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킨 호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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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유래
3. 사회적 의미
4. 관련 어록
5. 예외


1. 개요[편집]


Chicken hawk

전쟁을 경험하지도 않았고, 군에 복무한 적도 없으면서 전쟁 혹은 그에 준하는 급진적인 군사활동을 적극 찬성하는 호전적인 정치인, 관료, 평론가 등을 뜻하는 정치적 속어다. 주로 미국에서 쓰인다.

직역하면 를 흉내내는 이라는 뜻이다. 미국에서는 겁쟁이를 닭, 즉, '치킨(Chicken)'이라는 속어로 부른다.[1] 또한 정치인들 및 정책 결정자들 중 대외 정책 및 특정 사안에서 강경한 의견을 내비치는 이들을 매파(Hawk)라는 속어로 부른다.[2] 치킨 호크는 이 두 단어가 합쳐져 만들어진 단어로, 한국어로는 '겁쟁이 매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유의어로 암체어 제너럴(Armchair General)이라는 표현도 있다. 군사 경험도 없으면서 의자에 걸터앉아 군사를 논하는 방구석 클라우제비츠라는 뜻. 다만 이 용어는 치킨 호크를 가리킬 때에도 있지만, 후방 지휘소에서 대전략만을 짜거나 보급선을 유지하는 등의 직접적인 전선에 나가지 않는 장성진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다. 예컨대 체스터 니미츠 등. 이런 경우에는 치킨 호크와 같이 비하하는 의미는 담기지 않는다.

2. 유래[편집]


본격적으로 이 용어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베트남전 시절이었다. 베트남전을 시작한 정부는 민주당 정부였지만 공화당은 강력한 반공주의를 내세워 안보 의제를 독점하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외교정책을 주장하는 민주당을 비애국자라고 공격하고 있었다.[3]

여기에 열 받은(?) 판사 출신 인디애나주 연방하원의원 앤드루 제이콥스 주니어(Andrew Jacobs Jr.)[4]는 공화당의 비애국자몰이에 대항하기 위해 의원들의 병역에 관한 자료를 모아서 발표했는데, 충격적이게도 공화당, 민주당을 가리지 않고 주전파의 대부분이 병역을 기피하거나 면제받은 사실이 밝혀졌다.[5] 반면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대외정책 등을 주장한 민주당 의원들과 온건파 공화당 의원들은 대다수가 참전용사들인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결국 공화당과 주전파 민주당원들은 "니들은 전쟁에 참여해보지 않았으니까 전쟁이 어떤 건지 모르지!" 하는 역풍을 맞고 유권자들의 반감을 샀다. 평범한 의원 중 한 명이었던 앤드루 제이콥스 주니어는 사이다 이것으로 꽤나 명성을 얻었다. 민주당뿐만 아니라 실제로 공화당에서 비애국자몰이를 자제하고 온건파로 행동했던 정치인들 중에는 참전한 경력이 있던 사람들이 많았다. 다만 공화당이 더 강경한 주장을 하긴 했지만 민주당 대통령이 베트남전을 시작했기 때문에 베트남전의 책임은 민주당이 지고 말았다.


3. 사회적 의미[편집]


