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로 페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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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로 페라라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SSC 나폴리 역대 주장
디에고 마라도나
(1984~1991)

치로 페라라
(1991~1994)


로베르토 보르딘
(1994~1997)




치로 페라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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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베스트팀
파일:ESM.png

1996-97 · 1998-99



이탈리아의 축구감독

파일:Ciro-Ferrara-Italy-v-Ivory-Coast-Toulon-U21-x8o_1I7UI9lx.jpg
이름
치로 페라라
Ciro Ferrara
출생
1967년 2월 11일 (57세)
캄파니아나폴리
국적
[[이탈리아|

이탈리아
display: none; display: 이탈리아"
행정구
]]

신체
180cm / 체중 75kg
주발
오른발
직업
축구선수 (수비수[1]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선수
SSC 나폴리 (1980~1984 / 유스)
SSC 나폴리 (1984~1994)
유벤투스 FC (1994~2005)
감독
이탈리아 대표팀 (2005~2006 / 수석 코치)
이탈리아 대표팀 (2008~2009 / 수석 코치)
유벤투스 FC (2009~2010)
이탈리아 U-21 대표팀 (2010~2012)
UC 삼프도리아 (2012)
우한 줘얼 (2016~2017)
국가대표
파일: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49경기 (이탈리아 / 1987~2000)

1. 개요
2. 선수 경력
2.1. 클럽
2.2. 국가대표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감독 경력
6. 이야깃거리



1. 개요[편집]


이탈리아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우한 줘얼 감독을 맡았다.

코스타쿠르타와 더불어 1990년대 이탈리아를 주름잡은 막강 스토퍼. 파비오 칸나바로의 멘토이자 우상. SSC 나폴리(10시즌)와 유벤투스 FC(11시즌) 두 개의 세리에 A 클럽에서만 활동하며 수비수로서 큰 족적을 남겼던 축구 선수로 거론되곤 한다.


2. 선수 경력[편집]



2.1. 클럽[편집]



2.1.1. SSC 나폴리[편집]


파일:Maradona-ferrara.jpg

통산 기록 319경기 15골 3도움 (역대 최다 출장 8위)


이탈리아의 남부 도시 나폴리 태생인 페라라는 1980년 13세의 나이로 SSC 나폴리 유스팀에 입단한다. 이후 4년 뒤인 1984년 성인팀으로 콜업되었고, 1985년 5월 5일 산 파올로에서 열린 유벤투스와의 경기에 교체로 투입되어 첫 프로 데뷔를 치른다.

다음 시즌에는 로테이션 멤버로써 제 역할을 했고 1986-87 시즌에는 본격적으로 주전 수비수로 발돋움했으며, 나폴리 역시 디에고 마라도나를 앞세워 세리에 A코파 이탈리아 2관왕까지 달성하는 등 최고의 한해를 보낸다.

1988-89 시즌에는 UEFA컵 결승전에서 40분경, 마라도나의 어시스트를 헤딩 골로 연결하여 팀의 우승을 도왔고 이듬해 시즌에는 오렌지 삼총사을 구축한 AC 밀란 마저 따돌리며 팀이 다시 한 번 세리에 A를 우승하는 데 일조했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 대표팀의 부름도 받게 되어 자국에서 열린 1990 월드컵에도 출전하는 등 계속해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1990-91 시즌, 나폴리는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리그 8위를 기록하며 최악의 부진을 겪었고, 설상가상으로 마라도나의 시대도 저물게 되면서 쇠퇴를 거듭한다.

알베르토 비곤 감독이 물러나고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를 거쳐, 80년대 영광을 함께 했던 오타비오 비안키 감독이 복귀하는 등 감독 교체가 자주 일어나며 불안정한 팀 분위기가 계속되었다. 1993-94 시즌에는 마르첼로 리피가 새 사령탑으로 부임하였는데 페라라는 여기서 만난 리피와의 인연이 훗날 함께 유벤투스로의 이적을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2.1.2. 유벤투스 FC[편집]


파일:ciro_ferrara_juventus_getty.jpg

1994년 여름, 유벤투스 FC의 대대적인 개편의 일환으로 많은 선수들이 영입되었는데 페라라도 그 중 하나였다.

이적 첫 시즌부터 핵심 중앙 수비수로 활약하며 AC 밀란 지배 하에 있던 세리에 A 왕좌를 9년만에 되찾아 오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본격적인 리피 사단 유벤투스의 서막을 알리는 시즌이었다.

