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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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정유재란 전투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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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음력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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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15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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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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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7월

절이도 해전[朝][明]

9월

사천성 전투[日] · 2차 울산성 전투 · 왜교성 전투[日]

11월

노량 해전[朝][明] · 남해왜성 소탕전[朝][明]
각주: [朝]: 조선군의 승리 / [日]: 일본군의 승리 / [明]: 명나라군의 승리



칠천량 해전
漆川梁 海戰

파일:external/www.ptsisa.com/4455_4311_2532.jpg

거제 칠천량 해전 공원 전시관에 전시된 칠천량 해전 당시 해전도
시기
1597년 8월 27일 그레고리력
1597년 7월 15일 음력
장소

조선 경상도 칠천량
(現 경상남도 거제도칠천도 사이 해협)
원인
원균자승자박(自繩自縛)
교전 세력
조선
(수비)


일본
(공격)


주요 인물
지휘관

파일:조선 어기.svg 원균 (삼도수군 통제사 겸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1]
지휘관

파일:사츠마 시마즈 가문 문장.svg 시마즈 요시히로 (대장군)
참가자}}}
파일:조선 어기.svg 이억기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파일:조선 어기.svg 최호 (충청도 수군절도사)
파일:조선 어기.svg 배설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파일:조선 어기.svg 김완 (조방장)
파일:조선 어기.svg 배흥립 (흥양 현감)
파일:조선 어기.svg 우치적 (순천 부사)
병력
판옥선 160척
거북선 3척
수군 병사 21,000명
세키부네+아다케부네 1,000척 추정
피해
판옥선 148척 침몰실종[2]
거북선 3척 침몰
최고 지휘관 전사(추정)
7000-8000명 전사
세키부네 8척 침몰[3]
일본수군 500명 전사
가토 요시아키 부상[4]
결과
일본군의 압도적인 승리
조선수군 남해안 제해권 완전 상실
[5]
영향
일본군 한산도 통제영 점령 및 파괴
일본군의 남해안 제해권 완전 장악
정유재란의 확전(擴戰)

1. 개요
2. 배경
2.1. 일본군의 전략 진화
2.2. 조선 수군의 약화
2.3. 이순신의 파직
2.4. 이순신의 부산진공작전 및 압송
2.5. 원균의 1차 출정: 기문포 해전
2.6. 원균의 2차 출정: 가덕도 해전
2.7. 원균의 3차 출정: 서생포 해전
2.8. 권율이 곤장을 때리다
3. 전개
3.1. 7월 14일: 무의미한 추격으로 체력을 낭비하다
3.2. 7월 15일: 경계를 태만하여 기습을 허용하다
3.3. 7월 16일 새벽: 소수의 기습에 퇴각을 결정하다
3.4. 7월 16일 오전: 스스로 배를 불사르다
4. 평가
4.1. 원균에 대한 평가
4.2. 권율에 대한 평가
4.3. 선조에 대한 평가
4.4. 배설에 대한 평가
4.5. 이순신의 함대 재규합,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
5. 경과 요약
6. 대중매체에서
7. 기타



1. 개요[편집]




2021년 4월, 국방TV(국방홍보원)의 전투 요약

정유재란 당시였던 1597년 (선조 30년) 7월 16일 새벽, 경상도 거제도칠천도 사이의 해협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일본군의 기습을 받자, 삼도수군통제사 원균막다른 해협으로 함대를 몰아넣고, 함대를 스스로 불사르고, 육지로 병력들을 내려 흩어지게 해 모두 학살당하게 한 패전.[6]

후폭풍은 엄청났다.[7]
  • 1월 12~14일 일본군의 부산 재상륙부터를 정유재란으로 보기도 하나, 양측은 이전과 똑같이 대치 및 국지전만 있었다. 하지만 7월 16일 이 해전으로 힘의 균형이 깨지면서부터 일본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즉 정유재란의 시작이 된 전투다.
  • 조선군의 바다 방어선이 뚫림으로써, 전라도가 왜군에게 장악당했다.[8]


2. 배경[편집]



2.1. 일본군의 전략 진화[편집]


일본 수군도 바보는 아니어서 '왜 자꾸 조선 수군에 패하는지'를 분석해 반영했다.
  • 판옥선세키부네보다 훨씬 크고, 화포/총통 발사가 주력이며, 제자리 선회가 되며, 장갑이 견고하다. 따라서 판옥선 1척당 세키부네 5척은 붙어서 화포/총통을 무력화하고 백병전을 벌여야 한다.
  • 세키부네는 첨저선이고, 판옥선은 평저선이다. 세키부네가 더 빠르므로 거리를 살살 벌리며 전투를 피하면 판옥선의 노꾼들을 지치게 할 수 있다. 대신 세키부네는 이동의 곡률반경이 커서 내해에서의 싸움은 불리하므로, 내해에서의 해상전은 피하고 외해에서의 해상전은 할 만하다.
  • 조선 수군에 맞설 전력을 강화하기 위해 대형 선박인 아다케부네를 다수 건조하였다. 아다케부네는 판옥선에 대항하기 위한 선박이었으며 히데요시는 조선(造船) 전문가인 구키 요시타카에게 군선 설계를 맡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전국의 모든 다이묘들에게 기한을 정하고 건조 척수를 할당하여 군선을 건조하게 하였다.
  • 조선 수군은 조선군 중 최정예로, 해전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이다. 수군 대 수군으로는 승산이 없으니, 육군과 합동해서 움직여야 한다.
  • 낮에는 육지-해안으로 피해 싸움을 피하고, 어둠을 틈타 밤에 기습하도록 한다.
  • 해안지역에 많은 감시병을 배치하여 조선 수군의 움직임을 감시하고 서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따라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의 활동을 손바닥 보듯이 하던 예전과는 달리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동태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 초량목을 봉쇄한다. 부산포 해전 때는 어이없이 여기가 열려 있어 조선 수군이 장사진으로 들어와 부산포의 일본선박들을 격멸하고 돌아갈 수 있었다. 초량목만 지키면 부산포의 함선들도 보호하고, 조선 수군은 절영도(현 영도구)의 외해에서 힘든 싸움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안골포-웅포-가덕도 등에 왜성들이 촘촘히 건축된 것이 이순신에게도, 후임 원균에게도, 조선 수군의 7차례 부산 공략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된다. 왜성을 힘들여 공략해봐야 일본 육군이 쉽게 다시 차지하여 소모적이다. 또한 왜성들을 공략하며 순차적으로 부산포도 치자면 시간이 허비되는데, 그 동안 왜성의 일본군들이 부산포에 알려 부산포가 대비하게 된다.
  • 1592년 9월 1일, 이순신의 부산포 해전은 안골포-가덕도가 비어 있었기에, 조선 수군이 숙박하여 쉬어가며 부산포를 타격할 수 있던 것이었다.
  • 1593년 2월 10일, 이순신의 웅포 해전은 안골포 일대에 상륙전까지 감행했으나 왜성을 뺏진 못 하고 반신불수를 만드는데 그쳤다.
  • 1594년 10월 1일, 이순신의 장문포 해전은 안골포-가덕도 맞은편 거제도에 조선 수군의 정박 거점을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 1597년 2월 10일, 이순신의 부산진공작전은 안골포-가덕도를 패싱하여 절영도에 정박지점을 잡고 부산포를 때렸다.
  • 1597년 3월 9일, 원균의 기문포 해전은 졸전으로 유명하지만, 거제도 쪽에 왜군이 오는 것에 대한 극렬한 반발 반응으로 볼 수도 있다.
  • 1597년 3월 29일, 원균은 육군으로 안골포-가덕도를 공략해줄 것을 조정에 요청하나, 당시 육군 능력상 무리였다.[9]
  • 1597년 6월, 원균이 안골포-가덕도를 때렸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 1597년 7월, 장문포~기문포~영등포도 정박이 어려워지자, 원균은 칠천량과 옥포에 정박하며 멀리 외해로 힘들게 부산을 공략하는 수 밖에 남지 않았다.


2.2. 조선 수군의 약화[편집]


갑오년(1594)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돌아 수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로 인해 임란 개전 후 최대 2만 명 이상이던 병력이 을미년(1595) 봄에는 4천1백여 명으로까지 줄어들었다. 특히 이때 사망자의 대부분은 임진왜란 첫해 해전에서 승리를 경험했던 전투력이 높은 병력들이었다.[10]
  • 수군은 태반이 역질에 죽어 선사(船師)가 외롭고 허약하니 적을 소탕하는 것은 고사하고 전선도 운용하기 어렵다.[11]
  • 노직(盧稷)이 아뢰기를, “연해에 전선(戰船)이 비록 많으나 만약 배를 부릴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운행하여 수전(水戰)을 독책(督責)할 수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수군(水軍)의 번가포(番價布)를 경강(京江)에 사는 노젓기에 능숙한 사람에게 주어 격군(格軍)을 삼아야 합니다.”[12]
당시에는 협상 시기라 큰 교전이 없어서 눈에 띄는 변화를 감지하기 힘들었으나 이 영향은 장문포 해전 때부터 서서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였으며 이와는 반대로 일본군은 전술 교리가 향상되고 요충지를 점령하여 곳곳에 요새를 만들고 대포를 설치하는 방식으로 수군의 움직임을 견제하였기 때문에 조선 수군은 임진년 때처럼 적극적인 공세를 함부로 펼치기 힘든 상황이었다.

