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즈가타케의 칠본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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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활동
3. 칠본창 명단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5. 여담



1. 개요[편집]


賤ヶ岳の七本槍(しずがたけのしちほんやり/시즈가타케노 시치혼야리).

하시바 히데요시오다 노부나가 사후 후계자를 놓고 시바타 카츠이에와 시즈가타케 전투(1582년)를 벌일 때, 자신의 시종이자 경호를 담당하기 위해 가까이 있던 근위시동들에게 공을 세우라고 출전시킨 부하 7명이며 줄여서 칠본창(七本槍)이라고 칭한다.

'칠본창'이란 명칭은 히데요시가 자기 시동을 띄워주려고 만든 게 아니냐는 설이 대세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다케다 24장, 도쿠가와 4천왕, 구로다 24기 등과 같이 장수나 무사 몇 명을 묶어서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호칭을 만드는 캐릭터(?) 어필이 아주 흔했다.[1] 무사의 가문 출신이 아니었던 히데요시는 다른 다이묘와는 달리 자신을 섬겨오던 가신(후다이 가신)이 없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외적 이미지가 더욱 필요했음은 자명하다.[2]


2. 활동[편집]


임진왜란 때는 가토 기요마사[3]의 활약과 용인 전투, 칠천량 해전 등에서 활동을 보이면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다만 두 전투의 경우 조선군의 상황이 말이 아니었기에 별것 아닌 것으로 폄하되기도 한다, 특히 두 전투의 주역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 둘 다 이순신에게 당함으로써 더욱 과소평가되기도 하지만 용인 전투의 패배로 한양 탈환은 1여년이나 더 후로 마루어지는 동시에 조선의 남부지방 장악력이 공중으로 떠버렸고, 칠천량 해전으로 수군이 괴멸 상태에 빠지고 정말로 멸망 직전까지 갔다는 것을 보면 결코 폄하할 수 없는 이들의 대성과이다. 조선으로선 천만다행으로 두 전투 다 이순신 의 활약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칠본창의 우두머리 격인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임진왜란 초기 제5군을 이끌고 가토의 2군이 함경도 쪽으로 진출할 때 후방을 맡아 2군을 지원하는가 하면, 전쟁 와중에 경상도와 충청도 등을 돌아다니며 (전국시대 국내전 관행대로) 약탈, 학살 등 온갖 횡포들을 부리다가 경상북도 영천에서 권응수 장군과 싸운 전투에서 패해 영천성을 빼앗겼다. 이후 별 다른 큰 소득을 얻지 못하다가 명나라와 왜가 강화를 맺자 일본으로 돌아갔다.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다시 조선에 출병했던 가토 기요마사와 가토 요시아키, 와키자카 야스하루와 달리 후쿠시마는 조선에 다시 출병하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 충청도 공격에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오와리국 영주 지위를 받았다.

말년은 대부분 좋지 않았다. 전후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서 싸우는 과정에서 히데요시의 충복들이었던 만큼 일부는 서군에 합류했다 패망했고, 동군으로 합류한 인물들도 단지 미츠나리가 싫어서 미츠나리를 제거할 목적으로 합류한 거라 전후에도 노골적인 親도요토미 행보를 보인 탓에 숙청[4]당했기 때문이다. 칠본창 멤버 중 와키자카 야스하루만 제대로 살아남았는데 원래부터 親도쿠가와 파벌이었으나 미츠나리 측이 와키자카를 무리해서 붙잡던 경우라 가능했다.


3. 칠본창 명단[편집]


근위시동의 우두머리이자 연장자로 히데요시의 조카뻘인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는 고쿠다카 5천 석, 나머지는 각각 3천 석이 주어졌다. 아무리 큰 무공을 세웠다고 해도 첫 출전치고는 파격적인 논공행상이었다. 히데요시를 오랫동안 섬겼고 이 전투에도 참전한 야마우치 카즈토요가 3500석에서 3백 석을 더해 3800석을 받았다.



4. 대중매체에서의 등장[편집]


전국무쌍 시리즈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정식무장이지만 나머지는 클론 무장.

태합입지전 5에선 카스야 사네오를 제외한 7명이 모두 등장한다. 무력쪽에 모두 특화되어있으나 마사노리, 기요마사, 요시아키 정도만 전장에서 쓸 만하고 야스하루는 미묘, 나머지는 그냥 쿠소 수준이다.

한국 사극에서는 불멸의 이순신에서 가토 기요마사,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가 등장한다. 하지만 작중 취급이 잡몹 취급에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성 전투 이후 공기화.

그나마 징비록에서 가토 기요마사가 주역 인물 중 하나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조연급으로, 후쿠시마 마사노리, 가토 요시아키가 지나가는 말로 언급됨으로써 등장하였다. 물론 가토 기요마사는 잔혹한 개그캐릭터가 되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역시나 야라레메카신세다.

일본 사극에서는 가토 기요마사후쿠시마 마사노리는 히데요시와 세키가하라가 나오면 반드시 등장한다. 아무래도 말년이 그런지라 주인공이 되긴 힘들고, 주인공이 누구냐에 따라 비중이 달라진다. 다른 칠본창은 듣보잡. 카타기리 카츠모토는 예외로 오사카 전투에서 도요토미, 도쿠가와 사이의 중재를 맡아서 오사카 전투의 비중이 커질수록 그의 비중도 커진다. 아오이 도쿠가와 삼대의 경우 히데요리의 측근으로 가토, 후쿠시마보다 비중이 훨씬 높았다. 하지만 역사대로 도요토미측에서 버림받고 이에야스에게 협조했고, 히데요리가 죽은 후 따라 죽는다.

