뒤 도망가거나[3] 불량배들과 어울려 걸핏하면 여자를 겁탈하고, 을 즐기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아들의 만행을 듣게 된 부왕인 충숙왕으로부터

"예끼 이놈! 너는 왜 망나니 같은 행실만 하느냐!"

라고 욕을 들을 정도였으나 아버지 앞에서조차 매우 삐딱하게 굴며, 말로만 고친다 거짓말하고 실제로 고치지 않았다.

이후 즉위식을 치르러 고려로 오다가 마침 원나라로 가던 부왕과 황주에서 마주쳤는데, 화려한 옷차림으로 길 위에서 몽골인들의 유목민식 인사인 '호례'(胡禮)[4]를 행하는 아들에게

"네 아비[5]

어미가 모두 고려 사람인데 어째서 내게 호례를 행하느냐? 그리고 옷은 또 뭐가 그렇게 사치스러우냐?"

라고 꾸짖는 충숙왕의 서슬퍼런 호통에 놀라서 울며 물러났다고 한다.

1330년 7월 무자일, 낭장 김천우가 원나라에서 돌아와

"원 조정에서 전 정동행성 좌우사 낭중 장백상의 건의에 근거해 고려에 장차 행성을 설치할 것이라고 한다."

고 보고했다. 이에 충혜왕은 즉각 원나라 태사 우승상 킵차크 엘테무르(연첩목아)에게 서한을 보내

"장백상의 간교한 말을 믿지 말고, 황제의 의사를 잘 인도하여 고려가 스스로 풍속을 지키고, 조상 대대로 물려온 유업을 편안히 계승하게 해달라"

고 청원했다. 이에 엘테무르가 원 문종(제8대) 투그테무르 칸에게 상주해 고려에 행(중서)성을 설치하려던 계획을 중지했다고 하는데 이는 충혜왕이 즉위한 이후, 최초로 이룬 업적이라 할 수 있다.

재위 원년(1331)
정월
임진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2월
갑인일
왕이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무오일
공주의 생일을 맞아 연경궁(延慶宮)에서 잔치를 열었다.
을숙일
왕이 해주(海州)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3월
임인일
왕이 강음(江陰)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4월
신유일
왕이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계미일
왕이 폐행(嬖幸)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해
물놀이와 격구(擊毬)를 구경했다.
신축일
왕이 폐행들을 거느리고 연복정(延福亭)에 행차하여 물놀이를 구경했다.
6월
기미일
왕이 광덕사(廣德寺)에 행차해 물놀이를 구경했다.
7월
병자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8월
병인일
왕이 마제산(馬堤山)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10월
계해일
왕이 도성 서쪽 교외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병인일
왕이 수강궁(壽康宮)에 행차했다.
재위 2년(1332)
정월
병술일
밤에 왕이 폐인(嬖人) 양선(梁宣), 송명리(宋明理)
등을 데리고 평복 차림으로 몰래 거리를 쏘다녔다.[6]
2월
정미일
왕이 서해도(西海道)에서 사냥판을 벌였다.

재위 원년 당시 사냥 기록이다. 놀랍게도 이것이 《고려사》 충혜왕 원년 기록과 2년째 기록의 전부이다.[7] 참고로 사냥이라고 해서 그냥 하나 쥐어잡고 아무 산이나 가서 짐승 쏴잡는 수준을 생각하며, 그 정도 취미 생활이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평민이나 지배 계층이라도 어지간한 집안의 사람이라면 그렇겠지만, 국왕이 사냥을 나가면 경호를 담당할 많은 호위병, 국왕과 신하들 및 병사들에게 식사를 제공할 여러 요리사, 식재료와 사냥 도구 및 기타 비품을 운반할 짐꾼, 사냥터에 허가받지 않은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게 경계를 설 경비병, 국왕의 사냥을 성공적으로 도와줄 전문 사냥꾼, 사냥감을 찾거나 몰아야 하는 몰이꾼 등 최소 수백 명의 수행원이 필요하다. 그 많은 인원이 움직이고 숙식하려면 당연히 급료, 물품 등의 경비가 장난아니게 든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사냥 풍속도를 보면 알겠지만 사냥이란 건 사실상 당시의 워크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즉, 왕이 사냥을 자주 갔다는 것은 그만큼 낭비가 심했고, 나가 놀기만 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나마 이 중간에 왕 노릇한 것이라곤 1331년 4월 경인일에 쌍성, 여진, 요양, 심양 등으로 흘러 들어간 경인 5도의 고려 백성들을 돌려달라는 글을 써서 원나라에 보낸 것이었다.

충혜왕은 왕이 되자마자 정사에는 관심도 없고, 여색을 지나치게 즐겼으며 내시들과 씨름이나 즐겼다. 심지어 그가 궁궐을 신축하는 과정에서

"주춧돌 밑에 아이를 묻는다."

는 소문이 돌아 민심이 크게 흉흉해졌다.

5월 병인일(1339. 5. 8), 왕이 그 장인인 삼사좌사 홍융의 계실 황씨(黃氏)를 간음했다.

5월 경오일(1339. 5. 12), 왕이 서모인 수비 권씨(權氏)와 정을 통했다.