한편, 수군의 병력 부족 문제는 정유년(1597) 봄까지 지속되었는데 이를 해소하기 위해 병력을 충원하는 과정에서 동년의 3월 기록에 따르면 호남 지방이 수군을 징발하는 문제로 잡상인의 통행마저 없어져 기존 도로망이 사라질 정도였다고 한다. 결국 칠천량 해전 한달 전인 6월 중순에 와서야 인력 충원을 어느 정도 완료하였으나 이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한 인원들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초기의 수군이 보여준 승전에 고무된 나머지 강화 교섭기 동안 위기를 맞은 조선 수군의 실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고 이는 이순신과 원균에 대한 부산 앞바다 출전의 무리한 강요로 이어졌으며 결과적으로 이러한 요인들이 조선 수군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2.3. 이순신의 파직[편집]


편지가 오고 가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던 시대이므로 사건의 전후관계에 유의. 조선 조정 중심으로 정리. 참고문헌

12월 27일, 조선 조정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2일에 부산왜영에 큰 불을 내 가옥 1천호, 화약창고 2개, 군량 2만6천섬, 왜선 20척을 불태우는 공을 세웠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선조는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다음날, 제찰사 이원익의 선전관인 김신국이 '이는 사실과 다르다. 군관 정희현이 부산왜영을 기습한 공인데, 이순신의 군관이 물건 운반으로 부산에 도착해 이를 파악해 전달했고, 이순신이 공을 가로챈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에 선조는 매우 격노했고, 류성룡조차 이순신을 '게을러진 것'이라 평했다.

1월 1일, 조선 조정에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보고가 올라왔다. 12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편지를 전했으며, "가토 기요마사의 7천 군사가 12월 4일 대마도에 도착했다. 바람에 따라 거제/기장/서생포 중에 상륙할 것이다. 조선 수군을 거제도로 옮겨만 두어도[13] 상륙에 압박을 주어 그가 태합에게 호언장담했던 것이 거짓이 되어 오만함이 벌받게 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나 고니시가) 조선 정부와 계속 협상이 가능하다"는 내용이었다.[14] 1월 2일 비변사 회의를 통해 선조는 이순신에게 명령하기로 결정하고, 1월 3일 새벽에 명령서 전령이 출발했다. 1월 6일, 명령서가 한산도로 왔을 때, 이순신은 부재중이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영의 공무로 여수에 있었다가 돌아오는 길에 풍랑이 심해 남해도에 정박해 있었다. 명령서는 늦어도 1월 10일 이전에 이순신에게 도착했고, 이순신은 답변으로 "신이 수군을 뽑아 거느리고 부산 근처로 나아가 주둔해서 적이 오는 길을 차단하고 일사의 결전을 벌여 하늘에 사무친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만일 지휘할 일이 있거든 다시 알려주십시오"라 했고, 조정에 이 편지가 도달하자 모두 장하게 여겼다.[15]

1월 12~14일,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 410척이 본격적으로 조선에 재상륙했다. 이를 정유재란의 시작으로 보곤 한다.

1월 14일, 도원수 권율이 (이 때까진 가토가 넘어온 사실까진 모른 채) 다시금 한산도를 직접 찾아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지만, 이순신은 응하지 않았다.

1월 19일, 조선 조정에 김응서의 장계가 올라왔다. 1월 11일에 고니시 유키나가가 통역관 요시라를 통해 "나 고니시는 가토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그가 며칠 내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다. 제발 수전에 능한 조선 수군이 가토를 해상에서 없애달라.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내용의 편지를 주었다는 것. 선조/조정은 이순신에게 공격을 명령한다.

1월 21일, 조선 조정에 도체찰사 우의정 이원익의 '1월 12~14일, 일본군 재상륙' 보고가 도착했다. 그리고 같은 날, 조선 조정에 원균의 "내가 삼도수군통제사였으면 가토를 잡고 일본군 재상륙을 막았다"는 보고가 도착했다.[16]

1월 23일, 조선 조정에 김응서의 보고가 도착했다. 1월 13일에 요시라가 "가토가 이미 도착했다. 어째서 조선 수군이 그냥 놔두었는지 모르겠다"고 원망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선조는 "이순신이 출정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이제 끝났다"고 극언하며 격노했고, 이 날부터 이순신 책임론이 불거진다. 1월 27일, 선조는 이순신에 대한 탄핵을 논의했다. 원균을 전라병사에서 경상도통제사로 임명하고,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직책은 유지시키기로 했다.

2월 1일, 조선 조정에 이순신의 보고가 도착했다. 1월 19일 선조의 출정명령에 대한 답변서로,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이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라고 출전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타이밍이 불난집에 부채질하는 꼴이 되어, 사헌부는 통제사 이순신을 법률에 따라 처벌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마침내 2월 6일 선조는 이순신의 압송명령을 내렸다.


2.4. 이순신의 부산진공작전 및 압송[편집]


2월 9일, 도원순 권율, 경상우병사 김응서, 통제사 이순신, 경상우수사 원균 등은 200척(그 중 판옥선은 63척, 나머지는 소선)의 조선 수군을 한산도에서 출발시켜 장문포로 이동시켰다.

2월 10일, 해뜰 무렵 장문포에서 배를 띄웠다. 안골포는 왜적 1천명, 선박 40척이 있었고, 가덕도는 왜적 5백명, 선박 20척이 있었으나, 이들을 패싱하고 바로 부산포로 갔다. 미시(오후 2시경), 200여척의 조선 수군은 초량목을 지나 부산포로 진입해 당시 1000척에 달하던 일본 배들에 총포, 화포, 불화살을 가해 파괴했다. 구체적인 양측의 결과는 알려져 있지 않다.[17] 이순신은 이 부산진공작전의 소상한 내용을 장계로 올렸다고 하나 선조실록에 실려있지 않고, 선조실록엔 원균이 이 전투가 패전이었다고 주장한 장계만 기록된다.[18]

2월 13일, 이순신 함대가 돌아오며 가덕도에 잠시 물을 구하러 정박하자, 가덕도의 왜군이 기습해서 초동 1명이 전사하고 병사 5명이 잡혀갔는데, 이순신은 이에 극대노하여 가덕왜성에 포화를 퍼부으며 처음으로 상륙 공성전을 벌였고, 부산에 있던 요시라가 직접 가덕도까지 와서 사과하고 협상하여 양측의 포로들을 교환한 후에야 돌아갔다.

이 직후 가덕도에 선조가 보낸 선전관이 새 통제사로 임명된 원균을 대동하고 도착하였고, 한산도 본영으로 이동한 뒤 통제사직의 인수인계를 시킨 뒤 이순신을 서울로 압송했다. 이로써 2월 26일, 이순신의 후임으로 원균이 임명되었다. 원균은 통제사 이순신이 힘겹게 키워 온 판옥선 134척, 거북선 3척, 병력 1만 7천 명, 군량미 9914석, 벼 500섬, 화약 4천 근[19], 각 전선에 탑재된 총통 제외한 여분 총통 300자루, 건조작업이 진행되던 새로운 판옥선 48척 등을 인수인계받았다.


2.5. 원균의 1차 출정: 기문포 해전[편집]


3월 9일, 거제도 기문포에 일본군 3척이 정박하자, 원균이 첫 출정하여 이들을 몰아냈으나 처음으로 판옥선을 빼앗기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기문포 해전 문서 참고.


2.6. 원균의 2차 출정: 가덕도 해전[편집]


이후 원균은 앞서 이순신이 작전에 대한 의견과 본인에 대한 충언을 듣는 창구로 사용했던 운주당이라는 별당을, 기생 끼고 술판이나 벌이는 곳으로 바꾸어, 사령관들의 신망을 잃게 된다.

3월 29일, 조선 조정에 원균의 장계가 올라왔다. 그 내용은 4, 5월 사이 육로와 수로에서 남해안 왜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가덕포와 안골포, 죽도, 부산의 왜군이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특히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은 3, 4천명에 불과했다. 그의 표현으로 “만약 육군이 몰아낸다면 수군이 대를 쪼개듯 쉽게 섬멸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의 추산대로라면 조선의 군사는 정병 30여만 명을 동원할 수 있고, 늦봄으로 땅이 단단하여 말들이 잘 달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원균의 방안은 외견상 육군과 수군의 동시출병이었으나, 사실상 육로에서의 선제적 조치를 강조했다.

이는 통제사 되기 직전에 올린 상소에선 해로차단 전술을 주장한 것과 달리 수륙병진 전술로 변경한 것이었고 이 같은 내용의 장계에 대해서도 조선 조정은 작전 자체에 대해서는 이해하였으나 비변사와 이원익, 선조는 성공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고 현장의 도원수 권율에게 판단을 일임했다.

4월 30일 시마즈 요시히로가 가덕도에 주둔했고,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부산에 도착하였다. 당시 와키자카 야스하루 측 기록에 따르면 4월에 일본 병선 수천 척이 대마도에서 부산을 향하고 있을 때, 조선 수군 수백 척이 거제도에서 부산으로 진격해서 가로막고자 했다. 이때 큰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어 조선 수군이 결국 거제도로 되돌아갔다.[20] 5월 초 도도 다카도라가 부산에 도착했고, 5월 22일에는 전 군대가 오사카를 출발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요시라를 통해 6~7월 호남진격설을 흘렸다. 실제로 6월이 원래 목표였으나, 준비 부족으로 7월 보름부터 일본군이 움직였다.