이 사례는 단순히 입만 산 사람들에 대한 디스가 아니다. 여기에 내포된 진짜 의미는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이 반드시 겁쟁이 혹은 매국노이거나 안보관에 소홀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대로 전쟁 불사를 주장하는 강경한 사람이 꼭 투철한 안보관을 가지고 성실한 병역 이행을 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도 있다. 오히려 전쟁을 겪은 사람들이야말로 전쟁의 참담함에 질려버리거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등으로 고생하는 경우가 잦아, 전역 후에 반전운동가로 변신하거나 정치 입문 후에 전쟁에 관한 신중한 입장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존 매케인인데, 매케인도 베트남전 참전 도중 포로 생활을 해본 경험 때문인지 다른 것들은 보수주의자들과 뜻을 함께 하지만 전쟁 관련 부분에선 개입을 주장하는 다른 보수주의자들과는 달리 개입을 반대하거나 말을 아낀다. 그와 반대로 도널드 트럼프전장에 1미터도 가까이 안 가본 사람답게 고작 포로로 잡힌 주제에 무슨 참전용사냐고 거침없이 폭언을 퍼부은 적이 있다. 이후 매케인은 트럼프에 대한 불편한 관계를 숨기지 않았으며 이후 투병 중에 자신의 장례식에 트럼프를 초대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던 와중 2018년 5월 켈리 새들러 백악관 커뮤니케이션 담당 특별보좌관이 백악관 내 비공식 회의에서 매케인에 대해 곧 죽을 사람이라고 발언하여 미국 정계를 뒤집어 놓았다. 공화당, 민주당 모두 비판하고 있다. 매케인의 병세가 위중하여 매케인 측에서도 매케인의 곧 사망할 것에 대해 대비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타인이 이에 대해 곧 죽을 사람이라고 왈가왈부하는 것은 굉장히 큰 논란이 된다. 게다가 켈리 새들러 보좌관이 저 발언을 한 것은 물고문 지휘 논란에 휘말린 지나 해스펠 중앙정보국(CIA) 국장 내정자의 인준에 매케인이 반대한 것에 대해 반대자가 곧 죽을 테니 문제없다는 식의 발언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6]

군사학 자체에서도 '전쟁은 매우 어렵고 위험한 행동이므로 최대한 피하며 가장 마지막에 선택해야 한다', '전쟁을 잘 하려면 먼저 전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한다'라며 전쟁의 위험성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군사학을 제대로 배운 군인들은 함부로 전쟁을 찬양하거나 주전론을 펼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주로 주전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막상 전쟁이 일어나면 전선의 최후방(국가 핵심 지휘부의 지하 벙커)에 삼엄한 경비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를 받는 사람들이라는 점도 생각해볼 부분.[7][8] 이 점에서는 '전쟁은 늙은이가 일으키고 피는 젊은이가 흘린다'는 격언과 상통한다.[9]

이에 더해서 한국에서는 실제 전쟁, 특히 한국전쟁을 겪은 세대의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실제 참전용사들은 '그래도 우리가 겪었던 일이 또 일어나면 안 된다'라며 온건한 반응을 보이는 반면 그 아래 세대인 6~70대 정도의 젊은(?) 노인들이 오히려 더 강경한 주전론을 펼치는 사례도 생긴다. 대한민국어버이연합의 사례가 그것. 물론 이 사람들도 한국전쟁 이후 일상 속 하나하나에 세세하게 스며든 북진멸공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세대다. 살아온 환경을 생각하면 이해를 못할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이 전쟁에 나갈 것도 아니면서 전쟁을 너무 쉽게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

실제 군 출신에 참전 경력이 있는 공화당 인사들은 적어도 그 점에서는 개념이 잡혀있어서 걸프전에 참전했던 공화당의 온건파인 전 국무장관 콜린 파월[10] 조지 부시가 이라크전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확대하였을 때 반대할 정도이다. 공화당에서 진보적인 대통령인 아이젠하워도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였다가 대통령 취임 후 군비 축소 정책을 시행하였는데[11] 강경파 군부가 반발하자 '니들이 전쟁에 대해 나보다 잘 알어?'라고 군부를 디스할 정도이다.[12] 아버지 부시 대통령도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죽을 고생을 하였다. 저 죽을 고생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닌 게, 조금만 운이 없었다면 부시도 치치지마 식인 사건 희생자 목록에 이름을 올릴 뻔 했다. 그래서 전쟁에 섣불리 나서지 않고 외교전과 명분과 실리와 이해관계에 따라 처리한다.[13] 아들 부시와 달리 네오콘을 옆에 두고 밑도 끝도 없이 확전을 벌일 정도로 호전적이거나 강경한 성향도 아니다.