5월(1339. 5. 13) 환관 유성의 처 인씨가 미인이라는 소문을 들은 왕이 구천우, 강윤충을 거느리고 그 집에 가서 유성더러 술을 올리라고 했다. 그 자리에서 유성이 왕에게 "전하께오서는 곧 복위하실 것이니 백성들을 잘 다독거리고 아낌없이 상을 내리소서."라고 진언했다. 왕의 속내가 그 처를 꾀어내는데 있는 것도 모르고, 유성은 왕이 자신을 진심으로 아껴준다고 착각하여 행동거지를 매우 조심스럽게 하니, 주위 사람들이 몰래 비웃었다.

8월 갑오일(1339. 8. 8), 경화공주가 왕을 초대해 잔치를 열었는데 술자리가 파했으나 왕이 취한 체하며 궁궐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날이 저물자 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정을 통했다.

복위 2년 3월 초하루(1341. 3. 1), 예천군 권한공의 둘째 처 강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호군 박이라적을 보내 궁중으로 데려오게 하였는데, 이라적이 먼저 간통한 사실을 알고 노하여 두 사람을 모두 때려 죽였다.

복위 2년 11월(1341. 11. 16)에는 날마다 사냥을 다니다 겨울이 되어 여의치 않자 내시 전자유의 집에 가서 그의 처 이씨를 강간했다.

복위 2년 11월(1341. 11. 25) 전에 때려죽인 바 있는 박이라적의 첩과 상간했다.

복위 4년 3월(1343. 3. 13) 재상 배전의 집에서 그의 처와 그 처의 아우 김오의 처를 번갈아 간음하기도 했다[8]


특히 충혜왕은 "여자는 신하의 아내든 뭐든 이쁘면 전부"라는 식으로 마구 겁탈을 했는데, 막장 행각이 절정에 달할 때는 장인의 후처와 부왕의 후처들을 겁탈했다. 충혜왕이 겁탈한 충숙왕의 아내는 2명으로 수비 권씨(壽妃權氏)와 당시 충숙왕의 정비(正妃)격인 위치에 있었던 경화공주[9]였는데 경화공주를 범할 때 모양이 진짜 막장이다. 《고려사절요》를 보면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1339년 8월 8일, 경화공주를 위해 향연을 베풀었고 경화공주도 그 답례로 연회를 베풀었는데, 연회가 끝나자 충혜왕은 경화공주의 침실에 들어가 저항하는 경화공주를 송명리[10] 등의 아랫사람들을 시켜 사지를 묶고 범했다. 이후 경화공주가 원통하여 참지 못하고 원나라로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했는데, 이때 충혜왕이 연안군 이엄(李儼)과 윤계종(尹繼宗) 등에게 명하여 마시(馬市)를 금하여 경화공주가 말을 구하지 못하게 했다. 이어 사신을 보내 원나라에 뇌물을 바치고, 국새의 반환을 요청했는데 그때 충혜왕에게 겁탈당한 경화공주의 밀고로 1339년 8월 24일 조적 등 심왕 왕고의 일파가 국새를 영안궁에 감춘 뒤 군사 1,000명으로 반란을 일으켰지만, 충혜왕은 직접 기병대를 이끌고 이를 진압했다.(조적의 난) 그 뒤 경화공주를 부패로 악명이 높았던 만호 임숙의 집에 유폐시켰다.

개막장짓이 발각된 것은 얼마 후의 일로, 원나라에서 국새를 가지고 온 사신 두린이 경화공주를 알현할 때였다. 두린은 황제가 하사한 술을 경화공주에게 바쳤는데, 경화공주는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수치심에 울기만 했다. 이에 다른 수하들을 모두 물리고 난 후에야 경화공주는 자신이 당한 수치를 두린에게 말하게 되었고, 1339년 11월 12일, 두린 일행은 충혜왕을 원나라로 압송했다. 충혜왕은 자신의 책봉을 허락한다는 희소식을 알리기 위해 찾아온 원나라 사신들에게 붙잡혀 원나라로 압송당하는 꼴을 당한 것이다. 끌려간 충혜왕은 투옥되었지만 자신을 고발한 환관이 실각한 후 1340년 3월, 대부(大夫) 메르키트 토크토아(脫脫, 탈탈)가 원 혜종에게 상주한 덕분에 석방되었다. 충혜왕의 입지가 원나라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것 외의 기록들은 링크를 참고하자.#

이처럼 흉악무도한 충혜왕에게도 무서운 사람이 한 사람 있기는 했는데, 원나라 사신 실덕이라는 자였다. 충혜왕이 한창 새 궁궐 건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시기에 몸소 담장에 올라가서 공사를 감독했고, 궁궐이 준공되자 각 도에서 칠을 거두어 들였는데 단청의 안료를 수송하는 기한을 늦추는 자가 있으면 몇 곱의 베를 벌로 받았다. 이로 인해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시달렸고, 소인배들이 이 때를 틈타 치부에 열을 올렸으며, 충직한 인사들은 배척당해 한 번만 바른 말을 하면 살육을 당하기에 두려워하여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었다. 이런 판국에 1343년 7월 원나라에서 오던 사신 실덕은 길거리에 나부끼던 방문에

"나무을 기한 전에 바치지 않는 자는 를 징수하거나 으로 귀양을 보낸다."