5월 8일, 조선 조정에 도원수 권율의 보고가 올라왔다.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세 때문에 조선 수군이 고단한 것은 원균의 주장과 같으나, 섣불리 싸우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내용이었다. #

5월 12일, 권율은 조선 수군에 의한 공격을 강조하는 장계를 올렸는데 이는 그간 경험으로 육상에서와 달리 조선 수군이 우위에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균은 이전 장계에서 육상에서 대규모 군사를 동원한 선제공격을 전제로 했던 만큼, 특히 수군 단독의 공격에는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원균 자체의 역량 문제이기도 했으나 조선 수군은 당시에 전염병으로 인한 피해를 온전하게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고 일본군 역시 대응책을 충분히 준비했던 만큼 섣불리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이를 두고 비변사가 전략을 제시한다. 수군을 3등분 하여 절영도까지 오가며 계속 강습 타격하는 왕래가 끊이지 않게 하면, 일본군이 군량미 및 군인이 넘어오기 곤란해질까 두려워 마음대로 횡행하지 못하게 될 것이란 전략이었다. 다만 이는 수군이 한산도~부산포 사이의 중간 정박 지점이 고착화되어 일본 육군의 습격을 받을 수 있어 이뤄지지 않았다. #

6월 10일, 도체찰사로 나가 있는 우의정 이원익이 전략을 제시하여 받아들여진다. 수군을 2등분하여 절반은 한산도에서 견내량을 지키고, 절반을 이끌고 부산포 쪽을 강습하면, 안골포-가덕도가 부산포로 나간 선박들의 배후를 치려 해도 한산도의 군세가 이들을 압박할 수 있다는 것. # 조선 조정은 원균에게 병력 5천 명까지 지원하며 압박을 넣었다.[21][22] 우의정 이원익과 도원수 권율 등이 종사관 남이공을 원균에게 보내어, 견내량을 지키면서 부산포를 강습하라 명했다.

6월 18일, 원균이 함대 100여척을 이끌고 2차 출정을 나섰다.

6월 19일, 안골포(오늘날 부산신항)에 이르러 적에게 포격하면서 적선 두 척을 빼앗았다. 일본 수군들은 포격에 배를 버리고 해안으로 가서 포를 쏘다가, 조선 수군이 빠지자 다시 배를 타고 반격하여 왔으나, 원균이 거느린 전선들은 이를 물리쳤다. 오후, 조선 수군이 가덕도 방면으로 더 나아가자 안골포를 구원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다카하시 무네마스 등의 일본 수군과 정면대결을 펼쳐 양측이 피해를 입었다. 조선 측은 평산포만호 김축이 눈 부상을 당했고, 보성군수 안흥국이 전사했다. 이에 조선 수군은 칠천량으로 돌아왔다가 한산도로 귀환하였다.


2.7. 원균의 3차 출정: 서생포 해전[편집]


6월 26일, 비변사는 수군을 원균의 본대, 배설의 경상우도 부대, 이억기의 전라우도 부대, 최호의 충청도 부대 넷으로 나누어, 한산도-견내량을 지키면서 오랫동안 바다에 있으면서 서로 관측-교대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

6월 28일, 조선 조정에 권율도 해당 전략이 유효하다고 보았다. "이런 식으로 교대하여 해상을 장악하면, 적들이 감히 바다를 건너지 못할 것이고, 양식이 떨어져 진퇴가 궁색해질 것"이라 했다. #

7월 4일, 원균이 이에 함대 100여척을 이끌고 3차 출정을 나섰다.

7월 5일, 칠천도에서 1박했다.

7월 6일, 옥포에서 1박했다.

7월 7일, 부산 다대포를 강습했다. 일본 수군의 배 8척을 불살랐고, 여기에서 1박했다.

7월 8일, 부산 절영도 외해 방면으로 진출했다가 대마도 방면에서 접근해 오는 일본 수송선단 수백여척과 조우하자 퇴각을 결정한다. 하지만 부산 외해에 적합하지 않은 평저선인 판옥선들이 풍랑에 표류하여 판옥선을 20여척 가까이 상실한다. 표류한 판옥선 중 5척은 두모포(오늘날 부산 기장군 죽성리)에, 7척은 서생포(오늘날 울산 울주군 서생면)에 착륙해 전멸하게 된 사실이 알려졌다.[23]

7월 9일, 조선 수군은 거제 내해를 지나 한산도까지 군을 물린다.


2.8. 권율이 곤장을 때리다[편집]


부산으로의 해로차단 명령 미이행과 판옥선 20척과 정병 3천을 잃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한 도원수 권율은 전령을 보내 원균을 곤양(현 사천시)으로 불렀다.

7월 11일, 권율은 원균의 곤장을 치면서 "국가에서 너에게 높은 벼슬을 준 것이 어찌 한갓 편안히 부귀를 누리라 한 것이냐? 임금의 은혜를 저버렸으니 너의 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고 곧 도로 보내었다. 이날 밤에 원균이 한산도에 이르러 유방(留防) 하는 군사를 있는 대로 거느리고 부산으로 향하였다.[24]

  • 위 서술은 조경남의 난중잡록 기준이다. 류성룡의 징비록에선 칠천량까지 후퇴한 상황에서 권율이 고성으로 불러 곤장을 치고 돌아가게 만들었고, 원균은 더욱 화를 내며 술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그 날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다만 류성룡은 칠천량 해전을 8월 7일로 적어 신뢰도가 낮다. 징비록과 다른 자료들을 고루 참고한 선조수정실록이 원균이 곤장을 맞은 시점은 출진 전으로 서술했다.
  • 권율이 11일에 곤양에 있었음은 난중일기로 증명되지만[25], 15일의 행적은 확실치 않다.
  • 원균의 아들인 원사웅까지 같이 곤장을 맞았다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근거가 없다. 이 주장을 하는 쪽은 KBS 프로그램 <역사에의 초대>를 근거로 제시하는데, 정작 그 프로그램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
  • 원균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권율의 이 곤장 처벌에 대해 다른 방향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곤장만 치고 끝낼게 아니라 차라리 처형을 해야 했다'라는 것. 물론 원균의 행적을 보면 죽어도 싼 자는 맞다. 하지만 당시 권율로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균은 앞서 언급했듯이 일개 병졸도 아니고 수군의 최고 지휘관인 삼도수군통제사이다. 이런 고위직을 처형하려면 당연히 국왕인 선조에게 원균의 죄목과 근거를 밝히는 장계를 올리고 처형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원균을 자꾸만 감싸고 돌던 선조가 이를 허락할 리가 없었다. 즉 원균에게 곤장을 친 것도 권율 입장에선 정말 많이 참은 것.
  • 곤장 옹호 측에선 당시 조정이 원균에게 요구한 내용은 함대를 나누어서 해상의 적 보급선을 교란하라는 것이었지 전군을 이끌고 부산으로 몰려가 해전을 벌이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곤장을 친 당사자인 권율은 물론이고 선조조차도 당시 원균에게 그 정도의 기대를 걸지 않았다. 비변사나 권율은 5~6월에 걸쳐 부대를 2~4개로 쪼개어 견내량을 지키면서 부산포를 강습하라고 꾸준히 전략을 제시했지만, 원균은 2차, 3차, 그리고 마지막 4차 출정 때도 전 함대를 이끌고 몰려갔고, 소멸까지 해버림으로서 남해의 제해권 전체를 상실하게 된다.


3. 전개[편집]



파일:external/거북선문화재연구소.kr/08.jpg

2021년 6월, 거북선문화재연구소의 원균 4차 출정 요약


3.1. 7월 14일: 무의미한 추격으로 체력을 낭비하다[편집]


7월 11일, 원균이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그 날로 제 성질을 못 이기고 한산도에서 전군을 출정시켰다. 김완이 무리수라고 간하였지만 이를 묵살하고 진행했다.

7월 12-13일, 3차 출정과 마찬가지로 칠천량, 옥포에서 1박을 했다.

7월 14일 점심경, 부산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를 한다. 그러나 조선 수군보다 속도가 빠른 일본 수군이 살살 거리를 벌리며 대결을 회피하였고, 원균은 이들을 홧김에 추격하였으나, 전선의 운용이 어려운 노군들의 탈진 지점에 이르러서야 복귀를 결정한다.

7월 14일 저녁경, 조선 수군은 가덕도에 도착한다. 물을 싣기 위해 400명을 보냈는데, 가덕도에 있던 타치바나 나오츠구의 군의 기습을 받자, 원균은 그 병사들을 전부 가덕도에다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이는 2월 13일 이순신이 가덕도에서 초동이 죽자 극대노하여 공성전을 벌이고 요시라의 사과까지 받아낸 것과 너무나도 상반된다. 다만 2월엔 5백명 남짓만 있었지만, 이 시점엔 일본 수군이 정식으로 있는 상황이었다.

7월 14일 밤경, 조선 수군은 거제도 북쪽 영등포에 정박하려 한다. 하지만 해소실기에 따르면 '적과 대치하며 하릴없이 기각지세를 이루었다' 즉 정박하기에 만만치 않은 일본군이 이미 있었던 것이다. 이에 조선 수군은 또다시 노를 저어 칠천량으로 이동한다.


3.2. 7월 15일: 경계를 태만하여 기습을 허용하다[편집]


7월 15일 새벽경, 조선 수군은 꼬박 24시간을 노를 젓고 이제야 칠천량에 도착해 휴식(오침)을 취하게 된다.[26]

7월 15일 낮경, 원균은 지금까지의 경과로 의욕을 잃고 술만 퍼마실 뿐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27] 반면 거제 영등포, 가덕도에 있던 일본 수군들은 조선 수군의 동태를 부산포에 긴급보고했고, 이것이 기회임을 눈치챈 일본 수군은 본대를 모조리 출정시켜 칠천량으로 향했다. 특히 이순신에게 늘 패배하기만 했던 도도 다카토라와키자카 야스하루 등은 있는 배를 다 긁어모아 칠천량으로 향했고,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일본 육군도 칠천량으로 갔다.