드라마 사나다마루에서는 가토 기요마사, 후쿠시마 마사노리가 등장하며 가타키리 가츠모토와 히라노 나가야스 또한 비중은 높지 않지만 쭉 등장한다. 히라노 나가야스는 히데요시의 경호와 오사카의 치안을 맡는 역할로, 가타키리 가츠모토는 외교관의 역할로 등장한다. 히라노야 그냥 가볍게 출연하는 느낌이지만 가타키리는 계속 등장한다. 물론 무게감은 가토, 후쿠시마와 비교할 수 없다. 도쿠가와 삼대와 달리 무게감도 없고 능력도 없지만 도요토미에 대한 충성심은 같다.

인풍전대 허리케인저의 적 세력인 우주인군 쟈칸쟈의 간부진들의 직위이자 칭호인 ~의 창의 모티브가 되었다. 아마 국내 기준으로 볼 때 나름 생소한 칠본창을 모티브로 한 대중매체중에선 제일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예외적인 경우를 꼽자면 라이트노벨의 탈을 쓴 헤비노벨인 경계선상의 호라이즌에서는 기존의 칠본창 멤버에서 타케나카 한베에[5], 이시다 미츠나리, 하치스카 고로쿠를 더한 하시바 히데요시의 사병부대인 십본창이라는 이름으로 전원 출연. 아무래도 세키가하라가 최종 무대로 예정되어 있다보니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가토 기요마사의 비중이 가장 높으며 그 다음으로 유일한 남자이자 정상인인카타기리 카츠모토가 저 둘과 함께 묶여서 비중을 챙기는 중이다. 그 외 나머지 멤버들도 나름대로 얼굴을 비추는 편.

세키로: 섀도우 다이 트와이스에서는 이것이 모티브가 되어 아시나라는 가상의 국가의 칠본창이 존재한다. 게임 내에서는 야마우치 시키부 토시카츠, 오니와 슈메 마사츠구 2명을 만날 수 있으며, 모두 플레이어들을 한 두 방에 삭제시킬 정도로 강력한 중간보스로 유명하다. 칠본창은 지금의 아시나가 세워지는 데 큰 공로를 세웠으나 지금은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한다.

인왕 2에서는 딱히 비중은 없고 도키치로와 최종결전에서 중간보스로 하나씩 등장한다. 그래도 나름 유명한 무장이라 전용 세트가 존재한다.

명량한산: 용의 출현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토 요시아키가 등장했다. 물론 명량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이순신을 두려워하며 전투에 소극적으로 나서다가 전투 종반에 충파에 깨져나가는 역에 가토 요시아키는 그냥 지나가던 병풍 신세다. 한산: 용의 출현에서는 각각 최종보스와 조역급 악역으로 등장한다. 물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준비란 준비 다 해놓고 신나게 털려버렸고, 가토 요시아키는 특유의 오징어 투구는 구현되었으나 와키자카와 사이가 나쁘다는 동인설정에, 결전병기였던 텟코센을 와키자카의 기습에 털린 뒤 쓸쓸히 돌아가는 아낌없이 퍼주는 호구가 되었다.


5. 여담[편집]


후쿠시마 마사노리는 칠본창으로 묶인 멤버들 이야기를 듣고는 "와키자카 따위랑 동급 취급이라니!"이라고 불쾌해 했다. 뒤에서 그런 것도 아니고 앞에서 대놓고 그랬다고 한다. 한국에서 유명한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당대 일본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잘 보여주는 부분. 하지만 후쿠시마는 와키자카보다도 전공이 훨씬 적다. 다만 후쿠시마는 모계로 히데요시의 친척이라서 아무 혈연이 없는 와키자카 등을 동급으로 놓는게 마음에 안 들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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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만이 아니라 전근대 동아시아 문화가 다 그렇듯 중국에서부터 시작됐다. 후한의 운대 28장, 당나라의 능연각 24공신, 삼국지의 사마팔달, 죽림칠현, 오호대장군 등과 여말선초의 두문동 72현 전설, 사육신생육신 같은 것이 예시[2] 그러나 이런 이미지들의 다수는 에도시대 이후에 창작된 경우가 적지 않기에 이것이 당대의 창작이라 확신할 수는 없다.[3] 그나마도 의병장 정문부곽재우에게 크게 패했고, 임진왜란 육군 마지막 전투인 울산성 전투에서는 울산성을 방어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조명연합군의 울산성 고립 전략에 걸려 큰 피해를 입었다.[4] 물론 워낙 한가닥 하던 인물들이고, 동군을 승리로 이끈 전과를 인정하여 당사자를 직접 숙청하진 않았다. 칠본창 본인들이 죽고 그 후손들에게 알음알음 보복성 압력을 가해 서서히 집안을 몰락케 했다. 이들에게 세키가하라 전투에서의 승리는 장기적 차원에서 피로스의 승리가 된 셈이다.[5] 쿠로다 칸베에도 이중습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