공교롭게도 용어가 만들어진 그 때와 지금이나 다수의 공화당 치킨호크들#처럼 실제 매도 호전적인 동물이라는 인식과는 달리 전장에서 군용으로 쓰인 적은 없다. 반면 참전 경력이 있는 민주당 비둘기파와 마찬가지로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는 비둘기는 고대부터 2차 대전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전령으로서 포화가 빗발치는 전장을 누비고 다니며 통신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 바 있어 이러한 점은 용어와 잘 맞아떨어진다. 물론 매 역시 능력도 없으면서 무턱대고 무모하게 싸움을 거는 동물이 아니라 기존의 경험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필요할 때만 공격을 시도하기 때문에 완전히 들어맞는 비유는 아니다.

4. 관련 어록[편집]


그런데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그는 연설할 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취하는 것이었다. 매우 수치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진지를 버리고 무기까지 내동댕이치며 도망쳤다. 그의 방패에는 금으로 '무운장구(무인으로서의 운수가 길고도 오래감)'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정말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모습이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데모스테네스 편.[14]


중국의 일의 형세가 참으로 급급하기만 하다. 이런 때에 안으로 스스로를 강화하면서 밖으로 견제하는 계책을 써서 한결같이 고려에서 했던 것과 같이 한다면 거의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 나라의 인심을 살펴보면 안으로 일을 힘쓰지 않고 밖으로 큰소리 치는 것만 일삼고 있다. 조정의 신하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가지고 보건대, 무장들이 올린 의견은 모두 강에 나가서 결전을 벌이자는 의견이었으니 매우 가상하다 하겠다. 그렇다면 지금 무사들은 어찌하여 서쪽 변경은 죽을 곳이라도 되는 듯이 두려워하는 것인가? 고려에서 했던 것에는 너무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니, 부질없는 헛소리일 뿐이다. 강홍립 등의 편지를 받아 보는 것이 무엇이 구애가 되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이 끝내는 반드시 큰소리 때문에 나랏일을 망칠 것이다.

광해군일기 정초본 166권, 광해 13년 6일 병자 3번째 기사 1621년 명 천계(天啓) 10년


It is only those who have neither fired a shot nor heard the shrieks and groans of the wounded who cry aloud for blood, more vengeance, more desolation. War is hell.

전쟁의 영광이란 건 완전히 헛소리다. 오직 총 한 번 쏴본 적 없거나 부상병의 비명과 신음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들만이 큰 소리로 더 많은 피와 복수, 파괴를 외친다. 전쟁은 지옥이다.

- 남북전쟁 당시 북군 측 장교였던 윌리엄 테쿰세 셔먼


겪어보지 못한 자에게 전쟁이란 달콤한 것이다.

- 에라스뮈스


늙은이들이 전쟁을 선포한다. 그러나 싸워야 하고 죽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 허버트 후버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병사의 멍한 눈빛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깊이 생각해 볼 것이다.

- 오토 폰 비스마르크


I would like to see the kind of bloody fool who is genuinely not afraid of war.

나는 진정으로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진성바보를 보고싶다.

- 니키타 흐루쇼프[15]


Война - дело молодых, лекарство против морщин.

전쟁은 젊은이들의 몫, 늙은이들 주름에 있어 둘도 없는 특효약.

-

빅토르 초이


5. 예외[편집]


그러나 실제 전투를 경험했다고 전부 반전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실제 전장에서 구르며 죽을 고비를 넘겨놓고도 주전론자가 된 경우도 꽤 있다. 오히려 이런 경우는 '나도 전쟁을 겪여봤는데 그거 별 거 아니다'라는 논리를 들먹이기도 한다. 커티스 르메이의 경우처럼 워낙에 천성이 호전적이라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이 전장에서 겪은 끔찍한 경험이 무의미한 전쟁 때문이었다고 인정할 수 없어서 일종의 PTSD 방어기제로 전쟁 자체를 긍정하게 되는 사례도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병역을 피하려고 뮌헨으로 도주한 경력이 있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통신병으로 안전한 후방에 있었다는 인식이 있어서 치킨 호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입대를 거부한 것은 단순히 군대가 무서워서가 아닌 다민족 국가의 군대에서 복무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임이 현대의 통설이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입대를 기피하자마자 독일 제국군에 앞장서서 지원했다. 또한 1차 세계대전기에는 무선 통신이 발달하지 않아서[16] 전화선과 모스부호 따위의 신호로 통신을 대신했다. 때문에 통신병은 안전한 후방의 꿀보직이 아닌 최전방에서 참호와 전장을 기어다니며 야전 전화선을 설치하고, 만약 폭격이나 여러가지 이유로 전화선이 끊기면 총포탄이 날아다니는 최전방에서 참호 사이를 뛰어다니며 명령을 전달하는 보직이었으며, 당연히 서로 적군의 통신병이나 전령을 끊으려고 포병, 장애물, 기관총, 독가스, 폭격, 저격수 등 온갖 방법을 동원했으니 시시때때로 적이 명확하게 노리고 쏘는 총포탄이 날아드는 무인지대를 뛰어다녀야 하는 통신병은 참호 속에서 휴식하면서 안전하게 있을 수 있는 일반 전투병보다도 더 위험한 위치였다. 4년간 통신병으로 복무하며 철십자 훈장을 수훈하고 독가스 흡입으로 성대에 장애까지 입었고 영국군의 손에 죽을 뻔한 적도 있기 때문에 치킨은 절대 아니며, 극단적인 매파로 보는 게 옳다.