7월 15일 밤 10시경, 일본군의 야습이 시작되었다. 희득의 해상록에 따르면, 겨우 작은 배 2척이 조선 수군 한복판에 접근할 때까지 조선 수군은 잠에 취해 코를 골고 있었으며, 일본 수군이 대포 2발을 쏘자 조선 수군은 당황해 닻줄을 끊어 우왕좌왕 함대 간 충돌이 일어났다. 군량선 4척에 불이 났으며 조선 수군 함대가 기습을 당해 배가 불탄 적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르면, 조선 수군의 절반이 도망갔고, 나머지 절반은 원균이 직접 군관 김대복을 보내 후퇴를 명령했다. 하지만 김완은 기습해 온 적선이 단 2척뿐이라며 이를 거부했다. 즉 지휘권이 반쪽이었고, 그 반쪽마저 항명이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첫 기습은 5척이므로, 3척이 곧이어 도착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이 제정신이었다면 이렇게 피곤한 때야말로 주위를 더욱 철저히 경계하라고 명령했을 테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원균의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비해 전력 면에서는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었지만 원균을 비롯한 수군 지휘부는 아무것도 몰랐다. 즉 일본군이 조선 수군 진영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것도 몰랐다는 소리다! 군대에서 초병을 세우고 주기적인 정찰을 하는 것은 당연한 상식에 가까운 것이고, 난중일기나 이순신의 장계에서 허구한 날 탐망선을 띄웠다느니 하는 소리가 나오는 것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을 생각하면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를 알 수 있다. 원균 말고도 이억기나 최호 같은 개념인들도 있었으나 이런 실수를 할 위인들이 아님에도 경계망이 뚫렸다는 것도 뭔가 이상한데, 난중일기에서 좌수영 본영의 진흥국이 백의종군 상태인 이순신에게 찾아와 원균이 못되게 군다고 이야기했음을 감안하면 원균이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으면 막대한 불이익을 주었고, 이 때문에 이억기나 최호 등의 명령권이 극도로 제한되었을 수도 있다.[28]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수군은 일본 수군에 맞서 싸웠으나 기습 공격으로 당황한 채로 교전하여 싸움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3.3. 7월 16일 새벽: 소수의 기습에 퇴각을 결정하다[편집]


7월 16일 오전 0~3시경,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따르면, 일본 수군이 추가 도착했다. 비거도선(작은 선박) 10척이 전선 사이를 뚫어 휘젓고, 병선 5~6척은 진 바깥 복병선을 둘러싸서 불을 질렀다. 원균은 놀라서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게 하며 변을 전군에 알리는데, 적의 배가 충돌하고 총탄이 날아드니 군사들이 놀라서 실색했다.

7월 16일 오전 3~5시경, 김완의 해소실기(용사일록)에 따르면, 일본 수군이 대거 도착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이는 도도 다카도라의 선발대로, 50척 가량이었다.

7월 16일 5경[29]

에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포를 쏘아 한밤을 놀라게 했다. 우리 수군은 이미 어찌할 수 없이 매우 급하게 되어 배를 멈추니 날랜 자들은 온천(溫川)으로 나아가고 둔한 자는 미처 나가지 못해 적에게 포위되었다. (중략) 주장(主將)은 명령체계를 잃어 모든 배가 무너지니 반은 진해에서 패했고, 반은 거제도로 달아나게 되었다. 이때 나는 홀로 뒷배에서 호위하며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깃발을 휘두르며 재촉하였다. 그러나 남도포(南渡浦) 만호 강응표(姜應彪), 회령포(會寧浦) 만호 민정붕(閔廷鵬), 조라포(助羅浦) 정공청(鄭公淸), 해남대장(海南代將), 강진대장(江津大將) 등은 이미 수사 원균을 따라 먼 바다로 도망가버렸다. 나는 혼자 군관(軍官), 사부(射夫), 노자(奴子)와 함께 일제히 대포를 쏘면서 사살하고 죽을 각오로 있는 힘을 다해 싸워 서로간에 많이 죽었으나 형세가 심히 허약하였다. 지치지 않고 깃발을 휘날리며 진격해 나아가 주장(主將)이 사례하며 말하기를 "영공(令公)이 분발하여 싸우는 힘이 심히 크다."라고 했다. (중략) 주장이 말하기를 "이억기, 최호가 간 곳을 모르고 영공만이 죽을 힘을 다해 적을 사로잡고자 하니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냐"[30] 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보니 적선 2척이 이미 50보 이내로 가깝게 다가오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아 위태하고 두려운 시점이었다. 큰 소리로 급히 "주장! 주장! 어찌 나와서 구해주지 않는 것이오!" 라고 불렀다. 주장 원균은 술에 취해 높이 누워 호령만 하고, 다만 군관 김대복(金大福)이 편전 10여 발을 쏘았을 뿐이다. (후략)

『해소실기』 《용사일록출처


7월 16일 오전 4~6시경, 일본 측 정한휘보 권4 30면에 따르면, 가토 요시아키의 부대가 뒤이어 도착했다. 그는 거함에 뛰어 올라 몇 사람을 참수했고 조선 수군이 그를 공격하려 했다. 요시아키의 조가 곤시치로 등이 분전하여 (조선) 배를 빼앗았다. 다만 요시아키는 다른 별선에 뛰어오르려다 발을 헛디뎌 바다에 떨어졌다. 즉 일본 수군은 돛대를 사다리로 백병전을 발휘했다.

이 시점까지 새벽의 분전 중 전라 우수사 이억기와 충청 수사 최호는 배에서 일본군과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김완은 함선이 점령당하자 물에 빠졌다가 일본군에 사로잡혔다. 배설은 적선 8척을 격침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적선의 수가 너무 많아 결국 밀릴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자 원균은 각 수사들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고 전 수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조선 수군의 주력 함대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전력을 유지했다. 어이없는 조선 수군 궤멸의 이유는...


3.4. 7월 16일 오전: 스스로 배를 불사르다[편집]


7월 16일 오전 6~8시경, 해소실기에 따르면 조선 함대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원균을 따르지 않은 절반은 거제도 해안을 타고 서남쪽으로 한산도를 향했다. 이 방향으로 간 함대는 배설 등 훗날 이순신에게 무사히 합류하는 함대다. 하지만 원균은 주력 함대를 막다른 골목인 진해만과 춘원포[31]로 지휘한 뒤, 배를 불사르고 지상으로 도망치자는 결정을 내렸다. 이로서 여태 이순신이 힘들여 쌓아놓은 판옥선들을 제대로 교전 한번 해보지 않고 완벽하게 없애버리고 말았다.[32]

  • 7월 22일, 당시 현장에 있던 선전관 김식에 따르면, 도도 다카도라의 선봉대(50여척)가 3-4겹으로 에워쌓으며 형도(刑島, 오늘날 견내량 입구의 '싸리섬') 등 여러 섬에도 일본군을 배치해 위협했다. 즉 도도는 원균에게 견내량이 막혔다고 착각하게끔 하여, 일본 본대가 와서 전멸하느니 배를 버리도록 속이는 것이 주 목적이었고 원균은 여기에 걸려든 것이다. 배설 등은 견내량이 막혀있을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강행돌파를 결정했으나 의외로 견내량은 막혀있진 않았던 것이다. #
  • 7월 22일, 당시 병조판서를 맡았던 이항복에 따르면, "넓은 바다라면 패전하였더라도 혹 도망하여 나올 수 있지만 지금 이 상황은 그렇지 않아 비좁은 지역에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적선을 만나 궁지에 몰려 하륙하였으니 대체로 전군이 패몰되었을 것입니다."로 패인을 분석했다. #
  • 정상적으로 원균이 지휘권을 가진 지휘관이었다면 경계근무에 실패했더라도 새벽까지 기습해 온 상대는 소수임을 파악하고 견내량이 막힌 것도 아니므로 한산도 방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반대로 지휘권을 완전히 상실한 지휘관이었다면, 중간지휘관들이 한산도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중간지휘관들의 재량은 빼앗아 놓고, 본인은 그 지휘권으로 군대의 과반을 사지인 진해만/춘원포로 몰아넣어 배를 버리도록 지휘했다.

7월 16일 오전 7~9시경, 원균이 셀프로 판옥선들을 없애버린 이후에야 1천 척에 달하는 일본 수군 본 함대가 칠천량에 도착했다.[33]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나마 이 시점에 절반의 조선 수군은 견내량을 빠져나간 뒤였기에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34] 일본 수군 본 함대는 상황을 파악한 뒤 진해만/춘원포로 진격해 육지로 도망중이던 조선 수군들을 학살했다. 이 날 전사자가 워낙 많이 나서 칠천도에 딸린 작은 섬에 '혈도(血島)'란 이름이 붙었다.


4. 평가[편집]



4.1. 원균에 대한 평가[편집]


일단 가장 큰 원인은 원균 본인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기생을 끼고 살았다고 하고, 이 때문인지 부하들과의 관계가 나빠서 부하들이 원균에게 반발하여 원균의 말을 듣지 않는 상황까지 되었다고 한다. 난중일기에서도 이순신과 원균의 부하들이 같이 원균을 까는 장면이 자주 나올 정도. 다시 한번 말하지만, 거기다가 작전 중에도 경계조차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움직이다가 다급해지자 부하들을 헌신짝처럼 내팽겨 쳐놓고 도망쳤다.

(중략) 이때까지 이순신 휘하에 있던 여러 장수들은 원균의 지휘를 따르지 않고 오히려 통제사가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하자 부체찰사 한효순이 이 문제를 체찰사에게 보고하여 해결해보려 했지만 미처 조처를 취하기 전에 칠천량 해전이 일어났다.

이덕형이 올린 보고서, 《선조실록》 34년(1601년) 1월 병진 기사

이러한 이야기는 칠천량 해전이 벌어지기 한달 전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도 나온다.

(중략) 휘하의 여러 장수 중 다수가 다른 마음을 품은 사실과, 통제사가 장수들과 더불어 의논하지 않는 상황으로 볼 때 일이 잘못된 것을 알 수 있다.

― 《난중일기》 정유년(1597년) 6월 17일

당대 조선왕조실록을 쓰는 사관조차 주석을 달아 맹렬히 비판했다.