고 씌어진 것을 보고 대노하였다. 충혜왕이 농사가 한창인 시절에 백성들을 동원해 부역을 시키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꼴을 보고, 실덕은 곧 귀국해 원 혜종에게 보고하려 했다. 이에 충혜왕은 채하중을 친히 보내 혜종에게 보고하지 말 것을 간청했는데, 일국의 왕이 타국의 일개 사신에게 비굴하게 간청해 선처를 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보다 못한 환관 고용보기황후의 오빠이자 부원배 중 최고를 달리던 기철이 원 혜종에게 청을 넣어 원나라가 사신을 파견해 충혜왕을 호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11] 이 둘이 한국사에서 1, 2위를 달리는 유명한 간신배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행동을 취했다는 것은 충혜왕의 막장성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사실 간신배라고 해도 국가 통치의 임무를 맡은 만큼 권력을 유지하려면 왕이 그냥 무능하기만 해야지 사람이기를 완전히 포기해서는 곤란했다. 사람이기를 포기한 막장 인성을 가진 폭군은 간신이 아무리 아부한다해도 그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숙청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충혜왕은 의외로 눈치는 빨랐는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계속 출두를 거부했다. 그러자 화가 난 원나라 사신단의 도치(타적), 베시게(별실가), 나이주(내주) 등이 고용보로 하여금 충혜왕을 속여 그를 정동행성 내로 유인하는데 성공했다. 물론 처음부터 폐위시킬 생각으로 유인한 것이라 보자마자 사신들은 충혜왕에게 발길질을 했고, 환관 고용보는 이를 본체만체했으며, 사신단의 호위병들은 압송이라는 이유로 주위에 칼부림까지 해 사상자가 속출했다.[12] 이 날이 1343년 11월 22일(음력) 갑신(甲申)일, 1343년 12월 9일(양력)이었다(정동행성 사변). 이에 따라 직무 수행이 불가능하게 되어 왕권이 정지되었다. 시종을 드는 사람이 없고, 그를 증오한 원나라 사신들이 시종을 드는 사람을 줄 생각이 없었기에 충혜왕은 직접 짐을 들고 압송되었다.

결국 원나라로 압송되는 도중에도 지방 관리에게[13] 추워서 이불을 달라고 했는데 그 관리는

"네가 잘못해서 못 주겠다!!"

라는 식으로 거절당하는 등 굴욕을 겪는다. 물론 뒤에 관리는 처벌을 받게 되지만 재미있는 것은 관리를 처벌한 사람이 원나라에서 충혜왕을 잡아오라는 명을 받고 고려에 와서 충혜왕을 직접 구타하기까지 했던 도치(朶赤)라는 몽골인이었다.[14] 관리가 그에게 와서

"왕이 폐위된 주제에 자기 잘못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내 이불을 빼앗으려 한다."

고 일러바치자 도치는

"너한테 여기를 다스리게 해준 사람이 누구더냐? 네가 모시는 왕이 추위를 못 견뎌서 이불을 찾는데 네가 주지 않는게 신하의 도리냐?"

라며 쇠자로 초주검이 되도록 때렸다. 충혜왕 입장에서는 물론 '병 주고 약 주고'다.

원나라 혜종(순제)은 압송된 충혜왕에게

"그대의 죄는 너무나 커서 그대의 피를 천하의 모든 개들에게 먹여도 오히려 부족하지만(雖以爾血,啖天下之狗,猶爲不足), 짐은 살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 귀양을 보낸다."

는 식으로 말해서 주눅들게 만들었다고 한다. 시체를 갈갈이 찢어서 온 사방에 흩뿌려도 모자랄 정도로 엄청난 죄인이라는 뜻이다. 보통 이런 류의 발언은 역성혁명을 하려다 실패한 인물에게나 하는 것인데다 당시 몽골인들이 땅에 피를 흘리는 처형 방식을 극도로 금기시한 것을 감안한다면 충혜왕의 행동들에 대해 원나라 황제와 조정이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15] 결국 충혜왕은 티베트로 귀양간 할아버지 충선왕(제26대)처럼 원나라에 의해 귀양을 간 두 번째 고려 왕이 되었다. 그러나 충선왕은 원나라 내의 정치적 문제 때문에 유배된 것이었고, 나중에라도 이용 가치가 있어서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충혜왕은 막장이라서 유배된 것이었기 때문에 빨리 죽어 줄수록 고려와 원나라에게 도움이 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인지 게양현(揭陽縣)[16]으로 귀양가는 도중 악양현(岳陽縣)[17]에서 30세의 젊은 나이로 급사했다. 항간에는 을 잘못 먹고 체해 급사했다는 설도 있고, 독을 탄 술로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갑자기 사망한 걸 보면 원나라에서 손을 쓴 게 확실해 보이는데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든 고려 백성들이 기쁨에 겨워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王傳車疾驅 艱楚萬狀 未至揭陽 薨于岳陽縣。或云遇鴆。或云食橘而殂。國人聞之 莫有悲之者 小民至有欣躍 以爲復見更生之日。初 宮中及道路 歌曰 阿也麻古之那 從今去何時來 至是 人解之曰 岳陽亡故之難 今日去 何時還。

왕은 수레가 너무 빨리 달리는 통에 온갖 고초를 겪다가 게양에 못 이르러 악양현에서 훙서하였다(죽었다). 어떤 사람은 짐독(鴆毒)에 독살되었다고 말했고 어떤 사람은 귤을 먹고 죽었다고도 말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나라 사람들은 아무도 슬퍼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지체 낮은 백성들 가운데는 되살아나는 날을 다시 보게 되었다고 기뻐 날뛰는 자까지 있었다. 이전에 궁중과 거리에서 노래하기를 "아야마고지나 이제 가고 나면 언제 오나."라고 하였는데, 이 일이 있은 후 "악양망고지난(악양에서 죽는 신세) 오늘 가면 언제 돌아오나."로 뜻을 풀이했다.