이후에도 이듬해인 1995-96 시즌, 스쿠데토 2연패에는 실패하였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루이 판할이 이끄는 아약스를 상대로 승리하여 유럽 정상에 오르는가 하면, 1996-97 시즌에는 새로 영입된 파올로 몬테로와 새 수비진을 이뤘고 이 시기에 기량이 절정에 오르며 선수 인생을 통틀어 최고의 한 해를 보낸다. ESM(유러피언 스포츠 메거진)이 선정하는 유럽 이달의 팀에도 3회나 선정되었다.

그러나 1997-98 시즌이 진행중이던 1998년 1월, 레체와의 원정 경기에서 시즌 아웃 부상을 당하는데 이 부상은 이후에 페라라의 노쇠화를 불러오는 큰 악재가 되고 만다. 부상의 영향으로 1998 월드컵 출전 마저 좌절되었다.

1998-99 시즌 리그 5위라는 최악의 부진의 책임을 지고 리피가 물러나고 신임 감독 안첼로티가 부임하였다. 안첼로티 체제에서는 파올로 몬테로, 마크 율리아노와 함께 3백을 구축하며 리그 20실점이라는 유럽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안첼로티가 지휘봉을 잡은 2시즌간 유베는 2연속 리그 준우승에 머물며, 무관의 세월을 보낸다.

2001년 여름 다시 리피가 감독으로 돌아왔고 2001-02, 2002-03 스쿠데토 2연패와 챔피언스리그 준우승을 거두는데 페라라는 30대 중반의 고령임에도 여전히 녹슬지 않은 기량으로 주전 수비수로 활약하며 선수 생활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그러나 2003-04 시즌부터는 안토니오 콘테, 파올로 몬테로, 에드가 다비즈1990년대 후반부터 유벤투스를 지탱해오던 노장 선수들이 차츰 주전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하였고 페라라 역시 예외는 아니였다.

유벤투스는 선수단 노쇠화에 따른 팀 리빌딩에 실패하여 부진을 겪었고 결국 리피가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새 감독인 파비오 카펠로 체제 하에서는 출전 기회를 거의 받지 못하며, 2004-05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2.2. 국가대표 경력[편집]


치로 페라라는 국가대표에서 49경기에 출전하였고, UEFA 유로 1988, 1990 이탈리아 월드컵UEFA 유로 2000같은 굵직한 대회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의 능력이 탁월하였음에도 국가대표팀에서는 많은 출전을 못하였다.

첫 번째 이유로는 대표팀에 최고 수준의 수비수들이 넘쳐났다. 페라라의 대표팀 초반에는 프랑코 바레시, 알레산드로 코스타쿠르타, 마우로 타소티, 피에트로 비에르코보드, 리카르도 페리, 주세페 베르고미, 파올로 말디니 등이 있었고 대표팀 말기에는 파비오 칸나바로, 알레산드로 네스타, 잔루카 잠브로타, 마르크 율리아노 같은 선수들이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예기치 못한 부상이었다.[2] 이미 UEFA 유로 1996에서 부상으로 출전을 하지 못했었는데 프랑스에서 열렸던 1998 프랑스 월드컵 선수단을 구성할 때도 부상으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31살이였던 페라라는 유벤투스에서 최고의 세 시즌을 보내며 그의 선수 경력 최고의 활약을 보였다. 96–97시즌과 97–98시즌에 그는 이탈리아내에서 최고의 선수라고 할 수 있었고, 대표팀에서도 주전 선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월드컵 시작을 몇주 앞두고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대회 출전을 놓치고 말았다.(그의 주전 자리는 네스타가 차지하였고 남은 백업멤버 한 자리에 전격 발탁된 선수는 당시 노장이었던 베르고미였다.) 이 시기 이후로 페라라는 UEFA 유로 2000에 참가하긴 했지만 이미 대표팀에서는 후보 선수가 되었고, 반면 칸나바로와 네스타는 주전으로 나서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많은 이들은 그가 만약 부상을 입지 않았더라면 UEFA 유로 1996는 물론이고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최고의 스타 선수중 하나가 됐을거라고 믿는다. [3] 지금은 페라라가 그의 모국 밖에서는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탈리아 내에서는 아직까지도 수많은 이탈리아의 월드 클래스 선수들중에서 최고의 선수로 여겨지고 있다.