― 사신(史臣)은 논한다[35]

. 한산의 패배에 대하여 원균은 책형(磔刑)을 받아야 하고 다른 장졸(將卒)들은 모두 죄가 없다. 왜냐하면 원균이라는 사람은 원래 거칠고 사나운 하나의 무지한자로써 당초 이순신(李舜臣)과 공로 다툼을 하면서 백방으로 상대를 모함하여 결국 이순신을 몰아내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일격에 적을 섬멸할 듯 큰소리를 쳤으나, 지혜가 고갈되어 군사가 패하자 배를 버리고 뭍으로 올라와 사졸들이 모두 어육(魚肉)이 되게 만들었으니, 그때 그 죄를 누가 책임져야 할 것인가. 한산에서 한 번 패하자 뒤이어 호남(湖南)이 함몰되었고, 호남이 함몰되고서는 나랏일이 다시 어찌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시사를 목도하건대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으려 한다. (目擊時事, 胸欲裂而骨欲銷也。)

― 《조선왕조실록》 선조 99권, 31년(1598년) 4월 2일 두 번째 기사

이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에도 계속 이어졌다.

하나의 통영인데도 원균이 장수가 되니 군대 전체가 패망하고, 이순신이 장수가 되니 가는 곳마다 겨룰 만한 상대가 없었습니다.

박문수, 《조선왕조실록》 영조 71권, 26년 7월 3일 세 번째 기사

아군의 행동을 그대로 노출시키고, 적진 한가운데를 들이침에도 적정에 대한 감시를 소홀히 하여 왜선의 대대적인 기습을 허용하고, 그 때문에 일본군의 장기인 백병전을 허용하고, 제대로 된 퇴로를 확보하지 못하여 엉뚱한 곳으로 도망치는 바람에 수륙 양쪽의 협공을 허용하는 등 전투 과정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일본군도 바보는 아니니 전쟁을 또 일으키기 전에 당연히 새로운 전술을 연구해서 올 것이다. 실제로 이순신은 이것을 대비하기 위해 일본군이 조선 수군의 패턴을 눈치채면 전략을 바꾸었다. 그런데 원균은 이순신이 어찌 하는지 잘 보면서도 적을 분석하고 전술을 연구하지 않은 듯하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던 것.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이 칠천량 해전의 패배로 인해 정유재란이 일어났다고 말한다. 엄밀히 '일본의 증원군의 부산 증원' 시점은 1월이었다. 하지만 칠천량 해전이 정유재란의 첫 대규모 전투다. 또한 이 전투를 기점으로 정유재란의 전선이 하삼도 전역으로 확대되었고, 임진왜란 당시에는 실패했던 수륙병진의 가능성이 열리면서 왜군이 한양을 노릴 수 있게끔 됐다. 한 마디로 정유재란 초반의 국면을 결정지은 전투이다. 이 수륙병진은 임진왜란 때도 시도되었던 작전인데, 실제로 파죽지세로 평양성까지 올라간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에게 '우리 수군이 곧 서해로부터 10만 명이 당도할 것이다. 이제 조선의 임금은 어디로 가시려나이까?' 하는 글을 보내서 겁을 주기도 했다. 실제로 했다면 순식간에 전쟁을 끝낼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고니시가 선조에게 글을 보내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한산도 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이 완전히 조선 수군에게 들어왔기에 불가능해진 작전이었다. 이후 이 작전은 칠천량 해전으로 조선 수군이 괴멸되자 정유재란 초기의 왜군의 핵심 전략으로 채택되기도 한다.

4.2. 권율에 대한 평가[편집]


권율의 실책도 없다고 볼 수는 없다. 본인이야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 말이 달라지는 신임 통제사의 태도 때문에 화가 나서 했다지만, 삼도수군통제사에게 곤장을 치기까지 했으니 통제사나 휘하 수군 입장에서는 내몰리는 격이었다.

11월 4일, 사헌부는 "(칠천량 해전의 원인 중 하나로,) 조정의 명령이 있었다 하더라도, 도원수는 상황을 봐가야했다. 그런데 경솔하고 부질없게 원균에게 엄한 곤장을 쳐서 독촉했다가 6년 동안 어렵게 만들어온 수군을 무너뜨리고 호남을 내어줬다"고 비판했다. 이에 선조는 한창 전쟁중인데 논하는 바가 지나치다고 기각했다. #

1601년 1월 17일 전쟁이 끝나자 선조가 정반대로 "칠천량 해전에서 패전한 것으로 다투어 원균에게 허물을 돌리지만,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 바로 조정이 그를 빨리 들어가도록 재촉했기 때문... 도원수가 잡아들여 곤장을 치자, 그는 반드시 패할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


4.3. 선조에 대한 평가[편집]


이 일은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천명이니 어찌하겠는가.

― 《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7월 22일 세 번째 기사#

칠천량에서의 패전 소식을 접한 조정에서는 충격을 받았고 이후의 수습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 중에 선조가 했던 말이다. 쉽게 말해 '칠천량 패전은 원균 잘못이 아니라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라는 것이다. 사실 만약 패전의 책임이 원균에게 있다면 잘 싸우던 이순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원균을 앉힌 선조 또한 책임이 있다. 물론 왕에게 책임을 지라고 말할 신하는 없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왕의 위신이 깎인다. 그러니 원균에게 잘못이 없고 패전은 단지 운이었다고 말함으로써 자기에게도 책임이 없다고 은근슬쩍 변명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다. 사족으로 명량 해전에서 이순신은 승리를 거둔 이후 이를 "하늘이 도왔다.(此實天幸)"라고 평했는데, 두 사람이 비슷한 말을 했음에도 느낌은 전혀 다르다.

선조는 처음 패전 소식을 듣고 '한산을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한 형세를 지키며 우주방어 했어야 하는데 괜히 출동해서 졌으니, 이건 사람이 아니라 하늘 때문이다.' 라는 내용으로 말했다. 그런데 괜히 출동하여 적의 함정에 들어가지 말고 한산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바로 이순신의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을 한 이순신이 빨리 출동 안 한다고 처형하겠다며 길길이 날뛰다가 결국 백의종군에 처하고 그 자리에 원균을 꽂아넣은 책임자는 선조 자신이었다.

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자, 결국 현실을 깨달은 선조는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하리오." 하면서 이순신을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제수했다. 이 부분을 김경진 소설 임진왜란에선 '임금이 신하에게 싹싹 비는' 상황이라고 서술하는데, 다소 과장이긴 하지만 중앙집권 왕조국가에서 임금이 신하에게 저 정도 표현을 쓰는 것 자체가 파격적이다. 그만큼 다급했다는 소리.[36]

물론 선조의 속내야 안 봐도 뻔해서, 이순신을 여전히 불신하며 다시 기용하기 싫다는 기색을 드러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신하들이 여전히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복직하라고 요구하자 그때서야 마지못해 승인했다. 게다가 그 와중에 이순신한테 내린 실제 품계는 원래보다 훨씬 강등된 절충장군을 주어 제대로 뒤통수를 쳤다. 그러니까 중장이 억울하게 누명쓰고 해임되었는데, 정작 같은 직책으로 복귀할 때에는 소장이 된 셈이다. 이러면 이순신은 다른 수군 절도사들과 같은 품계 즉 계급이 같으므로 지휘권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휘하 수사들이 통제사 명령을 잘 따랐기에 이후 별 탈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배설은 도망, 김억추는 육군으로 전근 나간 이후 임명된 수사들이 권준, 무의공 이순신, 안위로 이 세 사람은 이전부터 이순신의 부장이자 최측근들이었다. 참고로 이순신이 받은 절충장군 품계는 명량해전이 끝난 지 7개월이 지나도 유지되었다. 이것도 선조가 쩔쩔매는 명나라 경리 양호, 제독 마귀 등이 이순신의 품계를 올리자고 강력히 주장하자 마지못해 올려준 것이고, 그나마도 원래의 정2품만큼은 절대로 주지 않고 이보다 1단계 낮은 종2품 가선대부로 해주었다.

원균이 제아무리 무능하다 한들 그동안의 전투 경험만으로도 이 전투는 무모하다는 것 정도는 인지했고 실제로 그러했다. 그런데 선조는 그동안 이순신한테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않으면서 현장 지휘관들의 합리적인 조언도 무시하고 되도 않는 명령만 내리고 불합리한 논리에 편승해 이순신을 내쫓았다가 그 논리에 묶여 원균에게 출정을 강행하게 만들어 조선 수군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것이다. 그런데도 막상 패전을 하자 책임을 회피하는 무책임함을 보였으며 이순신을 여전히 불신하고 기용하지 않으려다 신하들과 명군 지휘관들이 권고하자 마지못해 기용하며 여전히 지원을 해주지 않고 품계까지 깎아서 내리는 졸렬함까지 보였기에 선조가 원균 다음으로 큰 책임이 있다.