고려사절요》 권25 충혜왕 갑신 5년(1344년)


그나마 유해는 고려로 송환되어 '영릉'(永陵)에 안장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그 달에 충혜왕에게 겁탈당했던 경화공주가 한 많은 삶을 마쳤다. 충혜왕의 시신이 고려에 돌아온 날을 정확히 알기 어려워, 경화공주가 원수가 죽은 꼴은 보고서 저승으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어린 두 아들이 각각 충목왕(제29대)과 충정왕(제30대)으로 즉위했는데 둘 다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며, 고려 멸망의 단초를 제공하는 결과가 되었다. 여러모로 진정한 막장 군주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고려사》에 기록된 사관의 글을 보자.

王性游俠 好酒色 耽于遊畋 荒淫無度 聞人妻妾之美 無親貴賤 皆納之後宮 幾百餘。於財利 分析絲毫 常事經營 群小爭進計畫 奪人土田奴婢 盡屬寶興庫 良馬以充內廐。給布回回家 取其利 令椎牛進肉 日十五斤。新宮之役 張旗設鼓 親登墻督之。宮成 徵漆諸道 丹雘之輸 後期者 徵布倍蓰。吏緣爲姦 百姓愁怨。群小得志 忠直見斥 一有直言者 必加誅戮 人人畏罪 莫敢言者。

왕은 성품이 호협하고 주색을 좋아했으며, 놀이와 사냥에 탐닉해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남의 처나 첩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들으면 친소와 귀천에 관계없이 모조리 후궁으로 들이는 바람에 그 수가 100명이 넘었다. 또한 재물에 관계되는 것이면 아무리 자잘한 것이라도 따져 항상 이익을 올리려 하니, 군소배들이 다투어 계략을 올려 남의 토지와 노비를 빼앗아 모두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켰으며 궁중의 마굿간을 준마로 채웠다. 또 회회(回回) 사람들에게 베를 주고 그에 대한 이자[18]

를 챙겼으며 를 도축[19]해 그 고기를 날마다 15근씩 바치게 했다. 새 궁궐을 지을 때에는 깃발을 벌여 놓고 북을 설치한 다음 친히 담에 올라 깃발을 흔들고 북을 치며 독려했다. 궁궐이 완성되자 각 도에서 옻칠을 거두어 들였으며, 단청을 올릴 물감을 기한보다 늦게 가져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보다 몇 배에 해당하는 베를 징수했다. 관리들은 이를 기회로 백성들을 가렴주구했으며 백성들은 근심과 원한에 싸였다. 군소배들은 출세하고 충직한 사람들은 쫓겨났으며 한 사람이라도 직언하면 반드시 사형해버리니, 사람들이 처형당할까 두려워 감히 말을 꺼내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 <충혜왕 세가> -총서-



4. 평가[편집]


최근 정치 운영과 개혁 정책을 분석한 결과,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출간하는 53권짜리 《한국사》 중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에 역대 '충(忠)' 자 돌림 왕들의 항목을 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반적으로 충혜왕에 대해서는 왕이 음행을 일삼았다는 사실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 운영과 정책 시행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다. 이 왕은 상업 활동의 진흥과 유통 구조의 개선을 통해 재정을 확충했고, 사급전의 혁파 등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20]

더불어 각종 세목을 신설해 권력층을 견제하였다.[21] 원의 간섭으로 폐위당한 경험이 있어 악소배를 비롯한 측근 세력을 광범위하게 형성하여[22] 왕권 강화를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부원 세력인 기철, 고용보와 대립하게 되었다.

즉, 충혜왕의 개혁 시도는 전방위적으로 친원파들을 압박하는 것[23]

이었고 고려 정국은 충혜왕파 대 친원파로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이 같은 정치 상황 속에서 충혜왕은 고용보 등에 의해 체포당하여 원에 압송되었고 곧 악양현에 유배되었다가 사망했다. 기철 등 부원 세력은 충혜왕의 왕권 강화로 위축당하자 왕을 체포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위기 국면을 벗어나고자 한 것이었다. 원으로서도 충혜왕의 개혁 정치가 원나라의 고려 종속 정책에서 일정한 수준 벗어난 것으로 받아들인 결과였다. 즉 충혜왕의 폐위에는 원의 고려에 대한 종속 정책과 부원 세력의 정치적 이해 관계가 개입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원은 충목왕 즉위 후 충혜왕 대의 정치를 전면 부정할 수 밖에 없었으며, 왕의 폐위에 대한 고려 정치 세력들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개혁을 표방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사》 제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그가 이런 권력을 개인의 폭정을 위해 사용하지 않고, 좀 더 건설적인 방향으로 사용했으면 고려의 운명이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만드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렇게 권문세족을 짓누르고 획득한 재정이나 권력을 백성을 위해서 썼다면 지지가 높았겠지만, 왕과 신흥 세력인 악소배들이 깽판치는데 사용해 버렸으니 백성들 입장에선 왕이나 권문세족이나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24] 그가 폐위된 것도 결국 자신의 행실로 인한 빌미를 스스로 제공한 탓이라고 본다면 굉장히 아쉬운 부분이다.