히틀러와 비슷하게 1차 세계대전 당시 최전방 이손초 전선에서 2년간 복무했고[17] 여기서 수류탄에 맞아 중상을 입어 전역했다. 전간기까지 갈 것도 없고 본인도 파편이 몸에 수십개가 박혀 오늘내일 하다가 살아났는데 살아나자마자 신문에 찬전 사설들을 기고하는 등 선전활동을 시작했다.

군사적으로 매우 무능했기 때문에 치킨 호크로 인식되는 경우가 잦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당시 주도적으로 시도한 갈리폴리 상륙작전을 무참히 말아먹으면서 이런 이미지가 더 강해졌다. 그러나 한심한 군사적 능력과 별개로, 처칠은 기병 출신에 보어전쟁 당시 포로로 잡혔다가 자력으로 탈출한 적도 있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던 시절에도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집무실 의자에서 내 시체를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일갈하면서 공습이 연일 이어지던 런던에 끝까지 남아있었을 정도로 깡이 센 인물이었다. 거기에 괴짜에 가깝긴 하지만[18] 발명가 기질도 좀 있어서 근현대 전쟁을 장식한 전차도 이 사람의 작품이다.[19] 다만 장교시절 부상으로 인해 세이버를 들 힘이 없었고[20], 대신 마우저 C96 자동권총을 개인 구매해서 그걸로 싸웠다. 강경파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 전쟁을 겪어봤고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인물인 만큼[21] '치킨'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기 만용에 의한 계획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현실 감각도 없는 무뇌 '호크'였다는 비판은 받을 만한 이중적인 인물이다. 게다가 처칠도 말년에 가서는 "jaw jaw is better than war war"(아가리 싸움이 진짜 싸움보다는 낫겠지)라고 해서 전쟁을 가급적 피하고 협상을 추구하는 성향으로 변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수많은 승리를 안겨다 준 기갑전의 최강자 중 하나이며 인종 등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대놓고 평화를 혐오했다. 이러한 호전광 성향을 경계한 군부가 최후에 그를 암살했다는 음모론까지 돌 정도.