3. 플레이 스타일[편집]


이탈리아 수비수다운 강인함과 뛰어난 수비 기술을 갖췄던 센터백. 빠르고, 크지 않은 키에도 제공권이 좋은 편이었으며, 더티하지 않고 깔끔한 수비를 선보이면서도, 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주로 센터백, 그 중에서도 스토퍼에 가까운 선수였지만, 양 풀백과 스위퍼로도 뛸 수 있었고, 강력한 태클과 뛰어난 위치선정, 거기에 준수한 피지컬과 스피드로 상대를 철저하게 틀어막던 선수였다. 거기에 강한 리더십과 기복 없는 플레이, 상당한 공격력까지 갖춘 동시대 최고의 센터백 중 하나였다. 다만 동시대에 뛰던 선수들이 바레시, 페리, 코스타쿠르타, 네스타, 칸나바로 등인지라 국대에서의 명성은 아쉬운 편이다.


4. 기록[편집]



4.1. 대회 기록[편집]





4.2. 개인 수상[편집]




5. 감독 경력[편집]


페라라는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진 중 일부였다. 2006년 월드컵을 우승한 후에, 페라라는 과거 팀동료 잔루카 페소토의 코치로서 함께 유벤투스의 유스팀 코치진으로 합류하였다. 2008년 7월에 페라라는 피렌체 코베르차노에서 UEFA 프로 라이센스를 취득하였다. 2008-09 시즌에 7경기에서 단 한 번의 승리를 거두지 못한 클라우디오 라니에리를 경질하고 2009년 5월 18일에 페라라를 남은 두 주를 맡을 감독 대행으로 선임하였다. 남은 두 경기에서 시에나, 라치오를 각각 3-0, 2-0으로 이기고 라이벌 밀란을 제치고 2위에 올랐다. 이 결과들로 인하여 그는 다음 시즌 팀을 맡을 감독 후보로서 부상하였다. 2009년 6월 5일, 유벤투스는 페라라를 2009-10 시즌을 맡을 정식 감독으로 선임하였다.

유벤투스는 여름 이적시장에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지에구, 펠리피 멜루 그리고 2006 독일 월드컵 우승멤버였던 파비오 칸나바로, 파비오 그로소, 임대 계약으로 젊은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 마르틴 카세레스를 영입하는 등 막대한 투자를 하였다. 리그 초반 경기 4경기를 승리한 이후, 페라라의 행운은 유베가 조별 리그 예선 통과를 위하여 무승부를 거둬야한다고 점쳐뒀던 2009-10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 FC 바이에른 뮌헨과의 홈 경기에서 1-4 패배를 하였고 결국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면서 끝났다. 데르비 디탈리아의 라이벌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유베는 겨울이 지난후 힘을 잃었고, 특히 시칠리아를 연고로 하는 카타니아와 최근에 승격한 바리 같은 약팀들에 덜미를 잡혔다.

2010년이 된 이후 첫 경기였던 파르마 원정에서 승리했지만 밀란-키에보-로마에 3연패를 당하며 6위까지 떨어졌고 결국 경질되었다.

이탈리아 청소년대표팀 시절에는 2011년 UEFA U-21 챔피언쉽 예선에서 벨라루스에 1차전에는 2-0 승리를 거두었지만 2차전에서는 0-3 완패를 당해 본선진출에는 실패하였다.


6. 이야깃거리[편집]


이외로 한국과 인연이 있는데 1988 서울 올림픽때 발탁이 돼서 주전으로 뛰었고 나중에 2014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홍명보 감독 경질로 외국인 감독을 물색하던 당시 베르트 판마르베이크와의 감독직 협상 결렬 이후 유력후보로 급부상한 바 있었다. 당시 페라라는 UC 삼프도리아 감독 퇴진 이후 무직상태. 실제로 축협차원서의 접촉이 있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고# 페라라 본인도 의욕넘치는 반응을 보였으나, 결과는 울리 슈틸리케 선임으로 모처럼의 국가대표 감독행은 좌절되었다. 페라라 본인도 아쉬웠는지 서운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국, 맘에 들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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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파 리그/2020-21 시즌 조 추첨식에 등장하여 조추첨을 진행하였는데, 자신의 고향팀인 SSC 나폴리가 적힌 종이를 보자마자 입꼬리를 씰룩거리더니 이내 활짝 웃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 센터백, 라이트백[2] 사실 이 두 번째 이유가 더 컸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부터 페라라는 대표팀에서 아리고 사키 감독의 의해 제외된 1994 미국 월드컵 때만 빼면 줄곧 주전이라 할만했기 때문이다.[3] UEFA 유로 1992 때도 대표팀이 본선에만 진출했다면 페라라는 주전으로 출전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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