충혜왕의 이런 성향은 어찌보면 증조할아버지인 충렬왕(제25대)이나 아버지 충숙왕(제27대) 같이 시대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충렬왕이나 충숙왕의 경우에도 원나라의 압박이나 권문세족의 견제로 제대로 왕권을 휘두르지 못하는 상황에 있었고, 이 왕들의 경우에도 정사를 멀리하고 사냥이나 여색에 빠져드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기에 충혜왕은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 있으면서 그곳의 퇴폐한 풍속에 빠져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 마디로 제대로 된 제왕학이나 정치적 자제력을 그에게 교육시켜 줄 만한 여건도 아니었다는 것이다. 후대의 왕인 우왕(제32대)도 어렸을 때부터 권신 이인임 등의 압박 때문에 이런 루트에 빠지는데 그때 큰아버지 충혜왕과 비교되는 건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나 과한 행적이긴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려사》에 실린 충혜왕에 대한 사신의 논평도 이와 비슷한 논지다.

충혜왕은 영리한 재능을 나쁜 데에 썼으니, 악소배들을 가까이하고 황음무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안으로는 부왕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위로는 천자로부터 벌을 받아 죄수의 몸으로 유배가는 도중 객사한 것도 마땅한 일이었다.

오직 늙은 신하 이조년[25]

만이 간곡히 충언을 올렸으나 그 말마저 듣지 않았으니 어찌 하겠는가?



5. 가계도[편집]


  • 제1비 덕녕공주
    • 1남 충목왕 왕흔(1337년 ~ 1348년) (재위 1344년 ~ 1348년)
    • 1녀 장녕공주(長寧公主, ? ~ ?): 원나라 노왕에게 시집갔는데, 덕녕공주에게 돈을 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하지만 이 시기 장녕공주의 나이는 20대 초반이었고, 고려에서 절개를 잃었다는 비난을 받았다는 기록으로 보아 노왕과 결혼한 뒤 돈을 줬다는 노왕의 아버지에게 재가했을 수도 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가 명나라 북벌군에게 점령되는 혼란의 와중에 실종되었다. 그러자 숙부인 공민왕이 신하들을 시켜 장녕공주를 찾게 했다. 그 후 명나라 태조 홍무제(주원장)가 장녕공주를 찾아 고려로 돌려보냈고,[26] 공민왕은 장녕공주를 그 어머니인 덕녕공주와 함께 살게 했다.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서 덕녕공주와 살다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제2비 희비 윤씨
  • 후궁 은천옹주 임씨(銀川翁主 林氏, ? ~ ?): 충혜왕과 비슷한 성품으로, 미녀에다 충혜왕의 비위를 잘 맞추어 총애를 받았다(마치 연산군장녹수의 관계처럼).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본래 종실 단양대군의 여종이었다. 상인의 딸로 충혜왕을 만나기 전에는 사기 그릇을 파는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기옹주'(沙器翁主)라고 비꼬아 불렀다. 충혜왕은 정력제인 열약을 즐겨 먹어 여러 비빈들이 성생활을 못 견디거나 병에 걸리기도 했는데 임씨만이 능히 감당하여 그의 총애를 받았다. 충혜왕이 폐위되어 원나라로 끌려간 후 은천옹주도 궁에서 쫓겨났다.
    • 3남 왕석기(王釋器, ? ~ 1375년): 부모가 몰락하고 이복형 충정왕(제30대)이 즉위한 후에 승려가 되라는 명을 받고 여러 을 떠돌았다. 나중에 숙부인 공민왕이 즉위하자 역모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는 과정에서 공민왕의 명령으로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놀랍게도 살아남아 결혼까지 하여 아들을 하나 낳고 숨어 살았다. 하지만 다시 조카인 우왕이 즉위한 후에 왕석기와 그의 아들의 존재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되었다.
  • 후궁 화비 홍씨(和妃 氏洪, 생물년도 미상): 경상도 진변사인 홍탁의 딸. 충혜왕은 그녀의 미모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정식으로 궁궐로 불러들이지도 않은 채 후궁으로 삼았다. 위의 은천옹주는 원래 일개 궁인의 신분으로 충혜왕의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홍씨가 화비로 책봉된 것을 질투했다. 그래서 충혜왕이 은천옹주로 책봉해줬다. 그런데 충혜왕은 화비 홍씨에게 금세 흥미를 잃어서 궁 밖에 방치해 둔 채 자주 찾지 않았다고 한다. 사서에 딱 한 번 등장하는 충혜왕의 '경비'(慶妃)와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6. 대중매체[편집]


  • 코에이의 게임 <푸른 늑대와 흰 사슴: 원조비사> 시나리오 3에서 충숙왕의 자식으로 등장하는데 정식발매판 자체가 시대가 뒤틀려서 크게 상관은 없다. 능력치는 방탕하고 무능한 군주였던 것을 반영한 것인지 정치력이 D이고 전반적으로 별로이지만 그래도 왕자라 나중에 충숙왕을 죽이고 동생인 공민왕을 군주로 하는 플레이를 할 때 정복지의 군주로 잘 써먹을 수 있다.