4.4. 배설에 대한 평가[편집]


장수(배설)가 전장에서 도망친 것은 다른 경우였다면 심각한 문제였겠지만, 이 경우에는 최고 지휘관과 지휘부가 완전히 무너진 상황이었고, 전 병력이 사분 오열되어 각개 도주하는 상황이었기에 배설이 휘하 전선을 이끌고 퇴각한 것은 책임을 물을 수가 없는 행동이다. 또한 배설이 그나마 명량 해전 당시 12척이라도 투입할 수 있는 배를 남긴지라 되려 재평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그가 아니었으면 역사에 기록된 명량 해전이 불가능했을 것이고 이후 수습된 조선 수군의 80여 척이 넘는 판옥선 대부분 역시 수색 소탕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배설은 자기 휘하의 챙길 수 있는 전함은 최대한 온전하게 챙겨서 도망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명량 해전 당시 참전한 판옥선의 소속이 제각각인 점이 그 근거이다. 즉 배설이 직접 지휘하는 경상우수영 소속 외에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함선은 최대한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장 복직한 이순신이 싸우러 나갈 배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배설은 퇴각하면서 한산도에 있던 물자들을 일본군 손에 넘겨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불태웠다. 난중일기 8월 13일에 전라 좌수사 시절부터 여수 본영의 우후로서 이순신을 보필해오던 측근이었던 이몽구가 여수 본영에서 피난해오며 병장기를 처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순신은 이몽구에게 곤장 80대라는 중형을 내렸으며, 난중일기 10월 24일. 조정에서 내려온 선전관이 이몽구를 처벌하라는 유지를 갖고 온 것을 생각하면 배설의 행동은 전술적으로 옳은 행동이었다. 퇴각시 적에게 이로울 수 있는 물품(식량, 무기, 자재)을 폐기하는 기초적인 전술이다. 이후에도 이몽구가 멀쩡하게 임무를 수행하다가 연말에 전사한 걸 보면 처벌은 받았어도 참형과 같은 극형은 당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조정에선 아직 처벌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엄한 처벌을 주문한 듯하다.조정에서 탄핵을 받았음은 분명하지만 처형인지는 알 수 없다. 이몽구는 1605년에는 원무공신 2등에 추증, 복권되었다.

첨언하자면, 칠천량 해전 때 배설의 함대만 유일하게 일본 수군을 격파했다는 기록이 있고,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 습격 때 최초로 응전한 장수도 배설이었다. 그러나 배설은 이때 얻은 까임방지권을 명량대첩에 참가 안 하고 탈영하면서 써버렸고[37]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잡혀와 목이 잘렸다. 다만 이때의 배설은 정신적으로 큰 문제가 있었기에[38] 여러 정황상 배설의 도망은 미묘하며 무조건 비난할 수가 없다. 자세한 내용은 배설 문서 참조.[39]


4.5. 이순신의 함대 재규합,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편집]


7월 18일 (정미) 맑음

새벽에 이덕필과 변홍달이 와서 전하기를 "16일 새벽에 수군이 기습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이 다수의 피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 고 하였다. 듣자하니 통곡을 금할 길이 없었다.

난중일기 - 정유년(1597)


제대로 된 전투가 없이 조선 수군이 와해가 되었다 보니 이억기, 최호를 제외하면 지휘관급 전사자는 거의 없었으며, 병력 손실도 규모에 비해 적었고, 함선도 절반 정도는 살아남았긴 하나, 말 그대로 수군이 와해가 된데다, 건조 중이였던 함선을 모두 태워버리고, 실제로 현장에서 당장 동원이 가능했던 함선이 12척이였을 정도로 상황이 너무 참담했다. 실제로 아래와 같은 기록도 남아있다.

"이 때 한산도의 여러 장수들은 각자 도망쳐서 본도(本道)의 피란민 등과 함께 여러 섬으로 들어갔으므로, 공이 날마다 편비(褊裨)를 보내어 여러 섬에 통유(通諭)하여 흩어진 군졸들을 불러모으게 해서, 전함을 수리하고 기계를 준비하며 소금을 구워 판매하게 하니, 2개월 이내에 수만여 석의 곡식을 얻게 되었다. 그러자 장사(將士)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서 군성(軍聲)이 크게 떨치었다."

이항복, <백사집> 고(故) 통제사(統制使) 이공(李公)의 유사


일본군 장계에 따르면 칠천량에서만 적선 160여 척을 탈취하거나 불태웠고 연안에 남겨진 전선들 또한 불태웠다고 한다. 다만 이는 추후 임진왜란에 동원된 함선 수를 감안하면 중복 집계로 인해 전과가 뻥튀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이순신이 수군을 지휘하게 되면서 함선의 수가 급격히 불어나기 시작하는데[40] 시간상 건조해선 이렇게 빨리 불어나기 힘들다. 아무리 이순신이 수군 재건에 총력을 기울였다지만 조정의 지원도 어려운 상황에서 처음부터 이 전선들을 새로 만들었다고 보긴 힘들며, 이중 일부는 칠천량 해전 당시 도망쳤던 전선들이 합류했거나 뒤늦게 찾아낸 뒤 수리해서 다시 배치했다고 보는 게 더 합리적이다. 즉 살아남은 장수 대부분이 배와 휘하 병력을 데리고 숨어 있었고 그나마 배설만 자기 휘하 병력을 새로운 통제사 이순신에게 인계했다는 소리가 된다. 실제로 명량 해전 이후 도망쳤던 장수들이 수군에 합류해서 도망친 죄로 처벌받은 기록이 있다.

당시 조선 수군의 분위기는 최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압도적인 패배도 패배지만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 조선 수군은 병사들뿐만 아니라 군관들을 비롯한 지휘관들 역시 6년간 이순신 밑에서 맹활약을 펼친 실력파 부장들이 많았는데, 이 해전에서 그들 대다수가 전사하거나 도망쳤던 것이다. 한마디로 한산도 대첩을 비롯해 6년간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온 주역들이 이 해전 한 번에 죄다 증발된 것이다. 해군에서 숙련된 인력이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감안하면, 이는 큰 타격이며 사기가 떨어짐은 너무나 당연했다.

이순신이 막아내어 유지할 수 있었던 남해의 제해권이 일본군에게 완전히 넘어갔다는 점이었다. 이는 전라도가 더이상 안전하지 않음을 의미했다.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는 일본의 침략을 받지 않아 인적으로든 물적으로든 조선의 보급고였으므로 매우 중요했다. 단적인 예로 도원수 권율의 병력은 자신의 부임지였던 광주(현 광주 광역시)를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이 태반이었고, 수군도 마찬가지로 삼도연합수군이라고 해도 사실상 전라우수영과 전라좌수영이 핵심이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말한 '약무호남 시무조선'은 이런 맥락에서 한 말이다. 일본 입장에선 임진년 당시 한양 이북으로 진격하는 데 가장 큰 방해요소인 해상 보급 문제가 원균 덕분에 해결되었다.

다만 일본군은 너무 뜻밖의 대승을 거둔 탓에 서해로 곧바로 진출하지 않고 7월 말까지 주변 지역을 소탕하고 약탈하는 모습만 보였고 8월에는 이마저도 중단하여 이순신이 수습할 시간을 주었다. 일본군은 애초에 이런 식의 대승을 염두에 두지 못하여 서해로 보급 선단을 진출시킬 준비를 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후 남원과 전주를 공격하기 위해 일본 육군과 수군이 투입되는데 사천과 곤양을 거쳐 하동 땅 두지진으로 이동하면서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약탈과 학살이 벌어지기도 했고 이때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갔다. 영화 명량에서도 칠천량 해전의 이러한 상황을 잘 묘사했다. 영화 초반에 일본군에게 끝까지 분전하다 참혹하게 잡혀 끌려다니다 사살된 장수와 조선 군영에서 탈영하려다 참수당한 공포에 실성한 병졸이 임란 초기부터 이순신 밑에서 여러 해전에 참전한 부장과 병졸이라는 설정이다. 칠천량 해전의 패전이 조선 수군에게는 얼마나 절망스러웠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산 사람은 철사줄과 대나무 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조선 아이들은 잡아 묶고 그 부모는 쳐죽여 갈라놓는다. 마치 지옥의 귀신이 공격해온 것과 같았다.

《조선일일기》[41]


하여튼 이순신은 원통함을 뒤로 한 채 조선 수군 재건에 나서게 된다. 패전 후 상황이 얼마나 암담했는지 당시 체찰부사 한효순은 "밤낮 눈물로 배를 만들었다.'고 기술했다. #

그해 여름 사이에 수군이 싸움에서 패하고 군사들이 궤멸했다. 주상께서 애통해하며 ‘한산도 수군의 일이 일시에 무너지고 전선이 1척도 없으니 경이 급히 30척을 만들어 수군을 도우라’고 하명하셨다. 명을 받은 이후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야를 가리지 않고 배를 만들어 변산 지역의 배 태반을 입수했다.

《월탄연보》


이렇듯 조선 수군은 세계 해전사 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황당한 패전으로 궤멸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선 말도 안되는 엄청난 기적이 필요해 보였다.


5. 경과 요약[편집]


※ 1597년. 모든 표기는 음력.

  • 1월
  • 2월
    • 10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함대 63척이 부산포를 공격.
    • 25일: 한양에서 내려온 파발이 한산도에 도착. 이순신은 파직과 함께 압송되고, 제2대 삼도수군통제사원균 부임.
  • 3월
    • 9일: 기문포 해전 - 거제도에서 왜군을 유인해 47명의 목을 베고 승리를 거둠. 다만 판옥선 탈취 당함.
  • 6월
    • 18일: 원균이 이끄는 조선 함대 100여 척이 부산포 출정.
    • 19일: 거제 안골포 해전 승리.
  • 7월
    • 8일: 일본군 선박을 포착한 원균의 조선 수군이 무리하게 추적하다가 판옥선 12척 손실 발생.
    • 9일: 서생포 해전에서 판옥선 20여 척 손실.
    • 11일: 원균, 도원수 권율로 부터 곤장을 맞음.(징비록엔 7월 15일)
    • 14일: 가덕도와 영등포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당해 조선 수군 퇴각.
    • 15일: 기상이 좋지않아 칠천량에 정박.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조선 수군 지도부 당황.
    • 16일: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조선 수군 일부 병력을 제외하곤 와해. 원균은 춘원포에 상륙후 도주. 생사는 불명.
    • 23일: 조선 조정은 모친상을 치르고 있던 이순신에게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명하는 사절을 파견.