'적극적인 주전론자였으며 핵공격을 외치기도 했던 고위 장성'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최전방에서 직접 싸우며 많은 공을 세웠던[22] 인물이라 '치킨'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르메이는 주전론자이긴 했어도 전쟁 그 자체를 미화하거나 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싸워야만 하는 상황에서 애매하게 달려들면 오히려 안 봐도 됐을 피까지 더 보게 되므로, 뭘 해도 싸워야만 하는 상황이 닥쳤다면 처음부터 작심하고 화끈하게 밀어붙여야 결과적으로 피를 덜 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군인으로서 본인의 직무와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셈. 그러니까 전쟁이 가져다 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역설적으로 더 강하게 싸울 것을 주장한 사례로, 오히려 참전용사답게 전쟁의 참혹함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그 나름대로 전쟁의 참혹함을 최대한 줄이고자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눌러 적의 전쟁의지를 깎아내는 속전속결 기반의 주전론을 펼쳤던 것이다. 이 때문에 일반적으로 위선적인 성향을 띄는 매파와는 동일선상에 놓기 어려운 인물이다. 굳이 치킨 호크와의 연관점을 찾자면, 커티스 르메이는 "전쟁을 잘 아는 인물일수록 전쟁에 대해서는 조심스럽다"는 명제의 예외에 속하는 인물이라 더 자주 회자되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일본 육사와 육군대학을 졸업했으니까 인재라면 인재다. 의외로 젊은 시절에는 시베리아에서 정탐을 하거나 전투에 참전하는 등 실전적인 행보를 보였다. 계급이 올라갈수록 입만 살게 된 것이 문제지. 치킨 호크보단 똥별이라는 칭호가 어울리는 인물. 중일전쟁이나 임팔작전에서의 행태를 보면 처칠과 비슷한 현실감각 없는 주전파였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초 강경책과 민간인 학살 등을 주도하는 인물이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의 최정예 부대인 사예레트 마트칼에서 친형 요나탄과 함께 복무했으며, 형 요나탄은 복무 도중 엔테베 작전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즉 실제 최전선에서 뛰어보기도 했고 가족을 잃기도 하는 등 전쟁의 참혹함을 모르면서 강경책만 떠드는 치킨 호크와는 거리가 있으며 상술한 히틀러의 경우와 유사하게 극단적인 매파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네타냐후의 대 팔레스타인 강경책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압도적 군사력 차이 때문에 사실상 이스라엘인의 피해는 미미한 수준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일방적으로 학살할 수 있다는 점과 그런 위험부담 없는 강경책으로 지지율을 끌어올려 자신의 부정부패가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매파라기보다는 그냥 전형적인 부패한 정치꾼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 베트남 전쟁에서 구르다 고엽제 후유증을 앓게 된 이들의 모임이지만, 정치적으로는 폭압적이다 싶을 정도의 극우 성향을 띠고 있다. 이 경우는 베트남 전쟁과 여기에 참전한 한국군의 특수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선제적 조치나 과잉방어를 하지 않으면 거의 반드시 아군의 피해로 돌아오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이라는 특수한 환경 때문에 보통 전쟁에서는 허용되는 선제적 조치나 능동방어가 허용되지 않았고, 정글이라는 전장 때문에 그러한 제한이 반드시 적에게 허점을 크게 드러내주는 핵심요소가 되었으며, 가난한 한국군의 특수성 때문에 이 제약으로 인한 피해를 몸소 겪어야만 했다. 이때문에 적에 대한 적극적이고 무자비한 제압이 그냥 듣기좋은 구호가 아닌 진정으로 생존을 위한 길이라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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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 유명한 치킨 게임에서의 '치킨'도 이 '겁쟁이'라는 뜻을 잘 활용한 명칭이다.[2] 반대로 유화적인 의견을 내비치는 이들은 비둘기파(Dove)라고 부른다.[3] 물론 민주당 내에서도 전쟁불사를 주장한 의원들도 많았고 공화당 내에서도 온건한 외교정책을 주장하는 의원들도 있었다.[4] 중간에 재선을 관두고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력이 있는 진짜 참전용사다.