  • 2012년작 SBS 드라마 <신의>에서 배우 오현철[27]이 연기했다. 다만 퓨전 드라마이고 공민왕 시절이 배경인지라 비중있게 등장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행적이 짧고 굵게 표현된다. 대낮부터 기녀들을 끼고 술판과 춤판을 벌이던 충혜왕은 고려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최전방에서 싸워온 적월대 부대의 유일한 여인인 단백을 발견하고 “어명이니 옷을 남김없이 벗어보라”며 추태를 부린다. 이를 대장 문치우가 막아서자 충혜왕은 드디어 본심을 드러내는데 “너희들도 똑똑히 봤지? 저것들이 저렇게 방자하다. 백성들이 임금인 나보다 저것들을 더 믿는다 했어!”라고 외치며 마지막 속옷을 벗지 않는 단백을 향해 칼을 겨눴지만 문치우가 단백 대신 왕의 칼에 맞는다. 이 일로 문치우는 죽고, 단백은 충격으로 자살하며 문치우의 제자이자 단백의 연인이었던 최영은 삶의 의욕을 잃게 된다.
파일:충혜왕(신의).png

  • 2013년작 MBC 드라마 <기황후>에서는 방영 전 공개된 자료를 통해 배우 주진모가 연기하는 충혜왕이 세 명의 주연 중 한 명으로 비중있게 소개됐는데 설명상 실제 폭군의 모습에서 심각하게 미화되어 있어서 반발이 컸고, 결국 방영 중에는 가상의 고려 왕 '왕유'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드라마 전개 중 등장하는 복위 횟수나 사망 시기가 전부 충혜왕과 비슷하여 충혜왕을 기반으로 왕유를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파일:왕유.png

  • 만화가 박종관이 그린 아동 역사 만화인 《태조 왕건과 고려왕조 500년》에서는 주인을 닮아서 인상이 상당히 불량한 말을 탄 채 "으하하, 내가 누구냐? 바로 돌아온 탕아야!"라는 중2병 가득한 대사로 첫 등장했다. 죽어서 퇴장하는 컷의 대사는 "탕아의 최후구나."

며, 간신의 말에 넘어가 최중길의 모친 한여혜에게 흑심을 품는
다. 결국 이 흑심때문에 부모가 전부 자살했고 여동생인 최희정
도 그에게 바쳐지고 나서 자살한걸로 보인다. 사실상 최중길의 인
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만악의 근원이자 철천지원수.

7. 기타[편집]


  • 아무래도 막장 이미지가 연산군하고 비슷했는지 가상 대담도 존재한다. 그리고 소드마스터 척준경과 함께 온라인에서 화제거리가 되어 유명해진 고려인이다.

  • 대부분의 한국사 교재에서 충혜왕 부분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한 두 교재에서 간단히 '폭정을 한 왕'이라고만 대충 나오는 정도. 앞의 증조할아버지 충렬왕과 할아버지 충선왕이나 더 이후의 왕인 동생 공민왕이 많이 나온다. 굳이 충혜왕의 업적을 찾는다면 편민조례추변도감을 설치해 개혁을 시도했다 딱 이 정도만 나온다. 그나마 이것도 상급자용.

  • 충혜왕 때와 관련된 《고려사》의 기록 중에 우리나라에 만두가 고려시대에 전래되었음을 알려주는 사료가 있는데, 문제는 이 기록이란 게 어떤 사람이 만두가 먹고 싶어 궁중 주방에 침투해 만두를 먹다 걸려 처벌받았다는 기록이다. 다만 이 때의 만두는 '상화'라는 것으로, 고기나 야채로 된 속이 들어가는 '쟈오쯔'(교자)가 아니라 '만터우'에 해당하는 것이다.


  • 개막장 인생이었던 충혜왕과는 달리 충혜왕의 장남인 충목왕이나 동복동생인 공민왕은 충혜왕과 가족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완전히 다른 인물들이었다. 아들 충목왕은 12세에 요절했지만 오래 살았다면 명군이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모습을 보였고, 동생인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펼쳤던 개혁군주였다.

  • 시호인 '충혜'는 관우가 북송으로부터 추증받은 시호이기도 하다.

  • 폭군 충혜왕이 좋아하던 고려가요로 <북전>(北殿)이라는 노래가 있다. 충혜왕 당시 같은 이름의 궁궐을 완공했을 무렵에 생겨난 노래라고 한다. 당시에는 <뒷전> 혹은 <후전진작>이라는 제목으로 불렸으며, 조선시대 초기까지 유행했던 노래다. 망국의 곡인 데다가 가사가 음란하다는 이유로 조선 제9대 성종 시기에 노랫말이 한 번 《용비어천가》스럽게 개사된 이후, 18세기까지 활발히 연주되고 불렸다. 아무래도 가사가 문제인 데다가 원형에서 변화를 많이 겪어서인지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도 잘 소개되지 않는 노래이다. 바뀌기 전의 노랫말은 아래와 같으며, 여러 조각으로 쪼개져 전해 내려온다. 해당 노래가 시조의 초기 형태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학설도 존재한다. 멜로디를 들어보면 느긋하면서도 흥겨운 멋이 있는데, 이 때문에 노래가 오래 살아남았던 듯하다. 태종 이방원도 "<후전진작>은 노래는 좋지만 가사가 저속하다."라면서 불평하기도 했다.