6. 대중매체에서[편집]



6.1. 조선왕조 500년[편집]


조선왕조 오백년 임진왜란 편에서는 46회에 아주 간략히 나왔다. 평상시엔 이순신에게 빨리 출전 안하냐고 대들던 다혈질로 나왔던 원균이 정작 권율이 출전 명을 내리자 출전 못한다고 버티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이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뜬금없이 나온 태도 변화인 만큼 원균 명장론을 내세웠던 이 작품이 가진 한계를 잘 보여준다. 원균을 용장처럼 묘사해놓다보니 정작 칠천량 해전 때 머뭇거린 이유가 설명이 안되는 것... 정작 전투 장면은 그냥 원균이 배타고 나가는 장면에서 해설로 때워버리면서 임진왜란을 다룬 다른 사극들과 마찬가지로 원균이 전사한 것으로 조용히 마무리했다.


6.2.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편집]


신승수 영화 감독이 나래이션을 한 이 다큐멘터리에서도 묘사하고 있는데 원균이 권율에게 얻어터진 후 출진은 했으나 밤에 쳐 자다가 갑자기 왜군에게 불화살로 기습을 당했다. 이후 원균은 우왕좌왕하며 전투조차 못해보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가 마치 샌드백처럼 실컷 두들겨 맞기만 했다. 이후 배를 모두 잃은 원균은 육지로 도망쳤다가 육지에서 왜군들과 싸우다 2명 정도 베더니 3번째 왜병에게 살해당해 전사했다.

명대사는 "장군, 배 한 척에 불이 났사옵니다."[42]


6.3. 불멸의 이순신[편집]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가 틀리고.. 이순신이 옳다는 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불멸의 이순신 칠천량 해전 예고2 中 원균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91회 ~ 92회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그동안 이순신을 모함하고 자신이 떵떵거리며 주장했던 논리에 의해 선조와 권율 등에게 두들겨맞고 부산진으로 쫓겨나다시피 출정하게 된 이후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던 원균이 김완·이억기·우치적의 충언을 받아들여 견내량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지만, 곧바로 일본 수군의 기습을 받고 구키·도도·와키자카가 조선 수군을 비웃는 장면을 넣었다. 특히 와키자카는 "지금 이 모습을 이순신이 봤어야 하는데"라고 말한 뒤 포격전은 일본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며 백병전으로 조선군을 섬멸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도도는 거북선의 사각지대인 돛대로 사다리를 놓고 침입하는 왜군을 지휘하면서 "이걸로 메구라부네의 생명도 끝이 나겠군"이라 말하며 조롱한다.

이후 일본군 함대가 한꺼번에 투입된 데다 칠천량에 정박해 있던 조선군이 일본군의 기습 포격전을 맞아 포 한방 제대로 쏘지도 못하고 처참하게 발려버렸고 일본군의 화포 사격과 접현 전투로 대다수의 배가 격침당한 것으로 묘사되는데, 사실과는 거리가 좀 있지만[43] 이제껏 무적 무패 신화의 위용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이 정말 허망하게 무너져내리는 것만은 명백한 사실이다. 더군다나 이억기를 시작으로 작중에서 감초 역할을 했던 여러 군관들, 병졸들이 떼로 몰살당하는 모습은 시청자에게 안타까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나마 마침내 자신이 틀렸고 이순신이 옳았음을 깨닫고 늦게나마 갱생한 원균이 전사하기 직전에 우치적 등에게 이순신의 충직한 부하가 되라는 유언을 남김으로써 조선 수군이 더는 분열하지 않고 이순신 휘하에 완벽히 통합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손실이 워낙 컸기에 이 정도 성과는 아무래도 좋을 지경이다. 작품 외적으로는 마지막에 원균이 사망하는 장면을 지나치게 열혈적으로 묘사하여 대중들로부터 원균을 지나치게 옹호했다는 비판도 들었다.

6.4. 징비록[편집]


48화에서 아주 간략하게 다룬다. 전반적인 해전의 묘사나 원균이 죽는 장면 등은 전혀 안 나오고 그냥 내레이션 처리. 정유재란이 시작된 후 등장인물들이 칠천량에서 패했다고 언급만 하는 정도다.


6.5. 명량[편집]


직접적인 전투 묘사는 나오지 않지만 전후의 전멸한 판옥선들을 보여준다. 영화가 시작하고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 꽤 자주 거론된다. 이 과정에서 잡혀온 탈영병은 자신의 동료들이 칠천량에서 모두 죽었다며 울먹거리지만 이순신은 그걸로 할 말 다했느냐고 묻고 직접 환도로 목을 쳐버리고 군사들에게 군율은 지엄한 것이다라고 일갈. 이를 지켜보던 배설은 출전에 대한 반대를 접는 대신 거북선을 불태우고 탈영할 계획을 세운다.

6.6. 벽람항로[편집]


국내4서버의 명칭이 옥계인데 칠천량 해전이 일어난 그 지역이다. 아래의 기타에 옥계 마을이 언급된다.


7. 기타[편집]


  • 파일:external/www.saegeoje.com/193770_11632_157.jpg
거제시 하청면의 칠천도 옥계 마을에 칠천량 해전 공원이 위치해 있다. 이름만 보면 원균 기념 시설로 오해할지도 모르나, 사이트 문구부터가 아픈 역사를 발판삼은 다크투어리즘의 명소 칠천량해전공원이다. 즉, 어두운 역사를 접근하여 패배도 기억하자는 의미가 크다. 칠천량 해전의 배경인 이순신의 파직 과정도 부산포로 진격하지 않아 하옥됐다는 통념이 아닌 실제 사실을 충실히 설명하고, 기문포 해전 등의 통제사가 된 원균의 실책이나 출진 과정의 책임에 대해서도 잘 정리하여 이해를 돕는다. 다만 정작 칠천량 해전 자체는 이 문서의 내용이 아닌 통념에 가까운 내용으로 소개했다.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이 문서의 2번 부분까지는 이 전시관에서도 잘 다루었지만, 3번 부분의 칠천량 해역에서 조선 수군이 왜군의 공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궤멸당했다는 통념에 가까운 구성이며 공원이 위치한 칠천량 해역을 강조하다 보니 이렇게 된 모양이다.

  • 반대로 평택시에 위치한 원릉군기념관에는 원균은 수륙병진을 주장하였으나, 조정의 억지로 눈물을 머금고 출전,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애초에 칠천량 해전공원과 달리 원릉군기념관은 원주 원씨 종친회와 평택시원균 재평가를 노리고 만들었기 때문에 모든 내용이 '원균은 잘못 없고 패전은 조정 탓'으로 일관하는 경향이 있다.[44]

  • 조선에게는 그야말로 쓰디쓴 참패다. 후대에 이런저런 말을 덧붙이지만 사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참혹한 패전이었다. 후대에 덧붙이기로 원균옹호론이나 재평가, 판옥선의 성능이 왜선을 압도, 부관들의 역량도 뛰어나기에 이순신이 잘했다기보다는 승리가 당연 등의 기묘한 평가가 반박된다는 점이 있다고는 한다. 이순신의 유능함이나 원균의 놀라운 무능함 등은 나무위키의 여러 관련문서에서 많이 서술되어 있고 이 해전은 원균의 무능력함으로 그 둘의 극명한 대비가 이루어지기는 한다. 역사를 이런 인물간의 관계성이나 스토리로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보편적이고 재미도 뛰어난 것은 맞지만, 아무리 원균이었어도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될 뼈가 아픈 대참사였다.[45] 상술된 기묘한 평가들이 반박되는 적절한 사례라는 것에 그나마 의의가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한국인 입장에서는 이 참혹함에서 도피하고자 그런 인물론이나 스토리성의 시각으로 빠지는 무의미한 위로행위나 정신승리에 가까울 정도라고 할 수 있다.