[5] 물론 전쟁불사를 주장하던 공화당 의원들 중에도 2차대전 참전자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공화당에선 소수였고, 그들도 병역 면제를 받은 사람들을 비웃었다. 참전용사 출신 공화당 의원들의 숫자가 많았다면 지금 치킨 호크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6] 결국 2020 미국 대선에서 매케인의 부인 신디 메케인이 민주당 전당대회서 당시 바이든 후보를 지지하는 찬조 연설을 하였고, 메케인 생전 상원의원을 지냈던 애리조나 주에서 24년 만에 민주당이 대선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상원의원 선거에서 애리조나주 2석 모두 민주당이 가져간 건 덤.[7] 주전론을 주장하는 기성 정치인의 경우 나이가 중장년 이상이라서 이미 군 복무 시기가 한참 지난 경우가 태반이다. 때문에 본인들은 자원해서 최전선에 나서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어지간한 막장 국가가 아닌 이상 입대 신청을 받아주지도 않는다. 물론 이들 대부분도 이를 잘 알고 있기도 하고. 마지못해 자원을 받아줘 봤자 당연히 국가에선 이들을 최전선에 보낼 리가... 안전한 후방에서 보급, 행정 등의 분야에 종사하게 한다.[8] 단 전쟁에서 패배했을 시에는 전범이란 명목으로 대거 사형을 당하기도 하므로 후방에 있다고 해서 100% 죽지 않는 것은 아니다.[9] 2022년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 발발 이후 러시아의 반전시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현재 러시아에선 실제 전쟁에 나가야 하는 20-30대와 전쟁에 나갈 일 없는 50-60대 간의 세대 갈등이 일고 있는데, 바로 이것 때문이다. Война — дело молодых, Лекарство против морщин(전쟁은 젊은이들의 몫, 주름살에 둘도 없는 약). 원래는 키노의 노래 "태양이라는 이름의 별(Звезда по имени Солнце)"의 가사.[10] 걸프전을 지휘해 승리로 이끈 영웅이다.[11] 대선 공약부터 당시 미국의 골칫거리였던 장기화된 한국전쟁의 종결이었다.[12] 단순 디스가 아니라 아이젠하워의 권위를 이길 사람이 없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에게 "당신은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라고 감히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13] 실제로 걸프 전쟁 당시 목표로 하였던 쿠웨이트 해방이 끝나자 뒤도 안돌아보고 바로 이라크에서 빠져나왔다.[14]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의 대 마케도니아 정책에 있어 초강경 매파를 상징하는 웅변가였다. 그는 마케도니아와의 결전을 이끌어내고 스스로 모범을 보이기 위해 카이로네이아 전투에 참여하나, 막상 살벌한 전투 현장을 접하고는 제일 먼저 도망쳤다. 마케도니아를 몸소 전쟁에서 격파했으나 비둘기파로서 휴전을 주장했던 포키온과 대비되는 부분.[15] 흐루쇼프는 2차세계대전 당시 정치장교로서 일선 야전에서 근무했다. 특히 치열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군인들의 발목을 잡지 않고 최대한 자신이 할 수 있는 권한 내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독소전에서 전투기 조종사였던 아들을 잃기도 했다.[16] 단례로 영국은 그 환경에서 Mk 시리즈에 몇 미터는 되는 전파탑을 올리는 기행도 저질렀다.[17] 이 사람은 오히려 한국 군필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테크를 제대로 탔다. 전쟁 전에도 이탈리아는 징병제라 이 사람은 망명까지 했지만 끝내 징병을 피하지 못하고 20대 중반이란 나이에 입대하여 굴러야 했다. 이때는 평화로웠기 때문에 그냥 구르기만 하다가 만기전역. 그런데 전역하고 약 10여년 후인 30대 중반에 전쟁이 나서 다시 끌려갔다! 보통 한국의 군필자들이 슬슬 예비군도 끝나가고 군대의 망령에서 벗어난다 싶은 나이대에 전쟁이란 이유로 다시 군대에 끌려간 것이다![18] 당시 처칠이 맡던 해군 부서의 별명이 처칠의 우당탕탕 실험실(...)이었으니 말 다했다.[19] 하지만 처칠이 생각했던 전차란 사실상 육상전함 수준의 물건이었다고 한다.[20] 처칠은 기병으로 입대했는데, 복무 중 전투로 인한 어깨부상으로 오른쪽 어깨에 습관성 탈구가 있었다.[21] 물론 런던에 남아있으면서 대피소를 마련해두기는 했었다. 다만 그 대피소 바로 위에 정부청사 건물이 올려져 있어서 500파운드급 폭탄 한방만 직격당하면 건물과 대피소가 통째로 무너질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대피소따윈 없었던 것과 마찬가지 수준이었다.[22] 중,대령 시절에는 본인이 직접 폭격기를, 그것도 피격 및 격추확률이 가장 높았던 선두 기체를 몰고 나갔으며 (대공포에 직접 피격당한 적도 있다) 당시 생소했던 PTSD에 시달리는 병사들에게도 따뜻하게 대우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