흐리누거 괴어시든 어누거 좃니져러
젼ᄎᆞ젼ᄎᆞ로 벋니믜 젼ᄎᆞ로
셜면ᄌᆞᆺ 가ᄉᆡ론 ᄃᆞᆺ 범그려셔 노니져

(정신이) 흐려지게 누그러져 사랑하신다면 얼었다가 누그러지듯이 쫓아다니세
까닭 까닭으로 벗님의 까닭으로서
풀솜의 가시인 듯 뒤섞여서 노세

<금합자보> - 평조북전

누은들 ᄌᆞᆷ이 오며 기ᄃᆞ린들 님이 오랴
이제 누워신들 어늬 ᄌᆞᆷ이 ᄒᆞ마 오랴
ᄎᆞᆯ하로 안즌 곳에셔 긴밤이나 새오쟈

누운들 잠이 오며 기다린들 님이 오랴
이제 누우신들 어느 잠이 금방 오랴
차라리 앉은 곳에서 긴 밤이나 새우자

<해동가요 박씨본>

空房을 겻고릴동 聖德을 너표릴동
乃終始終을 모ᄅᆞᄋᆞᆸ건마ᄅᆞᄂᆞ
當시론 괴실ᄉᆡ 좃ᄌᆞᆸ노이다

빈방을 겨루려 하는 둥 성덕을 넓히려 하는 둥
나중과 첫과 끝을 모르옵건마는
당신은 사랑하시므로 쫓으옵나이다

<금합자보> - 우조북전

ᄋᆞ자 내 黃毛試筆 墨을 뭇쳐 窓밧긔 디거고
이제 도라가면 어들 법 잇것마ᄂᆞᆫ
아므나 어더 가뎌셔 그려보면 알리라

아차, 내 족제비털 붓을 묻히고 밖에 떨어졌구나
이제 돌아가면 얻을 수 있겠지만
아무나 얻어 가져서 그려보면 알리라

<청구영언 진본>

아소 님하 遠代平生애 여힐ᄉᆞᆯ 모ᄅᆞᄋᆞᆸ새
아 임이여 평생토록 여읠 줄 모르옵사이다

<만전춘>[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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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고려사》에서는 충혜왕이 사망한 날까지 재위한 것으로 분류한 뒤 '유년칭원법'을 적용하여 충혜왕 후5년 기록까지 있지만 충혜왕 후5년에는 충혜왕이 2월에 죽었다는 기록과 사관의 평이 기록되어 있다. 1343년 음력 11월에 재판을 받기 위해 원나라로 끌려갔으며, 1343년 12월 계축일에 중국 남쪽 변방 게양현으로의 유배 판결을 받고 이듬해 초 사망했다. 여기서는 죄를 지어서 유배가 확정된 시점까지를 재위 기간으로 분류한다.[2] 의외로 원래 시법상 '은혜 혜(惠)'는 좋은 시호에 속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국시대 진나라의 명군인 혜문왕과 조나라의 혜문왕.[3] 당시 불교는 고려의 국교였다. 국가에서 잘못한 절이나 승려를 처벌하는 일은 있었지만 이런 거랑은 얘기가 다르니 논외. 숭유억불을 행하던 조선에서조차도 절의 기물을 파손하거나 스님들에게 막말한 정도였지 절 자체를 방화를 한 선비들은 막장행동으로 취급받고 손가락질 받았다. 게다가 왕실 사람들도 사람인지라 불가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개중에는 왕릉을 관리하거나 명복을 빌어준다는 명목으로 왕실과 직접적으로 비호받는 절들도 있어 이런 절들은 유생들이 얼씬을 못했다.[4] 선 채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말을 한 다음 모은 손을 유지한 채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어앉고, 팔꿈치를 들어올리며 허리를 낮춰 절하는 유목민식 인사법이다. 부족에 따라서는 이때 들어올린 양쪽 팔로 상대방의 무릎을 감싸안아 윗사람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이후 《국조오례의》에서는 법적으로 금지되었다.[5] 충숙왕 본인을 가리킨다. 충숙왕은 역대 고려 국왕들 중 고려인의 피가 가장 적은 왕이었는데도 이런 말을 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이 뚜렷했던 것 같다.[6] 夜 王率嬖人梁宣宋明理等 微行。쏘다녔다는 건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서 잠행하러 간 게 아니라 그냥 놀러 나간 거다.[7] 2년째 기록에는 왕이 끌려가서 잡혀간 후의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지만 왕으로써 한 역할은 저게 전부이다.[8] 그런데 한가지 웃기는 사실은 제멋대로 무수한 여자들을 강간, 간음했으면서도 본인 귀에 강간 사건이 보고되면 당사자를 무참히 죽여버리거나 귀양보냈다는 것이다. 만호 전찬이 이포공의 처를 강간하자 형장을 쳐서 귀양을 보냈으며, 불량배 봉골 등 3명이 임금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주부 공보의 집에 들어가서 그의 처를 간음하자 행성에서 잡아 죽였다. 또한 복위 4년 10월, 강간범 3명을 잡아 돌로 눌러 죽였다. 하지만 뭐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백성들은 그리 동조하지 않았는지, 오죽하면 현도효라는 자가 독약으로 충혜왕을 시해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사건도 일어난 적이 있었다(1341. 윤5. 18). 또 한 번은 신하 최원이 "진사 우물골이란 곳에 예쁜 처녀가 있습니다"라고 보고하여 충혜왕이 최원과 함께 그 집에 가서 처녀를 찾았더니, 주인집 노파가 "저의 집에는 본래부터 처녀가 없습니다"라고 하자 왕은 노파가 숨기는 줄 의심하였고, 동시에 최원이 자신을 속였는가도 의심하여 둘 다 죽였다.