  • 사실상 칠천량에서 볼 수 있는 유일하고 가장 큰 이득은 만악의 근원인 원균이 사라진 것 그 자체 정도다.[46] 만일 원균이 살아있었다면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 만약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했다면, 역설적이게도 도요토미 정권이 실제 역사만큼 허무하게 무너지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이 승리하여 정유재란이 확전된 것이 이후의 명량 해전직산 전투를 기점으로 일본군이 다시 밀리게 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도요토미 정권의 엄청난 타격으로 돌아왔기 때문이다. 만약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군이 승리하여 정유재란이 국지전 정도로 끝났다면, 도요토미 정권이 입는 타격 또한 실제보다 줄어들어서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쿠데타에 대비할 여유가 어느 정도 생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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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사하지 않고 생존했다는 설이 있다. 자세한 것은 원균 항목 참조.[2] 배설이 지휘해서 탈출한 12척 외에 절반 정도는 독자적으로 탈출한 것으로 추정되나, 말 그대로 뿔뿔이 흩어진 형태라서 사실상 실종.[3] 배설의 전과[4] 화살에 맞았다.[5] 말 그대로 조선 최고의 정예군이 전투 하나 없이 공중 분해되었다. 그나마 병력은 다수 살아남아 이순신이 복직한 뒤 합류했지만, 이들은 원균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함선에 남아있었던 병력이다. 즉 원균의 지휘를 충실하게 따랐던 병사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했다.[6] 후술하겠지만 기초적인 야간 사주경계와 퇴각로 등을 정탐해두는 초급 지휘관이어도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결과다. 원균의 심각한 자질 부족을 드러낸 전투다.[7] 본 해전의 결과만 정리. 이후 이순신이 귀환하여 벌인 어란포 해전, 벽파진 해전, 명량 해전 등의 결과는 각 해당 문서들에 정리.[8] 충청도까지 넘어갈 뻔 했지만, 직산 전투를 통해 다행히 저지되었다.[9] 명군과의 수륙 합동을 하면 가능성이 있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잃을 수 밖에 없는것이, 당시 명군은 무력시위를 제외하고는 부산 일대 왜군을 압박할 의지나 능력은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들은 왜군 10만이 진주성을 공격하는 것을 구원하지도 못했다.[10] 『이순신 평전』, 책문, 2012, pp. 214-237[11] 『선조실록』 권52, 27년 6월 28일(을해)[12] 『선조실록』 권72, 29년 2월 2일(기해)[13] 물론 이 말만 믿고 내해의 요새 한산도의 통제영을 외해에 드러나 있는 거제도 옥포에 배치하고 하염없이 일본군 상륙을 기다리는 것은 바보짓이다. 무엇보다 이순신의 첫 승리자 조선의 첫 승리인 옥포 해전이 정확히 이렇게 거제 외해의 옥포에 정박중인 토도 타카토라의 선박들을 습격해 몰살시킨 전투다.[14] 고니시와 가토는 센고쿠 시대부터 원수지간인 것이 조선 일본 양국에 이미 유명했다. 고니시 입장에선 가토가 죽는 것도 이득이었고, 안 죽더라도 상륙을 못 해 벌 받게 돼서 이득이었다. 반대로 가토가 상륙해서 이순신이 벌을 받아도 이득이니, 고니시 입장에선 100% 이익만 보는 장사였다.[15] 1596년 10월 ~ 1597년 3월 난중일기가 없다(!). 선조수정실록의 1597년 1월 중 날짜가 미정인 부분에 이런 답변내용이 있다. 장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1월 23일 이순신 책임론이 불거지기 이전으로 추정된다.[16] 애당초 요시라의 '며칠 내'라는 구체적 정보는 11일이었고, 가토의 상륙은 12~14일이라 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한산도에서 가덕도~다대포까지 나아가는데 3일은 걸리므로. 게다가 속도가 빠른 일본 선박을 평저선 중심의 조선 수군은 잡긴 어렵고 상륙만 저지하고 대마도로 돌려보내는 데에 그친다. 즉 이 보고는 무리한 모함이었다.[17] 이순신 함대가 밤이면 절영도(현 영도구)의 해안에 정박하고 해가 뜨면 왜영을 쳐부수는 전투를 2월 12일까지 사흘간이나 벌였다는 주장이 있다. #[18] 앞서 1592년의 이순신의 4차 출정(부산포 해전) 때에도, 일본 수군의 선박 470척 중 160여척이나 파괴했던 대승리였음에도, 원균은 수급을 취하지 않았단 이유로 공은 없다고 보았고, 아군의 피해는 존재하니 패전(?)이라고 판단했다.[19] 이 화약은 조선 육군이 임진년~계사년 2년 내내 생산한 화약(3600근)보다 많다.[20] 『정한위략(征韓偉略)』 卷四, 二十三.[21] 이순신이 통제사일 때는 병사를 지원한 적이 없었고 전술했던 대로 오히려 수군 소속을 육군으로 돌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선조의 총애를 듬뿍 받는 원균에게는 지원을 못 해줘서 안달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도원수 권율 휘하의 병사들을 수군 소속으로 보내준 일이 있었다.[22] 또한 이는 조선 육군이 1.2만, 수군이 5천 남짓이었음을 생각하면 파격적인 지원이었다.[23] 이는 3000여명에 가까운 정예 군사를 지휘 능력 부족으로 죽게 만든 것이고, 임진왜란 이후 칠천량 해전 이전까지 판옥선을 가장 많이 잃어버린 것이다. 이순신이 조선 수군을 지휘했을 때는 판옥선을 단 한 척도 잃지 않은 걸 감안하면 매우 대비되는 결과다.[24] 이는 해군참모총장이 장병들 보는 앞에서 합참의장에게 얼차려를 받은 격이라 원균에게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25]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권율)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라고 했다.(『정유일기』 7월 8일)[26] 칠천량은 육지로 움푹 파인 형세에다, 양 옆이 산등성이로 시야가 차단되어 적의 동태를 살피기 어려워 이 곳에 정박하면 안 된다고 배설이 간언했으나, 원균이 이를 묵살했다. 이는 원균이 틀리지 않은 것이, 이미 앞서 원균의 2,3,4차 출정 모두 정박했던 곳이다. 과거에도 칠천량은 임진왜란 초기부터 조선 수군이 비바람을 피해 정박했다. 선조 25년 7월 15일 계본에 따르면 "7월 9일 맞바람이 세게 불어 항해할 수 없음으로 거제 땅 온천도(칠천도)에 정박했다"는 기록이 있다.[27] 칠천량 해전에 참전했던 김완이 쓴 해소실기에 내용이 있다.[28] 이순신은 통제사 복직 후 서해 쪽으로 후퇴하면서도 정박할 때마다 탐망선을 띄웠다. 그 덕에 어란포의 왜선을 확인한 뒤 벽파진에서 싸워 이겼고, 그날 밤 더 많은 전선으로 일본군이 습격을 했는데도 막아내었다. 워낙 전과가 찬란하다 보니 부각되지 못하는 감이 있는데 이순신은 싸움보다는 적의 동태와 전망을 살피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이러한 사전 정보를 충분히 수집한 후 아군이 100% 이긴다고 확신하는 전장에다가만 함대를 출진시켰다. 즉 23전 23승이라는 전과는 치열한 정보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 다만 여건상 그렇지 못한 명량 해전과 왜교성 전투의 경우도 있었다.[29] 오전 3~5시[30] 경계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않아 상황을 개판으로 만들어 놓은 상관이 정석대로 어떻게든 적군과 맞서 싸우고 있는 부하 장수에게 '다른 사람들은 다 튀어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데, 너 혼자 죽고 싶어 안달이냐.'라며 적반하장으로 큰소리를 친 것이다.[31] 추원포라고도 한다. 크게 두 곳으로 추정하는데 현 지명 통영시 광도면 황리(우세설)와 현재 통영시 용남면 춘원포 설이 있다.[32] 이렇게 함대 간 작전 전달이 어려운 야간-새벽녘에 기습하여 적군을 갇힌 협곡으로 나아가도록 유도한 뒤 궤멸시킨 일본 수군의 전략은, 노량 해전에서는 반대로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상대로 똑같이 갚아 주었다.[33] "가토 기요아키는 약간 뒤에 도착했는데, 전투는 이미 한참 전이었다" - 정한휘보[34]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숨어 있다가 지속적으로 이순신에게 합류해, 조선 수군은 명량 해전 때 대선 13척, 이듬해 절이도 해전 때 대선 85척 + 소선 85척이 된다.[35] 이 글을 쓴 사관(기록관) 본인을 뜻한다.[36] 이순신은 당시 3년 모친상 중이였고 효가 나라의 근본인 조선에서 그런 인물을 전쟁터로 보내 불효를 저지르게 하는 것은 감히 왕조차도 함부로 간섭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상중에 고기를 하사하는 선조의 인성에도, 그 어머니의 죽음의 근본적인 원인은 선조임에도 오직 나라를 위하는 애국심 하나 만으로 전장에 기꺼이 다시 뛰어든 이순신을 어찌 성웅이라 아니할 수 없다.[37] 김경진의 임진왜란에서는 지휘에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해 배설이 자발적으로 먼저 떠났다고 묘사했다.[38] 현대로 치면 PTSD라 할 수 있는 증세들을 보였다. 실제로 정신력이 강한 사람도 전쟁터에 오래 있다보면 걸릴 수 있어 마냥 겁쟁이라고 할 수 없다.[39] 물론 배설의 탈영자체는 도원수 권율이 격노하여 전국에 수배령을 내렸을정도이니 비판을 아예 피할수는 없다.[40] 칠천량 해전에서 1년만인 절이도 해전 때 함선이 85척이다.[41] 일본 규슈의 우스키 성 성주의 의무관이자 주지였던 케이넨이 쓴 종군일기. 케이넨은 주군을 따라 임진왜란에 참가해 《조선일일기》를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42] 원균의 부장이 자고 있는 원균을 깨우면서 한 말이다.[43] 당시 일본 함선의 일종이었던 안택선은 설계 및 제작법상의 한계로 뱃머리에 2문 정도의 화포를 설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덧붙여 칠천량에서 조선 함대가 막강한 타격을 입는 것으로 묘사하는 바람에,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이 조선 함대를 재건하는 과정에서도 흩어진 함대를 불러모으는 게 아니라 일일이 새로 건조하고 신병을 모집하는 것으로 묘사되는 오류가 발생했다.[44] 사실 원균이 수륙병진을 주장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조정이 압박한 것도 사실이고. 그러나 전사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더욱이 이순신이 건재할 때는 수군만으로도 된다고 주장한 건 원균이었다.[45] 애초에 원균은 삼도수군통제사는 커녕 경상우수사에도 부적합했다. 이순신이 아니었다면 진작에 전사해도 모자랐을 사람이겠지만 천운인지 이순신을 만나서 그래도 살아남고 전투에서도 활약할 기회 정도는 있었을 것이고 자기 주제를 안다면 거기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도 넘는 만행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이순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주제도 모르는 선택을 했다. 칠천량 해전 전까지 원균에 대해서 이순신을 옹호하던 이들도 용감하다 정도로는 평가했으니 그냥저냥 지냈다면 살아서는 공신이요 승장으로 대접받으며 잘먹고 잘살다 갔을 것이며 후세에는 안좋은 행적이 드러나 욕은 먹겠지만 그냥저냥 이순신 밑에서 활약한 용장 정도로는 기억될 수는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본인 목숨은 날아간건 물론이요 조선의 희망을 반 박살을 내버려 후세에까지 길이길이 남을 똥별의 상징이 되어버렸다.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의 중요성[46] 그러나 원균이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 자체가 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재앙의 장본인인 이유가 가장 크기 때문에...