[9] 충숙왕은 복국장공주 사후 조국장공주와 혼인했는데 조국장공주도 요절했고, 이후 혼인한 사람이 경화공주다. 조국장공주, 경화공주와는 정비의 자리를 채우기 위해 혼인한 것이기 때문에 조선시대식으로 표현하자면 경화공주는 두 번째 계비에 해당한다.[10] 간신이었지만 나중에 임시로 고려의 국정을 맡은 원나라의 환관 고용보와의 친분으로 무사했다.[11] 이후 고용보는 조일신의 난 때 도망친 후 숨어 살다가 공민왕이 보낸 어사중승 정지상에 의해 처형당했다. 이유는 충혜왕 폐위에 일조했기 때문이었다. 기철 역시 공민왕 입장에서 가장 커다란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1356년에 일어난 병신정변때 피살당했으며, 자기 측근들과 행주 기씨 일가까지도 한꺼번에 거의 전부 죽임을 당했다.[12] 국왕을 호위하는 근위병들이 압송을 저지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칼부림이 일어나고, 사상자가 속출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13] 기록에는 지금의 평안남도 숙주(肅州)의 지방관을 맡고 있었던 안균(安鈞)으로 되어 있다.[14] 원 간섭기 시절 고려 국왕들은 태조 칭기즈 칸의 방계 혈족으로서 원나라의 황족에도 해당했다. 몽골인들에게 알탄 우룩, 즉 황금씨족이 가지는 권위와 의미를 생각하면 도치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다.[15] 웃긴 사실은 당시 원나라의 황제였던 혜종도 사치와 향락에 빠져 원나라을 멸망으로 이끌고 간 암군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충혜왕과는 달리 감안할 부분이 있다면 어렸을 적부터 온갖 고생을 했다는 것이 있지만 실권을 잡은 이후에도 주색 잡기에만 열중했으니 실드 여지는 적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도 인간성은 혜종이 충혜왕보다는 나은데 둘다 암군이었어도 폭군인 충혜왕보다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선은 지켰다.[16]중국 광둥성 지에양시, 원나라 황족의 유배지로 쓰였던 곳이었다.[17] 현 중국 후난성 웨양시[18] 참고로 이슬람교에서는 이자를 죄악으로 본다. 수쿠크 참조. 다만, 실물자산의 이자니만큼 꼭 이슬람교에서 죄악시하는 이자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단지 수쿠크를 이자라고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19] 이슬람식 도축법은 할랄 푸드를 참고. 악행을 열거하는 내용 중에 왜 뜬금없이 소고기 얘기가 나오나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는데, 농경 사회에서 고기 먹자고 소를 도축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조선시대만 봐도 답이 나온다.[20] 고려 후기에 친원파 권문세족이 전국의 땅을 집어먹은 상태에서 왕들은 토지개혁 부문에서 제대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걸 건드리는 건 기존 권력층한테 "한번 겨루어볼래?"라고 파이트 신청하는 거랑 다를 게 없다.[21] 당시 권문세족 농장은 면세 면역이었다.[22] 이 부분이 진짜 독특한 건데, 우리 역사상 왕권을 강화할 때 임협 집단을 이용하는 경우는 없다. 보통 기존 권력 집단과 타협, 흡수하거나, 시종 공신들을 낙하산으로 투하한 다음 권력을 밀어줘서 거물을 만들거나, 통혼을 통해 처가빽을 만들거나 친가빽을 만들어 동원하지, 천한 건달, 조직들을 끌어들여 왕권 강화한 건 충혜왕이 처음이다. 중국에서는 전한 고조 유방과 명 태조 주원장의 사례가 있긴 한데, 그 쪽은 아예 출신이 임협집단이니 같이 시작한 인재들도 그 쪽 출신인 것이었다.[23] 쉽게 말해 기존 친원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상권과 유통 구조를 탈취하고, 토지를 집어먹는 수단을 없앴으며, 보란듯이 권문세족들에게만 적용되는 세금을 걷는 데다 자기들하고 통혼 같은 걸로 타협하려고 하지도 않았던 왕이었다. 때마침 친원파들의 음행이 심하다 하니 왕이 그들을 제거할 명분은 충분했다.[24] 물론 어느 정도 충혜왕에게 불리한 기록만 남았을 공산도 있지만, 저 재평가 역시 남은 기록을 통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25] 유명한 시조인 <다정가>를 지은 그 인물. 이인임의 할아버지.[26] 명 태조 주원장은 위협이 안 되는 적국 군주의 자제들에게는 관대했다. 심지어는 북원 소종 아유시리다라 칸의 장남이었던 마이딜리발라(매적리팔라)를 살려놓은 걸로도 모자라 숭례후에 봉해 집을 하사하는가 하면 끝내 소종에게 돌려보내는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27] <태조 왕건>에서 왕건의 아역 역, <무인시대>에서 고종 역.[28] 만전춘의 끝부분인데, <북전>이 원형이라는 설도 있어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